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Lost in Starlight
- seoulanimator

- 8월 14일
- 18분 분량
이 별에 필요한 Lost in Starlight | 2025 | 98mins | dir. 한지원 HAN Jiwon

닿지 않더라도 나란히 우린 걷고 있어
01. 이륙에 앞서
<이 별에 필요한>은 한지원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온전한 장편의 한 호흡으로 뽑아낸 첫 장편이다.
<이 별에 필요한>은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감성 본체 한지원과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 넷플릭스가 결합한 프로젝트이다.
<이 별에 필요한>은 SF 애니메이션이면서도, 로맨틱 드라마이자, 도전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
<이 별에 필요한>은 세련된 스타일의 룩과 풋풋한 인디 밴드의 사운드가 신과 시퀀스를 직조해 나가는 작품이다.
<이 별에 필요한>은 엄마의 과거로부터 딸의 미래로 향하는 서사이자, 떠난 여자들을 향해 줄기차게 신호를 보내려는 남자들의 서사이다.
이처럼 <이 별에 필요한>을 설명하고 소개하려 하다 보면 “A’이자’ B”, 즉 두 개 이상의 단문이 연결된 중문으로, 그리고 “A’와’ B”, 즉 두 개 이상의 항목이 결합된 문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제목 자체가 띄어쓰기에 따라 “이 별에 필요한”과 “이별에 필요한”이라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니는 점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며, 하나의 단순한 문장으로 풀이하다 보면 선택받지 못한 문장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아우성치는 상황을 낳는다. 물론 모든 문장을 빠뜨리지 않고 다 담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고 한들, 그것이 <이 별에 필요한>을 올바르게 풀어내는 해결책은 아니다. 또한 여타의 문장들을 유보한 채, 하나의 문장만을 선택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이슈/주제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더라도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해서 그릇된 이해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이상의 매력을 ‘아직’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 별에 필요한>에 대해 쓰고 말하려면 나름의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너무 단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접근법. 촘촘하게 얽힌 많은 것들 중에서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그 어떤 ‘하나’, 그리고 그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주요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다른 하나 (혹은 둘)’을 선택하고 결합하여 야무지고 요령 있게 입체도를 만들어내는 풀이법. 이는 감독 한지원이 <이 별에 필요한>을 제작하기 위해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의 인하우스 팀과 공동제작 파트너인 레드독컬처하우스를 연계하는 제작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방법이었고, 주인공 주난영이 생명체 탐지기의 성능 업그레이드를 고민하면서 핵심 장치의 레이어 배치를 새롭게 설계하는 설루션이기도 하다.
02. 30대의, 30대에 의한, 30대를 위한 이야기
그렇다. <이 별에 필요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주난영이라는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감독 한지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주난영과 한지원이 같은 인물이라는 섣부른 동일시가 아니다. 주난영과 한지원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 늘 한지원이 마련해 놓은 자리에 이번 작품에서는 주난영이 놓인다는 얘기다. 감독이 작품 속에 준비한 자리라는 건 바로 감독과 비슷한 연령대 (또는 처지)의 인물이 맡는 자리이다. <코피루왁>(2010)의 풋풋한 10대 말/20대 초가 그랬고, <딸에게 주는 레시피>(2017)의 수취인 격인 20대 후반이 그랬고,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의 삶에 지친 30대 초가 그랬다.
자기 나이 또래의 주인공을 설정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다짐이자, 자기가 현재 직면한 갈등과 고민을 작품 속에서 다루겠다는 결기이자, 때론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을 통해 감독 스스로 성찰과 성장을 하겠다는 실천이다. 또한 자기 또래의 관객에게도 말을 걸겠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이 별에 필요한>은 30대 관객을 향해 열려 있다.” 간파와 동시에 던져야 하는 질문, “그런데 30대 주인공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여러 수식어가 추가될 수 있다. 가령 “[30대/여성/독립 애니메이션 기반의 감독이 만든] 30대 [여성] 주인공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SF/넷플릭스 오리지널] 장편 애니메이션이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러니까 <이 별에 필요한>은 애니메이션 소구층을 창작자 자신의 연배로 이동시킨 대범한 기획이자 시도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고민했던 과제 중 하나는 관객 연령층의 확대였다. 어린이 중심의 작품 이외에 청장년층을 겨냥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독립 애니메이션과 상업 애니메이션의 구분 없이 요구되었다. 이에 대한 해법들은 장르이거나 소재에 국한된 경향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사 영화에서는 활성화되어 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소극적으로 다뤄진 SF, 호러, 누아르 등의 장르를 끌어들이거나, 하드 고어와 하드 코어처럼 “쎈” 소재를 취하는 식이었다. 요컨대 어른의 외투를 뒤집어쓰면 어른스러운 작품이 나온다는 접근법이었다. 그러다 보면 알맹이가 빠지곤 한다. 몸이 어른이 아니고, 생각이 어른이 아니고, 시선이 어른이 아닌 채로, 겉돌고 헛도는 기획들. 