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O: AN ERICK OH RETROSPECTIVE
- 2시간 전
- 14분 분량

애니메이션의 우주 속을 거닐다
# 0. 입구 앞에서
전시장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동안 머릿속을 채웠던 물음표들을 하나씩 헤아려본다. “에릭 오는 자신의 작품들을 이곳에서 어떻게 새롭게 배치할까?” “그간의 성과들을 반추하면서 그는 어떤 새로운 비전을 준비할까?” “그의 작품들이 스크린을 벗어났을 때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까?” “나는 관객에서 관람객으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에릭 오가 굳이 이곳에서 전시를 꾸린 까닭은 무엇일까?” 등등...
물음표들을 정리하려 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두서없이 증식한다. “내가 너무 늦게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닐까?”라는 개인적인 감정도 끼어든다. 하지만 궁극적인 물음은 하나로 수렴한다. “애니메이션은 이곳에서 또 다른 가능태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라 일컫는 것의 실상은 특정한 존재 양태에 해당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움직임을 부여한다’는 의미가 애니메이션이라면, 우리가 움직이는 영상으로 접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부분 집합일 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 장치에 기반한 애니메이션, 즉 “animated film”에 한정하여 애니메이션을 접해 왔다. 애니메이션은 영화 이전에도 있었고, 영화의 사멸 이후에도 존재할 테다. 지금 이 글에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에릭 오의 전시는 애니메이션이 ‘시네마’라는 기존의 육신을 걷어내고, 무언가 새로운 몸으로 육화 하여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아마도 내가 전시장 입구에서 굳이 숨을 고르는 까닭은 마침내 그것을 접하게 될 설렘 때문일 것이다.
# 01. 섬 | Island
처음으로 접할 작품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그건 전체 작품 (그러니까 전시라는 작품)의 오프닝에 해당할 테다. 첫인상 말이다. 선빵을 날리듯 압도적 위용을 보여줄까, 단정하고 정제된 인사로 맞이할까, 입구 밖과 안을 구분하는 단절을 각인시킬까...
첫 작품 <Island>에서 나는 순간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자객의 습격과는 다르다. 철저히 계산된, 그러나 결코 힘을 주지 않은 상대의 초식을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타격감 같은 맛이랄까.
에릭 오는 전시장의 귀퉁이를 노렸다. 두 벽면이 맞닿는 곳에서 이미지가 전개된다. 양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바닥에서 만난다. 세 개의 2차원 면이 만나서 하나의 3차원 공간을 이룬다. 이 세팅만으로 그는 어째서 애니메이션을 상영관에서 꺼내어 나오고자 했는지, 그러함으로써 전시장이 애니메이션을 위해 어떠한 공간일 수 있는지를 단박에 확인시킨다. “각설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애니메이션은 2차원 스크린을 벗어났다!”라는 선언을 경쾌한 휘파람처럼 들려주는 듯싶다.
