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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A Long Alone

유령이 떠난 자리 A Long Alone | 2023 | 7mins 41secs | dir. 여은아 YEO Eun-a


부재 증명 장치로서의 애니메이션

새해, 새 아침. 시작에서 끝을 다룬다. 세상 사람들은 갓 태어난 새 생명을 통해 새로운 한 해의 기운을 찾는다. 어째 죽음은 새해 첫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밥솥의 경쾌한 알람과 함께 ‘치이익’ 분출하는 증기는 새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만큼이나 활력이 넘친다. 그 공간이 이미 죽음으로 들어찬 곳이라는 역설과 함께. 감독 여은아는 이 작품 속 죽음을 최대한 늦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어차피 이 글은 죽음을 이렇게 초반에 언급한다 (아뿔싸, 스포 조심!). 죽음이 새해 첫날 찾아온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곳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고, 죽음 이후로 그곳을 흘러 지나가는 시간은 적어도 그 장소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새해, 새 아침은 바깥세상의 일일 뿐. 그리고 바깥세상은 내부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고독사’는 이 작품의 소재이면서 주인공이 된다. 고독하게 죽은 이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죽음을 의인화시켜서? 제목을 찬찬히 되뇌어 보자. “유/령/이/떠/난/자/리”… 죽어서 떠났기 때문에 유령이 된 게 아니라, 유령으로 머물다 떠났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이미 유령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유령 같은 존재라는 설정이 바로 <유령이 떠난 자리>에서 여은아가 ‘고독사’를 대하는 태도이자 이해이다. 고독사를 소재로 다룬 작품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은 많지만, 고독사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은 몇이나 될까?


<유령이 떠난 자리>는 이제까지 여은아의 작품들과 유사한 궤를 따르면서도, 거기서 이탈을 시도한다. <고치>와 <장미여관> (그리고 초기 습작들과 웹애니 <심야상영관> 시리즈까지)처럼 공간 자체가 지니는 분위기, 인상, 정서, 기운, 이야기가 이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특정한 장소가 그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감독 자신이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실제 로케이션 현장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여은아는 르포 작가, 다큐멘터리 감독, 심층탐사 기자, 인류학자에 가깝다). <고치>를 위해서 철거 예정인 거주지들을 찾고, <장미여관>을 위해서 사창가를 취재했듯, <유령이 떠난 자리>를 위해서는 특수청소부가 되어 현장에 뛰어들었다. 각각의 장소가 어떠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 그곳에서 직접 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언어를 초월한 그 무엇인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차이를 경험했다면, 그러한 장소가 단지 외부에 놓인 무대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치>와 <장미여관> 같은 작품들에서 인물들이 이상해서 그러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머무는 장소가 인물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유령이 떠난 자리>가 이전 작품들과 다른 점은 ‘관계’에 있다. 물론 그 관계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질척한 가족 관계가 장소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더 암울한 장소로 떠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여은아의 작품에서 ‘만약 가족에서 벗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을 조심스레 꿈꾸게 된다. 하지만 탈출과 해방을 위한 일말의 여지를 철저하게 봉쇄한 작품이 바로 <유령이 떠난 자리>이다. 관계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지점에 ‘고독’이 있고, 그 고독이 유령을 낳는다.



