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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 seoulanimator
    seoulanimator
  • 4일 전
  • 12분 분량

광장 The Square | 2025 | 73mins | dir. 김보솔 KIM Bosol


광장의 신비와 우울*


​​# 序1. 광장-운명을 만나는 자리

풍문의 지층은 두껍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서문, 1960년 11월)


1960년. 26세의 최인훈은 소설 「광장」을 세상에 내놓는다.**  서문에서 작가는 광장을 “운명을 만나는 자리”로 부른다. 광장에서 운명을 만나는 까닭은 삶이 펼쳐지는 구체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풍문, 즉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식견을 쌓은들, 현장이 결여된 삶이란 풍문에 휘말린 채 겉돌기 마련이다.


소설의 탄생으로부터 두 세대 남짓이 흐른 후, 김보솔이 “광장”이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을 구상한다 (완성은 이로부터 5년 이상이 더 걸렸다). 최인훈이 운명의 장소로 『광장』 을 썼던 20대 중반의 연배에 청년 김보솔이 이르렀을 무렵이다. 김보솔은 광장을 운명이 만나는 자리로 다시 찾고자 하는 걸까? 운명을 무엇이라 여기고, 운명을 통해 무엇을 묻고 이야기하려는 걸까?


*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 제목 <거리의 신비와 우울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에서 가져왔다.

** 잡지 『새벽』 11월호에 처음 실렸고, 이를 손보아 이듬해 1961년 2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 序2. 광장과 밀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 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1961년판 서문)


광장의 반대편에 밀실이 있다. 일견, 둘은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 살 수는 없다. 삶은 광장과 밀실을 모두 필요로 한다. 따라서 <광장>이라는 제목에는 밀실이 함께 따라다닌다.


허나, 광장과 밀실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한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는 말은 소설가의 말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에서 광장은 실제로 대중을 가두는 밀실이었고,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만의 광장을 지키고자 밀실을 찾곤 했다.


최인훈은 광장과 밀실을 연결하는 길(골목, 경로)을 이야기하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그 사이를 살아갔는가를 말하고자 하였다. 김보솔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얼마나 열심히’는 광장과 밀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길만큼 중요할 것이다. 


# 序3. 삶의 심해로부터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명준은 그 암초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사이의 바다 밑 지리며, 심도에 대해서는 송신해 주었다. (1973년판 서문-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소설을 처음 펴 낸 지 12년 후, 소설가는 주인공의 넋을 기리고 달래는 새로운 문장을 서문에 더한다. 진혼을 위한 글에서 이명준이 몸을 던진 바다는 삶의 바다였고, 그 삶은 이데올로기와 사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작가는 명확히 밝힌다. 이데올로기와 사랑은 하나로 묶인 쌍이다. 이명준은 삶의 깊은 바닷속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두 암초 사이에 걸려 버렸다. 소설가는 자신의 주인공을 통해 바다의 깊이, 즉 이데올로기와 사랑에 이르는 심도 깊은 여정을 짐작하고자 했다. 김보솔의 <광장>이 헤아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추가된다. 광장과 밀실을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에 더하여 이데올로기와 사랑을 아울러야 한다. 나아가 삶의 심해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물 밖으로 떠오르는 시도까지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 세 명의 인물, 세 개의 연장선

김보솔의 <광장>은 최인훈의 『광장』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할까?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기? 1961년의 이야기를 2025년의 이야기로 새롭게 쓰기? 청년 소설가의 시대적 고뇌를 청년 애니메이션 감독의 시대적 고뇌로 다시 쓰기? 아니면 소설이 남겨 놓은 질문을 이어받아 애니메이션이 그다음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기? 


이명준이라는 이름은 리명준으로 다시 등장한다. 동일인일리 없지만, 아예 남이라 할 수도 없을 테다. 하나의 느슨한 연장선. 


리명준의 맞은편에 스웨덴 외교관 이삭 보리가 있다. 보리의 할머니는 남조선 출신으로, 분단 전에 결혼과 함께 스웨덴으로 갔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다.* 이명준이 향했지만 끝내 다다르지 못한 ‘중립국’ (소설에서는 스웨덴이 아니라 인도로 향했다)이 보리에게 포개어진다. 이명준이 풍문에 머물지 않고 기꺼이 현실에 뛰어들었다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리명준에게 보리의 스웨덴은 여전히 ‘풍문’에 속하는 영역일 테다. 또 하나의 느슨한 연장선. 