<Island>는 두 폭의 동양화일 수 있겠다. 암반 절벽,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마냥 내리치는 물줄기, 그 아래 잔잔히 고여 이룬 샘. 세상은 자연의 형상을 하고, 그곳에 인간이 하나 둘 모여드는 풍경. 애니메이션은 동양화의 여백에 시간과 움직임을 채워 넣는다. 그리하여 자연이 품은 태곳적 고즈넉함에서 시작하여 인간 무리의 왁자지껄함을 펼쳐냈다가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오는 반복을 가능케 한다. 자연과 인간이 얽히면서 이야기와 의미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껏 관조적 운치를 풍길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흘러내려 바닥에 고이는 물, 그리고 귀퉁이의 활용이 내게 또 다른 연상작용을 이끌어낸다. 하나는 잔알베르토 벤다치Gianalberto Bendazzi의 책 『Cartoons: One Hundred Years of Cinema Animation』(1995) 커버에 실린 믹 해거티Mick Haggerty의 1972년 작 “Mickey-Mondrian”. 전시장 벽에 걸린 몬드리안 스타일의 그림에서 흘러내린 물감이 바닥에 고여 미키 마우스 얼굴을 만드는 이미지말이다. 이는 회화와 애니메이션의 연관성, 나아가 애니메이션의 예술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쨌든 내게는 캔버스 (그리고 전시장의 한쪽 벽면)라는 평면성으로부터 탈출하여 바닥이라는 새로운 영역 (그럼에도 여전히 2차원에 머물기는 하지만)으로 스며드는 물감의 경로가 인상적이었다. 때문에 <Island>을 접한 나로서는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반갑게 바라볼 수밖에. 이를 생명수라 한다면, 단지 인간을 비롯한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물 자체가 생명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Island>로부터 떠올린 또 다른 하나는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Complex Corner Relief” (1915)라는 부조 작품이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부조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구성주의자로서 타틀린은 자신의 작업을 갤러리 공간의 코너에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화이트 큐브라는 육면체 전시 공간에 새로운 영역이 발견 (또는 발명)된 셈이다. <Island>도 그러하다. 스크린, 캔버스, 바닥이 서로 모서리를 맞대고 연결된 이상, 이들은 이제 2차원 평면이 아니다. 비록 홀로그램으로 공간이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두 벽과 하나의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결코 ‘비어있다’라고 볼 수 없다.
그러하기에 오프닝으로서의 <Island>는 위트가 넘치면서도 다정한 선전포고와 같다. 전시된 전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디즈니-픽사 스타일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정하고, 자칫 심각하거나 심오한 문장으로 쓰일 실험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위트가 있으며, 그럼에도 직전까지 우리가 당연시하던 평면성을 단박에 흔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다.
# 02. 오리진 | Origin
<Island>의 신선함을 뒤로하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웅대함이 우리를 맞이한다. ‘기원’이라는 말마따나 <Origin>은 에릭 오가 꾸리는 유니버스의 탄생을 형상화한다. 세상의 모든 신화는 우주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직전에 봤던 <Island>의 자연 속 인간들 또한 자신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나름의 창조 신화를 이야기로 꾸렸을 테고, 그 이야기들이 바닥의 샘 속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나는 <Origin>을 이미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스크린에서 마주한 <Origin>은 추상 애니메이션으로써 세상의 탄생과 형성, 그 과정 속에서의 변화와 발전, 나아가 쇠락과 소멸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리고 장엄한 분위기로 펼쳐내었다.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형상, 수시로 전환되는 텍스쳐와 물성을 따르다 보면 잠시 아뜩한 현기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되짚다 보니, 관객으로서 내가 스크린 위의 영상과 맺는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묻게 된다.
나는 내게 할당된 좌석에 묶인 채로, 우주의 탄생에서 소멸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5분 남짓의 시간 (당시 영화제 상영 기록에는 러닝 타임이 6분 8초로 나와 있다)으로 압축해서 바라본다. 이러한 상황은 돌연 SF적 상상력을 급작스레 증폭시키기 마련이다. 즉 우주선 조종석에서 광속에 근접한 속도감으로, 웜홀과 같은 경로를 통해 차원을 넘나들면서 우주의 모습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펼쳐지는 이른바 ‘스타게이트’ 장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상황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주의 기원을 추구했던 실험 애니메이션의 사례들도 기억 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이를 테면 휘트니 형제John and James Whitney의 <Lapis> (1966)나 <Yantra> (1957) 같은 신화적 추상 애니메이션*, 그리고 조던 벨슨Jordan Belson의 <Allures> (1961) 같은 우주적 추상 애니메이션** 등이 불쑥 떠오른다.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접한 <Origin>은 한편으로는 기원 (그것이 우주의 기원이든, 신화의 기원이든)을 다룬 이제까지의 추상 애니메이션과 한 갈래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SF 장르의 스타게이트 장면과 같은 스펙터클과 연결되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나의 맞은편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스크린 평면에 투사한다.