<유령이 떠난 자리>가 지닌 중요한 가치이자 성취는 고독사를 소재로 삼아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 고독사는 소재가 아닌 주인공이며, 그래서 그 주인공을 어떻게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내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고독사가 소재가 되고 메시지가 되면 관객들은 불편해진다. 마치 우리 모두에게 당장 세상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반성과 실천,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랬다가는 작품은 ‘방 안의 코끼리’를 건드리고 만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다 함께 침묵할 때 그나마 견뎌낼 수 있는 그런 상황. 세상이 이 따위인 까닭은 무지와 무관심이 아니라, 당장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 불편한 대상을 우리의 시야에서 지워 버린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이제까지 해왔던 긍정적인 역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지워진 코끼리를 조금은 다른 이미지로 바꾸어서 사람들 앞에 다시 보이게 한 노력들이다. 상징과 은유, 의인화, 변신 등을 통해 그나마 사람들은 불편한 코끼리를 자신들이 감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애니메이션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특정 작품을 언급하기보다는, 개인적 트라우마부터 사회적 트라우마까지 형상화해 낸 수많은 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유령이 떠난 자리>는 고독사라는 불편한 코끼리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해서 주인공으로 제시했다는 말일까? 대답은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이다. 이렇게 대답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인공-고독사의 형상이 말 그대로 ‘유령’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령은 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면서 두둥실 떠다니는 형광빛 반투명 존재가 아니다. 유령은 우리 눈에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유령을 주인공으로 형상화/시각화한다는 것은 결국 유령을 우리 눈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아니, 현실 속에서 이미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에 고독사는 언제나 뒤늦게 우리 앞에 ‘이미 한참 전에 벌어지고 만’ 결과와 ‘이미 치워진’ 흔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지 않도록 다루는 작업은 애니메이션의 핵심과도 같다. 단순히 스톱 모션 촬영술을 통해 사물 스스로 움직이는 해프닝을 다룬 초기 ‘귀신들린 집(haunted house)’ 장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궁극적으로 존재를 지워내는 작업이란 애니메이터의 개입을 지워내는 일이다.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을 이루는 모든 프레임 이미지 하나하나에 관여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결코 그 프레임 이미지 ‘속’에 (그리고 ‘사이’에) 드러내서는 안된다 (물론, 애니메이션의 자기 반영성/자기 성찰성을 드러내는 의도적인 실험 작품은 예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령이 떠난 자리>는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다룬다.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은 고독사를 다루는 제작 기법을 추리한다. 스톱 모션이나 타임 랩스를 추정해 본다. 때론 3D 작업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부분적인 정답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과 사물은 모두 수많은 포토 이미지들의 콜라주로 구성된다. 하나의 프레임 이미지를 이루는 수십 겹의 레이어들은 저마다의 출처에서 분리, 조합된 파편들로 이루어진다. 모든 프레임 이미지는 인공적인 가공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만으로 <유령이 떠난 자리>의 제작 기법이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수십 겹의 프레임 이미지들 사이에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낱낱의 프레임 사이에 미세하게 컬러 값을 조정하고, 조명 효과를 변화시키고, 질감을 바꿔 나간다. 말 그대로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자신의 터치를 조절하고 통제한다. 변화된 값의 차이에 따라 시간은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느리게 흐르기도 한다. 그래서 단순히 외부의 시간 흐름을 듬성듬성 기록하는 타임 랩스와는 달리, 이 작품의 시간 또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공품이다. 다만 여기서도 애니메이터는 스스로를 화면 속에 드러내서는 안된다. 


드러난 스펙터클, 감춰진 노동. 미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관객을 압도하는 바그너 오페라의 스펙터클 효과를 이야기하면서, 그 효과를 만들기 위해 무대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많은 스텝들의 가려진 노동을 ‘판타스마고리아’ (phantasmagoria)라는 말로 가리켰다. 실체가 지워진, 허깨비, 유령 같은 존재. 애니메이션이 ‘움직임의 환영’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내려면 낱낱의 프레임 이미지를 만드는 애니메이터의 구체적 노동은 감춰져야 한다. 애니메이터들은 자신들의 첫 역사에서부터 기꺼이 스스로가 유령으로 지워진다는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디지털 툴로 대체된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유령이 떠난 자리>는 두 가지 점에서 시의성을 지닌다. 하나는 사회적 이슈로서의 고독사를 애니메이션만의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자동화될 것처럼 이야기되는 애니메이터의 작업 (또는 노동, 또는 실천)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증명하는 점. 그런데 이 둘은 그저 우연히 결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이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아야 하는 자’로 여겨온 애니메이터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된 타인이 있다는 것에 반응한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부재와 시간, 죽음은 늘 애니메이터와 함께 해왔다. 죽음(들)에 애도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시대에 <유령이 떠난 자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자, 닫힌 세상을 건너다보는 창이 될 것이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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