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City of Good People
- seoulanimator
- 3월 14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4일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 City of Good People | 2011 | 15mins | dir. 허범욱 HUR Bumwook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
허범욱답지 않다
필모그래피를 훑다 보면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작품을 찾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작품이란 우선, 당연히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 말하자면 더 알려진 대표작들 사이에 숨어 있고, 해당 감독의 시그니처 (주제든, 스타일이든, 반복되는 캐릭터/배우이든, 하여간에 그만의 특징들)를 그다지 내세우지 않거나, 본류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고, 대개는 조용하거나 다소곳하여 좀체 우리의 이목을 끌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일단 ‘비로소 제대로’ 눈에 띄었다면 그 작품은 이제껏 우리가 놓쳤던 감독의 숨겨진 2%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율)를 채워 넣으면서 그간의 논의와 평가를 더욱 살찌우고 키워 나갈 추동력을 선사한다. 어쩌면 그런 작품은 감독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도 있고,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의 열쇠를 제공할 수도 있다.
허범욱의 경우,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가 그러할 것이다. 이 작품은 허범욱답지 않다. “허범욱답다”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퉁 칠 수 있을 테다. 형용사로는 포악하거나, 사납거나, 거칠거나, 잔악하거나, 잔혹하거나... 동사로는 찌르거나, 물어뜯거나, 때리거나, 폭주하거나... 명사로는 칼, 피, 올가미, 시체, 살점.... 여기에 거친 욕으로 채워진 대사까지... 뭐, 이런 말들이다. 한 마디로 응축하자면 허범욱다운 작품은 “쎈”(표준어가 아니지만 된소리로 내야 맛이 산다) 작품들이다. 따라서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은 “쎄지 않다”. 적어도 첫인상은 그렇다.
겹겹이 쌓인 레이어
허범욱답지 않게 세지 않음에도, 아니 세지 않기 때문에 외려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는 순순히 우리를 그 속에 들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여러 겹의 레이어로 보호막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다. 여러 겹의 레이어라는 말은 비유이기도 하고, 실제를 가리키기도 한다.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와 ‘숲’의 풍경은 여러 층위의 레이어로 겹겹이 포개어져 마치 자욱한 안개처럼 공간을 점령한다. 각각의 레이어가 저마다의 움직임으로 일렁이면서 도시와 숲이라는 공간은 스스로 음침한 기운을 뱉어내는 듯하다.
레이어를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선 제목부터 해당한다. ‘선량한’, ‘인간들’, ‘도시’. 착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칭하는 듯 하지만, 이 작품 속 도시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선량한지 아닌지 판단할 충분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 작품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은 할머니뿐이다. 그렇다면 할머니를 선량하다고 여겨야 하는데, 그러한 판단에 앞서서 할머니 혼자만으로는 인간‘들’이라는 복수형이 성립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유괴, 실종 사건’을 다룬다. 그러니까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중심 사건에서 벗어난, 지극히 반어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선량하다’라는 단어를 유심히,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비유적 레이어는 인간들에게 향한다. 선량한 인간이든, 선량하지 않은 인간이든 작품 속에서 인간들은 할머니와 그 나머지로 구분된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도시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할머니와 나머지 인간들, 할머니와 나머지 도시. 그러니까 할머니는 자신을 제외한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즉 할머니는 관계라는 비유 속에서도 고립되어 있고, 제작 방식의 물성에서도 자신만의 레이어에 놓여 위아래의 레이어들(때로는 주변 인물들이 놓이기도 하고, 원경과 근경이 놓이기도 하는 레이어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비유적 레이어의 세 번째 층위에는 할머니와 우리가 놓인다. 작품은 유괴 사건을 다루지만 결코 그 사건을 재현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해당 사건은 오프닝에서 라디오 뉴스를 통해 흘러나올 뿐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유괴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있겠지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마도 6개월 전에 일어난 사건이며, 수사에 진척이 없어서 사건을 종결했기 때문일 테다. 감독이 보여주지 않는 사건, 인물들이 언급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 할머니는 ‘여전히/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영화를 통해 ‘지금/방금 막’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품 속 인물들로부터 분리된 할머니와 연결된 것은 작품 밖 우리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건 전반에 대해 알고 있지는 않다. 다만 우리는 작품 속 누구보다도, 심지어 할머니 자신 보다도 더 깊숙이 할머니의 상황을 들여다보게 된다. 외부의 우리가 보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할머니의 처지뿐만 아니라, 안으로 감춰진 할머니의 내면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관객인 우리의 존재를 알리 만무하다.