청장년이 어떤 일상을 사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선택과 판단을 하는지, 어떤 말투로 얘기하는지 등등은 장르와 소재의 클리셰가 저절로 (관성에 따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여겼나 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별에 필요한>을 보시라. 기회가 된다면 마찬가지의 태도로 한지원의 이전 작품들 (10대 말/20대 초반의 한지원이 그리는 또래,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또래...)을 보시라. 사실 이는 한지원의 작품에만 국한되는 감상법이 아니라, 여타의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창작품들 두루, 모두)을 대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 아무리 거장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창작자와 주인공의 나이대가 일치할 때 특유의 감각과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03. 근미래로의 초대
주인공을 감독의 연령과 비슷하게 맞출 때 <이 별에 필요한>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설정을 낳는다. 바로 근미래의 시간대이다. 작품은 2051년을 현재로 삼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엄마 손지영이 화성에서 사고를 당한 2026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까 엄마는 우리의 현재 (2025년 무렵)에 있고, 근미래는 지금으로부터 약 26년 (사고로부터 25년) 후에 놓인다. 이 말은 즉 엄마 손지영과 감독 한지원이 다시 동일한 연령대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감독은 자신의 나이를 통해 엄마-손지영과 딸-주난영, 두 여인의 삶과 이어진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현재이자 (작품 속) 과거인 엄마-손지영으로 살고, (우리로부터) 근미래이자 (작품 속) 현재인 딸-주난영으로 살아 본다.
엄마이면서도 딸이기도 한 이중 플레이는 마치 <딸에게 주는 레시피> 연작의 시도와도 닮아 있다. 엄마는 레시피의 발신자, 딸은 레시피의 수신자, 그 속에서 엄마와 딸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시간대로 수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엄마-손지영이 끝내지 못한 미션의 지점에서 딸-주난영은 그것을 이어받아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한다.
물론 우리는 <이 별에 필요한>에서 한지원의 이전 작품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의 대안적 전개 (마법 대신 과학, 절망 대신 희망)를 그려볼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을 거야>(2019)를 떠올리며 그 짧은 영상에서 생략된 이야기 (우주인 할머니의 젊은 시절)를 <이 별에 필요한>에서 보충할 수도 있다. 이처럼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을 짓고, 서로를 통해 보완하고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감독과 주인공의 ‘또래’ 설정에서 비롯되며, 그 지점을 엄마와 딸의 관계 속에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엄마, 딸, 감독이 한 점에서 수렴하고 확산하는 것이다.
근미래 설정임에도 현재 시점에서도 짐작이 가능한 시간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즉 25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은 <이 별에 필요한>에서 SF가 지니는 성격을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근미래에 기반한 SF는 현재의 과학기술이 당장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시도한다.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최악 (가끔은 최선)의 상황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비 또는 경고를 날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근미래 SF는 작품이 설정한 시간대가 현실을 관통하면서 이제는 과거가 되었을 때, 예언의 실현 여부를 두고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1984년에 조지 오웰의 『1984』(1949)가 (무엇보다 백남준을 통해서) 그러했고, 1988년에는 <아키라>(1988)*가 그러했으며, 2001년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2019년에는 <블레이드 러너>(1982)**... 아,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1989)의 2020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터미네이터>(1984)가 ‘스카이넷’의 역습을 설정한 2029년이 얼마 안 남았다!
*사실 아키라는 원작 만화에서는 첫 출판이 시작된 1982년으로 상정한 것처럼, 근미래 보다는 동시대이기는 하다.
**2017년 속편을 통하여 유효기간이 2049년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근미래 SF를 예언서로 여기고, 작품에 대한 평가를 예언의 실현율로 판단하는 건 분명 난센스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전개는 늘 당대의 전망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다. 변수는 항상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근미래 SF의 매력과 가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절망 (간혹 희망)을 미리 맛보면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경각심을 갖는 것에 있다.
이 점에서 <이 별에 필요한>이 기존의 근미래 SF 창작물과 궤를 함께 하는지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과학기술은 SF의 장르적 속성을 충실히 따르는가? 판단을 위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근미래적 과학기술을 꼽아보자.
화성 탐사, 테라포밍을 위한 식물 재배, 생명체 탐지기, AR/VR의 홀로그램, 자율주행 자동차, 에어 택시 (실물은 등장하지 않고 서울역 앞 안내방송으로 언급된다), 필요할 때 나타났다가 이내 바닥에 감춰지는 옷장... 이에 더하여 전광판에 잠시 보이는 뉴스 헤드라인의 소식들 중, 디지털 영생을 가시화한 디지털 의식 이전 성공까지 (사실 이 뉴스는 국내 소식의 세 번째에 소개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과학계를 뒤집어 놓을 어마무시한 성과이다)...