그런데 전시 공간에서 <Origin>은 위상을 새롭게 설정한다. 기원의 영상은 천장 위에서 펼쳐진다. 나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야 한다. ‘올려다보는 것’, 그렇다, 본시 인류는 우주를 올려다봤다. 과학자들은 종종 “인류가 이족 보행을 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우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우주와 존재에 대해 사유(또는 상상)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조던 벨슨이 우주에 관한 추상 애니메이션들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이전에, 천체투영관의 둥근 천장을 활용하여 추상 애니메이션과 사운드를 결합한 “볼텍스 콘서트 Vortex Concerts”***를 꾸린 것도 그저 객기에 따른 시도만은 아니었다. 우주를 제대로 보여주려면, 그리고 제대로 보려면 우주는 우리 정면이 아니라 우리 위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본래적 위상 설정이 일반적인 영화관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시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바닥에는 우물과 같은 둥그런 둘레가 만들어져 있고, 천장의 이미지가 그 속에서 되비친다. 반쯤 무너진 둘레는 폐허처럼 수풀에 덮이기도 한다. 이러한 세팅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 들어가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게끔’ 유도한다. 이를 테면 이곳은 신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우주와 세상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신성한 의식을 치렀을 테다. 그리 생각하면 영화관에는 결여된 경건함이 순식간에 전시 공간을 채운다. 그렇게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게 되는 <Origin>은 기원을 향한 의례처럼 펼쳐진다.
종종 신전은 자궁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자궁이 신전으로, 그리고 신전이 자궁으로). 그래서였을까? 문득 둥그런 둘레 속에 들어가 웅크리거나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싶어졌다. 차마 감행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Origin>의 완성은 그 광경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Origin>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스크린 위가 아니라 천장 (그리고 그것이 되비친 바닥)이라는 사실이다.
* <Yantra>는 1957년에 제임스 휘트니가 단독으로 제작한 작품이고, 존 휘트니는 이듬해인 1958년에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 타이틀 시퀀스에 등장하는 나선형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내가 <Origin>에서 잠시 현기증을 느낀 것도 예전에 접한 휘트니 형제의 작품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조던 벨슨의 작업은 이후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나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 등에 등장하는 스타게이트 장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조던 벨슨은 사운드 아티스트 헨리 제이콥스Henry Jacobs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모리슨 플라네타리움Morrison Planetarium에서 영상과 광학, 사운드를 결합한 다중매체공연인 볼텍스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 03. (스피릿 | Spirits)
<Origin>으로부터 경외감을 담뿍 받아 안은 나는 성스런 기원의 공간에서 빠져나온다. 그다음 전시로 향하는 동선에서 전시 리플릿에는 표시되지 않은 <Spirits>를 만난다. 보너스 작품인가, 내심 반갑다. 에릭 오의 친숙한 캐릭터들이 한쪽 벽면에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프로토타입의 미니멀한 형태로만 여겼던 이 녀석들은 어느새 에릭 오의 분신처럼 ‘온전한’ 존재가 되어 있다 (에릭 오는 ‘오스Oss’라고 이름 붙인다. 그의 이름을 딴, 그리고 전시의 중심인 ‘O’를 동시에 상기시키는 명법이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양, 아니 애초부터 그곳에서 있어왔다는 양 우리를 맞이한다.
한 장소에 늘 있어온 존재, 낮에는 모습을 감췄다가 밤이 되어서야 깨어나는 존재. 이러한 설정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이웃의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마쿠로쿠로스케’라든가, <모노노케 히메>의 ‘코다마’...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정령’이라 부르곤 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귀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할 테다.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다가 불현듯 새로운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게 된다. 장소의 정령이라면, 이곳 또한 ‘장소’여야 한다. 장소는 구체적인 사연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전시장이라는 장소에 있기도 하지만, 이곳은 또한 ‘제주도’이다.
