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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 FOCUS_PARK Sehong

  • 5시간 전
  • 12분 분량

# 진심

박세홍은 언제나 진심이다. 


이를 테면, 예전에 매달 애니 살롱을 통해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 상영과 GV를 진행할 때마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물론 바로 아래층에 그의 작업실이 있긴 했지만, 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왜냐면 그는 훨씬 먼 곳에서 열리는 영화제와 상영회도 꽤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나야 일 때문에 찾아가지만 (그리고 일이라는 구실로 “끄응~차!” 대면서 움직이지만, 즉 일이 아니면 온갖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아니었다. 


뜻밖의 마주침에 눈치 없이 “어맛! 감독님 작품도 상영하나요?”라고 물을 때면, 그는 예의 손사래를 치며 수줍게 “아무개 감독 신작이 요번에 상영된다고 해서요.”라며 답하곤 한다. 친한 사이이든,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든 그는 늘 동료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멀든 가깝든 기왕 찾아간 거면 해당 감독 앞에서 “잘 보고 갑니다~”라고 생색도 낼 법한데, 그는 별다른 기색 없이 조용히 그곳을 떠나곤 한다. 게으른 내가 겨우 찾아간 곳에서만도 매년 여러 차례 마주쳤으니, 내가 찾지 않은 더 많은 경우까지 헤아리면 훨씬 부지런히 다녔을 테다.


동료의 창작 활동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업 또한 허투루 임하지는 않는 법. 그건 진심의 태도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본격적인 작품을 접하기까지에는 첫 대면 이후로 제법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요괴 진격도>를 영화제에서 접하게 되었다, 두둥~!


요괴진격도 (2018)
요괴진격도 (2018)


그렇다, 그러니까, 드디어, ‘감독’ 박세홍의 ‘작품’을 통해 비로소 그의 애니메이션과 그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활동 인형’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는 때가 당도하였다. 


“왔노라! 보았노라!... 어... 그리고... 음... 아... 그러니까...” 


당시의 내 반응을 한 단어로 응축하면 ‘유보’였다, “판단 유보!” 왜?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내가 기대한 것은 정파의 보법과 초식이었다. 그리고 박세홍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리는 작품을 펼쳤다. 


이야기는 도중에 어디로 튈지 몰랐고, 불쑥 개그 설정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엄근진’ 전개로 방향을 틀뿐 아니라, 예상한 장면 보다 한껏 더 날뛰는 동선이 펼쳐졌다. 실내외의 세트와 소품은 어딘지 비어 있는가 싶으면서도 때론 그 이상의 집요함으로 채워져 있기도 했다. 정밀함과 정교함으로 다뤄진 장면이 있는가 하면, 전반적으로 투박한 인상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그저 ‘일초반식’이라고 폄훼하여 불러야 할까? 이는 정법의 결여일까, 아니면 고수의 변칙일까? 


혼돈을 잠재울 실마리를 어떻게든 찾아보려 했다. 일단 작품 속에서. 선명히 눈에 들어오는 기호의 품새가 있다, 바로 ‘궁서체’. 이 글꼴이 요구하는 애티튜드는 ‘엄근진’이렷다. 아니 어쩌면 그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춘 글꼴은 아닐까? 잠깐, 그런데 이 작품에 쓰인 궁서체는 왠지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궁서체더라...? 여하튼 작품 속 궁서체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물음표만 불려 나간다 (궁서체에 대한 답은 인터뷰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프리미어에서 제공되는 기본 글꼴이었다).


그렇다면 작품 밖에서 답을 찾아보는 수밖에. 가장 확실한 것은 GV를 통한 감독의 말이다. 나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그는 고요하고 차분하다. 요컨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간결하다. 정갈하다. 차마 “그래서 어디까지가 유머이고, 어디까지가 진지함입니까?”라든가 “의도가 십분 발휘된 것입니까? 아니면 아쉬움도 있습니까?”라는 추가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혹여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의 진심에 생채기를 남기는 결례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언제가 되었든 직접 물어볼 수 있겠거니, 아니면 그다음 작품을 통해 좀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겠거니... 라며.


기회는 바로 왔다. 이듬해 <용 없는 마을>(2019)이 선보였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을 선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혼란을 일으켰던 충돌과 부조화를 정리하면서, 비워졌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을까? 숨겨졌던, 또는 놓쳤던 지점을 비로소 드러낼까?