그리고 세 번째 연장선, 서복주. 보리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정하고 있는 여인이다. 소설가가 심어놓은 두 개의 암초 중 하나인 사랑. 소설 속 이명준은 남한의 윤애, 북한의 은혜라는 대비되는 여인들을 겪었다. 윤애와 은혜 사이 어딘가에 복주의 자리를 설정해야만 할까? 혹여나 그러한 유혹에 빠진다면 애니메이션 <광장>을 소설 『광장』 의 중력장 안에 가두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 19세기 초부터 약 200년 남짓 중립국 입장을 유지하다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2024년 3월 나토애 가입하면서 중립국의 입장에서 벗어났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정전 협정 감시 중립국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애니메이션이 한창 제작되던 무렵, 스웨덴은 중립국 지위를 갖고 있었다.



물론 <광장>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내세운다. 보리와 복주의 러브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있던 리명준의 존재가 점차 떠오르는 플롯 진행을 따른다. 즉 삶의 심해에 배치한 두 개의 바위, 이데올로기와 사랑 중에서 사랑을 앞으로 내세우고 그 저변에 이데올로기를 깔아 두되, 종국에는 사랑이 차지하던 높이만큼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떠오르는 형국이다 (소설처럼 이데올로기가 사랑을 집어삼키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애니메이션 <광장>이 소설 『광장』 으로부터 느슨하게 연장되었다고는 해도, 결코 소설의 중력장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의 운동 궤도를 갖는 까닭은 복주의 자리를 소설 속 윤애와 은혜 사이에 마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여인들은 주인공 이명준의 갈등과 고뇌를 외부로 드러내는 대상체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동등한 사랑의 주체라기보다는, 이명준의 욕망이 투영된 가상적 존재로 다뤄지곤 했다.** 윤애와 은혜라는 소설 속 인물이 충실하고 온전한 실체가 되지 못한 건 그녀들이 양측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즉 ‘이쪽에서 저쪽을 건너다보면서 갖는’ 동경과 환영이 근간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 연유는 소설 『광장』이 이명준을 ‘선택’의 상황에 배치하였기에 비롯된다. 대립하는 체제에서 선택은 ‘이곳이 저곳보다 더 매력적’이거나, ‘저곳보다 이곳이 더 환멸적’ 일 때 일어난다. 그랬을 때 소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사랑으로 의인화했다.


반면 애니메이션 <광장>은 복주를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나 동격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방법은 간단하다. 복주는 보리를 만나기 이전부터 북에 있었고, 보리가 복주 때문에 북에 온 것도 아니었으며, 보리가 북을 떠나더라도 복주는 함께 따라가지 않고 계속 북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정하면 된다. 복주는 북한 체제가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 이상형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생활하며,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당의 충성심을 누구보다 앞장서 내세우는 인물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사랑을 찾아 자신의 체제를 탈출하는 모험 따위는 함부로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복주는 복주일 뿐이다. 그래서 존재감을 지닌다. 복주는 그저 순애보의 가련한 여주인공이 아니다. 현재에 충실한 인물, 그래서 예정된 (슬픈) 미래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 복주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길을 걷다가도, 결국 발각되었을 때는 “길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안 지나갈 수 있나?”라며 되려 보리를 안심시키는 이가 복주다. 소설과 애니메이션 사이의 느슨한 연장선을 기꺼이 조율할 수 있는 자는 복주이다.