그로부터 내가 알고 있던 제주도의 ‘장소성’이 깨어난다. 한라산 ‘산천단’처럼 공식적인 제단 말고도, ‘와홀 본향당’처럼 곳곳에 산재한 신당을 품은 곳이 제주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 머무는 정령들로부터 나는 작가 한강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게 된 계기, 그녀가 꾼 꿈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 또한 꾸게 된 꿈)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눈 속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나무, 그리고 그것들이 바다에 잠기는 모습. 여전히 기록하기를 주저하게 되는 비극 속의 희생자들, 한때 애도마저 허용되지 않았던 영혼들.
에릭 오의 의도가 어떠했든, 전시장의 그곳에서 나는 장소성을 제주의 비극과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곳에 머무는 정령을 애도받지 못한 영혼과 겹쳐 봐야만 했다. 그래서 ‘스피리츠spritis’라 이름 붙인 것일까? 그래서 전시 리플릿에 공식적으로 표기하는 대신, 비워둔 것이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잠시나마 정령들에게, 스피리츠들에게, 영혼들에게 평안을 기원할 뿐이다.
# 04-1. 저울 | Libra
이내 전시장 통로는 선택의 갈림길로 이끈다. 왼쪽의 작은 구역으로, 아니면 오른쪽의 넓은 구역으로. 하지만 T자의 구획에서 우선 마주하는 것은 커다란 유리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Libra>이다. 선명하게 투사된 이미지가 아니어서 전시 리플릿을 다시 확인해 본다. 밖으로 나가서 봐야 하는 걸까? 아직 날이 밝아서? 아니면 날이 흐려서? 원인이 무엇이든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왼편 작은 공간으로 들어서기로 한다. 잠시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좀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 05. 만찬 | Supper
고백건대, <Supper>를 위한 작은 구역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사연인즉 이렇다. 작년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Supper>를 본 직후, 에릭 오 감독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응당 이렇게 진행되었어야 했다. “전시장에서의 <Supper>와 상영관에서의 <Supper>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군요.” 허나, 실제 나의 언급은 “신작 잘 봤습니다.”였다. 감독은 “전시회에서는 이 작품이 <Opera>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라며 답하였다. 아뿔싸! 당시 나는 아직 전시회를 찾지 않았고, 이런 나의 결례 앞에서 감독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대신 담담히 작품과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의 도량에 지금도 감사할 뿐이다!).
영화제에서의 공개 순서뿐만 아니라 실제 제작 일정에서도 <Supper>는 <Opera> 이후에 이루어졌다. 반면, 전시의 동선에서는 <Supper>가 <Opera> 보다 먼저 배치되었다. 이는 일종의 배려로 볼 수 있겠다. <Supper>의 구조와 전개를 어느 정도 익혀 놓아야 <Opera>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다는, 일종의 워밍업 시간 같은 것 말이다. 분명 두 작품은 구조적으로 닮아 있으면서도, 스케일과 복잡도 면에서는 <Supper>가 한결 완화되어 있다. 그렇다고 <Supper>를 <Opera>의 하위 보급형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Supper> 또한 나름의 세계와 질서가 있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Supper>는 개인을 이루는 사회, 또는 소우주라 할 수 있을 테다.
따라서 <Supper>를 꼼꼼히 살피면서 전체의 체계와 흐름을 파악한다면, 우리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 그중에서도 미시적 권력 작동 체계를 간파할 수 있을 테다. 그 복잡하고도 정밀한 미세 메커니즘을 ‘만찬’이라는 식탁 위에 펼쳐 보인다. 그리고 상영관에서와는 달리, 전시 공간 한가운데에 관람객을 위한 테이블 (같은 상자)를 설치하고 그 위에 또 다른 영상을 투사한다. <Supper>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 그것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눈에 들이고 나면, 어느새 나 역시 그 만찬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정도로 몰입하게 되면, <Supper>를 위한 작은 공간이 마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처럼 여겨진다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서도).
