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We Will Meet Again
- 12시간 전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시간 전
우리 꼭 다시 만나 We Will Meet Again | 2025 | 0:14:1 | dir. 박유선 PARK Yuseon

Atomic Love: 원자 간 상호작용이 사랑의 결속력 생성, 변화, 회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거시적(4500000000 years)이면서도 미시적(0.0000000001m)인 시뮬레이션
# 원자들, 사랑을 맹세하다
“Atomic Love”, 어디선가 들어본 표현인 것 같아서 검색해 본다. AI가 나름의 답을 뱉어낸다. (구글 제미나이 무료 모델)
원자처럼 쪼갤 수 없는 결속... (중략) ‘어떤 힘으로도 나눌 수 없는, 더없이 강하고 완전한 사랑’
핵폭발처럼 강렬한 감정... (중략) ‘모든 것을 불태우는 듯한 격렬하고 압도적인 사랑’
AI는 “문맥에 따라 위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라는 친절함을 추가한다. <우리 꼭 다시 만나>를 학습 데이터에 넣었다면, AI는 이 작품은 자신이 제시한 두 가지 뜻 모두를 아우른다며 ‘문맥’을 새롭게 반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이 AI의 풀이를 알고 있었는지 그제야 묻고 싶었지만, 확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모름지기 창작자는 직관을 통해 진리에 닿곤 하는 법이니까.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원자들의 사랑, 말 그대로 ‘atomic love’를 보여준다. ‘어떤 힘으로도 나눌 수 없는 강하고 완전한 사랑’이자 ‘격렬하고도 압도적인 사랑’ 말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처음부터 훅 들어오는 사랑의 표현.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내뱉는 농밀한 고백들. “내 사랑!”
그러다 별안간 들이닥친 대폭발. 그 와중에 다급하게 외치는 다짐.
“우리 꼭 다시 만나!”
급발진 같은 오프닝 전개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사랑해”의 진정성을 따져 본다. 진심이 담긴 말일까? 그렇다면 한 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같은 말을 거듭할수록 농도는 희석되기 마련이다. 되풀이될수록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다급할수록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목소리들이 제각각 흩어지고 난 후에야 드러난다. 아주 오래전, 인접한 원자들이 나눈 얘기다. 그러다 대폭발이 일어났고 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서서히 세상의 질서 속에서 재편된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입자 물리학이나 천체 물리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고, 요즘엔 다정하고 친절한 과학자들과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흥미롭고 재밌게’ 들려주는 상식이자 교양이다. 그게 빅뱅 직후인지, 초신성 폭발 때인지, 태양계 형성기인지는 중요치 않다 (감독은 원시 지구가 만들어질 즈음이라고 답하기는 했다). 우리는 적어도 (리처드 파인만의 말마따나)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과, 그 원자들이 우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이해 여부를 떠나) 알고 있다(고 치자).
100년 전 인류라면 누구도 (심지어 아인슈타인마저도!) 몰랐을 우주의 생성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설정이자 출발점을 가뿐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왠지 우쭐대고 싶다. 이뿐이랴. 심지어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전개 상황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흩어진 원자들은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재배치될 것이며, 그러다 마침내 이들이 다짐했듯 (작품 제목이기도 한) “꼭 다시 만나”는 지점에 다다를 테다.
따라서 작품은 원자들이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재배치’될지, 그리고 ‘다시 만남’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 원자들,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기까지

다섯 개의 원자는 마치 ‘물’, ‘불’, ‘흙’, ‘공기’라는 4 원소에 ‘에테르’라는 다섯 번째 원소 (뤽 베송이라면 ‘사랑’이라고 불렀겠지만)를 가리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과학적 엄밀성 여부를 떠나, 존재론을 다룬 고대의 자연 철학을 떠올릴 수 있어서 다시 한번 우쭐대고 싶다 (보고 있나,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자, 이제 판을 벌여 보시라. 다섯 원자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우주적 질서를 재편할 것인가? 사실 이 점은 예전에 픽사의 <엘리멘탈>을 보면서 가졌던 기대이기도 했다. 물론 <엘리멘탈>은 이러한 관심에는 아랑곳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4 원소들의 관계 맺기보다는 물과 불, 두 주인공 사이의 결합을 둘러싼 대립과 화해에 집중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 꼭 다시 만나>는 다행히 원자들의 조합과 재결합 과정을 건너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허를 찌른다. 슬롯머신 속 회전하는 릴의 조합, 이에 따른 세상의 모습이 짧은 인서트로 제시되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그러니까 굳이 원리를 따지자면 다섯 원자가 다시 만나는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확률적 조합이다. 그리고 다섯이 모두 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상황이란 말 그대로 ‘잭팟’에 해당한다. 잭팟이 터지기까지 지난한 불발의 연속이 오랜 시간 동안 펼쳐졌다 (원시 지구 형성기부터였으니 얼추 45억 년 정도라 보자). 각각의 원자가 각기 다른 시기에 저마다의 존재로 (생명체뿐만 아니라 광물과 같은 비생명 물질로도) 여기저기서 개별적으로 (외부의 또 다른 원자들과 결합을 통해서) 등장했다가 분해되고, 다시 결합한다. 이러한 전개는 한편으로는 랜덤 뽑기처럼 무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완전체 결성!’을 향하는 목적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 꼭 다시 만나>가 본색을 드러내는 설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꼭”이라는 맹세는 의지와 운명을 담고 있다. 다섯 원자는 반드시 만나야 하는 운명이되, 이를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나자”는 다짐은 장엄한 서사를 이루는 기초이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전개 장치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주와 자연의 질서와 전개는 결정론적 운명이나 목적론적 지향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법. 운명과 의지라는 말은 과학 내부에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운명과 의지에 해당하는 자리에 필연성이라는 말을 쓸지 고민한다. 그리고 ‘필연’ 또한 100%를 상정하기 때문에, 필연 대신 ‘인과율/인과관계’라는 (필요하다면 확률적/통계적/확률-통계적 인과성이라는 말로 최대한 조심성을 추가하면서) 표현을 택한다.