감독은 이처럼 세 겹의 레이어를 거쳐 우리를 작품 속으로 유인하여, 심정적인 목격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행동의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결코 작품 속 사건과 상황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판단의 자유는 허용된 셈이다 (동정할 것인가, 비난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난처해할 것인가, 무관심할 것인가 등등). 그렇다면 일단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닦아 놓은 경로, 즉 작품의 플롯 구조부터 짚어 보자.

사건의 신포니에타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는 마치 교향곡처럼 크게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선 1분 남짓의 짧은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는 아이의 모습과 유괴 사건에 관한 라디오 뉴스가 잠시 나온다. 이것이 우리가 핵심 사건에 대해 얻게 되는 정보의 전부이다. 6개월 전 “아이가 유괴되었다”. 으레 허범욱의 작품들이라면 이 사건을 강렬하게 그려냈을 것인데, 그러면서 폭력의 기원을 다뤘을 텐데, 이 작품은 여기서 멈춘다.
사건 피해자인 김영수 어린이의 생전 모습은 10초 밖에 보여주지 않고, 이마저도 페이드 인/페이드 아웃의 삽입으로 분량을 잠식한다. 우리는 영수의 얼굴 대신 장난감 인형을 눈에 담게 된다. 사건을 전하는 뉴스는 TV나 신문과 같은 시각 정보 대신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추상적인 이미지의 파편들로 덧입혀진다. 범죄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범죄 영화 장르처럼, 유괴 사건은 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을 뿐, 전면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1악장 Largo
짧은 오프닝 후 제1악장과 같은 첫 파트가 시작한다. 식사 준비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퀀스임에도 움직임이 거의 없다. 스틸 컷에 가까운 정적인 쇼트들로 채워진 1분 남짓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침묵이다. 한정된 움직임만이 간신히 살아 있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묵직한 침묵을 비집고 나오는 가녀린 생명력, 바로 할머니의 지금 상태이다. 손자는 사라졌고, 아이의 물건만 남아 있는 곳에서 할머니는 그렇게 밥을 짓는다. 누구를 위한 밥일까? 돌아오지 않는 손자를 위해? 아니면 그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 자신을 위해?
#2악장 Allegro – Presto - Adagio
제2악장은 세 개의 하위 파트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파트는 학교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할머니는 혼자 있다. 하교를 하는 손주 또래 아이들로 북적이든 말든, 할머니는 혼자다. 신발을 그러쥐고 있는 한, 할머니는 세상과 단절되어 손자를 기다리는 자신만의 세상 속에 머문다. 손자가 유괴된 이후로 할머니에게는 당신만의 세상이 존재할 뿐이며, 오직 그곳에서만 손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유효할 것이다. 그 세상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도시의 사람들로부터 할머니의 존재마저 잊혀졌으리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안감이 더해진다. 할머니는 손자가 사라진 숲으로 이끌리듯 다가간다. 숲 속 나무 뒤, 기척이 느껴진다. 돌아온 것일까? 불러 세우려 하지만 쏜살같이 도망친다. 할머니는 간절하다. 이번에도 붙잡지 못하면 영영 놓칠 것만 같다. 할머니의 애절함 따위 아랑곳없이 아이는 멀어져 간다. “무서워할 것 없다”, “할미가 여기 왔다”, 해주지 못한 말, 해주고 싶은 말을 건네지만 대답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손자가 아닌가? 아니라면 굳이 도망칠 필요 없이, 자신이 ‘그 아이’가 아니라고 드러내면 된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다. 되려 할머니로부터 일부러 도망치려는 듯하다. 그 의도를 할머니도 알아챈 것일까? 할머니는 손자가 사라진 것이 범죄자 때문이 아니라 자기 탓이라 여기는 듯하다. 뒷모습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여기서 잃어버리면 안되는디”라고 흐느끼는 말은 손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향한다.
