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FOCUS_KIM Changsoo
- seoulanimator
- 6월 7일
- 10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7일
삶의 끝을 향하는 자의 보법
김창수의 <어둠의 저편> (2015), <사라지는 것들> (2022), <엄마의 집> (2024)
끝과 시작
# 장면 1
좌회전과 우회전, 갈림길에서 멈춰 선 차.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리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방금 엄마를 모셔다 놓은 요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치매로 꽤나 오랜 시간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다가 이제 막 떠나온 집,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야 할 요양원. 엄마의 집은 어디여야 할까? 제목이 <엄마의 집>인 까닭이다. 하지만 머물 집을 선택하는 건 노모 자신이 아니다. 좌회전과 우회전 사이에서 한참을 멈춰 있는 주인공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선택과 결정이 쉽지 않다는 점을 안다(고 지레 짐작한다). 마지막까지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는 ‘도리’의 무게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안다(고 으레 수긍한다). 그만큼이나, 오랜 병수발을 견뎌낼 효심은 없다며 그 ‘노고’가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도 안다(고 응당 맞장구친다). 엄마가 떠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의 짐을 짊어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테다. 한편,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다고 자식의 도리를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찾아보고, 요모조모 따져가며, 이리저리 직접 발품을 팔며 찾아보았을 것이다.
어떤 선택도 쉽지 않을 것이고, 선택에서 배제된 다른 하나의 상황을 앞으로도 수시로 되돌아보며 후회와 회한을 쌓아가게 될 테다. 이처럼, 김창수의 최근작 <엄마의 집> (2024) 마지막 장면은 마침표로 끝맺지 않는다. 교차로에 멈춰 “딸깍딸깍” 대는 자동차의 비상등 소리는 장면이 암전 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그치지 않는다. 상황에 공감하는 관객에게 그 소리는 결코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 따위는 없는, 지극히 기계적인 정박자의 “딸깍딸깍” 소리는 그래서 야속하기까지 하다. 결정을 재촉하는 채근처럼 들리기도 하고, 사신의 춤에 매달린 운명의 시계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 장면 2
거대하게 확대된 모습으로 꿈틀대는 구더기 떼. 처음부터 다짜고짜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이 낯설고 기괴한 장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할 틈조차 없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거나, 판단을 유보한 상태로 이 장면이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지 조금 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구더기 무리는 누군가의 귀에 모여 있다. 그리고 이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구더기와 파리떼가 죽은 이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 ‘본다’라는 능동태가 아니라 ‘보게 된다’라는 수동태를 쓸 수밖에 없다. 단지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어둠의 저편> (2015)은 관객뿐만 아니라 작품 속 주인공에게도 ‘수동태의 시선’을 강제한다. <엄마의 집>처럼 선택의 기로에 선 상황과는 다르다. <어둠의 저편>은 판단과 선택의 결정권을 몰수한 채,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 눈앞에 죽음을 들이미는 상황을 설정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주인공을 포함한 작품 속 사람들의 의지와 의사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게 죽음의 본모습이고, 죽음이 우리를 거칠게 대하는 태도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마찬가지로 수동태로) 마주하게 ‘될’ 때의 충격과 공포, 무력함, 난처함, 두려움, 역겨움이 집약된 것이 <어둠의 저편>의 첫 장면이다. 이때 우리의 귓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는 저마다의 날갯짓으로 붕붕 대는 소음, 비정형의 난폭한 폭주, 누군가의 시신을 빨아들이며 제 몸을 불리는 벌레들의 끈적이는 소리이다. 유기체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김창수가 자신의 첫 작품에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보여준 장면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장면 1과 장면 2는 이제까지 만들어진 김창수의 작품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 (가장 최근) 장면과 제일 처음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두 장면 모두 강렬하게 우리를 포박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다. 판단과 선택, 결정을 해야 하는 입장과 무방비 상태로 죽음 앞에 끌려 나온 입장. 그렇다고 선택과 결정이 죽음 앞에 당당하게 맞선다든가 능동적으로 죽음을 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상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지 않고,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할 시간과 마음가짐이 허락된 상태로 변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이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웅웅”대는 무질서한 소음과 ‘딸깍딸깍’ 정박자 시그널 소리 사이의 대비에서 무엇이 관통하고 지나간 것일까? 한편에는 죽은 이의 살을 삼키며 삶의 혼돈을 만들어내는 유기체 (구더기와 파리떼), 다른 한편에는 교차로에 멈춰 서서 차갑게 질서를 따르는 기계장치 (비상등과 와이퍼), 이 양극단 사이에서 어떠한 삶의 순간이 펼쳐졌을까?