** 가령, 정조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끝내 명준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남쪽의 윤애에 비해, 적극적으로 명준과 관계를 맺는 북쪽의 은혜가 더 실체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결코 은혜도 실체로 남지 못한다. 명준이 중립국을 향해 가는 항해 내내 그를 지켜보는 허상적 존재이자 끝내 그를 바다로 이끄는 유혹자는 은혜의 환생으로 여겨지는 갈매기였기 때문이다 (즉, 은혜는 실체에서 허상으로 밀려난다). 명준의 이성관이 작가의 시대적 한계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준의 한계 (“관념 철학자의 달걀”로 종종 일컬어지는)를 보여주는 소설가의 의도로도 읽힐 수 있다. 작품의 해석에는 늘 독자의 의도와 상상력이 발휘될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 광장과 밀실 사이 1-풍경과 소리 

광장과 밀실을 다룰 때, 소설은 상징과 묘사를 적절히 섞은 문장으로 풀어내지만 애니메이션은 매 장면마다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평양의 풍경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사실적 재현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선택과 판단이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분단이라는 상황은, 적대적이든 유화적이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대상화하여 바라보게끔 한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광장>이 얼마나 현재의 평양 모습을 충실히 담아냈느냐는 언제든 시빗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코 이 작품의 본질에는 닿을 수 없는 부차적인 이슈이다. 


중요한 건 광장과 밀실을 설정하고 보여주는 태도와 방식이다. 소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단, 김일성 광장을 보여주는 것이 광장에 해당하고, 보리와 명준의 처소를 보여주는 것이 밀실에 해당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앞서 최인훈이 주지시켰듯,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자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즉, 김일성 광장이 어떻게 대중의 밀실인지, 보리와 명준의 처소가 어떻게 각자의 광장이 될 수 있는지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를 테면 광장에 적혀 있는 ‘‘27-184’라는 숫자. 광장에는 왜 이런 숫자들이 적혀 있는 걸까? 그 숫자들은 광장을 구획화하고, 필요에 따라 그곳에 사람을 배정하는 기능을 한다. 대규모 행사를 위해 개인을 동원할 때 쓰이는 장치이다. 열린 광장은 구획으로 나뉘지 않지만, 숫자와 위치가 표시되는 순간 광장은 밀실로 닫히고 만다. 이처럼 광장 바닥에 적힌 숫자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미 광장이 “대중의 밀실”임을 다룬다. 하지만 <광장>은 이를 다시 개인들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27-184, 이번에도 이 자리에서 봅시다.” 복주와 보리는 함께 새해를 보낼 약속 장소로 활용한다. 복주를 찾기 위해 보리가 돌아오는 곳도 광장 속 그 구획이다. 거기에는 그들만의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광장이 밀실과 광장 사이를 오가듯, 밀실도 광장과 밀실 사이를 오간다. 늘 도청되는 곳이기에 밀실은 “개인을 위한 광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청과 감시는 밀실이든 광장이든 중요치 않다. 그럼에도 보리는 명준을 자신의 밀실로 불러들이려 한다. 그래야 그곳이 비로소 함께 있는 광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준이 보리의 초청을 한사코 마다하는 까닭은 그곳을 광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게 명준의 진심이었을까? 명준의 판단에 앞서 조직의 명령이 우선한다. 보위부가 (도청이 가능한) 밀실을 유지하는 까닭은 밀실이 언제든 “개인을 위한 광장”이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명준의 처소를 감시의 대상으로도, 개인을 위한 광장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은 명준의 판단과 행동에 달려 있게 된다. 조직과 제도의 작동 여부는 결국 개인의 손 끝에서 결정된다. 이때 광장과 밀실의 차단막은 단지 ‘감시의 시선’에 국한되지 않는다. <광장>의 연출에서 섬세하게 공을 들인 지점은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들리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 초반, 보리와 명준이 함께 일하는 스웨덴 대사관 장면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음악이 들려온다. 장면의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의도로 쓰인 배경 음악이 아니라, 건물 바깥에서 사무실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소리다. 감독에게 물어보니, 이른 아침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체조 음악이라 한다. 이를 통해 평양 시내의 아침은 풍경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작품 속 상황으로 보자면 실내의 인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외부로부터 실내로 침투하는, 강제적인 간섭의 소음인 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리는 줄곧 유선 이어폰을 꽂고 시디플레이어 속 음악을 듣는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확인할 수 없다. 감독은 결코 그 음악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보리가 복주에게 자신의 이어폰과 시디플레이어를 선물로 건네려 하더라도,* 우리는 복주가 (그리고 명준이) 어떤 음악을 듣게 될지, 훗날 보리를 떠올리며 그리워할 그 음악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보리가 듣던 음악을 우리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밀실에 가둠으로써, 음악은 보리와 복주/명준만의 “개인적인 광장”으로 남을 수 있다. 


