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Entity
- seoulanimator
- 4월 24일
- 6분 분량
엔터티 Entity | 2024 | 17m 28s | dir. 정휘빈 CHUNG Huibin

요상 망측한 테크노 디스토피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장르, 로그인
<엔터티>는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흔치 않은 “장르” 영화이다. ‘흔치 않은’이라는 수식어는 조금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작품이든 추구하는 방향성과 스타일과 분위기가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넓은 의미로) 장르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장르라는 말을 흔히 영화의 분류 기준으로 말한다면, 개별 장르의 규칙과 클리셰가 강하게 작동하는 (좁지만 훨씬 실용적인 의미의) 장르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점에서 독립 애니메이션은 주류 상업 애니메이션 (그리고 실사 영화)로부터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거나, 그 빈틈을 노리거나, 기존의 장르 관습을 전복시키려 하기 때문에, 통상적인 ‘장르’의 잣대를 들이대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또는 그러하기에, <엔터티>는 장르 영화이다. 무엇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중심에 설정하였기에 ‘SF’이다. 하지만 SF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게 요즘 SF 판도이다 (SF 소설이 그러하고, SF 영화/드라마가 그러하며, SF 만화/애니메이션/게임이 그러하다). 기실 현대 사회가 과학 기술에 기반하여 시시각각 변화하고,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테크놀로지는 오늘날을 생생히 기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엔터티>가 SF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유는 시간대를 근미래로 설정하였다는 점과 테크놀로지가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뿐만 아니라, 메타버스라는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한 점 때문이다.
그리고 SF <엔터티>에 크라임 장르가 추가된다. 테크놀로지로 상상하는 근미래의 삶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야기는 늘 ‘사건’을 필요로 한다. 그 사건이 범죄라면 우리는 크라임 장르의 상황과 전개를 기대한다. 여기에는 범죄자의 행적과 이를 차단하고 응징하려는 자의 갈등과 대립이 필수적이다. 때론 그 사이에 놓인 희생자의 역할이 부각될 수도 있다. <엔터티>는 희생자와 차단-응징자를 하나로 결합시킨다.
그래서 공포/스릴러의 장르 코드가 스르륵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무작정 암울하거나 무섭거나 흉측하기만 하지는 않다. 간간히, 그리고 번번이, 무엇보다 결정적일 때 블랙 유머가 터진다. 그러다 보니 <엔터티>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블랙 코미디로 기운다. 그 속에서 B급 정서가 피어오른다. 고상함, 우아함, 세련됨, 섬세함 대신 거칠고 투박하고 속되고 상스러운 것들의 향연이다.
다시 말하지만 <엔터티>는 장르 애니메이션이고, 여러 장르가 뒤섞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또는 어찌 되었든) 흔치 않은 독립 애니메이션이다.
장르의 변칙 플레이
허나, 정휘빈은 장르를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 애초부터 클리셰를 떠받들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클리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다. 클리셰를 원천 부정한다면 장르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장르의 클리셰가 작품을 지배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르의 규범에 따라 클리셰는 예상된 장소에 배치되지만 작동 방식은 장르 매뉴얼에서 벗어난다. 즉 우리는 <엔터티>에서 하나의 상황이나 장면 다음에 어떤 상황, 장면이 뒤따를 것인지 예상할 수 있고, 정휘빈은 우리의 예상에 부응하여 그러한 장면과 상황을 보여주지만, 막상 흘러가는 전개는 장르가 허용하는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오류와 오작동으로 덜컥거리곤 한다. 장르가 요구하는 리듬, 박자, 호흡을 자신만의 변칙술로 교란시키는 것이다. 장르를 율법으로 숭배하는 종교가 있다면 정휘빈은 이교도가 아닌, 이단자로 분류될 것이다.