죽음의 배치
김창수의 작품들에서 죽음은 하나, 즉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짝을 짓는다. <어둠의 저편>에는 아버지의 죽음과 누이의 죽음이 등장한다. <사라지는 것들>(2022)에는 고양이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이 나란히 놓인다. <엄마의 집>에서는 인간-어머니와 양-어머니의 죽음을 다룬다. 이렇게 짝지어진 죽음이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는 작품마다 다르다.
<어둠의 저편>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누이의 죽음은 대조를 이룬다. 아버지의 죽음은 방치되어 뒤늦게 발견된 죽음이고 누이의 죽음은 병실에서 돌보며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래서 이 둘은 준비하지 못한 죽음과 준비된 죽음으로 단순히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죽음과 준비의 대비는 좀 더 다층적이다. 아버지의 준비 못한 죽음은 생전에 돌보지 못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있던 아버지는 일종의 방치 상태였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족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시점에서 이미 상징적인 죽음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지위를 생각하면 특히나 그렇다)에 놓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누이에게 죽음은 너무나 이르게 찾아왔다. 아무리 병간호를 통해 준비된 죽음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젊은 나이이다. 아버지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가족 간의 돌봄과 치료의 과정이 누이에게는 주어졌지만, 죽음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필연적인 결과이고, 누이의 죽음은 ‘그럴 수는 없는’ 모순 자체이다.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은 공통적으로 느닷없이, 돌연, 별안간 들이닥쳤고, 주인공에게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난처하고 무력한 죽음으로 앞에 놓였다. 다시 말하지만 <어둠의 저편>에서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수동태로 놓인다.
<어둠의 저편> 속 대비된 죽음에 비해, <사라지는 것들>에서 고양이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은 대칭적이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반으로 접어 포개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죽은 고양이를 정성껏 수습하여 묻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고, 후반부는 이제껏 어머니를 통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 고양이들이 성심껏 보은을 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어둠의 저편>이나 <엄마의 집>과 달리, <사라지는 것들>이 커다란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평온하고 정적인 분위기 (그 고요함을 깨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벌어지는 파괴의 충격음이다)를 줄곧 유지하는 이유는 이러한 대칭과 균형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당신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양이들의 죽음을 거두어 왔다. 마당 한편, 양지바른 곳에 마련한 고양이 무덤들. 거기엔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어 놓은 고양이들의 이름이 함께 세워져 있다. 주목할 것은 글씨체가 아니라 이름이다. 고양이 이름, 누가 붙여준 것일까? 어머니일 게다. 이미 누군가 붙여준 다른 이름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예 누구도 이름 붙여주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방식으로 고양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짓고, 그것들이 살아 있을 때 불렀을 터.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듯, 마지막 순간에 거두어 묻고 이름을 적어두는 것으로 그것들은 오롯이 하나의 삶을 마감한다.
후반부의 장면은 받은 정성을 고스란히 되갚는 환상신이다. 고양이 무덤의 주인공들이 상주와 상여꾼이 되어 어머니의 마지막을 모시는 설정. 이때 우리는 이름으로만 유추했던 그들의 모습을 마침내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어머니가 눌러 적은 이름이 각자의 목에 걸려 우리에게, 그리고 그것을 부여한 어머니에게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고양이와 어머니는 서로에게 죽음의 절차를 정성껏 마련하고 충실하게 챙겨준 관계이다. 여기에는 <어둠의 저편>에서와 같은 무력함, 당혹함, 머뭇거림, 주저함, 절망감 같은 것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수동태의 난처함 따윈 없다. 물론 능동태의 부산스러움도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들>을 통해 완전히 극복되었을까? 또는 적어도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일까? 아니, <엄마의 집>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 그처럼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그리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고, 애써 눌러 참고 있던 감정을 터뜨리듯 쏟아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말하자면 이성과 감정의 혼재이고, 처한 현실과 따라야 할 도리 사이의 충돌이며, 선택과 결정이 결코 해결책은 아니라는 답답함의 토로이며, 조만간 맞이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폭발이다. 준비하고 정리하려 할수록 오히려 뒤엉켜버리는 삶의 모순과 복잡다단한 감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할까?
