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REVIEW_UNIQUE TIME

  • 작성자 사진: seoulanimator
    seoulanimator
  • 1월 24일
  • 8분 분량

유니크 타임 Unique Time | 2022 | 16mins 49secs | dir. 오유진 OH Yujin


안드로이드는 조지 오웰의 꿈을 꾸는가?


​​#01.

“오직 당신만을 위한 유니크 타임. 외로우신가요?... 유니크 타임의 역할대행 안드로이드로 당신이 원하는 그 누군가를 만나보세요. 유니크 타임은 당신에게 특별한 시간을 선사합니다” 


오유진의 2022년 작품 <유니크 타임>은 무려 ‘16분 49초’ 분량의 ‘SF’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2020년 무렵부터 한국의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은 부쩍 호흡이 길어지기 시작했으니, 16분 남짓이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또한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SF 장르가 아직 주류의 한 줄기를 굵직하게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낯선 영역도 아니다. 그럼에도 <유니크 타임>은 분명 서사의 길이와 장르의 스토리텔링 면에서 기존의 독립 애니메이션들과는 다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테면, 그간의 SF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은 ‘작은 이야기’를 하나의 호흡 속에서, 함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마치 우화를 들려주듯, 그러면서도 뭔가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식으로 전달되었다. 상황이 사건보다 우선하였고, 구체적 사건은 하나의 일화처럼 제시되었으며, 스케치 식의 압축적인 연출이 액팅을 대신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콘셉트 설정이 내러티브 구조를 대체하고, 근원적 갈등은 좀처럼 건드려지지 않은 채, 자기만족적인 결말로 성급히 마감하곤 했다.


이러한 아쉬운 경향을 그저 창작자의 한계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8~10분 이내의 단편 애니메이션 러닝 타임 (이 정도가 2020년 이전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의 평균치일 테다)으로는 SF 장르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보량을 원활히 전달하지 못하는 물리적 제약이 크다. SF 스토리의 스케일이 클수록, 상황이 복잡할수록, 작품 속 과학기술적 설정이 독창적이거나 치밀할수록, 작품에서 오리엔테이션은 길어지고 본론은 짧아지는 현상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결국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24년에 발표된 정휘빈의 <엔터티>가 SF 장르의 드라마를 풀어낸 길이도 17분 28초였다. 


그러니까 <유니크 타임> (그리고 <엔터티>)은 SF를 드라마 구조 속에서 충분히 펼치기 위해서는 단편 애니메이션의 호흡이 조금 더 길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한지원의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가 24분, 김상준의 <메아리>(2022)가 17분 26초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는 단지 SF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탄탄한 드라마를 위해서 분명 예전보다는 단편 애니메이션의 러닝 타임이 더 늘어났다. 지난해 주목할 작품 중에서도 최지희의 <후잉>이 15분, 한병아의 <만복탕>은 22분에 달했다.


#02.

<유니크 타임>이 16분 49초를 단지 이야기의 전개에만 할애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소재와 줄거리로 보자면, 얼핏 <유니크 타임>이 전적으로 ‘유니크’하지만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량 생산된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은 이미 하나의 전형성, 또는 나름의 전통/계보를 형성해 왔다.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이를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데츠카 오사무의 <우주소년 아톰>부터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 그리고 아톰을 만화로 리메이크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 등등. 단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의미의 ‘로봇’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외양을 흉내 내고, 인간의 사고를 모방함으로써 인간의 반열에 한껏 다가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문제,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는 <유니크 타임>이 SF 장르에서 따르게 될 특정한 갈래를 이루어 왔다. 


<유니크 타임>은 이러한 계보 속에서 자신만의 ‘유니크’한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장르’의 필드에 입장하였을 때, 각각의 작품은 자신이 속한 장르에서 이제껏 비어 있던 좌표를 용케 찾아내거나, 기존의 좌표값을 비틀고 뒤집어서 자신만의 변주된 자리로 재설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차별화를 위해 무엇을 유지, 강화하고 무엇을 겨냥하여 공략할 것인가? 정석 플레이를 할 것인가, 변칙 플레이를 할 것인가?


<유니크 타임>을 기획, 제작할 당시, 감독 오유진은 애니메이션 경력의 출발점에 서있었다.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션에 발을 들인 상황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전문 교육 기관 소속으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확 튀거나, 아니면 탄탄하게 기본기를 입증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사이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기본에 충실한 똘끼’를 도모하는 건 불가능하다. 튀려다가 처참히 고꾸라진 사례도 많고, 지나치게 기본을 따르다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야심과 부담감이 자기 안에서 수시로 대립하며 꿈틀대기 마련이다.