웬걸? 카오스는 증폭되었다. 남겨진 물음표는 증식되었다. 이야기 전개는 더욱 요동쳤고, 유머와 진지함의 충돌은 더 잦았고, 세트와 아트웍은 여전히 불균질 한 상태를 이뤘다. 감독의 의도는 혼돈을 틈타 우리로부터 꼭꼭 숨어버리려는듯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작품은 반복과 변주를 통해 일종의 짝을 이루려는 기색도 내비쳤다. 무엇보다 주인공 사내, 그리고 그와 대립하는 요괴가 그대로 등장한다. 사내의 초가집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요괴를 가두는 족자 그림 또한 유지된다. 


용 없는 마을 (2019)
용 없는 마을 (2019)

그렇다면 <요괴진격도>와 <용 없는 마을>은 이어진 작품인가? 아니면 본편과 속편의 관계일까? 혹은 프리퀄과 본편? 닮아 있는 요소들 덕에 이러한 짐작을 해보려 들지만, 닮지 않은 점들을 따지다 보면 섣불리 단정할 수 없게 된다. <요괴진격도>에서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선비가 <용 없는 마을>에서는 나무꾼으로 역할을 바꾼다. 그저 직업을 바꾼 것에 그치지 않고, 말투도 달라졌다. 아내도 전작에서는 족자 그림을 함부로 펼친 연유로 족자에 갇혔지만, 후속작에서는 요괴에 맞서 싸우다가 봉인되었다. 전작에는 없던 사내의 동생도 <용 없는 마을>에서는 등장한다. 그렇다면 두 작품은 평행 우주 속에 있거나, 감독이 야심 차게 설계할지도 모를 ‘박세홍 유니버스’의 부분들을 저마다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를 이리저리 ‘나름 합리적으로’ 궁리해 보려는 시도는 “용”의 등장과 함께 여지없이 박살 난다. 설마 했던 용이 진짜로 나온다, 이런! 용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늘을 난다, 어이쿠!. 그리곤 요괴의 공격 한방에 고꾸라진다, 맙소사!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라고 스스로 물어볼 틈도 허용치 않고, 두 번째 용이 날아오른다. 이번엔 ‘드래건’이다, 서양 용! 마찬가지로 등장 직후, 일격에 격추된다, 이런 어이쿠 맙소사! 용 두 마리가, 그것도 동양의 용과 서양의 드래건이 동시에 등장하는 작품이라니...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이런 설정의 작품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뭐람? 내가 그간 쌓은 애니메이션 경험치의 한계와 마주하고 만다. 궁서체가 표방하는 함의가 무너진다. 장르의 법칙이 삽시간에 가루가 되었다. 무협지에서는 종종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보법과 초식으로부터 일격을 당하고 쓰러지는 자가 묻는다, “그대는 정녕 어느 문파 출신인가?” 질문을 받은 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쓰러져 묻는 이에게만 슬쩍 흘리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한다.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도 나는 용케 <용 없는 마을>에서 박세홍이 슬며시 흘린 표정과 몸짓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요괴의 약점을 통해 평화를 회복하는 마지막 장면,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 나무꾼은 2선으로 물러선 채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낸다.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중심 앞 쪽에 서있는 인물들 때문에 자칫 묻힐 수 있다. 그만큼 너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배치한 감독은 직접적인 말 대신, 자신과 닮은 인형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넌지시 내게 답을 흘린다. 비로소 알겠다. 진지한 표정으로 ‘V’를 날리기, 그것도 진심을 담아서, 궁서체로. 진정 고수다.


# 이야기꾼

<요괴 진격도>와 <용 없는 마을>은 서사의 관습 따위는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장면과 장면의 관계는 예상 기대 범위를 훌쩍 벗어나곤 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해체되고 마는가?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이야기 관습은 늘 정해진 그 위치에서 작동하기 마련이었다. 요괴는 예견된 시점에 정확히 등장하고, 응징당해야 할 시점에 어김없이 응징당한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은 요괴에게 당해야 할 지점에서 당하기 마련이고, 역전할 포인트에서 전세를 뒤집는다. 선은 선의 자리에, 악은 악의 자리에 늘 있다. 그러니까 <요괴 진격도>와 <용 없는 마을>은 우리가 정석이라 여기는 딱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지점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으로 진폭이 요동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박세홍은 이야기꾼으로서 <요괴 진격도>와 <용 없는 마을>을 풀어낸다. 세련된 현대적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 고전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재담꾼의 태도로 말이다. 그는 꼼꼼하게 설계된 플롯 공식에 따라 냉철히 계산된 정보량을 배열하지 않는다. 대신, 말하는 이의 흥에 따라, 때론 듣는 이의 호응에 따라 과장을 더하거나, 절제와 생략을 섞는다. 