이들 중 가장 선명한 것은 분명 화성 탐사일 것이다. 이미 엄마-손지영이 2026년에 처음 프로젝트에 합류하였고, 이 와중에 사고를 당하였고, 때문에 딸-주난영이 현재의 추동력으로 삼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별에 필요한>이 전적으로 화성 탐사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화성 탐사는 난영과 제이의 연인 관계에 가장 큰 난관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줄기이지만, 두 사람의 격리를 굳이 화성행에 얽매지 않고도 이야기는 성립할 수 있다. 예컨대 원양어선을 탄다든가, 중동 건설 현장으로 떠난다든가, 남극 세종기지로 파견을 간다든가 등등…
즉 화성 탐사를 중심에 두기 위해 2051년이라는 근미래를 설정했다기보다는, 지금으로부터 25년 후의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화성 탐사가 (원양어선이나 중동 건설이나 남극 기지 보다) 과학기술적으로 제법 매력 있는 소재로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상상 가능한 근미래 소재임에 분명하다.
04. SF입니까?
그렇다면 이 작품은 SF가 아닌 걸까? 혹은 SF인 척을 하는 걸까? 섣부른 판단은 아직 이르다. 다만 SF가 중심에 놓이거나 모든 것이 그것에 수렴하지는 않는다. 중간 정리를 하자면 <이 별에 필요한>에서 SF는 작품의 핵심 혹은 주인공의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기술 자체가 주인공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SF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과학기술은 이 작품에서 25년 후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맥락과 환경을 제공한다. 오해는 말자, SF가 그저 병풍 역할에 그친다는 말이 아니다. (작품 준비 과정에서 감독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통해 과학자문을 받았다. 단순한 요식 절차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꼼꼼히 챙겼는지는 글 후반부에서 좀 더 언급하기로 하자.)
한지원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25년 후 근미래의 일상과 풍경을 가장 그럴싸하게 상상하고자 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대가 흐른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합리적(!) 상상을 한 것이다. ‘합리적 상상’이라는 말이 다소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다. 25년 이후를 합리적으로 (즉 공상의 탈을 쓴 망상이 아니라, 말이 되는) 상상하기 위해서는, 25년 전을 떠올려보면 된다. 2000년의 모습으로부터 현재까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은 2번 반 변했다. TV는 납작해졌고, 낯선 길을 운전할 때는 “방방곡곡 지도책” 대신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를 해주고,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얼마 전부터 AI 활용 서비스가 순식간에 퍼지고 있다. 반면 여전히 인간이 운전대를 잡고 있고, 자동차 바퀴는 지면 위를 굴러가고, 사람들은 콘크리트 건물 속에 살며,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기다려야 하고, 치킨은 언제나 맛있지만 비만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감기 몸살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바뀐 것도 많고, 바뀌지 않은 것도 많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꿈쩍도 안 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난영이 엄마가 남긴 LP는 25년 후에도 소리를 재생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고장 나면 부품을 구하기는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자율 주행 자동차로 이동하지만, 실내 귀퉁이에는 커다란 생수통을 꽂아 쓰는 정수기가 놓여있는 풍경 (이는 여전히 생수통 사업이 유지되며, 누군가는 그때에도 끙끙대며 생수통을 들어 올려 내리꽂아야 한다는 말이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면서 25년 후의 ‘이곳’을 상상할 때, 한지원이 꽤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은 맑고 사람들은 방독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점으로 보아 초미세먼지 농도가 악화된 것 같지는 않고, 가로수가 야자수가 아닌 점에서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급변하지도 않은 것 같고, 도심 도로의 차량 정체도 현재보다는 다소 완화된 것 같으며, 노들섬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보아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서 전 세계의 해수면이 급상승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며, 청계천 인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밤낮으로 제법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서울의 지나친 과밀화도, 도심의 공동화 현상도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저 부정적인 것을 그려 넣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진 낙관적 모습이 아니다. 매 장면, 각각의 장소와 공간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치밀하게 ‘낙관적으로 보이게끔’ 계획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어느 곳에나 화분이 놓여있고, 그곳에서 식물이 자란다 (하물며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는 난영의 아빠마저도 가장 공들이는 것이 식물 관리이다!). 가장 음습해야 할 것 같은 세운상가 1층 교각 기둥들에도 화분이 설치되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유지되는 낙관이 아니라, 철저히 꼼꼼하게 관리해서 유지하는 낙관이다.
식물만큼이나 공간을 채우는 것은 빛이다. 시간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빛의 색깔, 세기, 방향, 기울기가 다채롭다. 그로부터 광원의 위치를 화면 밖에서든 안에서든 특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빛은 정확한 위치 설계를 따른다. 더욱이 인물이 이동할 때도 그 동선을 따라 배치된 광원에 의해 인물에 드리우는 빛의 세기와 색이 바뀐다.
빛과 식물이 채우는 세상은 잿빛이 될 수 없다. <이 별에 필요한>에서 SF가 삶의 맥락과 환경을 제공한다는 말은 이러한 기능, 즉 근미래에 제법 그럴싸한 낙관적인 일상의 풍경을 가능케 한다는 얘기이다.