<엄마의 집>은 이를 두 겹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하나는 현실 세계에 기반한 인간-어머니의 모습으로, 다른 하나는 환상 속의 양-어머니의 모습으로 분리한다. 양의 모습으로 그려낸 환상은 그저 죽음에 대한 우화를 꾀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의인화라는 설정은 감추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 죄책감,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드러내고 받아들이려는 우회로와 같다. 차마 정면으로 직시하기는 힘든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는 없는 괴로움. 남들 모르게 애써 삼켜버리려 하지만, 결국 토악질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 쓰디쓴 감정들…
그동안 엄마를 모셔왔지만, 더 이상 감내하기에는 힘든 상황. 하지만 자칫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따랐다가는 그간의 노고마저 부정당할 것 같은 두려움. 가족만큼의 정성은 아닐지라도, 차라리 전문 기관의 시설과 전문 인력의 도움이라면 외려 지친 가족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와 위안. 그러나 아무리 신경 써서 찾고 꼼꼼히 확인했다지만, 정작 현장에서 둘러보고 어머니를 그곳에 모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잘못된 결정일 수 있다는 불안과 좌절감. 이전까지의 기대와 신뢰가 일순간에 의심과 불신으로 급반전되면서 밀려드는 절망과 공포. 그렇다고 다시 가족의 품으로 함께 되돌아가기에는 막막하고 절박한 현실의 장벽 등등.
이처럼 뒤죽박죽 엉켜버린 현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양의 외양을 빌려 이야기를 한다면 조금은 수월할 것만 같다. 순한 성품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짐승을 불러와서, “오죽하면 양마저 제 어미를 저리 대할까”라는 반응을 유도하기. 그럼으로써 비난의 화살을 인간-자식이 아니라 양-자식에게로 향하게 하기. 혹여 이러한 우화적 설정이 순진하게 들릴 경우,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 양은 고약한 성품을 지닌 동물이다”라며 자신의 위선을 양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심산. 우화의 표현을 따르든, 동물의 실제 습성을 내세우든, 양은 말 그대로 주인공의 속죄양으로 불려 와 그 자리에 놓인다. 짐짓 능동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죽음 앞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숨어있다.
죽음은 각각의 작품들 속에서 쌍으로 짝지어져 서로 대비되거나 대칭을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죽음은 이전 작품과 이후 작품을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도 한다. <엄마의 집>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사라지는 것들>에서 고양이를 보살폈던 그 어머니이다. 철거를 앞둔 어머니의 집, 방에 걸려 있던 사진 속에는 먼저 떠나보낸 딸이 함께 한다. 그 딸은 <어둠의 저편>에서 투병하는 누이이다. 이처럼 죽음은 개별 작품에 국한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 사이에서 겹쳐지고 포개어지면서 상실의 여파를 지속한다.
이렇게 작품과 작품이 죽음을 매개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어둠의 저편>에서 죽음 앞에 허망한 모습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청년이 <엄마의 집>에서 여전히 교차로에 멈춰 있는 중년의 사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내 (한때 청년이자, 이제는 중년인 사내)는 정작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사라지는 것들>에서 어머니와 고양이 간의 평온한 죽음 의식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고양이는 속죄양이 아니라는 것, 어머니 당신에게 속죄양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아들은 순순히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접촉과 무게
김창수가 다룬 죽음의 이야기들에서 김창수의 인물들 (감독 자신과 겹치기도 하고, 허구로 변주, 증폭되기도 한 인물들)은 죽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아직 청년이었을 때 당면한 두 죽음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착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아버지의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부패하고 있었다. 구더기와 파리떼로 뒤덮인 모습 자체가 참혹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를 살피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과 공포, 두려움이 그를 삼켜버린다. 이것이 그가 경험한 죽음의 첫 모습이다.