본래, 재담꾼의 입담에 사람들은 사사건건 토를 달지 않는 법이다. “조선 시대에 홍모인, 색목인도 아닌, 웬 뜬금없는 푸른 몸뚱이의 요괴냐?”라든가 “용과 드래건은 서로 다른 유니버스에 속하므로 공존할 수 없다!”라는 시비 따위는 재담꾼의 판에 어울리지 않는다. 늘어놓는 이야기가 다소 거칠다면 “거, 허풍이 심하군!”이라고 슬쩍 궁싯댈 수는 있어도 판을 엎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어느새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오르면, 재담꾼은 자신의 입에 쏠린 사람들의 기대치를 요래조래 재주껏 다루면서, 환호는 더 높이, 탄식은 더 깊게 이끌어낸다. 재담꾼, 이야기꾼의 능력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얼마나 맛깔나게 제 요량 것 매만지고 풀어내느냐에 있다. 그 맛이 통하기만 한다면 듣는 이들은 “캬,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치게 된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장르의 규칙, 서사의 황금률, 인과율과 개연성 따위는 끼어들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박세홍은 이야기에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꾼으로서의 진심은 통했을까? 사람들은 <요괴 진격도>와 <용 없는 마을>에 선택적으로 반응했다. 열광하거나, 당황하거나. 무엇보다 처음엔 대개들 어리둥절했다. 누군가는 캐릭터에, 어떤 이는 세트와 아트웍에, 다른 이는 조명과 촬영에, 때론 제목의 글꼴 (궁서체!)에, 혹은 대사에, 그리고 사건에, 아니면 전개에, 어쩌면 톤 앤 매너에, 행여 결말에... 이 작품들이 재담꾼이 깔아 놓은 이야기 판이라는 걸 눈치챈 이들은 당혹과 의심을 재깍 거두고 기꺼이 호응하며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낯섦을 떨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재담 판에 맘껏 발을 들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감독도 관객도 서로 난처해진다. 그렇다고 이를 누군가의 과오나과 과실로 몰고 가는 것은 합당치 않다. 당장에는 양쪽 다 어찌할 바를 모를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서로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거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독으로서는 여전히 작품을 이야기꾼의 마당에 올리는 시도가, 작품과 관객은 이제껏 (길게 잡아봤자 백 년 남짓이긴 하지만) 익숙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신화와 전설과 민담 그리고 옛날이야기가 입과 말을 통해 들려지던 옛날 옛적의 상황을 잠시나마 회복해야 하리라.


# 웃픔

익숙해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세홍은 2022년에 <인형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리고 관객들이 즉각 반응했다 (그해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심사단상을 받았다). 


삼세판! 요괴와 선비-나무꾼과 초가집이 다시 등장한다. 저 캐릭터들이 누구인지, 저 집이 누구의 집인지 눈에 익고, 그들의 예전 이야기를 알고 있다. 엄근진과 유머가 뒤섞인 가운데, 그것들이 놓이는 상황도 겪었다. 그제야 의심과 판단 유보는 거두어진다. “이게 뭐람?”이라는 물음표는 “역시 박세홍이지!”의 느낌표로 바뀌었다. 긴가민가 하며 조심스레 반응했던 태도 대신 이젠 대놓고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은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무리 또한 세트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비로소 박세홍의 작품에 익숙해졌을 때, 그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이야기꾼으로 인정하고, 이야기에 대한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는 예전의 자리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인형 이야기 (2022)
인형 이야기 (2022)

<인형 이야기>에서 박세홍은 애니메이션을 이야기 판으로 옮기거나 이야기 판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려 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자체가 이야기 그 자체가 되도록 만들려 했다. ‘애니메이션=이야기’라는 등식을 만드는 시도가 애니메이션의 형식, 물리적 구조를 서사로 새롭게 구축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건축적 재구성의 멋진 사례로는 에릭 오의 전시 리뷰를 참조하시라).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얘기도 아니다. 


대신 이야기의 얼개를 짜면서 애니메이션 본체에 다가간다. 이야기 속 신작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요괴>를 준비하는 요괴와 나무꾼의 상황을 다룸으로써 <인형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그리고 작품 제작에 임하는 감독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메타 픽션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하여 이야기와 애니메이션 사이에 등호를 집어넣을 자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즉, 작품 속의 작품, 그리고 그 작품 속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애니메이터와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기. 