<엔터티>가 기반하고 있는 SF 장르란 무릇 과학-기술 분야의 내공이 얼마나 탄탄하게 깔려 있는지 여부가 성패의 관건일 것 같지만, 정작 최종적인 평가는 예지력에 맞춰지곤 한다. 즉 SF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얼마나 실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작품이 상정한 미래 시점이 현재로부터 꽤나 멀찍이 떨어져 있다면 동시대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고작 100년 남짓 전에 발표된 쥘 베른의 작품에 대해 오늘날의 기준 잣대를 들이대며 실현율을 따진다는 것은 이미 실효성이 떨어진다. 실패한 예측은 그저 가십거리에 그치고, 성공한 예측에는 뭔가 영험한 신통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하는 태도는 SF의 기반인 과학을 주술적 예언으로 대체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SF는 예지적 신통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풍자, 즉 현실 (현재, 또는 과거, 혹은 현재 완료)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하기에 <엔터티>가 미래를 향하려 할수록 우리는 과거를 더 소환하게 된다. 이는 작품 속 인간들이 메타버스 세계에서 기어이 1980~90년대에 머물고자 하는 반동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 풍경 속에서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곳곳에 배치된 당시의 아이콘들을 집요하게 찾으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엔터티>는 아주 먼 미래가 아닌 근미래를 전망한다. 도시를 이루는 건물과 도로, 그리고 교통 및 통신 네트워크 시스템 등 인프라를 보자면 현재로부터 향후 50년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 시대에서 사람들은 현실 세계 대신 메타버스 속에서 대부분의 교류와 소통을 한다. 다양한 선택지가 가능할 터이지만, 주인공 빵23-김영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은 1980~90년대를 택하였다. 그러니까 현재와 근미래 사이의 간격만큼 메타버스의 가상세계는 근과거로 돌아갔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과거에 대한 기억과 포개게 된다. 즉 미래 예지력은 과거 소환술과 겹쳐진다.
이러한 설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설정한 시간대만큼이나 구체적인 장소성이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가 미래 속에서 L.A.를 지우지 않고, 현재의 뼈대 위에 미래를 덧씌우면서 현재를 과거의 흔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엔터티>는 서울, 그것도 종로, 특히나 종로3가 일대, 특정하자면 서울극장과 세운상가를 근미래의 메타버스 속에 얹는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익숙한 장소를 인용하는 수준이 아니다. 세운상가가 갖는 중첩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의미를 알고 있다면, <엔터티>는 세운상가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듬뿍 채워냈다.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한 근대 건축의 청사진이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현실화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서 세운상가는 준공당시인 1968년의 시점으로 보자면 불쑥 등장한 미래와도 같았다. 건축물의 구조는 차도와 인도가 층위로 분리된 입체 도시였으며, 당대의 첨단 기술이 모이는 마이크로 집약 센터였던 점에서 (그래서 못 만드는 것이 없다 했던) SF적 구현체였다. 동시에 그곳은 불법 복제 음반 (빽판!)과 각종 음란물의 거래가 이루어지던 수상한 구역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운상가 그 자체가 <엔터티>가 추구하는 혼종 장르인 셈이다. 주인공 빵23-김영이 현실 세계에서 불법과 탈법의 경계에 놓인 요상 망측한 가젯(gadget)를 수리하는 일을 한다는 설정은 그래서 더없이 적합하다. <엔터티>와 세운상가와 빵23-김영은 서로가 서로를 가리킨다. 그러하기에 근미래의 시간, 여전히 세운상가와 같은 주상복합의 건축 공간은 메타버스 속 1980~90년대 세상과 이질감 없이 녹아든다.

