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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Hooing

11분 전
10분 분량

후잉 Hooing | 2025 | 0:14:38 | dir, 최지희 CHOI Jeehee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원기옥을 내뿜다


# 얼치기 비평가의 자기반성

독립 애니메이션을 접할 때는 대개 별다른 정보가 없거나, 극히 제한된 경험에 의존할 때가 많다. 제법 경험치를 쌓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초장부터 고백건대 <후잉>을 처음 봤을 때, 남들이 알면 민망했을 몇 가지 오해와 선입견을 스스로 마주해야 했다. 우선, 제목부터. 후잉이 “자신의 세대에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의 자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를 나만 모른 것은 아닐 테다 (안 그런가?). 나만 몰랐던 건 아니라고 파워 당당하기엔 나는 사실 이 단어를 의성어, 의태어쯤으로 짐작했다. 바람이 ‘후잉~’하고 분다던가 (휘잉~처럼), 아니면 ‘뿌잉’, ‘후엥~’처럼 뭔가 귀여운 척하는 말로 여겼다. 그러니까 그저 ‘후잉’의 본뜻을 모르는 무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되지도 않는 편견에 이미 갇혀 있었단 말이다. 


오해와 편견, 선입견은 아무래도 감독 최지희의 이전 작품을 통해 내가 쌓아온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최지희는 <시청률의 여왕>과 <한 점의 감성>이라는 웹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웹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일단 넣어두자). 그리고 나는 <시청률의 여왕>과 <한 점의 감성> 사이에는 연속성보다는 단절이 더 두드러진다고 여겼다. 전자는 풍자가 돋보였고, 후자는 일상의 소소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경쾌함과 담백함, 즉 불필요한 무게와 장식을 덜어낸 ‘기분 좋은 가벼움’, 그리고 그에 따른 간결함이 두 작품에 배어 있다. 그렇다, 이러한 섣부른 판단을 탑재한 채 나는 <후잉>을 보려 한 것이다.


때문에 <후잉>의 러닝 타임을 확인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15분. 드라마 서사를 따르는 요즘 한국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의 평균 분량이므로 새삼스러울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 15분이지, 이전까지 드라마 기반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감독들에게도 15분은 ‘깔딱 고개’처럼 자칫 호흡과 템포 조절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마의 구간이다. 그런데 이제껏 짧게 치고 빠지는 웹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최지희를 떠올리면, 이건 예상치 못한 종목 전환, 업종 변환이다. (초)단거리 선수가 갑자기 중장거리를 뛰는 셈이니까. 이쯤에서 문득 감독에게 사과의 뜻을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맙소사! 제가 이전까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저의 울타리 안에 감독님을 가둔 겁니다요.”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내 선입견의 울타리는 참으로 견고했다. 나는 최지희를 코미디 장르에 가둬두고 있었다. <시청률의 여왕>과 <한 점의 감성>이 코미디 장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앞선 작품들에 더하여, 그동안 최지희가 속했던 데굴데굴 스튜디오까지 한 겹 더 얹어서 판단했던 것이다. 자타공인 (블랙) 코미디의 명가 아니던가. 하지만 정휘빈이 그러했듯, 최지희도 자신의 영역을 계속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는 것 (그리고 <후잉>을 마치면서 자신의 작업 공간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만 셈이다. 이런 지경이라면 어설프게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아예 생판 무지한 것이 낫다고 할 법하다.


# 드라마의 (재)구성

초장에 이런저런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까닭은 단순하다. <후잉> 첫 장면부터 나는 헛다리를 짚었다. 스쿠터를 타고 내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뭔가 좌충우돌 로맨스 코미디가 펼쳐질 거라 여겼다. 헬멧을 뒤집어쓴 캐릭터의 얼굴선이 복고풍으로 제법 진하기에, 순간 <로보트 태권브이>의 철이와 영희인가 싶기도 했다 (헬멧을 쓰고 로봇을 조종하던 그때 그 커플이 지금은 스쿠터에 올라타 있는 모습이라고 나 혼자만의 환영에 빠져 있었다.* 내가 접한 최지희의 이전 작품들 때문에 그런 착시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재차 말하지만 이래서 어설픈 경험에 기반한 선입견은 무섭다). 이윽고 드러나는 지방 소도시의 모습 또한 이전 작품들보다 조금 더 스케일이 커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유쾌한 소동이 펼쳐지기에 적합한 설정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장면 위로 “지방 소멸... 저출산... 고령화...” 이러한 단어를 담은 뉴스 멘트가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슈의 무게감으로 짐짓 분위기를 잡으려 하다가 이내 통통 튀기며 반전의 재미를 이끌어내려는 설정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 더욱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건 이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았다. 그들은 남녀 커플이 아니라, 동성 친구였다. 이경화 편집장이 문제 제기를 했고, 최지희 감독이 확인해 줬다. 맙소사!



