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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A Blue Giant

파란 거인 A Blue Giant | 2021 | 6mins 48secs | dir. 노경무 NOH Gyeongmu


감각을 깨워 존재를 끌어안다

무채색 세상 속에 파란 인물이 있다. 잔뜩 웅크린 자세를 보며 그의 상황을 추측해 보자. 갇혀 있거나 스스로를 가두거나 또는 뱃속 태아의 상태로 퇴행하려는 포즈. 우리는 파란 인물이 어떤 선택지들을 밟아 나갈지 미리 짐작한다. 우선, 그는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안에 머무를 것인가? 그다음, 밖으로 나간다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할 것인가? 안에 머문다면 내면의 기억을 끄집어낼 것인가, 아니면 상상을 통해 저 밖의 세상을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최종 결말은 성장(혹은 각성)인가, 치유(혹은 위로)인가, 소멸(혹은 좌절)인가?


이런 질문과 선택, 가정과 예측은 꽤 익숙하다.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영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훌륭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아쉬움을 자아냈다. 창작자 홀로, 고립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한 인물의 실존적 고뇌를 붙들고 작업을 하다 보면 자신의 처지와 작품 속 상황이 서로 침입하면서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런 교차 속에서 창작자는 더욱 치밀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이야기에 천착할 수도 있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매력이자 함정이다. 감수성, 성찰, 측은지심, 자괴감이 서로를 붙든 채 밀치고 당긴다.


노경무의 <파란 거인>은 바로 이 지점, 독립 애니메이션 영역의 최다빈도 기출문제를 마주한다. 앞서 나열한 여러 유형의 선택지들에 대한 <파란 거인>의 답은 다음과 같다.


Q1. 안에 머무는 대신 밖으로 나간다.

Q2. 목적지에 도달한 후, 다시 돌아온다.

Q3. 최종적으로 치유와 성장을 이룬다.


이러한 선택이 이 작품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실, 답안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파란 거인>은 우리가 실존적 고민/고통/고뇌를 다루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이를 테면 <;파란 거인>이라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내면과 서사에 초점을 두고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파란 거인>이라는 텍스트와 이를 만든 노경무를 연결시켜서, 작품 속에서 창작자의 고뇌와 깨달음을 파헤쳐 낼 것인가? 또는 다른 작품과 <파란 거인>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낼 것인가? 등등. 물론 이러한 접근법들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파란 거인>이 별안간 새로운 독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파란 거인>은 익숙한 (심지어 진부한) 것을 참신하게 바라보고 신선하게 다가가도록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다.



<파란 거인>은 노경무의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과 나란히 놓았을 때 시너지를 발산한다. 첫 그림책과 첫 애니메이션을 겹쳐 놓는 순간, 각각의 매체 형식이 지닌 가능성을 탐색하는 초행자 노경무의 조심스러우면서도 한껏 달뜬 발걸음이 전해진다. 2017년 작 『불에서 나온 사람』은 붓과 먹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컬러가 없다. 그렇다면 무겁고 어두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불길이 초반을 장악하며 특유의 기운을 뿜는다. 그 뜨거운 불기운 속에서 숯처럼 까만 사람이 간신히 밖으로 나와서는 이내 쓰러진다. 돌처럼 꿈쩍 않는 그 사람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여기까지 보면 이 작품은 분신이나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연상시키며 묵직한 비장미를 자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에 숲 속 동물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톤이 바뀐다. 깨워주고 도와주려는 모습을 통해 우화나 동화로 넘어간다. ‘그’가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전환을 맞는다. 새를 따라가다 보니 물가에 다다른다. 물로 열을 식히고, 그을린 몸을 닦아낸다.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고 미소를 보인다. 우화이고, 동화이고, 깨달음이고, 구원이다. 무엇보다 생명의 확인이다.


『불에서 나온 사람』 속에는 당장 폭발할 것 마냥, 움직임과 살아있음에 대한 의지가 끓어 넘치고 있다. 이야기는 출발점에서부터 결승점을 향해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색은 없지만 왠지 색을 본 듯하다. 애니메이션 <파란 거인>은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을 이어받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저 반대편에 있고자 하고, 이야기의 경로를 구부리고자 하며, 안을 만듦으로써 밖을 구분 지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치 『불에서 나온 사람』 이야기는 파란 거인이 꾼 꿈이거나, 반대로 <파란 거인>이 불에서 나온 사람이 꾼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도 불에 들락날락 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노경무가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이다. 작가 개인의 삶 또는 창작자라는 직업이 겪는 처지를 은유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파란 거인>에도 붙일 수 있다. 그리하면 『불에서 나온 사람』과 <파란 거인>은 삶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게 된다. 두 작품 모두 상징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다루는 서정적 이야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런데 ‘불’이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감각적 고통의 실체라면? 창작자의 실제 경험이 드러나면서 작품의 의미와 무게가 달라진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결국 작품의 최종 판단은 창작자의 경험과 의도로 수렴, 환원되어야 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작품과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창작자의 몫도 추가되어, 훨씬 풍부하고 적극적인 대화로 나아갈 수 있다.


<파란 거인>은 『불에서 나온 사람』과 함께 할 때 자신의 색을 뚜렷이 할 수 있고, 『불에서 나온 사람』은 작가의 개인적 상황과 함께 할 때 깊이를 얻는다. 이러한 연결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째서 <파란 거인>이 다루는 내면, 정서, 여정, 성장. 치유가 그저 피상적인 상징으로 겉돌거나 익숙한 클리셰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파란 거인>에서 눈길이 가는 지점이 선명히 보인다. 웅크린 채 회전하는 첫 장면, 빨라지는 비트에 맞춰 접히듯 줄어드는 모습, 상처를 치유하며 빛을 품에 안고 다시 웅크리며 회전하는 장면. 비슷한 자세의 반복과도 같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들은 주인공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상태에서 거대해진 자아, 절망감에 무너지며 작아지는 자아, 그리고 치유와 내적 평화를 회복하는 자아… 이 모습들은 결코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내면적 움직임이다. 정서가 머무는 영역을 몸이라는 외형으로 드러내고, 이를 회전하고 접어가면서 작품 속 우주에 배치하는 시도가 <파란 거인>에 담겨 있다. 정적이지만 조만간 분출될 에너지를 담고 있는 그 모습에서 『불에서 나온 사람』이 겹쳐지고, 불에 들락거리면서 고통과 삶을 동시에 경험하는 창작자가 겹쳐진다. 피상적이었던 실존적 고뇌는 날카롭게 깨어난 감각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인 실재가 되었다. 거인은 웅크린 것이 아니라 자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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