손주를 찾아 나선 첫 번째 추격이 작품의 5분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잠시의 정지 후 이어지는 두 번째 추적은 간절함과 절박함 대신 불길함과 두려움으로 채워진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을 유인하는 과자처럼, 아이의 인형에서 떨어져 나온 팔, 다리, 몸통을 따라 할머니는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조금만 더 가면 그곳에 손자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집착처럼 휘감는다. 그렇게 6분 40초 지점에서 두 번째 멈춤, 10초의 멈춤.
지나치게 밝아진 세 번째 파트,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나무 하나가 서 있다. 손자가 있어야 할 곳, 손자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할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인형의 머리뿐이다. 목 매달린 상태로, 하지만 역설적으로 웃고 있는 얼굴로 할머니를 내려다본다. 할머니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차마 올려다보지 못한다. 외침도, 속삭임도, 한탄도 허락되지 않은 침묵의 1분이 느린 속도감으로 흘러간다. 영혼의 조각처럼 눈송이가 천천히 흩뿌린다. 세상 모든 것을 하얀 침묵으로 서서히 삼키려는 듯이.
#3악장 Adagio – Presto - Adagio
7분 50초, 작품의 중간 지점에 이르자 완전히 다른 모습의 제3악장으로 급변한다. 돌연추상 이미지로 넘어가는 것이다. 얼핏 보면 추상 애니메이션, 순수 애니메이션, 비주얼 뮤직 등등 실험 애니메이션과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심미적으로 탐색한 추상 움직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노먼 맥클라렌이나 스탠 브래키지의 작업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추상적 형태의 순수한 운동을 추구하는 실험 영상과는 구분된다. 형태적, 지각적, 미학적 모색 등 기존의 추상 애니메이션과 차별되는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심리 상태를 담아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객관적 외부 세계(제1악장)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할머니의 주관적 외부 세계, 즉 절박함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뒤엉킨 상태로 바라보는 세계(제2악장)를 거쳐, 이윽고 할머니의 주관적 내면세계(제3악장)로 우리를 이끈다. 손자를 놓치고 잃어버린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할지 과연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설혹 짐작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을까? 무너지는 억장을 말로 옮길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대사로 구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언어와 형상을 넘어선다.
어떻게 허범욱은 2분 분량의 추상 이미지 속에 형언, 형용할 수 없는 내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처참히 붕괴하는 심정적 에너지는 그저 어설프게 기존의 작품들을 흉내 내는 식으로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그는 과감히 컴퓨터와 규격화된 애니메이션 작화지에서 벗어났다. 벽면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종이 위에 붓으로 흩뿌리는 액션 페인팅 방식을 취하다 보면 작품 속 인물과 같은 몸짓으로 크게 휘저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풍파를 드러내는듯한 거친 표면, 상흔과 닮은듯한 얼룩이 비로소 고스란히 포착될 수 있다.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작업자의 몸짓으로 전이되고, 작업자의 몸짓이 물성의 흔적을 낳고, 그리고 물성의 흔적이 음악의 전개를 불러온다. 이 부분 자체로도 이미 하나의 놀라운 비주얼 뮤직/추상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성립된다.
#4악장 Largo
이윽고 15초 간의 느린 화면 전환. 모든 감정의 토악질(3악장)을 끝낸 후, 다시 천천히 내리는 눈(2악장의 마지막 장면). 앞선 장면과 설정, 모티프들이 이 마지막 악장에서 반복, 변주된다. 밥(1악장)은 이제 도시락 통에 담겨 있다. 도시락 통에 그 도시-아이가 머물던, 이제는 아이가 사라진 장소들이 잠시 담긴다. 할머니는 아이의 부재를 받아들이게 된 걸까? 학교 앞 벤치에 변함없이 앉아 있지만, 이제 신발 대신 당신이 준비한 도시락 보자기를 꼭 쥐고 있다. 지나가는 아이들마저 없는 고요함, 결국 돌아오지 못한 손주. 마지막 1분 동안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어떤 표정 변화 없이 밥을 먹는다. 1악장처럼 느리지만, 결코 멈춰 있지는 않다.