05. 치밀한 빌드업
현재로부터 25~26년 후의 세상에서 첨단과학기술 전문직의 30대 여성과 뮤지션의 꿈을 간직한 또래 남성의 일과 사랑을 이야기할 때, “자율 주행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연인”이라는 볼거리 이외에 SF는 또 어떠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근미래의 과학기술은 그저 미장센과 스타일이라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고 마는 걸까?
질문은 “SF라는 장르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보여주었는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SF는 아주 큰 스케일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거나 (과거의 사건을 미래 시제로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어떠한 식으로 전개될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거나 (앞서 말했듯이 최악을 대비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여타 예술적 창작이 그러하듯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SF인 만큼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왔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별에 필요한>은 SF의 규범과 관습, 전통과 언어에 크게 연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완고한 SF 근본주의자가 “이 작품은 SF가 아니오!”라고 준엄하게 단정한다면 “뭐,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요”라고 답할 듯싶다. 하지만 교조적 입장을 유보하고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한지원이 SF적 요소를 얼마나 꼼꼼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활용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난영과 제이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엄마가 남긴 LP 플레이어를 고치기 위해서 세운상가를 찾아갔을 때이다. 수리점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우주인을 소재로 한 <가장 먼 외출>을 홍보하는 홀로그램 영상을 사이에 두고 난영과 제이가 부딪친다. 고장 난 LP 플레이어가 두 번째로 박살 나는 상황이다.
# 그렇다면 애초에 LP 플레이어는 어쩌다 고장이 난 걸까? 한국에 막 도착한 난영이 자신의 숙소에서 짐정리를 하면서 휴스턴 본부에 남아 있는 동료 로사와 영상 통화를 하던 중, 별안간 ‘어떤 로봇 장비’가 난영을 향해 날아들어서 우당탕쿵탕 사달이 났다.
# 이 로봇의 정체가 뭐길래? 바로 “생명체 탐지기”이다. 난영이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장치이다.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한 성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난영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이 장치가 난영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도한 까닭도 난영을 생명체로 탐지하였기 때문에 반응한 것이다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서는 확실히 업그레이드가 필요해 보인다).
# 난영은 왜 생명체 탐지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화성에서 사고를 당한 엄마를 구조해내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다. 사고가 난 지 25년이 지났기 때문에 생존을 기대하는 것은 무모하겠지만, 이제까지 난영의 커리어를 이끌어 온 추동력이다.
# 난영이 해야 할 생명체 탐지기의 업그레이드는 두 가지이다. 우선 ‘분해능’을 향상시키는 것. 탐지기가 생명체를 찾아내는 원리는 “미생물이 호흡으로 배출하는 유기물의 흔적”을 포착, 분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 자문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난영의 여행용 캐리어에 담겨 있던 생명체 탐지기가 (오) 작동하여 난영에게 다가간 것도 바로 난영의 호흡에서 나온 유기물에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체 탐지기는 과거의 엄마로부터 출발하여 (엄마의 유품인 LP 플레이어의 고장과 수리를 위해) 현재의 제이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작품의 전반부 전개에 해당한다.
# 생명체 탐지기의 두 번째 업그레이드는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그래야 화성행 우주선에 실을 수 있다. 무엇보다 개발자인 난영이 직접 탐지기를 가지고 화성에 가고자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난영은 현재의 제이를 떠나 과거의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이는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 크기를 줄이는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어렸을 적 난영이 껌종이와 테이프를 가지고 만들었던 종이 인형. 이 방식을 응용하여 핵심 부품을 이루는 레이어의 순서와 소재를 재조합하면 된다 (이 역시 과학 자문의 디테일 포인트!). 껌종이와 테이프로 만든 종이 인형은 늘 엄마와 함께 했다. 즉 작품의 시작과 마지막을 연결한다. 뿐만 아니라 <뭐든 될 수 있을 거야>에서도 이미 등장했으므로, 두 작품 사이의 가교 역할도 한다.
# 고장 난 턴테이블 (생명체 탐지기 때문에 한번, 제이와 부딪혀서 또 한 번 수난을 겪었다)도 마침내 수리를 마쳤다. 제이가 LP 플레이어를 난영의 집으로 가져왔을 때, 그는 난영 엄마가 남긴 “앨리스 메이 킹” 음반을 재생하려 했고 (난영이 처음 턴테이블을 떨어뜨렸을 때도 그 음반을 재생하려던 참이었다. 엄마의 음반은 그렇게 난영과 제이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이다), 그 속에서 난영 엄마-손지영의 마지막 영상을 발견한다. 오프닝 장면과 같은 사고 상황이면서도 새로운 각도(수신자를 향해 보내는 영상 메시지의 시선)로 그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 제이가 난영 엄마-손지영의 마지막 영상을 확인할 때, 난영이 우주 탐사 멤버로 합류한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작품의 중간 지점이다. 엄마, 난영, 제이, 세 사람이 교차하고 엇갈린다. 두 남녀의 갈등도 최고조가 된다.