# 04-2 저울 | Libra
<Supper>의 성찬에 만족해하며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통유리 너머 <Libra>를 바라본다. 여전히 선명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차분히 살펴본다. 저울 양편에 나뉜 두 무리가 줄다리기를 한다. 제 편으로 당긴 쪽으로 저울이 기울다가 이내 반대쪽으로 기운다. 마치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처럼, 저울의 이쪽과 저쪽이 모두 사력을 다한다. 줄다리기는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로, 계속될 테다.
저울의 대칭을 보다 보니 이 대칭이 <Supper>와 <Opera>의 관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다. 스케일과 복합도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언정, 두 작품은 닮아 있다. 저울 위에서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처럼, <Supper>와 <Opera> 속 존재들도 끝없는 순환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 정도의 깨달음을 안고 이번에는 오른편의 더 넓은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제야 유리창 너머의 영상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것 같아 뵌다.
# 06. 오페라 | Opera
이윽고 맞이한 <Opera>는 실로 대작이다.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접했을 때, 적잖이 당황했고, 그만큼 혼란에 빠졌고, 종국에는 그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압도감은 <Origin>과 같은 추상 애니메이션이 주는 것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Opera>가 하나의 사건을 쫓아 서사를 완성하는 감상법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성격이 조금 다를지라도 <Opera>는 일종의 지옥도를 관객 앞에서 펼쳐놓는 것과 같았다. 아니면 조직화된 개미 군집의 관찰기라고나 해야 할까? 또는 정교한 시계 장치 내부의 전개도?
무엇이든 상관없다. <Opera>는 처음에는 혼돈처럼 다가왔다가, 별안간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사불란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질서를 드러낸다. 우리의 시선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면서 <Opera>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구하고자 한다. 체계, 조직, 계급, 공장 (예컨대 <찰리와 초콜릿 공장>), 기업, 도시 (이를 테면 <메트로폴리스> (1927) 같은), 사회, 국가, 세계, 문명, 나아가 감히 우주까지... 무엇을 선택하든, 이 복잡한 구조와 체계는 각각의 부분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그러한 연결은 수평적이거나 분산적이지 않고, 엄격히 중앙 집중적인 위계질서를 따른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구조와 의미를 어느 정도 가늠하다 보면, 그제야 <Opera>는 하나의 롱 테이크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체계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저마다의 움직임과 동선을 동시에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어떠한 불협화음이나 오차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정밀하게 계산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여느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라면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분량의 레이어 층위들이 쌓여야 한다.
이러한 구성의 작품을 상영관에서 단 한번 관람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전시는 <Opera>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 맞닿은 벽면 한쪽에는 전체를 보여주는 영상을, 다른 한쪽에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서 맨 아래에서 맨 위까지 훑어 오르고 다시 맨 아래까지 훑어 내려오는 영상을 배치하였다. 이로써 전체와 부분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는 관(람)객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영화적 실험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어떻게 시선을 교차할 것인가? 카메라 움직임을 따라 부분에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 전체로 눈을 돌리고, 어느 정도 전체를 가늠했다가 다시 부분으로 옮겨올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종의 ‘편집’ 권한을 행사한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 자신의 비디오 다이어리를 띄우면서 관람객에게 시선/편집의 자유를 부여하고자 한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의 다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 (2007년작 <365일 프로젝트 365 Day Project>가 대표적이다)이나, ‘텍스트, 배우, 카메라, 프레임’을 영화의 ‘4대 폭군’이라 부르며, 전통적인 영화의 사망 선고와 함께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는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의 인터랙티브-멀티 미디어 프로젝트 <털스 루퍼의 가방 The Tulse Luper Suitcases> (2003)가 바로 감독의 독점 소유물이었던 ‘편집권(력)’을 관(람)객에게 이양하고자 한 시도로 꼽을 수 있다. 전시장에 배치된 두 버전의 <Opera>를 마주하며, 우리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시선을 전체와 부분을 오가며 저마다의 버전으로 <Opera>를 편집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롱테이크로 이뤄진 작품은 숏으로 분절된다.