마침내 “후잉”이라는 제목이 뜨고, 그 옆으로 후잉의 의미를 밝히고 있을 때까지도, 그러니까 이미 작품이 시작한 지 1분이 지날 때까지도 오독은 유지되었다. 모두가 떠나고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공동 주택에 노파가 힘겹게 복도를 지나 자신의 거처로 들어설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전과 전복은 의외의 설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을 통해 일어날 때 한층 더 짜릿한 법이라고 나 혼자만의 셈법을 따졌다. 아니나 다를까, 설치하기로 한 긴급 통화 장치가 너무 낡은 건물 상태 때문에 다음 날로 미뤄진다고 할 때, 한바탕 대소동을 위한 빌드업이 제법 꼼꼼히 쌓여간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2분이 흘러갔다. 


이윽고 홀로 남은 할머니가 보온밥통을 연다. 그 속에 등장하는 꽤나 큼지막한 벌레. ‘옳거니! 이제 시작하겠군, 저 벌레를 어떻게 처치하느냐를 가지고 소동극의 방아쇠를 당길 심산이로군...’ 2분 30초, 적절한 시간 배분! 


하지만 기대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할머니는 무심하게 벌레를 떼어내 버린다. 그리고 혼자 식사하는 뒷모습을 멀리서 담아낸다. 어라? 잠깐만요, 감독 양반, 식사 장면이 <한 점의 감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 분위기, 할머니의 고독한 뒷모습을 이렇게 짠하게 담아내면 나중에 코믹한 방향으로 핸들을 틀기가 곤란할 것 같잖소?


후잉 (2025)
후잉 (2025)

할머니가 잠든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 곡소리, 비명소리... 3분에 다다른 시점. 별안간 공포로 장르를 꺾는 걸까? 아니면 “앗, 깜짝이야!” 서로 화들짝 놀라면서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는 걸까? 그 과정을 풀어가는 1분은 공포 장르의 연출을 충실히 따른다. 천천히, 조금씩, 서서히... 그렇게 4분. 홀로 출산하려는 젊은 여인 (아까 그 헬멧 쓴 영희)에게 할머니가 도움을 건넨다. 비로소 나는 감독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결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5분, 갓 태어난 아이를 할머니에게 남겨둔 채, 방금 출산한 젊은 여성은 훌쩍 떠나고 만다. 졸지에 갓난아이를 떠안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씻기고 어루만지고 어르고 달래고 재우려는 모습. 


그리고 6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할머니는 아이에게 먹일 것을 마련해야 한다. 본격적인 퀘스트를 위한 여정의 시작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의 전개가 마치 정휘빈의 <민서와 할아버지>에서와 같은 ‘우여곡절 육아 분투기’로 이어질 거라고 차마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 지금 최지희는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들을 뒤집고 있다. 음식에 담긴 달콤한 추억 대신 퍽퍽한 삶에서 삼켜야 하는 한 끼의 고단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고, 갓난아이의 배를 채워줄 끼니를 마련하기란 결코 녹록지 않다는 곤란한 상황을 펼쳐낸다. 시장 논리에 지배되는 드라마가 피치 못해 따를 수밖에 없는 클리셰의 위치에 어김없이 자신의 드라마를 새롭게 배치하고 있다. <시청률의 여왕>에서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들이 놓였던 곳은 이제 드라마의 정석에 맞춰 제대로 된 포석으로 재정비된다. 


텅 빈 냉장고, 벌레가 들어 있는 밥통... 결국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선 1차 퀘스트 원정. 공동 주택 화단 구석에 버려진 유아차를 간신히 거두어 아기를 태우고 장도에 오른다 (그 유아차를 탔던 아기는 그로부터 얼마나 오래전에 그곳을 떠났을까?). 그렇게 7분. 다다른 곳은 무인 마트. 주민들이 떠난 동네에서 가장 밝게 빛을 뿜어내는 장소, 가지런히 놓여있는 상품들, 사람이 부재한 가게에서 한껏 예의 바르게 응대하는 기계 장치들. 퀘스트란 모름지기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고,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나는 법. 무인 상점은 할머니에게 도움과 불편을 함께 선사한다. 무인 계산대는 말하자면 퀘스트에서 마주하는 도전 같은 역할을 한다.