# 지구를 떠난 난영이 화성에 다가갈 때, 화성을 둘러싼 우주 공간은 LP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블랙홀 주변 (뿐만 아니라 중성자별, 백색왜성 등 강력한 중력원을 중심으로 물질들이 회전하면서 만들어내는 원반 구조)의 ‘강착 원반’, 보이저 호에 실려 먼 우주로 보내진 ‘골든 레코드’ (거기에는 지구와 인류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등등, 우주 어딘가에서 우리는 LP판을 떠올릴 수 있다 (데이비드 보위, 들리는가?).
#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 난영은 제이와 어떤 모습으로 만나야 할까? 어김없이, 처음 부딪혔던 바로 그 장소에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영상을 뚫고서. 난영과 제이는 첫 만남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재회한다.
섣불리 SF에 도전했다가는 자칫 디테일 설정의 늪에 빠져 전체를 놓치거나, 반대로 전체의 스케일과 구조에 집착하여 세부적인 것들을 간과할 수 있다. 야심 찬 포부를 내세우며 창대하게 시작했던 SF 망작들은 그렇게 주저앉은 경우가 빈번하다. 더욱이 장편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생명체 탐지기나 껌종이로 만든 종이인형도 자칫 단순한 소품에 그칠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이야기의 발단부터 종결에 이르는 전체의 구조를 긴밀하고 탄탄하게 구성할 수 있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SF에서는 특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고안하여 배치하였다면 거기에는 마땅히 의도한 기능과 목적이 장착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세심하고 정밀한 기획과 설계만으로 <이 별에 필요한>과 SF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06. 레코드, 홀로그램, 전파
레코드
여전히 ‘25년 후의 사랑과 일에 대한 이야기’에서 도대체 SF 또는 과학기술의 상상력이 어떠한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 사실 새로운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창작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당사자들도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취하는 전망은 창작자들과 큰 차이가 없기도 하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야심작인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이 장치의 여러 가능성을 적어본 것이다.
속기사의 도움 없이 편지를 받아 적게 하는 것
맹인을 위한 축음기 책
발성법 교육
음악 재생
“가족 음반” (가족 구성원이 직접 자기 목소리로 대화, 회고담, 유언을 녹음)
뮤직박스 겸 장난감
명확한 목소리로 집에 갈 시간, 밥 먹을 시간 등을 알려주는 시계
발음 방식을 정확히 재생하여 언어를 보존함
교육적 용도 (교사의 설명을 녹음해 두면 학생이 언제든 돌려 들을 수 있고, 단어의 철자나 다른 교과 내용을 녹음해 두면 암기하기도 쉽다)
전화와 연결해서 사용하면, 전화를 일시적 대화를 주고받는 수단이 아니라 귀중한 영구 녹음본을 전송하는 보조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현실문화, 2010), 272쪽 인용)
한마디로 무궁무진하다. 그런데도 결국 사람들이 축음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용도는 네 번째 항목인 “음악 재생”이다. 애초에 항목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중을 따진 우선순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에디슨의 목록을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일단 열 개의 낚싯대를 던져 놓고 물고기가 덥석 미끼를 무는 것에 재빨리 반응하면 되는 식이다.
<이 별에 필요한>에서 난영의 엄마가 애정한 “앨리스 메이 킹”의 LP 또한 ‘음악 재생’을 위한 용도이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뮤지션’ 제이의 음악은 LP가 아니라, 파일 형식으로 음원 사이트의 클라우드에 업로드된다. 난영과 제이가 ‘우연 이상의 인연’으로 연결되는 계기는 바로 난영이 제이의 음원을 발견하여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고 지속적으로 재생하여 들었다는 점이다.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았음에도, 게다가 아주 잠시만 클라우드에 올렸다가 내렸음에도, 제이의 노래를 난영이 들을 수 있던 것은 새로운 기술 덕분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LP 플레이어가 고장 나서 수리점을 찾아 헤맨 것도, 그 와중에 제이와 난영이 마주치게 된 것도, 그리고 클라우드에 업로드된 음원 파일을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것도 모두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 특히 난영과 제이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얘기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LP, 음원 파일이라는 ‘음악 재생’이 엄마와 난영, 난영과 제이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면서 그다음 항목, 즉 “가족 음반”으로 성격을 확장하는 용도 전환이다. 난영에게 “앨리스 메이 킹” LP는 음원 파일로 대체할 수 없는, 즉 음악 재생을 뛰어넘는 소중한 유품이다. 거기에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송두리째 담긴 추억 앨범과도 같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실제로 엄마의 마지막 영상 메시지가 LP 재킷 안에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난영이 “앨리스 메이 킹” LP를 재생하다는 것은 그저 음악을 듣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앨범에 간직된 엄마를 만나는 시도이다.