“꼭”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이렇게 신중하게 구는 태도가 <우리 꼭 다시 만나>의 재미를 반감시킨다고 여기는가? 오히려 반대이다. 이 작품의 재미는 “꼭”에서 출발한다. “꼭”에 상응하는 과학적 서술이 (확률-통계적) 인과율이라면, 우리는 이를 자칫 ‘개연성’으로 등치 하려 한다. 시나리오 작법서가 요구하는 게 응당 개연성이고, 작품의 스토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근거로 콕 집어 가리키려 드는 지점이 개연성이 되곤 한다. 그랬을 때 <우리 꼭 다시 만나>는 개연성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보며 거침없이 나간다. 다만 인과관계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구분할 뿐이다. 대신 그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 우연 또는 랜덤, 즉 ‘잭팟’이다.
잭팟은 확률적으로 발생한다. 그 확률은 우주에서 태양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지구가 탄생하고, 그곳에서 생명이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인류가 등장하는 확률과 연결된다. 확률이라는 말을 들이대서 우주의 존재와 인류 등장과 다섯 원자의 재회를 뭉뚱그려 퉁 치려 드는 것처럼 보이는가? 왠지 심오한 존재론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목적론을 들이대야 그럴 싸 해질까?
작품의 첫 준비 단계에 대한 감독 박유선의 말을 들어보면 질서, 목적, 존재와 같은 묵직함은 없다. 수업 중 냅다 던져진 세 가지 낱말, 그리고 여기에 감독이 추가한 두 개의 낱말에서 이야기는 싹이 텄다. 모든 것에서 존재론적 의미와 관계의 필연성, 사건의 개연성을 따졌다면 이미 다른 이야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또는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작위로 주어진 조건들, 그것들의 랜덤 한 조합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진행에 개입하는 것은 엄격한 개연성이 아니라, 랜덤 한 확률에 따른 원인과 결과의 연쇄 반응일 뿐이다. <우리 꼭 다시 만나>가 그러하고, 우주가 그러하다.
# 원자들, 재결합하다

남자, 여자, 꽃, 돌고래, 원숭이. 다섯 원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현재, 마침내 함께 하게 된 ‘잭팟’의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록 한 곳에 있지만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원숭이와 돌고래는 남자와 여자를 첫눈에 알아 채지만, 커플은 원숭이와 돌고래를 몰라 본다. 원숭이와 돌고래는 동물원에 함께 있었지만 마주친 적이 없다. 꽃은 그저 꽃에 머물 뿐이다. 이들의 감격적인 재회를 목격하는 건 관객인 우리 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는 첫 장면에서 이들의 사랑 고백과 맹세까지도 들어버렸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이들 원자를 둘러싼 우주적 기원과 현재까지의 전개를 알아버리게 된, 거의 ‘전지적 관객’ 시점을 지니고 말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다섯 원자가 다시 어떻게 어긋나게 되는지 (그럼에도 결국 함께되겠지만)를 지켜볼 일뿐이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제한적이나마) 전지적이지만 (원천적으로) 상황에 개입할 수 없는 관객인 것이다. 동물원에서 데이트하는 연인의 모습 속에 태곳적 관계가 숨어 있으며, 이들의 동선을 따라 스치고 엇갈리는 상황이 펼쳐진다니. 하지만 우리는 안타까움 보다는 그다음에 전개될 엇박자를 기대한다.