데운 우유를 간신히 아기의 입에 떠먹이는 7분 43초. 작품의 절반에 이르렀다. 허기를 채우자 곧 잠이 든 아기, 녹초가 되어 잠에 빠져든 할머니, 그녀의 꿈속에서 언뜻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어린 시절, 8분. 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9분.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도움을 청하려 전화기를 들지만, 그날 오후에 설치를 끝내지 못했기에 먹통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떠나게 되는 2차 퀘스트, 9분 15초. 이전보다 더 먼 곳을 향해, 더 험한 길을, 더 힘겹게 올라야 한다. 


손잡이가 부러지고, 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할머니마저 쓰러진다. 10분 25초.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들개 무리가 아기를 노리고 있다. 팽팽한 대치의 시간이 잠시 흐르고, 11분 30초. 갑자기 배경이 사라진다. 걸음을 내딛다가 휘청거린 후, 온 힘을 다해 내뿜는 일갈. 떨어져서 박살 나는 틀니. 그제야 물러나는 들개 무리. 12분. 2차 퀘스트의 절정은 그렇게 종료된다. 


5초 간의 암전 후, 휴대폰 속 밝게 웃는 꼬마 여자 아이의 영상, 동료와 함께 보는 경찰. 그리고 동틀 무렵, 어스름한 기운을 뒤로한 채, 아기를 품에 안고 힘겹게 걸어오는 할머니. 마치 간밤에 좀비 떼와 사투를 벌이고 새벽을 맞이하는 최후의 생존자와 같은 연출이다. 쓰러진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기의 대비되는 모습. 12분 47초. 그로부터 조금 더 긴 10초 간의 암전. 마지막으로 약 50초 동안 에필로그처럼 선사하는 회상 장면.


#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

<후잉>의 러닝타임 15분에는 전날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벌어진 사건이 담겨 있다. 그리고 달포동 최후의 거주자인 98세 이말분 여사의 생이 포개어져 있다. 사건은 단순히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오프닝에 실린 뉴스 기사처럼, ‘고령화’, ‘저출생’, ‘지방 소멸’이라는 우리 사회의 현안이 중첩되어 있다. 


<후잉>은 이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면서 단박에 1타 3피를 노린 걸까? 고령화, 저출생, 지방 소멸은 x, y, z로 이루어진 삼원 일차방정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삼차방정식도 아니다. 어려움으로 보자면 삼체문제에 가깝다. 여기에는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욕구와 욕망도 얽혀 있다. 15분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풀이법을 내놓기를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그렇다면 <후잉>은 해결책에 대한 궁리는 제쳐두고, 그저 이런 난맥상을 하나의 이야기 소재거리로 삼는 것에 그쳤을까? 


내가 품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감독 최지희에 앞서 다른 이를 통해 듣는다. 


“이 작품은 그 특유의 힘겨움을 멀리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달려가 정면승부를 합니다. 감독이 갈고닦아 온 성실한 연출법과 애니메이팅을 총동원하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자연스레 우리는 주인공 캐릭터에 깊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올해, 그 어떤 작품보다 더 깊었습니다. 이러한 힘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 작품의 진득한 완성도를 만들었습니다.” 


작년 서울인디애니페스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허범욱의 심사평이다. 폐막식에서 대상을 수여한 직후, 상영관 밖에서 우린 잠시 심사 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후잉>을 선정한 판단에 몹시 뿌듯해했다. 그러한 확신 앞에서 나는 차마 내가 저지른 오독을 드러내지 못했다. 대신 그의 심사평을 여러 번 읽었다. <후잉>에 대한 판단은 이미 그 글 자체로 완성된 셈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쓰는 이 리뷰는 사족에 불과하다). 아울러 <후잉>에 대한 허범욱의 글에는 허범욱 자신의 작품이 깔려 있기도 하다. ‘힘겨움을 멀리서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 정면승부 하는’ 모습, ‘성실한 연출과 애니메이팅을 총동원하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태도, ‘치열한 고민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진득한 완성도’... 그는 <후잉>에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족에 불과할지라도 이 리뷰를 쓰는 이유이다). 


답이 안 보이는 현실 앞에서, 그저 그것을 멀찍이 바라보지 않고 기어이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자(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이(들). 성실한 연출과 애니메이팅이 단순히 눈을 간지럽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이 한낱 기예를 흉내 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창작의 고민과 고뇌의 결과물들.


