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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Gen Z Trio

  • 3일 전
  • 9분 분량

<커피와 담배> (2024, 김윤아), <핑크몽키> (2024 , 우종빈),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 (2024 문세라)


닥치고 청춘 애니!


# 새벽비행을 하는 작품들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는 “새벽비행”이라는 경쟁 섹션이 있다. 다른 영화제들에서는 “학생 부문”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주로 상영되지만, 엄밀한 정의에 따라 구분되지는 않는다. 굳이 졸업 작품일 필요도 없고, 전공생의 작품일 필요도 없고, 학생일 필요도 없다. 첫 작품, 즉 데뷔작일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런 것 만도 아니다. 누군가는 이미 두 번째, 세 번째 만든 작품일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데뷔작이라도 일반 경쟁인 “독립보행”에 선보일 수도 있다. 


어떠한 선택 기준을 택하여 이르렀든, “새벽비행”에서 상영하는 작품들과 마주하는 시간이면 나는 여느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곤 한다. 어느 작품이 언제, 어떻게 (좋은 의미로든 그 반대로든)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새벽비행” 상영 섹션이 실망스러울 때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이다. 자폭이든 폭격이든 저격이든 터졌어야 하는데, ‘피시시식~’하면서 불발탄에 그치면 여간 안타깝고 민망한 게 아니다. “기세! 기세란 말이다!”라고 속으로 외치곤 한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에 의구심이 든다. ‘혹시 내가 알아채지 못한 건 아닐까?’ 더 끔찍한 상황은 ‘나만 못 따라간 건 아니었을까?’ 일 때다. 


작년, 2025년의 영화제에서 나는 이런 걱정과 의심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건 내가 불발탄들만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폭발의 순간과 타이밍, 충격량과 타격 부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를 수시로 겪어서였다. 그렇다, 나의 감각은 새벽의 신선함을 즐기기에는 곯았다 (감독의 가족들을 제외하곤, 상영관 안에서 내가 꽤 연배가 높은 축에 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도대체 지금의 젊은 애니메이션은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가?” “이 작품들은 어떠한 감수성을 지니는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이 정서는 뭐람?


# 익숙함

<커피와 담배>, <핑크 몽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 작년 가을의 영화제에서 “이 정서란 뭐람?”이라고 되뇌게 한 작품들이다. 물론 이 외에도 몇 작품이 더 있긴 하지만, 자연스레 이 세 작품들을 하나로 묶게 된다 (나머지 작품들도 조만간 다룰 기회가 있을 테다, 아마도...). 나의 관심을 건드린 이 작품들이 서울인디애니페스트 말고도 서울독립영화제를 비롯한 여타 영화제에서 제법 소개가 되는 걸 보면, 분명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반증일 테다. 다만 나의 반응 속도가 느릴 뿐이다 (‘못 따라간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더디게 반응한 까닭은 이 작품들이 마냥 ‘낯설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익숙함’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방심한 건 아닐까 싶다. 익숙함이란 다음과 같다. 


<커피와 담배>는 동명의 짐 자무쉬 영화를 당연히 연상시킨다. 제목 그대로, 짐 자무쉬가 그러했듯, 커피와 담배가 나오고, 짐 자무쉬가 그러했듯, 흑백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고, 짐 자무쉬가 그랬듯,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대신 평범한 (그닥 영양가 없는) 대화로 가득 차 있다. 그 대화란, 으레 청춘 영화가 그러하듯, 연인이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헤어진 커플이) 툭툭 던지는 시답잖은, 그래서 특별한 반응과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얘기들이다. 기법으로 보자면 <커피와 담배>는 전형적인 드로잉 애니메이션이기에, 눈이 빙빙 돌아가는 현란한 스펙터클 장면은 없을 테다. 그러니까 이 밋밋한 상황을 흑백 드로잉 애니메이션만의 담백함으로 얼마나 잘 살리느냐가 관건이겠다.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 2024 | 0:08:15 | dir. 김윤아 KIM Yun-a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 2024 | 0:08:15 | dir. 김윤아 KIM Yun-a