시선-편집의 권한을 회복한다는 것은 본래 <Opera>가 다루려 한 주제와도 맞닿는다. “어째서 ‘오페라’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에릭 오는 “오페라opera의 어원인 노동labor이다.”라 답한다. 세상은 수많은 노동의 결합을 통해 돌아가는 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Opera>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음악적 퍼포먼스 갈래인 ‘오페라’와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다. 미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세상의 작동과 노동, 그리고 ‘오페라 무대’를 연결 지은 바 있다.* 아도르노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선사하는 스펙터클에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동이 필요하지만, 정작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그들의 존재가 철저히 감춰져야 스펙터클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은폐되는 노동 중에는 무대 아래 피트로 배치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동안 화려한 ‘오페라’ 공연을 위해 지워져야 했던 노동처럼, <Opera>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때로는 가려지고 지워지고 부정당하기까지 한) 수많은 노동 과정, 생산 과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관(람)객 또한 나란히 배치된 두 버전의 영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그동안 ‘관계자 외 접근 금지’ 구역에 감춰졌던 편집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되돌려 받은 ‘시선’의 권한을 새삼 확인하며 <Opera>가 영사되는 공간을 다시 둘러보다 보니, 잠시 잊고 있던 맞은편 <Supper>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Supper>는 <Opera>와 마주 보며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고요.” 지난 영화제에서 뜬금없는 ‘신작’ 언급으로 당황케 했을 내게 에릭 오가 들려준 언급이 떠올랐다. 작품과 전시 장소의 스케일에서는 차이가 났지만, 두 작품은 공간적으로 분명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Supper>의 구역에서 <Opera>의 구역으로 들어서는 지점에 문틀 하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사찰 입구에서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나누는 ‘일주문’처럼, 전시장 내부에 세워진 문은 <Supper>와 <Opera>를 구분한다. 문이 설정한 프레임을 통해 저 편의 <Supper>를 바라보면, <Supper>는 문이라는 프레임으로 재획정된다. <Supper>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본래의 스케일 대신 <Opera>와 마주하는 상대값으로 재조정된다. 흥미롭게도 이 순간, 전시 공간은 주제를 이루는 ‘O’라는 동그라미, <Supper>와 <Opera>의 구조인 세모, 그리고 문-프레임을 형성하는 네모가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 아도르노와 지워진 노동에 대해서는 여은아의 <유령이 떠난 자리>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 04-3 저울 | Libra
시선은 하나의 영상에서 다른 영상으로 이동하면서 편집의 권능을 부여받는다. 공간은 한 작품과 그다음 작품을 배치하면서 시선과 동선을 유도하고, 줄곧 재조정한다.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전시장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다시 <Libra>를 떠올린다.
저울은 <Supper>와 <Opera>의 배치를 닮아 있다. 다만 이 둘이 전적으로 대칭과 균형을 이루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배운 균형의 원리를 기억해 내고자 한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균형을 이루려면 무게 중심을 조정하면 된다. <Supper>와 <Opera> 사이에 설치된 중문이 그 역할을 한다. <Supper>에서 <Opera>를 바라볼 때, 그리고 <Opera>에서 <Supper>를 바라볼 때, 문-프레임은 그것이 허용하는 만큼만을 보여준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말이다.