커플을 알아본 원숭이는 사력을 다해 쫓아 가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돌고래 또한 커플의 시선을 끌지 못한 채 (그저 기념사진의 피사체에 머물 뿐) 동물원에 갇혀 지내다 방생 직후 허무하게 삶을 마무리한다. 그 사이, 연인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고, 끔찍한 사건 처리 속에서 꽃 또한 내던져진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가장 나쁜 ‘놈’, 아이러니하게 천수를 누리고 만다.
대폭발과 잭팟 마냥 파국도 종잡을 수 없는 발생이자 귀결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개연성을 바랄 수 없다. 다만 벌어진 일에는 그에 우선하는 원인이 있을 뿐이다. 원인들은 각 상황에서 작동했지만, 원인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주는 거대한 목적과 계획이란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과 상황이 그러하며, 우주가 이제까지 그렇게 흘러왔다.
의미가 없어서 허탈하고 허무한가? 논리와 대서사가 없어서 황당하고 황망한가? 낙담하거나 애써 이런 상황을 부정하려 들 필요는 없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고 굳이 의미를 부여하는 건 과학적인 대응은 아닐지언정, 인문-예술적으로는 소중한 반응이긴 하니까 말이다.
# 원자들, 핵융합과 핵분열 사이
어쩌면 <우리 꼭 다시 만나>는 부조리 극일 수도 있겠다. 이 작품에 대한 매력적인 리뷰는 이미 지난해 서울 인디애니페스트 관객 심사단으로 참여한 김담이 쓴 바 있다.* 김담은 <우리 꼭 다시 만나>에서 다루는 사랑을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며) 숭고와 저속함 사이에 있는 것, 나아가 숭고와 저속함이 뒤엉켜 있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웃음의 의미를 건져 올렸다. 짧지만 날카로운 리뷰 속에서 김담은 박유선의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정갈하게 활자화하였다 (고백건대 나로서는 그 이상의 글을 쓸 수 없다고 그 때나 지금이나 인정한다). 또래로서 일종의 정서적 공감이 즉각적으로 통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달에 이어, 그리고 올해 들어 더욱 빈번히 실토한다. 내 감수성은 올드하다).
* 김담, “사랑을 믿는가”,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5, 웹데일리 리뷰3 (2025. 10. 21.)
그럼에도 <우리 꼭 다시 만나>를 전적으로 MZ 감성, 또는 젠지 감성으로만 한정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이 작품에 애착을 (경우에 따라서는 집착에 가까울 때도 있었다) 가진 까닭은 작년의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들 속에서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감성과 감각, 취향 면에서 분명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지난달 다룬) <커피와 담배>, <핑크 몽키>, <이 세계는 콜라이고 우린 그걸 흔들고 있어> (그리고 아직 다루지 않은 몇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등과 결을 함께 한다. 직설적이고, 거침없고, 키치적이고, 한 박자 빠르고, 주저하지 않고, 감추지 않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리 꼭 다시 만나>는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의 사연과 입장을 교차하면서 뜻하지 않게 얽히고설키며 상황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한병아의 <만복탕>과 최지희의 <후잉> 같은, 좀 더 어른들의 이야기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박유선은 청년과 그 직후의 경계 어딘가에서 절묘한 균형점과 모순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것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내게 박유선의 스타일은 전작 <분노의 개구리> (2023)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 작품은 그 해 서울인디애니페스트 2023의 독립 보행 부문 초반부 (그러니까 에릭 오의 <오리진>에 이어)에 배치되었다. 영화제 상영 라인업에서 그 순번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종의 헤드라이너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테면 그 해의 ‘인상’ 또는 ‘경향’을 가리키는 위치랄까. 단순히 이미지 스타일이나 분위기에 국한하는 얘기는 아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비해 그 해엔 유독 ‘개구리’가 나오는 작품이 많기도 했다). 그때 <분노의 개구리>를 통해 확인한 방향성은 ‘새로운 앵글’이었다. 이제까지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던 시선과는 다른, 신선한 각도와 높이로 포착된 구도. 이는 <분노의 개구리> 뿐만 아니라 김상준의 <메아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시도였다 (그 외에도 몇 작품 더 있었다).
시선이 새로운 앵글을 취한다는 건 이전까지의 관습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얘기이고, 이를 통해 이제까지 포착하지 못한 지점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점에서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이전 작품과 궤를 함께 하면서도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분노의 개구리>에서 새로운 앵글은 가해자 소년과 피해자 개구리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를 시각화한 시도였다. 반면 <우리 꼭 다시 만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각각의 관계와 거리를 재조정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상대를 알아보는 자와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시선이 ‘왜곡된 깊이감’으로 뒤틀린다. 이러한 효과는 한편으로는 광각 렌즈와 같은 굴절율을 도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해체와 재구성을 적절히 가미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이렇듯 과장되게 비틀어진 공간에서는 서로의 시선이 엇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피카소가 의도한 것은 분열과 파편, 해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합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꼭 다시 만나>에서 각 캐릭터의 시선은 파편적으로 엇나가지만, 관객은 이 모든 상황을 아우를 수 있는 종합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 원자들, 카타르시스와 아이러니에 작용하다

<분노의 개구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말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돌은 ‘무심코’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던져졌다. ‘무심코’는 “아무런 의미나 생각, 목적이 없다.”는 뜻이다. 소년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개구리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소년은 “그저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으레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 행위를 ‘장난’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당하고만 있던 개구리가 반격을 한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소년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이 ‘무심코’, ‘장난으로’ 그 궤적으로 그린다고 여길까?