<핑크 몽키>는 레트로 카툰 애니메이션이다. 그것도 60~70년대 (꼼꼼히 따져보자면 50년대~80년대까지로도 확장할 수 있겠다) 미국의 TV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점철되어 있다. 이야기는 할리우드에서 한 번 대박을 친 창작자가 겪는 창작의 고통을 다룬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잔혹과 공포의 장르로 전환된다. 이에 따라 팝과 키치가 점차 고조된다. 대사는 영어이다. 왠지 예전에 AFKN에서 봤음 직한 (물론 그랬을 리는 없다) 작품 같다. 그래, 창작자의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테다. 따라서 <핑크 몽키>는 익숙한 레트로 감성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현재화하느냐에 성패가 달릴 것이다. 그것도 일단은 한국의 관객에게 말이다. 


핑크몽키 Pink Monkey | 2024 |  | 0:12:09 | dir. 우종빈 WOO Jongbin
핑크몽키 Pink Monkey | 2024 |  | 0:12:09 | dir. 우종빈 WOO Jongbin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는 제법 도발적인 제목으로 관심을 끈다. 왠지 라이트 노벨이나 웹소설에 어울릴 법한 제목 같기도 한데, 정작 이야기는 두 캐릭터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다룬다. 그것도 록 페스티벌이라는 공간에서. 화려한 색감, 그리고 스타일리시하게 단순화한 형태들. 말하자면 왠지 힙한 (적어도 힙해 보이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어느 순간 한 방 터뜨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가득하다. 제목 마냥 이 작품은 ‘콜라가 터지는’ 타이밍과 효과에 명운이 달려있다. 버블팝은 현재의 감각을 한껏 충족시키는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을까?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 This World is a Soda Can We Are Shaking It | 2024 | 0:05:56 | 문세라 MUN Sera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 This World is a Soda Can We Are Shaking It | 2024 | 0:05:56 | 문세라 MUN Sera

# 익숙함의 균열

세 작품이 지닌 익숙함에서 그 기원을 짐작해 본다. 거기엔 어디까지나 취향이 짙게 배어 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취향은 물론이고, 영화에 대한, TV에 대한, 음악에 대한 취향들. 이러한 취향은 장르, 스타일과도 연결된다. 인디, 레트로, 호러, 코미디, Mtv, 키치., 팝, 락... 그런 점에서 각 작품에는 만든 이의 관심사와 개성이 담겨 있으리라. 


그런데 잠깐. 취향을 반영하는 작품들임에도 어딘가 매끄럽지 않다. 빗대자면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에서 공연장 밖에서 무대를 즐기기 위해 이것저것들을 아슬아슬하게 탑처럼 쌓아 올린 모습, 또는 별안간 벌어진 초신성 폭발로부터 이런저런 스타일 (또는 차원)의 공간들이 짧은 몽타주로 펼쳐지는 설정 (다분히 Mtv 스타일이다)과도 같은 불균질함 말이다. <커피와 담배> (짐 자무쉬의 영화는 2003년 작이다)에는 흡연 가능한 카페, 스마트 폰 이전의 폴더폰, 1991년 작 <양들의 침묵>과 2015년 작 <맨 프롬 어스>의 포스터가 서로 섞여 있다. 마찬가지로 가장 레트로한 스타일의 <핑크 몽키>에서 오프닝에 나오는 TV 화면은 AI로 만들어진 페이크 다큐 영상이다. 


진작에 이 작품들은 매끄러움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세 작품은 모두 노이즈와 얼룩, 잡음과 거친 텍스쳐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투명하고 깔끔하고 흠결 없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애당초 없었다. 그게 이들의 취향이다. 처음에 어림짐작으로 ‘익숙한 취향’이라는 고정된 틀을 들이대었다가 이제 그 선입견을 거두고자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불균질 한 취향이란 무엇인가? 현재와 레트로의 혼종? 힙한 것과 올드한 것의 뒤엉킴?


# 관계와 장소

혼종, 뒤엉킴은 무질서-카오스를 떠올리게 한다. 무질서-카오스는 질서-코스모스와 대립한다. 우리는 이를 관계에 적용하여 불안정한/안정한 관계라고 말하고, 장소에도 대입하여 혼돈스러운/정돈된 장소라고 부르곤 한다. 그랬을 때 사건과 갈등이란 혼돈스러운/정리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불안정한/안정한 관계의 변화라고 치환할 수 있다. 