음악 재생에서 가족 음반으로 확장되는 것은 단지 LP에 국한되지 않고 제이의 음악 파일에도 적용된다. 화성으로 떠난 난영은 제이의 곡을 반복 재생하면서 그 속에서 제이를 그리워한다.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쓰임새는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홀로그램
사실 에디슨이 내심 바랐던 대박 활용법도 바로 가족 음반에 있었다. 그는 사진이 광학적 기록을 통해 생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하여 앨범에 보관하듯이, 축음기가 생전의 목소리를 생생히 보존하여 언제든 꺼내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앨범’이라는 사진과 축음기의 용도를 좀 더 완벽한 형태로 결합한 것이 바로 “영화”이다. 에디슨이 자신의 방식으로 발명한 영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에 대해 전망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자신의 발명품 뿐만 아니라 머이브릿지Edward Muybridge, 마레Etienne-Jules Marey 등의 연구가 수년 내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가 되면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성대한 오페라가 펼쳐지리라.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티스트와 음악가들이 어떠한 변화나 차이 없이 오리지널 상태 그대로를 간직한 채로 무대에 오를 것이다”
(W.K.L. Dickson and Antonia Dickson, History of the Kinetograph, Kinetoscope and Kineto-phonograph (1895) 중 에디슨이 쓴 서문)
에디슨은 영화를 통해 이미 떠난 자들을 언제든 ‘생생하게’ 소환하기를 기대했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를 모티프로 삼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으로 1995년에 오토모 가츠히로가 제작 총지휘를 맡은 옴니버스 장편 <메모리즈 MEMORIES> 중, 모리모토 코지가 감독한 첫 번째 에피소드 <그녀의 추억 Magnetic Rose>를 꼽을 수 있다.* 우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조난 신호는 오래전 죽은 오페라 가수가 녹음한 앨범에서 무한 재생되는 아리아였고, 사람들은 홀로그램에 현혹된다. 에디슨의 예언을 뒤틀린 악몽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이 발표된 1995년은 바로 영화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곤 사토시가 설정과 각본을 맡았다.
<이 별에 필요한>에서 앨리스 메이 킹 LP에 소중히 보관된 영상 또한 엄마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 곳곳에는 홀로그램 영상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을 현혹하는 <그녀의 추억>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인다. 25년 후의 근미래에서 홀로그램은 AR, VR, 전광판, 간판 등등,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디스플레이에서 전방위적으로 활용된다. 물론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미래의 풍경이다. 놓치지 말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작품 속 근미래 현실 공간이 어떻게 새롭게 재배치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어떠한 상황에 놓이는가”이다.
근미래의 서울에는 새로운 고층 건물들과 교통 인프라가 들어서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의 건물들도 여전히 함께 한다. 세운상가가 철거되지 않고도, 그렇다고 디스토피아 분위기를 내는 흉물로 방치되지 않고도, 오히려 홀로그램 레이어를 얹음으로써 적절히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뉴트로 스타일로 힙하게 거듭난다.** 제이가 거처로 삼기에 딱 알맞은 장소 아닌가! 때론 건물 옥상에서 홀로그램을 투사함으로써 도시는 그 자체로 영화관,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이 되기도 한다.
**물론 정휘빈이 <엔터티> (2024)에서 그려낸 음침한 디스토피아적 세운상가도 만만치 않게 매력적이다. (<엔터티> 리뷰 참조)
홀로그램은 영상 통신에서도 빠질 수 없다. 지구 저편에 있는 상대방일지라도 홀로그램 이미지로 언제든 이곳으로 훌쩍 건너와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비록 실체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원거리 소환술은 어쨌든 지금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하지만 요란스레 시선을 끄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홀로그램은 <이 별에 필요한>의 일상 공간을 재편한다. 현재의 우리가 자신의 방이나 사무실에서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컴퓨터나 TV를 켜놓듯이, 근미래의 방, 사무실에는 늘 디스플레이의 홀로그램이 띄워져 있다. 더욱이 라이팅 설계에 공을 들인 작품인 만큼, 홀로그램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이미지를 증식시킨다. 이렇게 배치된 홀로그램은 이미 해당 공간을 채우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에워싼다. 그러면 홀로 있는 곳일지라도 늘 (홀로그램이라는 가상/복제/증식 이미지의)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를 위해 눈여겨볼 장면은 바로 난영이 탐사대에 합류하기 전에 유언 영상 (영화에 대한 에디슨의 전망을 어김없이 상기시킨다)을 기록하는 모습이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치르는 의식,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절대 고독의 시간. 모니터와 마주한 난영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되비친다. 그리고 그 모습이 다시 주변의 유리창에 반사된다. 그렇게 죽음을 예비하는 적요한 공간에서 난영은 혼자이자 여럿이다. 이를 불안한 자아의 분열로 볼 것인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한 자가 증식으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홀로그램 (그리고 세심한 광원 세팅에 따른 반사 이미지)은 작품 전체의 장면들을 부지불식 간에 채우고 있다.***
***홀로그램은 아니지만 우주 센터의 복도를 걸어갈 때에도 복도 옆 유리 구조물에 난영 일행의 움직임이 반사되어 나타난다. 밝은 조명 세팅 때문에 상대적으로 희미하게 처리되어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제작진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설정이다.