# 확장하고, 계속 확장하는...

그제야 이 작품의 장면 하나하나를 어떻게 치밀하게 준비했는지가 드러난다. 비어 있는 듯 하지만, 채워져 있다. 유일한 거주자인 할머니가 잠들어 있던 방은 휑하지만 창 너머에서 들어온 빛이 바닥에 드리워져 있다. 창틀에는 커튼의 흔적조차 없다. 애초에 할머니의 방은 그런 상태로, 긴 세월을 흘러왔다. 한 여름 뜨거운 햇빛을 가리지도 못했을 테다. 간신히 우유를 구해 돌아온 방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가려면 뭔가로 둘러싸 입혀야 하겠기에, 얼마 없는 세간살이일지라도 황급히 뒤져가며 찾아내야 했을 테다. 어질러진 방 한가운데에 반짇고리가 놓인 것으로 보니, 이불보를 잘라내어 임시방편으로 강보를 만든 듯하다. 아기를 안고, 먹이고, 어르고, 재우는 여러 포즈들도 결코 어색하거나 어설프지 않다. 성실한 연출과 애니메이팅, 진득한 완성도란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이들에게만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또한 그것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기도 하다.


미장센과 동선의 시퀀스를 눈여겨보다 보면 촘촘하게 배치된 디테일들이 어떻게 작품 전체를 빌드업해 나갔는지도 알 수 있다. 공동주택이 너무 낡아서 그날 오후에 마무리 짓지 못한 긴급 돌봄 서비스 설비 때문에 할머니는 험난한 퀘스트의 장도를 나서야 했다. 너무 낡고 방치된 건물이었기 때문에 어린 산모는 그곳을 택했을 것이다. 그곳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을 리 없다. 그러니까 그곳은 자칫 신생아를 유기한 비극적인 ‘사건’의 장소가 되었을 수도 있다. 훨씬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라면 그곳은 고독사와 유기사라는 두 죽음이 텅 빈 복도를 사이에 두고 일어날 수도 있었을,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라고 뉴스에서 호들갑스레 다뤄졌을 법하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전개되고, 동선이 연장되고, 공간이 확장될수록 <후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또 다른 캐릭터, 연기자, 플레이어를 등장시킨다. 미장센이 축적되고 시퀀스가 누적되면서 드러나는 실체란 바로 ‘달포동’이라는 이름의 소도시이다. 달포동은 더 이상 배경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달포동은 할머니 혼자 남아있던 공동 주택이자, 누군가 버리고 떠난 유아차이고, 홀로 우두커니 불 켜진 무인 상점이다. 달포동은 함부로 무언가를 새로 설치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조금만 덜컥거려도 흔들리고 부러지기 쉬운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달포동의 전부는 아니다.


달포동은 홀로 거주하는 주민의 안전을 모니터링하고자 긴급 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려 하고, 24시간 무인 상점은 혹시나 있을 타지의 방문객을 위해 달포의 기념품을 마련해 놓았으며,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과속방지턱, 길거리 코너의 사각지대를 확인시켜 주는 도로반사경, 그리고 안전 운전을 유도하는 무인 단속기의 경광등이 설치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달포동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외형으로 우리와 마주하는 안전장치이자 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달포동은 고령화, 저출생, 지역 소멸의 대상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을 복구하고, 유지하고, 더 나아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이기도 하다. 달포동이라는 제도-장치는 소외된 이를 외면하지 않지만,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처럼 좋은 의도의 제도와 장치가 늘 본래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잘’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달포동은 할머니를 곤경에 빠뜨리려 일부러 심술궂게 구는 건 아니다. 다만 의도치 않게 자주 퀘스트의 훼방꾼이 될 뿐이다.


후잉 (2025)
후잉 (2025)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비인간’이나 ‘신유물론’ 같은 개념이나, 브뤼노 라투르 같은 이론가를 들먹이고 싶어지긴 하지만, 그러기엔 내 지식이 너무나 얄팍하다. 대신 <후잉>을 계기로 이러한 테마를 또 다른 애니메이션들로 확장, 연결시키는 것이 더 흥미로울 테다.


이를 테면 허범욱의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는 어떠한가? 그 도시는 그저 실종 사건이 벌어진 곳, 그리고 희생자 가족인 할머니의 고통에 무심한, 건조한 무대에 불과할까? 사건 이전에는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손주를 찾아 헤매는 할머니의 동선을 따라 도시는 주체로 깨어난다. 그렇게 허범욱은 <후잉>에서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해 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여은아의 <유령이 떠난 자리>에서 아파트는 그저 고독사가 벌어진 현장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작품 속에서 도시와 아파트는 누군가를 꼭꼭 숨겨두거나, 벼랑 끝으로 내몰거나, 혹은 마지막으로 품어주었을 주체로 볼 수 있다.