<커피와 담배>, <핑크 몽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는 모두 일대일 관계를 중심에 둔다. 헤어졌지만 잠시 잠깐 다시 만나는 커플, 성공한 작가와 다음 작품을 독촉하는 제작자, 관계에 집착하는 두리와 세상 쿨한 하나. 이들의 관계는 이미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따라서 (이야기 작법서의 정석 풀이에 따르면) 작품의 전개는 관계의 회복 (또는 관계의 재편)으로 향해야 한다(고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전개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무엇보다 나는) 이미 ‘올드’하다. 


세 작품은 관계의 회복이나 재편에 집중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 깨진 관계 그 자체, 그러한 관계가 야기하는 불편함이다. 그러하기에 각 작품이 설정하는 장소에 주목해야 한다.


<핑크 몽키>는 작가의 처소에 갇혀 있다. 물론 처소 바깥도 간간히 제시되지만, 바깥세상이란 “핑크 몽키”가 소비되는 곳, 그리고 그다음 작품을 소비하는 곳이다. 다시 말해 외부의 반응과 기대는 처소 내부의 작가를 얽매고 옥죄는 압력으로 작동한다. 요구가 거세어질수록 작가는 자신의 공간 안에 갇히고 만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악몽과 환각, 망상을 키워내고, 자신의 장소마저 불안과 공포로 채우게 된다. 결국에는 외부의 기척은 침입과 위협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여기서 감독은 애니메이션적인 상황에서 영화적 연출을 적절히 활용한다 (이를 테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연출들 말이다).


<커피와 담배> 또한 장소를 작은 카페로 한정한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말을 주절대는 상황은 짐 자무쉬가 마련한 세팅 값이다. 그랬을 때 감독은 영화적 연출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칫 당연한 연출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탄탄한 기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애니메이션만의 표현 (커피 잔 속에서 노를 젓고, 그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가고 또 들어가는 반복의 표현)을 추가한다. 그럼으로써 8분 남짓한 러닝 타임을 지루하거나 너무 단조롭게 처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프닝에 잠깐 카페 출입문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후로는 바깥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회상 장면은 예외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페 어딘가에서 이들의 상황을 엿듣는 셈이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는 조금 더 과감하고 변칙적이다. 시작은 공연을 준비 중인 스테이지에 비중을 두는 듯싶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애써 마련한 위태로운 자리가 그 반대편에 있다. 이러한 기본 세팅으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마치 공연 퍼포먼스와 객석의 호응이라는 구조로 진행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공연 장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나란히 앉은 하나와 두리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도를 바꾼다. “우리 계속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수줍게 건네지만 “난 아닌데”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 순간 두리의 세계는 무너진다. 기대와 소망은 부정당하고, 공들였던 관계는 허무하게 파괴되고 만다. 단단해 보였던 모든 것이 단박에 허물어져 먼지가 되어 버린다. 


이 충격을 감독은 대뜸 ‘초신성 폭발’로 처리한다. 빠르게 넘어가는 몽타주 장면들 속에서 공간과 차원은 다양한 가능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일관되게 두리는 하나를 찾는다. 우주를 날려버리는 초신성의 폭발력도 두리를 단념시킬 수는 없다. 그만큼 두리는 관계에 ‘찐’이었다. 작품은 몽타주의 카오스를 지나서 다시 새로운 질서를 갖춘다. 돌고 돌아 하나와 두리는 다시 나란히 마주한다. 두리는 내면에서 초신성 폭발의 충격을 겪었지만, 정작 폭발을 일으킨 ‘무심한’ 하나는 별다른 내상 없이, 일관된 태도로 (집착하지도, 뿌리치지도 않는다) 두리를 대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둘의 시선은 스테이지로 향하고, 시작 부분의 설정-객석과 무대-으로 복구하며 마친다. 이로써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는 초신성 폭발을 분기점으로 삼아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마주 보는 구조를 이룬다.