SF 장르의 정공법은 세계관을 설득력 있게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옛날 옛적에, 멀고 먼 은하계에서...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라는 텍스트로 시작하는 스타워즈 시리즈는 지극히 예외적이다 (그래서 스타워즈 시리즈는 미래로 향하지 않고, 계속 신화적 기원으로 돌아가려 한다). 잿빛 대기에 잠긴 LA 도시 풍경을 보여주는 <블레이드 러너>, 전통적인 셀 작화와 3D 컴퓨터 이미지를 과감히 분리, 병렬한 <공각기동대>의 오프닝이 ‘세계관의 시각화’를 초반부터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유니크 타임>은 대량 수송되는 안드로이드의 모습과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 풍경을 교차하면서 작품의 세계관을 신속하게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멀지만은 않은 미래, ‘여기’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지지만은 않은 도시에서 일어난다. 그러하니 안드로이드가 처할 상황은 어쩌면 우리도 조만간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렸다. 이때 오유진은 풍경을 그저 바깥에 두지 않는다. 오프닝뿐만 아니라 작품 전반에서 도시의 모습은 유리와 거울, 디스플레이 표면을 통해 반사되고 되비치는 식으로 다뤄진다.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이 빈번히 오버랩된다 (이러한 설정은 2025년에 공개된 한지원의 <이 별에 필요한>에서 더욱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레이어 공정으로 구현되었다). 안드로이드 J-204, 제이는 거울이 아닌,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곤 한다. 자신을 소비하는 차창 밖 세계, 그 위에 얹힌 반사 이미지, 결국 세상 속에서 안드로이드 J-204/제이는 신기루 같은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리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깨비 마냥 쉽게 지워지고 대체될 존재. 안드로이드가 차지하는 것은 부재의 영역이다. 유니크 타임 광고는 대뜸 묻는다. “외로우신가요?”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 언젠가 그 빈자리는 누군가가 차지했을 터. “돌아가신 엄마, 아빠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혹은 친구, 연인까지...” 그러니까 유니크 타임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존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사람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부재할 대상, 그저 자신의 욕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의 이상형을 쫓기 마련이다. “당신이 원하는 그 누군가를 만나보세요.” 욕망이 갈구하는 대상이 실체적 존재일리 없다. 


<유니크 타임>이 안드로이드라는 장르적 오브제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안드로이드를 욕망과 결합시킬 때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은 화면이나 VR 장비를 통해 가상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욕망을 투사하는 3차원 스크린과도 같다. 아니 물리적 외형을 부여받았으므로 3D 프린터 출력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원하는 형태로 자유로이 모습을 변형시키는 것, 마치 <터미네이터 2>의 T-2000처럼 메타모포시스가 가능한 기능을 탑재한 것이 <유니크 타임>의 차별화된 안드로이드 설정이다. 그러니까 리얼돌 같은 양산형 오브제/공산품이 아니라,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맞춤형 오브제이기에 사용자/소비자에게 “유니크 타임은 특별한 시간을 선사합니다”라고 공언한다.


맞춤형 욕망 충족 기제라는 특징을 내세움으로써 <유니크 타임>은 스스로를 구분 짓고자 하였다. 물론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작품이 종국에는 충족되지 못한 채 좌절하는 욕망으로 귀결될 것이라 예견한다. 


충족과 좌절을 잇는 연결점은 안드로이드의 ‘맞춤형 형상 기능’에 달려 있다. <유니크 타임>의 이야기 전개는 이 기능의 정상 작동이 아니라, 오작동에 의해 야기된다. 오작동이 폭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능 불량, 오류, 버그는 본래 의도한 ‘정상적인 기능’, 즉 “당신이 원하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이용자들은 컴플레인을 걸고,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한다. 이때 그들은 욕망의 탐닉을 멈추고 일반적인 ‘소비자’로 돌아온다. 


주인공 J-204도 환불, 교환, 반품, 반송, 수리 또는 폐기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허나 의도치 않은 오류는 사진작가(이자 사용자, 이용자, 소비자이기도 한)의 시선을 끈다. 그의 눈에 오류는 해당 안드로이드만이 지닌 ‘유니크’함이었다. ‘오류의 유니크함’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 계기가 ‘사진 촬영’ 때문이다. 사진술은 대량 복제 기술의 대표적인 예술이기에 정상 작동하는 안드로이드의 표준과 닮아 있다. 그러면서도 사진작가는 그 속에서 늘 ‘새로움’을 포착하고자 한다. 새로움은 표준화된 프로그램으로부터의 일탈과 만난다. 그러니까 일상의 필요와 용도 면에서 오작동은 불편과 고장으로 여겨지지만, 예술에서 그것은 창작과 창조의 반열로 올라선다.


작품의 흥미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끓어오른다. 이야기는 두 개의 가지를 따라 전개된다. 