선량함이란?
보호막과도 같은 여러 겹의 레이어를 4악장의 플롯 구조를 따라 돌파하다 보면, 우리는 사건의 실체가 아닌, 사건이 할머니에게 남긴 여파를 목도하게 된다.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할머니의 시선으로 이행하고, 밖으로 향했던 세계로부터 말과 구체적 형태로 담아내지 못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마지막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여정이다.
그러고 나면 결국 다시 제목을 확인하며 묻게 된다. 어째서 “선량한 인간들”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누가 선량한 걸까? 도대체 “선량함”이란 무엇일까?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선량하다는 말일까? 동의하는가,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가? 유괴 사건으로 아이가 돌아오지 못하고, 할머니는 괴로워한다. 이 상황만 가지고는 섣불리 다른 사람들을 “선량하다/선량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사전적 정의를 확인해 본다.
선량하다: 성품이 착하고 어질다
“착하고 어질다”라는 정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는 “선량함”이 지닌 능동적 기준과 수동적 기준의 충돌을 건드린다. 우리는 “선량함”이라는 제목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이미 떠올렸을 수도 있다. 나와 무관한 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꺼이 나서서 도움을 주는 인간들을 이 도시에서 기대했을 테다.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러한 능동적, 적극적 선량함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괴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이 할머니를 위로하며 적극적으로 ‘선량하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잦아들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선량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가?
작품 속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선량함’을 항변할 수도 있다. 자신들은 범죄와 무관하다라는 ‘결백함innocent’이 선량함일 수 있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라는 수동적, 소극적 의미에서 선량함을 말할 수도 있다. 유괴 사건은 안타깝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들은 ‘무해한’ 인간일 뿐이다. 그 점을 탓하거나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유괴 사건을 재현하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이 작품 속 도시에는 ‘범죄를 짓지 않았다’는 의미로의 선량한 사람들만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고통은 ‘선량함’과 어떤 관계일까? 범죄 피해자 가족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일 수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심정적 상태를 입체적으로 드나들면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그 이상이었다. 할머니 당신 때문에 손주를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다. 지나치게 자학적인 태도라고 지적할 수 있겠으나, 당사자라면 쉽게 자신을 ‘죄를 짓지 않은 선량함’으로 일컬을 수 없을 테다. 그러니까 스스로 가장 엄격한 ‘선량함’의 기준을 들이댐으로써 자신을 ‘선량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는 고통을 떠안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에 놓인다.

다시 시간이 흐른 후에
허범욱은 그 당시에 접한 유괴 사건 뉴스로부터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감독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선량함’에 대해 질문을 한 셈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2011년 무렵에 이 작품을 보았다면 나는 위와 같이 리뷰를 마쳤을 것이다. 소극적인 무해함과 적극적인 죄책감이 뒤엉킨 상태로 ‘선량함’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여럿 일어났고, 많은 희생자를 떠나보냈다. 이 과정에서 ‘선량함’의 판단 또한 바뀌었다. 집단적 애도 표현이 국가 권력, 공공 제도 속에서 허용되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소극적인 선량함은 무해함을 벗어나 무관심까지도 정당화하곤 한다. 나아가 애도를 향한 선량함은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희생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이 겪는 슬픔과 고통은 좀처럼 존중받지 못한다. 가치를 담은 많은 단어들은 오염되어 버렸다.
이 상황에서 할머니의 고통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저 손주를 지켜내지 못한 자책일까? “할머니,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한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선량함과 괴로움은 ‘부끄러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우에 따라 부끄러움은 염치, 양심, 책임감 등등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을 테다. 그건 법이나 도덕률과는 또 다른 차원의 얘기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선량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렵거나 생소한 얘기는 아니다. 이를 테면 우리는 윤동주의 시에서 ‘부끄러움’을 자주 마주칠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은 동주의 시 한 편이 작품 속 영수 할머니와 겹쳐진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찾아낸 작품은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선사한다. 뒤늦은 타이밍이 외려 무엇인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가 그러하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