이러한 복합적이고도 입체적인 구성에서 대개 메타 픽션은 애니메이터 (창작자)와 캐릭터 (등장인물)를 창조주-피조물이라는 위계적 서열 관계에 두고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평적인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을 교환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곤 한다. 그럼으로써 창작이라는 실천과 매체 형식 자체(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소설 등등)가 자기 반영성/자기 성찰성self-reflexivity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정작 <인형 이야기>는 이러한 일반적인 전략에서 벗어난다. 이 작품에서 애니메이터와 캐릭터 간의 직접적인 대화나 교류는 없다. 캐릭터가 창작자에게 저항이나 어필을 하지도 않고, 애니메이터가 캐릭터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득하거나 호소하지도 않는다. 즉 그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영역에서 상대를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 바라본다. 주로 나무꾼과 요괴가 감독 박세홍을 바라본다. 감독은 창조주의 전지적 시점을 지니지 않고, 오히려 관찰자 시점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은 <인형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메이킹 필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제작은 어떻게 좌절되는가”를 다룬다. 완성이 아닌 중단을 보여주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인형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즉 이 작품에서 인형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뿐만 아니라, “무엇이 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형을 움직이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서 인형의 ‘존재론’을 묻는 것이다. <인형 이야기>라는 제목은 ‘인형이 들려주는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인형 자체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셈이다.


시작은 우리에게 낯익은 요괴와 나무꾼에서 시작한다. 신작 준비 중에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스톱 모션 ‘배우’로서의 고충을 전한다 (그렇다, 그들은 인형이 아니라 ‘배우’이다). 또한 배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감독 박세홍에 대한 시선도 담겨 있다. 이때만 해도 인형들은 자신들의 ‘연기’를 통한 애니메이션의 완성을 지향한다. 힘들지만 사명감과 보람이 인형과 감독을 하나로 묶는다. 


인형들이 뒤적이는 감독의 스크랩 파일 속에 ‘레이 해리하우젠Ray Harryhausen’과 ‘강태웅’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박세홍이 자신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어떠한 계보 속에 놓고자 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째서 그의 작품에 요괴가, 그리고 나무꾼이 줄곧 나오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요괴는 할리우드 스톱 모션의 전설 레이 해리하우젠에게서, 나무꾼은 한국 최초의 장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강태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렷다. 그리하여 박세홍의 애니메이션이란 두 선각자에 대한 리스펙트이자 그들의 법통을 잇는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차질이 생기고, 제작은 중단된다. 인형과 감독 모두, 목표가 사라졌다. 이 와중에 등장, 혹은 탄생하는 것이 바로 선녀이다. 이는 꽤 아이러니하다. 제작이 멈춘 상황에서 우리는 인형의 메이킹 장면을 보게 된다. 뼈대를 거푸집에 넣고 그 속에 라텍스와 실리콘을 부어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슬쩍 엿볼 수는 있지만, 이렇게 제작된 선녀-인형이 정작 자신의 역할을 작품 속에서 구현해 내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녀는 배우로서의 활약 대신, 기대했던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겪는 슬픔과 좌절을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노래로 풀어낸다. 애초에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요괴>는 “판소리 인형 애니메이션”을 표방한다(고 작품 속에 기획서 표지에 적혀 있다). 한데 선녀가 “거위의 꿈”을 판소리로 부르는 장면은 예정된 작품 촬영 중이 아니라, 제작이 좌절되었을 때 일어난 것이다. 나름 감정선이 한껏 고조되는 이 판소리 뮤지컬 신에서 감독은 엄근진-유머 신공을 발휘한다. 노래 가사에 따라 선녀가 정말 ‘날아오른닷!’ 게다가 나머지 캐릭터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코러스’ 파트를 책임진다. 


그런데 이 장면은 그저 웃픈 연출에 그치지 않는다. 날아오른 선녀를 따르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세트와 작업장의 상황이 함께 포착된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감독의 뒷모습을 선녀가 굽어 보는 장면까지 나온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좌절된 제작과 (완성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메이킹 영상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배우가 되지 못한 인형’인 선녀의 모습을 통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인형이 어떠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되새기게 된다.


애초에 인형은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 처음부터 사실적인 비율과 외양과 움직임으로 사람 배우를 대신하려던 시도들은 대부분 기이하거나 어설픈 ‘언캐니’한 존재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형뿐만 아니라 3D 애니메이션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지금은 AI가 더욱 확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그래서 스톱 모션의 인형들은 다소 왜곡된 비율과 외양과 움직임을 통해 자신들만의 ‘애니메이션다운’ 세계 속에서 활동하고자 한다. 