물론 난영과 제이가 처음 부딪힌 장면,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재회하는 장면에서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어김없이 중요한 극적 장치로 활용된다.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이러한 설정은 홀로그램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홀로그램의 가상 이미지를 “뚫고 나오는 (단단한 그리고 따뜻한) 실체”!

전파
영화가 이미지 소환술을 부릴 수 있는 까닭은 빛, 그중에서도 가시광선을 이용하는 광학 장치이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반사한 빛이 필름에 코팅된 감광유제에 닿아 형태를 기록하고, 영사기가 빛을 쏘아 필름에 기록된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투사한다.
빛의 스펙트럼에는 가시광선 영역 외에도 파장이 가장 길고 주파수가 낮은 끝자리를 차지하는 전파 영역이 있다. 통신기기는 빛 중에서도 전파를 이용한다. TV도 라디오도 휴대폰도 모두 안테나로 송수신되는 전파를 사용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와 통화를 할 때, 우리는 빛의 속도로 연결된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기 때문에, 지구 어디에 있든 거의 시간차를 느낄 수 없다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통신 기술과 기기의 성능, 서비스 사양, 데이터 사이즈 등에 따라 동네 친구랑 통화할 때도 버퍼가 걸리곤 하지 않던가).
*엄마의 사고로 큰 충격을 받은 난영의 아빠가 그날 이후로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전파를 보내는 안테나이다. 난영의 사고 소식에 제이가 가장 먼저 황급히 찾아 나선 것도 난영 아빠의 안테나였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로맨스 서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휴대전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연인들 사이에 안타깝게 엇갈리는 전형적인 클리셰가 사라졌다. 떠나는 연인을 눈앞에 두고 신호 대기 때문에 한발 늦게 도착할 일도, 다급히 적은 쪽지를 건네받지 못할 일도 없다. 물론 휴대전화로 인해 새롭게 생긴 오해와 갈등도 있어서 로맨스 장르는 유지되기는 한다 (늦은 밤 “자니?” 메시지라든가, ‘읽씹/안읽씹’ 상태 표시라든가 등등).
그런 와중에 고전적 로맨스 서사의 애절함은 의외로 SF와 결합하면서 되살아나기도 한다. 지구 밖으로 멀어질수록 전파가 닿는 시간차가 커진다.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 (2002)가 이 지점을 다뤘다. 스마트폰이 개발되기 이전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문자 메시지를 건네고 음성사서함을 사용하던 시기였다. 전파로 연결됨에도 시간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스토리는 로맨스의 무대를 우주로까지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별에 필요한>이 현재의 시점에서 원양어선(이나 중동 건설 현장이나 남극기지 등등)을 타는 대신, 굳이 25년 이후의 근미래로 넘어가서 SF와 결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장거리 연애’가 아니라, 시간적 딜레이에 의해 발생하는 심리적 긴장감과 지연된 기다림을 정서적으로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주적 규모에서 일어나는 시간차가 로맨스가 아닌 다른 반응도 일으킨다는 점을 바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SF 영화 <마션> (201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앤디 위버의 원작 소설에 기반하기도 한 이 이야기는 조난과 구조를 지구 규모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지구 밖 우주로 확장하였다. 가느다랗게 연결은 되어 있지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지구와 화성 사이의 시간차 때문에 즉각 대응이 어려운 상황을 드라마로 만들면서 <마션>은 SF 버전의 안타까움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별에 필요한>은 <별의 목소리>의 SF 로맨스만큼이나 <마션>의 SF 조난을 흡수한다. 엄마-손지영에 의해 한번, 딸-난영에 의해 또 한 번, 조난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SF 조난이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조난’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새롭게 경험하는가”라는 지점이다.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지만, 현대의 조난 중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난자들이 화면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리 있다”는 사실이다. 전파를 이용한 통신은 조난을 생중계하지만, 정작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교통수단이 현장에 닿기까지에는 물리적, 거리상의 제약이 놓여 있다. SF 조난/구조은 그 제약을 더욱 강하게 주지 시킨다.
이처럼 <이 별에 필요한>은 레코드, 홀로그램, 전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근미래에서 벌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를 직조하였다. 과학과 기술에 기반을 둔 SF 장르가 어떻게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전통적인 서사가 시대의 전망과 어떻게 맞물려 풍성해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07. 테크노 시대의 데메테르
난영은 무사히 돌아왔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도 <이별에 필요한>이 아니라 <이 별에 필요한>이 되었다. 감독 한지원은 그렇게 해피 엔딩을 선택하였다. 어째서? 이 물음에 한지원은 30대 주인공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망, 위로, 격려 그리고 사랑일 것이라는 의미로 답했다. 30대 주인공들에는 감독 자신도 포함될 것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얘기한 것처럼, 주난영과 한지원을 동일시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SF이기 이전에 30대가 들려주는 또래 30대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30대 중 한 명인 감독은 자신에게 필요한 엔딩을 정한 것일 테다.