하나는 누가 ‘유니크’함의 주인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출발한다. 비록 오류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안드로이드 J-204/제이가 ‘유니크’의 주인일까? 이에 사진작가는 반발한다, “그것은 내가 유도한 것!” 제작 당시에는 낯설었지만, 2026년 현재의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적 이슈를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생성형 AI”와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판단 문제 말이다. 안드로이드 J-204/제이는 입력된 데이터 없이 스스로 모습을 바꾸면서 자신의 얼굴을 만들었다. 반면 작가 선생은 기존 알고리즘에 없지만 결국 자신이 그 결괏값을 유도해 낸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이 작금의 AI 발전과 함께 별안간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SF 장르는 언제나 ‘안드로이드의 정체성’ 고뇌를 안고 있었다. <유니크 타임>에서 새로운 모습의 안드로이드에게 누가 이름을 붙일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도 ‘정체성’ 고뇌의 연장선에 있다. 내 이름은 내가 만들고 싶다는 안드로이드와 (“제이”라는) 이름은 내가 정했다는 인간의 대립과 갈등은 안드로이드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까지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유니크 타임>은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을 둘러싼 기존의 문제,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립에 ‘기술적 오류’라는 설정을 추가하여 ‘돌연변이’의 의미와 가치로 확장한다.


다시 말해,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을 창조론의 틀에 가두는 대신, 진화론의 무대로 옮겨 온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다양한 종은 진화의 계통수에서 매번 돌연변이를 통해 적응하거나 도태되어 온 만큼, 안드로이드 또한 버그와 불량이라는 돌연변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생존의 시험대에 올릴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테크놀로지의 버그는 일종의 ‘획득 형질’이기 때문에 후속 세대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의 타당성과 적합성 여부를 떠나,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을 둘러싼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 점에서 <유니크 타임>은 ‘유니크’하다.



이야기 전개의 두 번째 가지는 원본과 복제, 한정판과 공산품을 둘러싼 갈등이다. 


“유니크하다는 게 무엇인가요?” 

“환상이지, 신기루 같은... 더 이상 새로운 게 없는 세계. 넌 그 환상을 진짜처럼 보여줄 수 있어... 넌 무언가 있어. 네가 만드는 네 얼굴은 정말 특별할 거야.” 


안드로이드는 본래 대량 복제의 산물이다. 이때 원본은 없다, 다만 프로토타입만이 있을 뿐. 안드로이드 J-204/제이의 유니크함은 프로토타입으로부터의 이탈, 오류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이미 세상이 대량 복제, 또는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들로 가득 차 있을 때, 특별한 가치는 하나뿐인 원본의 아우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다름이 본래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오류 때문일지라도 그러한 ‘불량품’은 스스로 차별화된 ‘유니크’함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오류의 유니크’를 열심히 설파하는 이가 사진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다루는 사진술이 대량 복제 기술의 총아라는 점을 알고 있다. 사진술은 복제를 무한히 증식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눈이 놓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안드로이드 J-204/제이의 이상 작동을 감지하고 확인한 것도 카메라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제시하고, 일상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도 사진 이미지였다.


여기까지, 그러니까 사진술과 안드로이드를 연결시키는 것까지는 테크놀로지 기반의 SF 장르에서 이제껏 충분히 활용되었던 소재였다. 그러면서 환상, 신기루, 환영과 정체성, 고유함을 대립을 통해 안드로이드 (때론 가상현실이 안드로이드를 대신하기도 한다)에게서 본래적 가치를 묻고,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시뮬라크르는 어떤 존재론을 갖게 되는지 질문하는 식으로 장르는 계승되었다. (인간다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안드로이드의 고뇌는 마치 사진술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예술이 혼돈 속에서 (기존의, 그리고 새로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장면과 오버랩되곤 했다.


허나 <유니크 타임>은 기존의 질문을 되풀이하는 대신, 본질과 실체만큼이나 신기루와 환상, 환영의 가치에 주목한다. 단, 이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의 질서 속에서 작동한다. 즉 ‘유니크’는 존재의 가치가 아니다. ‘유니크’는 새로운 상품 가치이다. 이는 안드로이드 J-204/제이가 자신을 성찰하면서 발견한 가치가 아니다. 그의 유니크한 오류를 놓치지 않고, 이를 세상에 소개한 사진작가의 입을 통해서 버그와 결함은 개성이 되고, 새로움으로 어필하고, 차별화한다. 그러면서 마침내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그 욕망이란 애초에 부재하는 이상형을 향한 욕망이었다. 이처럼 <유니크 타임>은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가 결합하는 지점이 ‘욕망’이라는 사실, 바로 테크노-자본주의의 정곡을 찌른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의 결말은 역설적이면서도 직설적이다. 파괴된 안드로이드 J-204/제이는 폐기 처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리를 통해 구제된다. 그동안 대량 생산된 안드로이드들의 외양은 “제이”의 모습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오류를 원본 삼아 대량 복제 프로토타입이 바뀌면서, 복제는 원본을 완전히 대체하고 만다. 터미네이터를 삼킨 용광로처럼, 욕망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작동 기제는 유니크한 버그마저 꿀꺽 삼키면서 ‘유일함’을 허용치 않는다.