인형 이야기 (2022)
인형 이야기 (2022)

하지만 인형의 세계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바로 인형으로서의 인형이 사는 곳. 이때 인형은 퍼펫이나 마리오네트가 아니라 ‘doll’에 가깝다. 이 단어에는 놀이와 주술, 수집, 욕망, 애착, 때론 수공예 등의 뉘앙스가 뒤엉켜 있다. 이 인형들은 종종 사실적인 비율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인간을 모사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액션 피겨도, 마네킹도, 밀랍 인형도 아니다). 가장 확실한 예는 퀘이 형제의 애니메이션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테다. 인형으로서의 인형이, 인형 자체로서 움직임을 갖는 애니메이션 말이다. 


<인형 이야기>에서 선녀는 바로 이처럼 ‘인형으로서의 인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원래 예정대로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요괴>에서 선녀로 활약했다면 그녀는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인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인형’의 기회가 봉쇄되면서, 선녀는 ‘배우가 되지 못한, 인형으로서의 인형’이 되었다. 뼈대와 (라텍스와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맨몸과 뒤늦게 갖춰진 행색의 인형.그래서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요괴>의 등장인물에게 주어진 역할 연기에 맞는 움직임이 아니라, 좌절과 분노가 뒤엉킨 다소 뒤틀린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은 마치 마비와 히스테리적 발작이 교차하는 듯하다.


* <인형 이야기>가 선녀의 탄생/제작을 통해 이를 보여줬다면, 표트르 사페긴Pjotr Sapegin의 <아리아Aria> (2001)에서 절망과 분노에 몸부림치는 인형은 자신을 해체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 짠함, 짠내, 그리고 여전히 진심

좌절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 이에 대한 메타적 이야기들에서 작가/창작자는 신세 한탄 속에서 자칫 자기 연민에 빠지곤 한다. <인형 이야기>에서 박세홍은 자신의 말을 극히 아낀다. 그의 목소리는 외부와의 통화, 그리고 빈 술병을 치우는 마지막 장면의 독백 정도로 그친다. 물론 할 말은 이미 다 배치해 놨다. 요괴와 나무꾼의 대화 속에, 선녀의 노래 속에 그가 하고자 한 속내가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귀퉁이와 뒤편으로 물러선다. 앞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주로 뒷모습과 옆모습으로 화면에 나온다. 실의에 빠진 채, 벽 쪽으로 돌아누운 그의 뒷모습은 더없이 슬프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끝냈더라도 크게 아쉬움을 남기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박세홍은 자신을 캐릭터의 시선에만 가둬두지는 않았다. 즉 관찰자로서의 캐릭터가 자신을 동정하는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형들에게 받은 만큼의 연민과 애정을 다시 돌려주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인상적인 연출이 하나 있다. 선녀가 ‘거위의 꿈’을 부르는 바로 그 뮤지컬 신에서, 무대 가장자리에 힘없이 쭈그려 앉아있는 또 다른 캐릭터, 해골 (원래는 동료 감독의 외주 주문을 받아서 만든 것인데, 도중에 제작이 엎어지면서 납품을 하지 못한 처지이다)을 찾아낼 수 있다. 화면 끄트머리에 배치되어 자칫 놓칠 수 있다. 포커스도 살짝 날아가 있다. 하지만 분명 의도한 설정이다. 맨 앞, 가운데가 아닌, 거기서 벗어난 위치에 무엇인가를 배치하기. <용 없는 마을>에서 나무꾼이 손가락으로 V를 흔들던 것처럼, 이번에는 무대 한편에다가 주목받지 못한 인형을 놓았다. 물론 선녀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직전의 배치는 참으로 절묘하다. 해골의 모습이지만, 그 처지는 영락없이 감독과 닮았다. 그럼으로써 ‘좌절된 감독’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실의에 빠진 자신의 인형을 한번 더 품고자 한다. 과연 그는 인형에 진심이다.


<인형 이야기>가 준비된 프로젝트의 좌절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다뤘다면, <가상과 실체>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마주한 애니메이션의 현재를 다룬다. 인형의 존재론으로부터 애니메이션 이미지의 존재론으로 심화, 확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실체로서의 인형과 가상으로서의 3D 캐릭터 사이의 논쟁은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어왔다. 누군가는 저항했지만 영화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디지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다. 필름은 사라졌지만, 배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디지털로 촬영하지만 여전히 인형과 세트, 소품을 직접 만들고 다루면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있다. 