전시장 공간을 곱씹을수록 <Libra>의 배치가 절묘하다. 그것은 통창 너머에 유령처럼 떠있다. <Origin>으로부터 <Spritis>을 거쳐 <Supper>와 <Origin>의 갈림길에 <Libra>가 기다린다. 희미할지 언정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시장의 통로는 우리를 <Libra>로 인도한다. 이것은 시퀀스! 그러니까 건축물로서 전시장은 그 구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공간을 거닐면서 시선을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옮긴다. 시퀀스는 건축과 영화가 공유하는 개념이다. <Opera>가 우리의 시선을 통해 숏과 숏 간shot by shot의 편집을 환기시켰다면, <Libra>가 놓인 T자형 교차의 동선 구조는 우리에게 시퀀스의 연결을 몸소 체험케 한다. 역시나 “전시장 건물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지점”이라고 에릭 오는 인터뷰를 통해 확인시켜 준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Libra>가 제자리-자신이 놓일 바로 그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거니는 곳은 그저 전시장 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영화의 몸뚱이 내부라는 점 또한 깨닫는다. 애니메이션이 스크린 평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애니메이션의 몸통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 07. 오르빗 | Orbit
애니메이션은 건축물-신체-우주가 되었다. 그 속에서 구조와 시선, 그리고 동선이 서로 맞물린다. <Opera>의 강력한 중력장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또 다른 중력장 속으로 편입된다. <Orbit>은 이 전시가 어째서 애니메이션을 공간 속에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 스스로 공간으로 육화 되었는지를 재차 입증한다.
다섯 개의 프레임이 천장에 고정된 케이블 덕에 전시공간 위에 나란히 떠있다. 각각의 프레임은 투명한 스크린이 되어 저마다의 영상을 펼친다. 이곳까지 이르는 전시 동선을 따르면서 우리는 이러한 세팅의 구조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배우고 익혔다. 나 자신이 카메라라고 여기고 이리저리 이동할 것, 시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면서 나름대로의 숏을 구성해 볼 것, 움직임과 시선을 조합하여 시퀀스를 만들어 볼 것…
다섯 개의 스크린은 다섯 개의 순환적 영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의 맨 앞이나 맨 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는 스스로 정할 것)에 서서 스크린 한복판에 시선을 맞추어 정면을 바라보면 다섯 개의 스크린은 하나로 합쳐진다. 이 구조도 왠지 낯익다. 바로 디즈니 스튜디오가 1933년에 개발한 멀티플레인 카메라multiplane camera. 높이가 대략 3.5m에 달하는 이 대형 구조물은 7개의 레이어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함으로써, 셀 애니메이션의 깊이감을 실제 물리적 심도 속에서 구현시켰다. <Orbit>은 디즈니의 멀티플레인 카메라를 수평으로 재배치한 시도이다. 그리함으로써 굳이 사다리를 타고 맨 꼭대기에 올라 카메라처럼 내려다보지 않더라도 여러 겹의 레이어들이 서로 어떻게 중첩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의 멀티플레인 카메라는 2차원 속에서 더욱 사실적인 깊이감을 구현하고자 하였기에, 이를 위해서는 카메라의 위치가 고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 <Orbit>의 참맛은 정확한 위치 선정에 있지 않다. 5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쳐서 바라보는 양 끝단의 위치는 그저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대신 우리는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를 자유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2차원적 환영에서는 불가능한 위상이다.
그렇게 레이어의 층위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틈새)를 살피다 보면 뜻하지 않은 발견을 할 수 있다. 보물은 바닥에 있다. 각 레이어에 투사하는 영사기의 빛이 스크린 표면에서 굴절되면서 바닥에도 영상을 드리운다. 그리고 이 영상 위로 앞쪽 레이어의 영상이 포개어지고, 반대편으로는 뒤쪽 레이어의 영상이 포개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때 겹쳐지는 두 레이어의 비율이 균등하게 5:5가 아니라는 점이 주목할 포인트다. 즉 저울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상황을 우리는 <Orbit>의 바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순간에 전율을 느끼는 까닭은 전시 전체를 지배하는 ‘조화로움’에서 일탈했기 때문이다. ‘O’라는 표상으로 대표되듯, 순환은 일종의 영구운동과도 같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흘러야 한다. 모든 것이 그러한 질서를 추구하다 보면 자칫 강박과 질식 상태에 빠질 수 있다. <Orbit>의 바닥에서 찾아낸 불균등함, 그리고 입사각과 반사각 차이로 인한 뒤틀린 왜곡상anamorphic. 덕분에 전시 공간 전체에 숨구멍이 열린 듯싶다.