누이의 죽음은 ‘너무 때 이르게 찾아왔다’는 당혹감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깨어나게 했다. 무관심과 방치 대신 헌신적인 돌봄으로 죽음을 멈추려 했지만, 이 역시 막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죽음 또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죽음 앞에서 발버둥 치며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시도는 <엄마의 집>에서도 이어진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수발하는 것으로 이미 지친 상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테다. 이제 남은 일은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어머니를 마지막 안식처에 모시는 것이다. 중년의 연배라면 이러한 절차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얼마나 복잡한 심정으로 진행되는지, 충분히 겪어보았을 터. 허나 여전히 갈등하고 주저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에 다가가고,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왠지 납득할 이유가 있어야 하고,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김창수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죽음을 맞이하는 참모습은 그 너머에 있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접촉하는 것, 죽음을 만지는 것,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 다시 말해 죽음을 구체적인 실체로 감각하는 것이다.
방치되어 부패한 아버지의 시신은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다. 파리와 구더기에 의해 훼손되고, 부패로 인해 잔뜩 부풀어 오른 신체는 어디까지나 시각에 머무른다. 참혹함과 역겨움으로 그 마저도 오랫동안 응시할 수 없다. 첫 번째 죽음은 그렇게 신기루와 같은 악몽이었으며,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죽음을 앞둔 누이는 접촉을 허락한다. 힘겨운 투병으로 인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육신을 주무르고 두드린다. 간신히 전해오는 온기에서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갈수록 누이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잃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어루만지고 안아주고 싶지만 왠지 점점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같은 병실에 누워 있지만 누이는 이미 어둠 너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내는 감히 그곳을 건너다볼 용기가 없다. 돌아누운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의 저편은 눈길도 손길도 닿지 않을 심연일 테다.
<엄마의 집>에서 인간-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상황은 난데없는 부탁으로 양-어머니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 모습으로 빗대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에 올려진 무게를 느낀다. 비탈을 오르기에 실제보다 더 무거운 중량감을 겪는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도 자신이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그 무게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원래의 자리로 내려오다가 함께 찍은 사진을 확인하면서 퍼뜩 깨달은 것, 그제서야 허겁지겁 재차 올라서 비로소 알게 된 실체. 중년의 사내는 산을 두 번째 오르면서 자기가 벌인 일을 직시하게 된다. 무게는 심리적 압박감이면서도 어머니와의 마지막 접촉이다. 고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두 가지 형벌−−회한이라는 심리적 형벌과 육체적 형벌−이 된다.
<어둠의 저편>에서든 <엄마의 집>에서든 죽음과 접촉하는 태도와 자세는 서툴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거나, 주저했거나, 황급히 서둘렀거나, 부질없이 도망치려 했다. <사라지는 것들>이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과 다른 까닭은 죽음에 접촉하는 것 자체를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대칭으로 설정하면서도, 이 둘은 죽음을 치르는 과정을 함께 완성한다. 즉 고양이의 죽음은 염의 의식, 어머니의 죽음은 상여 행렬로 연결된다.
처음에 등장한 고양이의 사체는 파리떼로 뒤덮여 있다. <어둠의 저편>과 겹친다. 하지만 방치되었던 아버지의 시신과는 달리, 어머니는 고양이의 사체를 거두어 정성껏 씻긴다. 묻어줄 구덩이를 파놓고, 쟁반 위에 물과 포목을 담아 내오는 준비하는 과정부터 작품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렇게 털 하나하나에 묻은 먼지와 더러움을 씻어내고는, 깨끗이 정돈된 몸뚱이를 여러 번 쓰다듬고 다독인다. 아마도 어머니 당신은 앞세워 떠나보낸 딸에게 차마 해주지 못한 정성을 고양이들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바람이 지나가며 고양이의 수염을 건드리자 마치 웃는 표정을 짓는 것 같다. 접촉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교감으로 승화된다. 부패한 시신, 앙상하게 야윈 병자의 몸, 치매로 인해 의식과 분리된 육체 등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접촉과 교감이다.