# 관계에 대한 거리 설정

제한된 장소 속에서 관계를 다루는 설정은 마치 관계를 시료로 삼아서 재물대 위에 올려놓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시도처럼 여겨진다. 그렇다,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관계를 중심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세심히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한다. <커피와 담배>라면 우리는 건너편 커플의 대화를 엿듣는 셈이고, <핑크 몽키>에서라면 우리는 감시 카메라와 CCTV 모니터를 통해 사건을 건너다보는 셈이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에서는 마치 망원경을 통해서 (페스티벌에서는 공연장용 쌍안경으로, 초신성 폭발의 우주에서는 천체 망원경으로) 멀리 떨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고 들여다보는 식이다. 


왜 이들의 관계는 개입이 아니라 거리 두기를 요구할까? 관계를 둘러싼 거리 설정에는 세 감독이 관계에 대해 갖는 태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테면 <핑크 몽키>에서 창작자가 제작자의 요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대응이란 ‘쥐어짜 내거나’ 아니면 ‘(회피할 수 있는 한)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다가 압박이 임계치를 넘는 순간 사달이 나버린다. 창작자로서 감독 자신 또한 이러한 압박감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고 있을 터이며, ‘창작의 스트레스’에 대해 어설픈 해결책 대신 ‘고조되는 압력’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관계를 대하는 감독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커피와 담배>는 다소 역설적이다.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 (준비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감독이 먼저 실토했다. 아마 자주 듣는 질문이었나 보다)은 정작 감독 자신은 커피도, 담배도, 심지어 연애도 ‘무경험자’라는 점이다. 대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 꼼꼼하게 관찰하고 조사하였다. 그러니까 이는 ‘직접 체험’이 아닌 ‘간접 체험’이며, 그 점에서 작품을 위한 간접 체험의 상황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엿듣다 흠칫 놀라 커피잔을 쓰러뜨리는 카페 직원은 ‘관찰자’로서의 감독이기도 하고, 영화 속 커플의 상황을 대하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와 대비되게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의 경우는 감독 자신의 상황이 관계에 투영되어 있다. 졸업 작품을 만들면서 감독은 ‘동기들과 곧 헤어질’ 예정 때문에 슬퍼했다 (이 또한 인터뷰에서 감독이 직접 말해준 사실이다). 감독이 겪는 ‘예정된 관계의 슬픈 결말’은 관계의 불안정함으로 모습을 바꾸어 작품 속에 등장한다. 어쩌면 여기에는 감독이 가지고 있었을 법한 또 다른 불안도 깔려 있으리라. 말하자면 ‘나는 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애정도를 지닐까?’라는 의심 같은 것 말이다.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는 법은 결국 안전거리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그 관계를 외부의 대상으로 (말 그대로 작품의 소재로) 다루는 정도이다.


# 감각과 관계

이처럼 세 작품을 ‘관계에 대한 거리 두기’로 집중하여 대하다가 불현듯, 우리 경험 세계에서 일어난 ‘관계의 재설정 시기’를 이들 감독들에게 포개어 보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겪어야 했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은 그 무렵부터 “새벽 비행” 섹션에서 상영되는 ‘학생 작품’에 어떠한 여파를 남겼을까? 세 감독들은 절묘하게도 1년 터울의 학번이다 (그리고 다 다른 학교 출신이다). 코로나 이전에 입학하여 코로나를 겪은 학번, 코로나 때 입학하여 비대면으로 시작한 학번, 코로나 종식 후 입학한 (그러나 입시의 시간을 ‘거리 두기’와 함께 한) 학번... 우리 모두가 그 시간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각자가 ‘관계’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는 여전히 명확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이 작품들은 그러니까 감독들과 그 또래의 경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을 되비쳐볼 기회이다. 