그래서일까, 시선과 동선이 한층 자유로워진다. 다섯 개의 레이어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을 이렇게도 바라보고 저렇게도 섞어 본다. 기하학적, 유기체적, 기계적, 우주적 이미지들은 개별화된 세상이기도 하고, 조합을 통해 상관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는 단지 <Orbit>에서만 허용된 것이 아니다. 전시장 안의 모든 영상들은 5분에 맞춰 반복, 순환한다.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도 이와 맞춰져 있다. 따라서 이곳의 영상들은 여덟 편의 5분짜리 작품들로 병렬되어 40분의 러닝 타임이 될 수도 있고, 여덟 개의 영사면 위에서 동시에 재생되는 5분 분량의 멀티스크린 작품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이 포개어져서 5분 동안 상영되는 멀티 레이어 애니메이션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는 하나의 유니버스 안에서 펼쳐지는 여덟 개의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동시간 대에 전개되는 여덟 개의 다중 우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궤도orbit을 통해 그 우주를 가로지른다.
# 08. 코로나 | Corona
전시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의 설치물과 마주한다. 평면을 벗어난 원은 마침내 구sphere가 된다. 이미지의 환영을 걷어낸 자리에 단단한 실체가 들어선다. 구는 바닥에 놓이는 대신, 와이어를 통해 둥실 떠있다. 구의 표면 위로 돌기처럼 ‘오스’들이 한가득 서 있다. 오스로 채워진 행성,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플라스마 상태의 코로나로 감싸인 태양, 그리고 그 형태를 빗대 이름 붙여진 바이러스...
전시를 통해 배운 것을 한번 더 활용하여 <Corona>를 이렇게 바라보고 저렇게 둘러본다. 형태가 바뀌고 정서가 바뀐다. 유머와 풍자, 비판과 성찰, 관조와 초월, 희망과 낙관, 사랑스러움과 으스스함, 따뜻함과 서늘함,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이 모든 것의 대립과 융해, 충돌과 승화, 그리고 무한히 이어질 순환의 고리... 전시의 끝지점에서 다시 찾게 떠올리게 되는 시작점.
# 09. 출구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제주도에 갈 일이 있으면 그때 겸사겸사 들르겠습니다.”라는 말로 방문을 미뤘었다. 그사이 겸사겸사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왠지 전시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리뷰 작성을 이유 삼아 (나름) 장도에 올랐다. 오고 나서야 알았다, 제주도에 올 일이란 다름 아닌 이 전시 자체여야 했다는 사실을, 이것이 메인이벤트여야 하고 나머지가 겸사겸사여야 했다는 점을.
전시가 애니메이션을 자유롭게 펼쳐 놓은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신체-구조로 현현하여 나를 삼켰다. 필름-영화장치-시네마에서 벗어난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태를 확인한다. 여덟 편의 작품을 감상했다는 말보다는, 여덟 개의 화두를 만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해 여덟 번의 묵상을 했다는 말이 정확할 테다. (얻을 것 별로 없는) 애니메이션 관련 책들과 비견할 수 없이, 훨씬 많은 것을 겪고 확인했다.
발길을 돌리려 할 즈음에 아쉬움이 한껏 밀어닥친다. “진작 와야 했을 걸” 정도가 아니다. 적어도 여러 날 그 안에서 머물렀어야 했다. 해가 뜨는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 공간이 어떻게 빛을 품고 뱉을지,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이 어떠한 얼굴로 변할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맑은 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궂은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 더운 날엔, 추운 날엔, 바람이 몹시 심한 날엔, 수시로 변덕스러운 날엔, 사람이 많은 날엔, 사람이 적은 날엔... 빛에 따라, 시간에 따라 <Libra>는 얼마나 선명해지고 옅어질지, <Corona>의 오스들은 어떤 그림자를 구체 표면에 남길지 궁금해졌다.
나호원 Joint Editor
이미지 제공: BEASTS AND NATIVES ALI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