Warning! 시스템 오류
근미래와 근과거를 균등히 포개어 <엔터티>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정작 세상의 균형을 깨는 것은 근미래의 현실을 지배하는 테크놀로지이다. 근미래 세상은 엄격한 경찰국가의 질서를 추구한다. 하지만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프로토콜이 지나치다 보니 본래의 목적인 개인의 ‘안전 safety’은 체제의 ‘보안/안보 security’로 대체된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현실의 거리에서 사리지고, 각자의 단절된 공간에서 멀티버스 접속을 통해 자신들만의 가상 세계로 빠져든다. 그래서 작품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이들의 거처는 아편굴과 유사하게 그려진다. 시스템의 첫 번째 오류는 여기서 발생한다. 지나친 안전이 개인을 위협하는 상황. 보안 요원(security)이 정작 살인마로 활약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미래 시스템의 두 번째 오류는 자본을 둘러싸고 초래된다. 돈! 그곳에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시스템 속에서 원활히 활동하려면 소셜 포인트도 필요하다. 원만한 사회 생활력 (또는 체제 순응력)에 비례하는 소셜 포인트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를 이용할 때 필요하다. 사회 규범을 위반하면 소셜 포인트가 차감된다. 평상시 돈으로 소셜 포인트를 구매할 수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일단 소셜 포인트가 부족할 때는 돈을 들여서라도 비합법적인 루트로 (일종의 지하 경제 같은) 충전을 해야 한다. 여기에 추가로 메타버스 속 가상현실에서는 차별화된 아이템 (고급 ‘시가’로 대표되는)이 거래된다. 일종의 상징 자본 같은 거다. 아마도 현질을 해서 얻어야 하거나, 능력치로 구입하거나 해야 할 테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주인공 빵23-김영처럼, 이래저래 보잘것없는 처지의 시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가난의 덫에 빠진다. 돈이 부족해서 위법한 일을 감수하고, 그러다가 적발되어 소셜 포인트가 거덜 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급전을 당겨서 급히 소셜 포인트를 채워 넣으려 하고, 그러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이때 유혹의 손길이 뻗치는데, 바로 청부 미션을 해결하면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고급 ‘시가’는 그저 알량한 자랑템, 간지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더러운!) 메달 같은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이러한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감시하고, 서로에 대한 경쟁과 약탈을 부추기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이처럼 <엔터티>는 분명 테크노 디스토피아를 상정하지만, 그렇다고 우울함과 절망감으로 우리를 흠뻑 적시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두운 씁쓸함을 느닷없이 교란시키면서 불쑥 튀어나오는 블랙 유머가 있다. 이 유머는 순도 100%의 해맑은 유쾌함과는 다르다. <엔터티>의 유머 포인트는 부조리에 더 가깝다. 근미래 테크놀로지의 과잉, 엇나감, 오작동, 미숙함, 부적응, 오류, 전도/전치/도착증 등등. 그러니까 잘 짜인 논리와 계산된 전략으로 만들어지는 유머가 아니라, 논리와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유머다. 이는 장르의 규칙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의 규칙이 교란되는 것, 즉 장르가 변칙적으로 비틀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유머다.

장르를 멋대로 굴러 나가기
<도나 표류기>(2022) 이후 <엔터티>에서도 계속해서 정휘빈은 장르를 건드리고, 두드리고, 굴리고, 뒤집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관심과 취향, 호기심과 도전 정신, 무모함과 근심이 서로 뒤섞여 있다. 그래서인지 도나에게서도 정휘빈이 보이고, 빵23-김영에게서는 더 많은 정휘빈이 보인다 (그렇다고 대놓고 주인공과 창작자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는 말자). 좌충우돌 속에서 감춰진 능력을 발휘하고, 예기치 못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그런 모습 말이다.
작품의 길이는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도나 표류기>는 14분 30초, <엔터티>는 어느새 17분 30초. <민서와 할아버지> (2020)의 분량이 7분 45초였던 점과 비교하면 증가량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늘어난 시간이 결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다. <도나 표류기>의 제목은 작품 마지막에서야 등장한다. 자연스레 관객은 그다음 전개를 기다렸다, 이런! <엔터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그다음 단계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아무렴! 이러한 반응은 장르에 대한 기대이자, 정휘빈만의 장르 요리법에 대한 기대에 기반한다.
<도나 표류기>에서도, <엔터티>에서도 과하게 넘쳐서 빼냈어야 하는 지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외려 더 풀어 가고 충분히 채워 넣었으면 하는 지점들이 눈에 띈다. 장르를 충분히 주무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에는 조금 더 긴 러닝 타임이 필요했다. 제도적으로 표준화된 분량으로 치자면 시트콤 시리즈의 에피소드 한 편에 해당하는 21분에서부터 일반적인 영화제 단편 최대 허용치인 30분 사이. 이 어딘가에 정휘빈의 장르가 안착할 수 있는 적정 길이가 있을 것이다.
장르는 제도화된 게임의 규칙을 제시하고 이를 따르라고 요구한다. 변칙 승부사라면 한쪽 손으로는 악수를 건네면서도, 다른 한쪽 손으로는 암수(暗數)와 비기(祕器)를 품는 법! 정박자와 변박자를 넘나들며 거침없이 장르를 굴려 나가다 보면 머잖아 정휘빈 자체가 장르가 되는 때가 올 것이라 기대한다. 발칙한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