<분노의 개구리>는 말하자면 (돌)직구로 정면 승부를 거는 작품이다. 타깃을 향해 곧바로 내리꽂는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카타르시스는 선명하다. 참다못한 개구리가 내뱉는 일갈, “이 개섹히야!” 그 한마디로 족하다. 후련하다. 분노가 쌓이면서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정확한 타이밍과 그에 합당한 폭발력으로 발사하는 일성이다. 또한 카타르시스는 정당하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사필귀정’, ‘역지사지’, ‘뿌린 대로 거두는 법’,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분노의 개구리>의 돌직구와 비교하자면 <우리 꼭 다시 만나>는 변화구다. “꼭 다시 만나!”라는 맹세처럼 귀결점은 정해져 있지만, 경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하나의 사건 이후에 다음 사건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전개의 템포도 변칙적이다.
<분노의 개구리>에서 ‘무심코’가 역설의 포인트였다면, <우리 꼭 다시 만나>에서는 ‘꼭’이 그 역할을 한다. ‘무심코’가 액면 그대로의 ‘무심코’가 아니듯, ‘꼭’은 우리가 예상하는 ‘꼭’이 아니다. ‘꼭’이 말하는 필연에서 개연성과 인과율이 분리된다. <우리 꼭 다시 만나>에서는 앞서 개구리가 시전 한 ‘인과응보’로부터 ‘응보’가 사라지고, ‘인과’만 취한다. 그리고 ‘인과’는 ‘개연성’을 거부한다. 본래 자연현상이란 법칙 또는 규칙성을 따르지만, 거기엔 “아무런 뜻이나 생각, 목적이 없다.” 즉 무심코의 본래 뜻인 ‘무심’이 자연현상의 ‘인과’와 만나게 된다.
인과응보에서 분리된 응보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나쁜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나쁜) 놈인 살인자 남자만 유일하게 자연사(!)를 한다 (원숭이는 로드킬 당했고, 여자는 살해되었고, 꽃은 여자의 시신과 함께 버려졌으며, 돌고래는 방류 직후 잡아 먹혔다). 개연성 대신 인과 관계만 추구함으로써 이러한 역설이 생겼지만, 여기엔 나름 감독의 계획이 깔려 있다. 오래 살아남은 자, 그래서 가장 나중에 죽은 자는 원자들의 무리에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다. 모두가 벼르고 있던 참이다. 질타가 그에게 집중된다. 응보는 마침내 그곳으로 수렴된다. 응보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지연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아이러니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러니는 작품의 시작과 끝이 연결될 때, 즉 원자들의 결합과 재결합을 포갤 때 비로소 명확히 드러난다. 어쩐지 처음부터 “사랑해!”라는 말을 과하게 남발하는 것 같더라니. 사랑 고백은 남용되었다. “사랑해”를 외친 횟수만큼의 욕설이 메아리 마냥 마지막을 채운다. 난사되는 욕은 <분노의 개구리>에 등장한 단 한 방의 욕과 대비된다. 배설과 정화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과잉의 애증일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온 원자의 존재 양태이며, 세상은 원자들 사이의 그러한 상호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재조합되면서 변모해 왔다.
작품의 마지막을 욕지거리로 가득 채우는 건 쉽지 않은 판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찰지게 감기는 욕,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한껏 격한 감정을 담되 원자의 앙증맞음에 맞춰 적절히 튜닝된 억양, 그리고 거기에 맞춰 경쾌한 타격감을 선사하는 원자들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다. 앞서 언급한 김담의 “숭고함과 저속함이 뒤엉켜 있는” 웃음의 미학적 결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엔딩이자, 사랑의 가려진 본모습을 드러내는 끝맺음이다.
‘Atomic Love’, 원자처럼 쪼갤 수 없는 사랑, 핵폭발처럼 강렬한 사랑.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언제나 위험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우리 또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늘 위험한 사랑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10 -10승 m 크기의 원자는 지구 기준으로 4.5 X 10의 9승 년 전부터, 우주 기준으로는 1.38 X 10의 10승 년 전부터 그렇게 아찔한 사랑을 해왔던 것이었다.
나호원 Joint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