김창수의 <엄마의 집>에서 삼거리 교차로에 깜빡이는 신호등도 같은 맥락이다. 갈림길에 놓인 주인공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면의 갈등을 상징하는 대상물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을 붙잡아 두고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행위자의 역할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돌봄’이라는 이슈를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한지원의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에서 사기 분양으로 방치된 아파트도 빼놓을 수 없다. 사귀던 연인과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원인, 그리고 기어이 관광 통역사가 되어 한국을 떠나고야 말게끔 등 떠민 장본인 (물론 매번 자식의 발목을 붙잡는 징글징글한 아버지도 한몫하지만)이 아닌가?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는 광고판 전면으로부터 180도 전환하여 드러나는 뒷면은 그저 폐허가 아닌, 잠에서 깨어난 악귀와 닮았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주체, 캐릭터, 행위자, 플레이어의 역할을 하게 된 도시, 건물, 제도, 시스템은 굳이 ‘의인화’ 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한다.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감독이 의도했던 역할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과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을 해 나간다. 그래서 관성에 젖은 우리 눈에는 종종 포착되지 못했다. 


예외적이라면 김상준의 <메아리>였다. 아파트 단지와 재개발을 앞둔 뒷산은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적극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메아리의 증폭, 그리고 그동안 품어왔던 테니스 공의 방출. 그야말로 적극적인 활약상이다.


# 그렇게 이어지는 삶

<후잉>을 하나의 작품으로 가두지 않고, 여타의 독립 애니메이션과 연결시키면서 경향과 흐름으로 묶는 이유는 후잉의 본래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세대에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의 자녀를 통틀어 이르는 말”. 그러니까 일종의 계보를 엮어 보려는 시도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이 세상에 응하는 방식의 계보, 현실과 관계 맺는 태도의 계보, 그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것에 새로운 움직임을 부여하는’ 애니메이션 본래의 모색들. 


모든 에너지를 발산하여 아기를 구해내고 할머니는 쓰러졌다. 깨어난 아기는 해맑게 웃으며 할머니를 바라본다. 감동의 관습을 따른다면 할머니도 눈을 떠서 아이에게 미소로 화답했을 테다. 하지만 아기의 미소에서 멈췄다. 대신 8초의 암전을 거친 후, 할머니의 과거를 보여준다. 혈혈단신,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던 젊은 날의 모습, 거기서 건네받은 작은 선물, 그것을 바라보며 짓는 고운 미소. 아기를 바라보며 지었을 미소를 아껴두었다가 마지막 40초의 플래시 백에서 드러낸다. 그렇다고 플래시 백으로 모든 감정선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어째서? 


감동을 집약, 응축시키는 대신 지연하고 분산시킴으로써 <후잉>은 이야기를 할머니의 영웅담이나 희생 서사에 빠뜨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위해 희생하거나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대 간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바통 터치 같아야 한다. 그래서 아기는 아기의 시간과 장소에서 미소를 짓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시간과 장소에서 미소를 짓는다. 성실한 연출과 진득한 완성도란 이 둘을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가장 적절하게 포갤 때 가능해진다. 최지희는 이것을 단지 두 장면의 조응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그저 두 개의 점을 겹쳐 찍는 것에 불과하다.


바통 터치는 두 주자가 각자의 경로 상에서 최적의 속도로 달리다가 접점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져야 한다. <후잉>의 엔딩은 바로 두 경로의 접점을 정교하게 구하는 시도이다. 아기와 할머니는 “인생 가장 먼 길” (시놉시스에 감독이 쓴 표현이다)의 여정을 방금 끝냈다. 마지막 플래시 백에서 할머니는 그 이전까지 자신이 걸었던 가장 먼 길을 떠올렸다. 아기의 미소 위로 새벽의 빛이 드리우고, 할머니가 그 옛날 건네받은 선물은 ‘샛별’이라는 담뱃갑 위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이었다. 새벽에 빛나는 샛별에서 두 빛이 어느 하나를 삼키는 게 아니라, 서로의 밝음을 상승시킨다. 그게 “후잉”의 뜻이고, <후잉>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그렇게 감독의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되어, 다시 새로운 1회를 여는 제21회 서울인디애니페스트 ‘인디의 별’로 밝게 빛남을 온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심사평의 마지막 문장에서 허범욱은 그 빛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지 시킨다. 그는 확실히 <후잉>을 완벽히 이해했다. 그리고 최지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증명했다.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그다음 작품으로 연결되고 확장된다. 지혜를 일깨워준 두 감독에게 더없이 감사하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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