가상과 실체 (2025)
가상과 실체 (2025)

사실 21세기 들어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내부에서도 두려움이 유령처럼 엄습하기도 했다. 인형은 와이어 프레임과 텍스쳐 맵핑, 인버스 키네틱스로 대체되고 말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다시 퀘이 형제의 경우를 언급해야겠다. 사람들은 적어도 퀘이 형제만큼은 디지털에 저항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필름이 지니는 고유의 질감은 이미 그들 작품의 정체성과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퀘이 형제는 디지털을 받아들였다. 물론 인형과 세트와 소품 등은 예전처럼 유지했다. 다만 촬영과 편집만 디지털로 전환했다. 필름 텍스쳐의 고유한 물성은 약해졌다. 그래서 퀘이의 작품이 아니게 되었나? 그럴 리가. 영화는 필름의 감광유제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퀘이 형제의 스타일에는 빛과 렌즈도 핵심적인 요소이다. 디지털 때문에 (‘덕분에’라는 말은 차마 쓰지 못하겠다) 그들은 더욱 빛과 렌즈에 심혈을 기울였고, 디지털은 인형과 소품, 세트가 빛에 반응하는 텍스쳐를 더욱 섬세하게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인형을 둘러싼 표현은 더욱 정교하고 섬세해졌다. 다시 말해 디지털을 도입한 이후로 퀘이 형제의 작품에서 인형은 더욱 ‘인형다운 인형’, ‘인형으로서의 인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늘 불안과 위기를 안고 있다. 퀘이 형제는 퀘이 형제일 뿐이니까. 그래서 <가상과 실재>는 만성적인 위기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박세홍뿐만 아니라 많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터들은 ‘혹시 이게 마지막 작업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떠안으며 작업한다. <인형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창작자의 고뇌를 캐릭터의 목소리를 통해 대신한다. 인형, 3D 캐릭터, 드로잉 캐릭터를 불문하고 엄연히 그들도 ‘배우’이고, 그래서 실직의 두려움을 토로한다. 


점잖게 드로잉 캐릭터가 다툼을 중재하려 하지만, 그의 처지 또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불안 위에서 만들어지는 법. 마지막에 홀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제작 시기와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조금 더 서둘러 왔어야 했다.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미 애니메이션 현장에서도 AI가 화두이니까 말이다. AI는 그저 아놀로그를 집어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다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빨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은 채, 결국 창작자까지 지워낼 가능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과 실체>가 애니메이션의 미래형으로 홀로그램을 내세운 것은 여전히 흥미롭다. 그것은 에디슨이 자신의 영화 장치인 “키네토그래프/키네토스코프”를 개발하면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음악가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소환해 올리는” 전망과 맞닿아 있다.* 또한 AI는 제작/생성에 관여하는 반면, 홀로그램은 재현의 디스플레이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연히 홀로그램은 AI와는 별개의 영역을 차지하기도 한다. 즉 <가상과 실재>가 AI 대신 홀로그램을 애니메이션의 미래형으로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AI에 대한 전망을 놓친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홀로그램이든 AI이든, 그 어떤 기술적 발전 또는 변화에 늘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나 위기 속에서 신박한 돌파구를 찾아내 왔다. 


* 에디슨의 전망과 <메모리즈MEMORIES> 중 오페라 가수가 홀로그램으로 등장하는 모리모토 코지의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에 대한 언급은 한지원의 <이 별에 필요한> 리뷰에서 다룬 바 있다.


찬찬히 돌이켜 보면 박세홍은 (그리고 그가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동료 독립 애니메이터들은) 늘 불안정한 여건 속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어려움은 단지 테크놀로지에 의해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니까. 그런 점에서 <가상과 실체>에는 “우리가 언제까지 애니메이션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엄근진한 근심 속에 “짠내와 짠함, 그럼에도 지금 만들고 있네”라는 유머 한 스푼이 담겨 있다. 여전히 박세홍의 진심은 애니메이션 그 자체로 향한다. 


인형 이야기 (2022)
인형 이야기 (2022)

그의 인형은 그를 닮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인형을 닮았다. 인형과 감독, 모두 진심이다. 상영관에서 인형을 닮은 그를 본다면, 스크린에서 그를 닮은 인형을 본다면, 그곳에 그의 진심이 함께 와 있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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