#04.

이처럼 <유니크 타임>은 고유성을 부정당한 안드로이드 J-204/제이의 모습으로 끝날 수 있었다. 적어도 세상에 소개된 2022년에는 그렇게,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을 화두로 한 SF 장르의 최신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을 새롭게 조명할 계기는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등장한다. 바로 2026년 1월에 개봉한 김보솔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광장>. 김보솔은 <유니크 타임>의 조연출을 비롯하여 레이아웃을 담당하고, 감독 오유진과 함께 레이아웃과 원화를 맡았다. 마찬가지로 오유진은 <광장>의 조연출과 프로덕션 디자인, 캐릭터 디자인을 맡으면서, 감독 김보솔과 함께 원화 작업을 했다. <광장>의 기나긴 제작 과정 중에 <유니크 타임>의 제작이 함께 했던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이전에 <유니크 타임>을 보았을 때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놓쳤던 지점이 <광장>을 보고 난 후에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무엇보다 캐릭터 디자인. 차갑게만 느껴지던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광장>의 인물들-특히 리명준과 서복주-을 거치면서 온기를 얻는 것만 같다. 그리고 다시 안드로이드로부터 <광장>의 인물들을 한번 더 바라보게 된다. 두 작품 사이의 교류는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한층 좁히는 효과를 준다. 그러다 보면 수송차량에 실린 채, 창 밖을 건너다보는 안드로이드 J-204와 광장을 바라보는 리명준이 오버랩될 것이다. 중첩된 무표정 (안드로이드의 무표정과 리명준의 무표정) 사이를 뚫고 새어 나오는, 옅게 바란 감정을 이제야 느낄 수 있을 테다.


<유니크 타임>과 <광장>의 연결은 캐릭터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량 생산된 안드로이드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은 텅 빈 광장에 표시된 구역 번호를 떠올리게끔 한다. 광장의 구역 번호에는 고유성을 상실한 인민이 배치될 것이다. 이는 개성을 박탈한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또 다른 모습을 들추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개인의 욕망이 어느 순간 획일화된 상품 소비로 대체되고, 그 속에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이 관리되는 체제의 민낯. 서로 다른 체제를 다루는 두 작품이 동시에 공유하는 단어는 ‘외로움’. “외로우신가요?”라며 <유니크 타임>이 묻고, “외로워서 그런가 봅니다”라고 <광장>이 답한다.



그러니까 <광장>을 경유함으로써 <유니크 타임>은 비로소 안드로이드를 소재로 한 SF 장르가 다루는 궁극의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핵심에 다다르게 된다. 인간 이후의 존재, 즉 “포스트 휴먼”에서 ‘인간다움’이란 그저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거울로 되비쳐 보는 인간의 모습에 그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만남뿐만 아니라, 체제와 테크놀로지의 만남, 그리고 인간과 체제의 만남, 나아가 체제와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만남 속에서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한다. 


훌륭한 작품들은 이 지점을 짚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범작이나 망작으로 전락해야 했다. 무엇보다 뛰어난 안목은 다름 아니라 조지 오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물농장』>과 『1984』 중 하나만 읽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읽어야 한다). 그 이후로 현재의 테크놀로지를 반영한 만족스러운 최신 개정판을 기다려왔다. <유니크 타임>만으로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광장>과 함께 <유니크 타임>을 본다면 의외의 상승작용을 맛볼 수 있을 테다. 


오유진과 김보솔, 두 감독의 인터뷰 도중에 <광장>과 <유니크 타임>을 “두 개의 평행 세계”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 봤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동시대 현실의 상반된 체제에서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현실 체제 속에서 상반된 세계관이 작동하는 것을 목도하곤 한다. 굳이 세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니더라도,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AI와 같은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야 할지 점점 더 신경 쓰게 된다. 어떤 작품에서든, 어떤 체제에서든, 어떤 테크놀로지와 마주한 상황에서든, 뜬금없이 “외로운가요?”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이는 우리가 인간인지를 묻고 확인하는 ‘튜링 테스트’의 일환일 수 있겠다.

나호원 Joint Editor

© 2013-2025 SEOUL&ANIMATOR 

상호 서울엔애니메이터 | 대표 이경화 | 사업자등록번호 105-91-81500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