비슷한 설정으로, 보위부 조직원들과 명준이 보리를 찾기 위해 명준의 처소를 뛰쳐나갔을 때, 홀로 남은 보위부 직원이 명준의 헤드폰을 쓰는 장면에서도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야기 내내 명준이 헤드폰을 쓰고 보리의 숙소를 도청한 임무를 생각해 보면, 광장과 밀실의 차단막은 감시자의 시선 이상으로, 도청자의 청각에 크게 의지한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관객의 입장에서는 음악과 소음보다는 인물들의 억양을 통해서 훨씬 직접적으로 소리에 반응할 것이다. 보리의 한국말 억양, 명준의 억양, 그리고 복주의 억양은 다 다르다. 여기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보리 할머니의 억양과 보위부 간부 진철의 억양까지 아우르자면, 하나의 스펙트럼이 만들어진다. 보리 할머니, 보리, 명준, 복주, 진철의 말투와 억양 속에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남한의 억양에서부터 북한의 억양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왜 보리가 저리도 유창하게 남한의 말투를 쓰는가 보다는, 어째서 명준의 말투가 ‘전형적인 북한 억양’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엔드 크레디트에 “언어코디네이터” 담당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면,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북한의 (마찬가지로 남한의) 말투와 억양을 획일적으로 대해 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설정에서 <광장>은 이미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건드리고 있다.


* 결국 보리의 이어폰과 시디플레이어는 복주가 아닌 명준의 손에 남게 된다. 명준은 보리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보리 (그리고 복주)가 떠난 광장을 바라본다.


# 광장과 밀실 사이 2-골목과 경로

앞서 최인훈은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라고 했다. 애니메이션 <광장> 또한 밀실과 광장 사이를 잇는 경로를 놓치지 않는다. 


밀실이면서도 광장인 보리의 숙소 맞은편에 도청 헤드폰을 끼고 보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명준의 거처가 있다. 건너편에서 헤드폰을 낀 명준이 보리의 사적인 밀실을 감시의 광장으로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정작 당사자 보리는 내색하지 않는다. 길 건너에서 명준이 보리를 도청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들, 감시 체제가 거두어질리는 없다. 오히려 명준과의 관계만 불편해질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명준 또한 보리의 집에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올 때, 자전거를 타고 굳이 빙 에둘러 온다. 그리한들 보리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보리의 밀실/광장으로부터 명준의 밀실/광장에 이르는 경로는 최단 거리를 취하는 대신, 구불구불 둘러가면서 일부러 길게 늘이고자 한다. 그런 다음 건물 입구에서 자신의 방까지 이르는 계단과 복도의 동선은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상당히 복잡하게 펼쳐진다. 감독은 이처럼 명준과 보리 사이의 경로를 일부러 늘이고 굴곡지게 배치한다.


늘이고 지연시킨 두 공간이 단숨에 좁혀지는 순간은 명준이 보리의 집에서 창 너머로 자신의 거처를 바라볼 때, 그리고 보리가 달걀을 힘껏 던져 건너편 명준의 유리창을 깨뜨릴 때이다. 이때 두 지점 사이의 경로는 직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두 상황 사이에 또 하나의 거리 설정이 배치된다. 보리가 잠든 틈을 타서 명준이 보리의 노트북 사진 폴더를 열어보았을 때, 그 속에서 보리가 이제껏 명준을 찍은 사진들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미 보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명준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직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보리는 명준에게 이르는 최단 거리의 시선을 마련해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평양을 한겨울로 설정한 것도 광장과 밀실 사이의 경로를 다루기에 적합했다. 눈 쌓인 길은 통행인의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함께 걷는 복주와 보리는 자신들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남겼다.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보리는 자신의 동선을 여지없이 평양 곳곳에 표시했다. 그로부터 우리는 한산한 거리, 텅 빈 광장일지라도 그곳을 지나간 이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광장과 밀실을 잇는 저마다의 골목인 셈이다.