비대면은 누군가에게는 편하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불편하다. 흥미롭게도 세 작품들의 제작 방식과 스태프 구성은 제각기 다르다. 소수의 친밀한 대면 방식부터 비대면에 기반한 다수의 참여까지. 저마다의 장단점과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결국 작업은 굴러가게 마련이다. 다만 비대면을 거쳐서 대면을 하게 될 때, 그동안 포착되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지각이 깨어난다. 우리는 돌연 대면의 현장에서 ‘후각’에 예민해지고, 공공장소에서 ‘청각’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헤드폰을 통해) 선택적으로 차폐하게 되었고, 상대의 체온을 의식하게 되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감각에 대한 반응은 고스란히 이 세 작품에도 스며들어 있다. 커피의 향, 담배의 냄새, ‘커담’의 구취, 민트의 향, 초코의 맛, 그리고 ‘민초’를 둘러싼 호불호, 톡 쏘는 탄산의 자극... 앞서 언급했던 노이즈와 얼룩, 잡음과 질감들도 이러한 감각들과 궤를 함께 한다. 관계에서 거리를 의식할수록, 관계가 헛돌수록, 관계 속 빈틈으로 이전까지 포착되지 않았던 감각들이 확장하고 채워 나간다.


# 지연과 유보

이처럼 감각을 새롭게 자극하면서 관계의 거리 두기로 마무리하였다면 이 작품들은 ‘제법 깔끔하게 마무리한’ 졸업 작품 정도로 남았을 테다. 하지만 기어이 세 작품들을 붙들게 된 지점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밀당’의 타이밍에 있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는 작품 내내 록 페스티벌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비로소 음악이 시작한다. 온갖 ‘개취’가 고스란히 묻어난 가사는 그제야 감독 자신의 취향을 드러낸다. 소심했던 두리나 무심했던 하나와는 다른 모습이 그 안에 있다. 


<핑크 몽키>의 엔딩에서는 ‘기어이’ 사달이 벌어지고야 만다.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포인트는 ‘타이밍’이다. “셋까지 세겠어”라고 하면서 카운트 다운을 할 때, “하나”에서 덮칠 줄이야. 그리고는 닫힌 문 너머에서 이후의 ‘끔찍한’ 일이 진행된다. 우리는 그 참상을 볼 수 없다, 다만 소리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청각의 중요성이 부풀어 오른다). 엔딩 크레디트까지 이어지는 이 끔찍한 사운드 쇼는 2분을 넘긴다.


<커피와 담배>에서도 마찬가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민준이 먼저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영아가 커피를 마저 비우고 통화를 하면서 나가고, 그렇게 빈 테이블을 종업원이 정리하려던 차에 다시 민준이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엔딩이 1분 남짓 진행된다. 우리는 마치 카페에서 저쪽 편 테이블을 보듯,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드나드는 상황을 보듯 그 장면을 지켜본다. 정작 당사자인 두 남녀만 자신들의 부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뿐이다. 이에 더하여 엔딩 크레디트 내내 민준은 영아의 뒤를 터벅터벅, 졸래졸래 따라간다.


결국 세 작품들에서 관계의 밀당은 타이밍의 밀당으로 연결되면서 작품 속 두 인물 간의 관계들을 관객에게까지 확장시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의도는? 단지 우리 또한 그 애매한 거리 두기의 목격자로 확실히 남겨두려고? 그보다는 아무래도 우리에게도 뭔가 얘기를 듣고 싶은 듯하다. “이런 경우를 겪어 보지 않았나요?” “벗어나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하나요?” “너무나 소중하기에 그 관계가 두려운 적은 없나요?”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 있는 관계는요?”


영아의 뒤를 따라가는 민준, 민준이 따라오는 걸 애써 모른 척 앞서 가는 영아를 보면서 누가 누구에게 더 미련 또는 애착이 남아있는지 추측해 본다. 어찌 보면 민준이, 또 달리 보면 영아가... 


그러다 퍼뜩 드는 생각,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실은 세 작품 모두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본다.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까닭은 관계에 부담을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리 두기 때문에 관계 맺는 법이 익숙지 않아서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로 인해 자신의 영역이 침해받는 걸 꺼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적절한 거리 두기가 서로에게 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실은 “정작 관계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이 작품들은 (적어도 나의) 정곡을 찔렀다. 그 점에서 올드한 나는 그제야 머리로나마 진실을 알았고, 젊은 그들은 이미 그 진실에 감각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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