작품에서 화성 탐사 프로젝트 이름에 “데메테르”가 부여되었다. 올림푸스 12 신 중에서 곡식, 농경, 수확, 풍요, 계절, 대지의 여신으로 결혼의 유지를 주관하는 데메테르. 인류의 이주를 위한 테라포밍 과업에 적합해 보인다. 엄마-손지영이 정성을 들여 얼음새꽃을 가꾸는 모습도, 난영의 아빠가 식물에 애정을 기울이는 것도 데메테르의 이름에 어울린다. 난영이 화성에서 조난을 당한 상황에서 얼음새꽃을 발견함으로써 난영의 엄마는 데메테르와 합일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데메테르 프로젝트를 듣는 순간, 비극을 예상했다. 데메테르라는 여신은 얼음새꽃과 테라포밍을 담당하는 엄마-손지영에게는 적절할지언정, 딸-주난영에게는 마치 정해진 비극적 운명처럼 들렸다. 데메테르의 외동딸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명계에 머물지 않던가? 난영이 화성 탐사 중 자신이 개발한 ‘생명체 탐지기’가 반응하는 신호를 따라 땅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에서 어찌 하데스의 영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비극을 예견한 것은 단지 그리스 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나로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테크놀로지 시대의 조난이 더 크게 다가왔다. 우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생생하게 조난의 현장을 중계로 바라보지만, 사고 당사자들을 쉽게 구조할 수 없다는 현실에 더없이 충격을 받고 좌절한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빠르다고 하지만, 구조의 기적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그 기적이 난영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바랄 수 있을까?
질문은 “현실 세계의 재난 앞에서 무기력할 때,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여타의 예술 창작)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이 물음이 낯선 것은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이 전환점을 맞은 계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경험이었다. 애니메이션은 기적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무사히 재난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엔딩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 재난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어떻게든 구조의 손길을 뻗치려는 간절한 노력을 응원하면서, 우리의 무뎌진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살려내는 데에 있다. 우리가 직접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디어 속의 재난 상황은 자칫 실체 없는 가상에 머물면서 현실감각을 잃기 쉽다. <이 별에 필요한>이 레코드, 홀로그램, 전파를 통해 연결하려 한 것도 그저 난영과 제이 사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타까움에 반응하는 우리의 정서이다.* 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 중 어디로 향하든, 우리의 감수성이 그 과정에서 잠시라도 깨어났다면, 미션은 성공이다.
*화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을 탑승하기 위해 오르는 장면에서 난영과 로사의 sns 계정이 인서트로 보여진다. 난영의 계정은 “게시물 0, 팔로워 12.7k, 팔로우 189”, 로사의 계정은 “게시물 1023, 팔로워 90.1k, 팔로우 163”. 로사의 sns는 평소처럼 자신의 행복한 사진을 포스팅하고 있지만, 난영은 게시물을 모두 지웠다. 승강기 안의 두 사람이 각자 어떠한 심정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난영의 마음을 읽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가슴 한 켠이 아리어왔다면, 우리의 공감능력은 아직 살아 있다.
마지막으로 <이 별에 필요한>이 보여준 근미래적 상상력을 짧게 복기해 보자. 작품 속에서 테크놀로지는 단지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도구라는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미디어는 그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 즉 매체는 비워졌던 공간을 채우는 매질,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또 다른 구체적인 실체로 작용하는 물질적 존재로 위상을 갖는다. 이때 미디어는 외부적 객체인 매개’체體’가 아닌, 능동적인 주체의 성격을 지니는 중재’자者’, 중계’자者’가 된다.
<이 별에 필요한>이 SF를 새롭게 다뤘다면 그것은 테크놀로지를 하나의 소재, 대상, 도구, 수단이 아니라, 엄연히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자actor로 설정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았던 테크놀로지를 가시화하되, 단지 감정과 정서를 담는 상징화나 사람의 외양을 흉내 내는 의인화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물성 자체를 유지하고 드러내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화성에서든 지구에서든 살아남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로지를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테크놀로지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 이러한 새로운 관계 덕에, 고장 난 LP 플레이어를 사람이 수리하듯, LP 플레이어가 사람의 정서를 보듬어 치유한다.
제이의 노랫말처럼 서로를 보고 있는 “0과 1 어디쯤”은 부재와 존재 사이이면서도, 디지털 2진법의 세계이기도 하다. 굳이 양자역학까지 떠올릴 필요 없이, 우리는 그 사이에서 “닿지 않더라도 연결되어 나란히 걷고 있다”.

나호원 Joint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