이제는 고양이들이 어머니를 정성으로 대할 차례이다. 눈부시게 흰 목화꽃 들판을 가로지르는 행렬은 알록달록한 색깔들로 치장한 꽃상여를 짊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그 무리가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리고 그 상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짐작했을 것이다. 행렬은 서두르지 않는다. 고양이도, 어머니도 재촉하지 않는다. 염 의식이 그러하듯, 상여를 나르는 의식 또한 고도의 집중력과 고요함으로 충만하다.

죽음을 향한 속도와 표정
김창수는 <사라지는 것들>에서 진심을 담아 애도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과 속도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고양이들의 행렬은 흡사 삼보일배와 닮아 있다. 이러한 속도는 감독이 관객과의 감정 교류에서 얼마나 절제하고자 하는지를 확인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감동을 뽑아낼 심산이었다면 염 의식과 상여 운반을 더 짧게 보여주고, 대신 고양이와 어머니의 표정과 행동을 더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만드는 이든, 보는 이든, 모두가 죽음의 의식 앞에서 멈춰 예를 표하며, 죽음을 대면하는 서투른 태도를 다잡고, 제대로 죽음을 바라보는 경험을 함께 하고자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절대적 평온함에 이르러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목도하고 받아들이는 준비를 반복적으로 익히면서 김창수는 절제와 인내의 시간을 가장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로 매번 거듭나고 있다. “지독하게 기다릴 줄 아는”이라는 표현은 내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붙인 수식어 중 하나이다. 나 스스로 절제한다 해도 매번 그의 긴 호흡 앞에서는 언제나 한두 박자 먼저 흔들리곤 한다.
김창수에게 붙이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주름을 가장 잘 그리는”이라는 구절이다. 이는 그저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흉내 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얼굴 표면에 나타난 주름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름의 깊이와 거기에 담긴 세월과 삶의 흔적을 가장 적절하게 담아낸다’는 의미이다. <사라지는 것들>에서 간파했던 점인데 <엄마의 집>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두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주름은 스타일과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 주름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동일하다. 두 얼굴 모두 무표정하지만, 매 장면마다 우리는 무표정이 전하는 감정과 정서의 강도와 온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김창수의 작품들에 대한 글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뒤늦게나마 발견한 것이 또 하나 있다. 10년 전에는 미처 포착하지 못한 것, 바로 죽음 앞에 무력한 자가 짓는 표정이다. <어둠의 저편>에서 그 표정은 다른 강렬한 이미지들 때문에 한 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사건의 전개만을 좇다 보면 여전히 멈춰 있는 스틸 이미지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미간과 눈동자, 입꼬리를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마치 거울에 비친 표정처럼 따라 해 본다. 의식적으로는 지을 수 없는 아주 작은 떨림, 오히려 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떨림, 죽음 앞에 한없이 초라해져 버린 (다시 한번 수동태!) 존재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는 나약하고 연악한 떨림, 안타까움과 분노와 공포와 망연자실이 혼재하는 실존적 떨림... 그제서야 <어둠의 저편>의 비어 있는 부분, 차마 담아내지 못하는 부재의 영역, 즉 “이편의 어둠”을 가늠하게 된다.
<어둠의 저편>부터 <사리지는 것들>, <엄마의 집>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감독 김창수에게 10년이 지나갔고, 관객 중 한 명인 내게도 10년이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 그만큼의 시간 속에서 가깝거나 먼 사람들의 죽음을 여러 번 거쳤다.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배우듯, 우리 삶에서 겪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 다시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접한다. 우리는 ‘메멘토 모리’라는 말에 제법 익숙하지만 여전히 죽음 자체에 서툴다. 10년이 흐르는 동안 ‘애도’, ‘돌봄’과 같은 단어 (‘존엄’, ‘치유’도 마찬가지로)가 죽음과 우리 사이에 추가되었다. 김창수의 작품들은 그 단어들과 조응한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