# 광장과 밀실 사이 3-숨바꼭질


이처럼 <광장>에는 밀실에서 광장으로 이르는 많은 골목들, 경로들이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보리와 복주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난다. 가끔은 관광 가이드와 외국인의 관계처럼 처신하기도 하지만, 되도록이면 사람들의 시선이 드문 곳을 찾아 조심하게 걷곤 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 자체로 CCTV 같은 것이다.


광장과 밀실이 교차하는 평양의 거리에서 시선을 피하며 서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을 감독은 단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제시한다. 바로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1914). 보리와 명준이 함께 근무하는 스웨덴 대사관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일단 우리 눈에 포착되는 순간 “왜 뜬금없이 이 그림이 여기에 걸려 있는가?” 궁금해지고, 불현듯 그림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광장과 골목, 빛과 그림자, 건물과 여백, 홀로 굴렁쇠로 굴리며 달려가는 여인... 그러다 보면 데 키리코의 그림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들도 떠오른다. 텅 빈 광장, 덩그러니 세워진 동상, 공허함, 저 멀리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 이 낱말들을 모두 모으면 <광장>의 이미지가 되고, 그 속을 채우는 정서가 된다. 


그러니까 <광장>은 데 키리코의 그림을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시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데 키리코의 그림은 <광장>을 하나의 이미지로 함축하는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복주와 보리를 투영할 수도 있고, 복주를 찾아 나서는 보리의 모습을 이입할 수도 있다. 마치 평양의 거리, 광장, 밀실은 이들 연인을 위한 숨바꼭질 장소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복주와 보리의 숨바꼭질에 관객들도 동참하게 된다. 돌연 사라진 복주를 찾아 나서는 보리를 따라 우리는 평양 거리를 달린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평양을 모른다. 하물며 복주가 ‘사리원’으로 간다 했을 때, 우리는 사리원이 평양 시내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늠을 할 수 없다. 보리가 기차를 타고 반나절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일까? 중요치 않다. 우리는 그저 보리 곁에서 함께 달리는 것만으로도 숨바꼭질의 참가자이다. 낯선 도시에서 느닷없이 숨바꼭질에 휩쓸려 어리둥절할 관객을 염두에 둔 듯, 감독은 보리의 노트북 화면 위에 평양 지도를 슬쩍 띄워 놓는다. 복주의 사진을 찍은 장소가 평양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가 직접 복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복주를 찾는 보리만 따르면 된다. 지도는 보리가 잘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달리며 광장을, 평양을, 그리고 데 키리코의 그림 속에서 잠시나마 숨바꼭질에 참여한다.


# 열심히 살지만 (그러나/그래서) 외로운

소설가 최인훈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가는 경로 자체 보다도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사랑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얼마나 열심히’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치열함’으로, 때론 ‘진정성’으로 풀어쓸 수 있는 척도이다. 복주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사랑하는가? 보리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사랑하는가? 두 사람은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명준은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가? 명준과 그의 조직은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가?


“얼마나 열심히”를 판단하는 지점에서 명준의 역할이 도드라진다.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 마련이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판단은 다르다. 보리와 복주의 진심 여부를 떠나, 명준은 이들이 안위를 염려한다. “얼마나 열심히”가 초래할 상황에 대해 우려하며 명준은 보리를, 그리고 복주를 대한다. 


명준이 보리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그러하다. “여기서 살 생각인가?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잠깐 심심해서 그런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가라! 야, 작작해라, 이기적인 새끼야!” 그렇지 않으면 복주는 보위부에 끌려가고 만다.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사랑하는가”를 “잠깐 심심해서 그런 거다”로 바꿔줘야 한다. 


그런 다음 곧바로 명준은 복주를 찾아간다. 복주는 그제야 명준을 처음 보게 된다.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준은 복주에게 “우린 만난 적 없는 겁니다”라고 다짐을 이른다. 명준의 행동이 체제의 충성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명준과 보리에게 위압적으로 굴었던 보위부 상관 진철 역시도 사납게 몰아붙이지만 이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보리와 복주를 둘러싼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지연시키는 눈치다. 커다란 사건으로 번지기 전에, 최대한 조용히 수습하기로 모두가 은연중에 공모한 듯 말이다.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맞닥뜨렸던 폭압적인 보위부와는 다르다. 그때는 사랑마저 침몰시킬 만큼 이데올로기의 힘이 컸다. 반면 애니메이션 <광장>에서 리명준을 통해 서서히 떠오르는 이데올로기라는 암초는 파괴적 역할을 맡기보다는, 사랑의 한계를 주지 시키는 경고음에 더 부합한다. “더 이상은 위험하니, 이쯤에서 멈추시오”라는 경고 메신저로서의 역할이 리명준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째서, 왜, 리명준은 그리 행동한 걸까? 관객의 의문을 대변하듯 스웨덴 대사가 명준에게 묻는다. 명준의 대답은 “외로워서 그런가 봅니다”이다. 이 대답이 절묘하다. 감독은 이 대사를 기획 단계의 사전 인터뷰 과정 - 폐쇄된 사회에서 외로움은 사치라는 응답 - 에서 찾아냈다 한다.


그런데 이와 닮은 표현이 소설 『광장』에서도 자주 나온다.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 애초에 이 말은 주인공 명준이 한때 의탁했던 부잣집 도련님 변태식과 나누던 대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그들 사이에 농담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고받는 대사였다. 득도의 깨달음처럼 들리지만, 실은 ‘의미 없다, 알 수 없다, 상관없다’는 냉소적 뉘앙스를 진득하게 품은 일종의 밈과 같은 말이었다. “얼마나 열심히”라는 작가의 기준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종의 ‘권태’를 한껏 담고 있는, 퍽이나 아이러니한 태도의 응결체이다. 


이후 온갖 굴곡진 사건을 겪으며 잊고 살던 명준이 다시 이 문장을 입에 올린 건 전쟁의 한복판에서였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라는 은혜의 물음에 명준은 “고독해서 그랬겠지”라 답한다. 


결국 고독, 외로움은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고백이 된다. 소설 『광장』에서, 그리고 애니메이션 <광장>에서 외로움, 고독은 ‘인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감정의 증거인 셈이다.



# 結. 광장과 밀실 사이의 궤적

자전거를 타고 텅 빈 공터를 하염없이 돌고 돈다. 쌓인 눈 위로 바퀴 자국이 남는다. 공터를 도화지 삼아, 자전거로 선을 그려 나간다. <광장>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장면이다. 처음에서는 보리가 자전거를 탔다. 멀리서 명준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제 명준이 자전거를 탄다. 보리가 그랬듯, 명준이 자전거를 타고 텅 빈 공터를 돌고 돈다. 자전거를 펜슬 삼아 눈 덮인 바닥에 선을 그려 나간다. 


처음과 끝, 수미상관을 이루는 보리와 명준의 자전거는 공터라는 여백에 끊임없이 광장과 밀실을 만들고 지운다. 맴돌며 쌓여가는 선, 선으로 표시되는 둥그런 영역, 그 구획의 안쪽과 바깥. 공터는 그 선을 따라 광장이 되기도, 밀실이 되기도 하며, 그 광장은 “대중의 밀실”로, 밀실은 “개인의 광장”으로, 매 순간 새롭게 획정된다. 자전거는 매번 밀실로부터 광장에 이르는 골목의 경로를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려 낸다. 처음엔 보리가, 나중엔 명준이 밀실과 광장을 잇고, 그 위에 다시 길을 낸다. 


애초에 두 연인 사이에 해피 엔딩이 일어날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행여나 젊은 남녀가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였다면 <광장>은 장르를 취하는 대가로 소설 『광장』에 맞닿는 가치를 훼손했을 테다. <광장>은 보리와 복주의 사랑이 어떻게 마감될지 예견하고 받아들이는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이 왜 힘들 수밖에 없는지를 이념과 체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핵심일 수는 없다. 


삶의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사랑과 이데올로기의 바위에 걸려 끝내 떠오르지 못한 소설 속 이명준, 그가 비워둔 그다음의 여백을 현재의 상황과 감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애니메이션 <광장>의 출발점일 수 있겠다. 광장과 밀실이 감시되고 획일화되고 왜곡되고 부정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외로울 수’ 있을까? 그 외로움으로부터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상황을 ‘얼마나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끼리 얼마큼 서로를 헤아릴 수 있을까?


<광장>은 가장 추운 한복판에 가장 따뜻한 것을 남겨두었다.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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