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When Things Collapse
- 2월 24일
- 11분 분량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 01. 붕괴의 한복판
갤러리 메인 홀에 서 있다. 네 명의 아티스트가 전시의 중심 테마인 “무너지는 것들”을 담은 각자의 작품을 한데 모은 곳이다. 그러니까 이 구역은 붕괴의 중심이다. 관람자는 이 한복판에서 붕괴에 동참해야 한다.
동참하려면, 또는 관람하려면 그 연유와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무너지는 한복판에 서있는 건 그 붕괴를 관람하고, 감상하고, 의미와 성취를 판단하고, 온전히 글로 전하는 임무 (혹은 용역)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회의 중심에 이르렀을 때 퍼뜩 깨닫게 된 사실. “나는 이 붕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조금 더 거세게 밀어붙이자면 “나는 무너지는 상황에 어떤 책임을 나누고 있는가?” 다시 말해, 나는 기성세대로서 소환되었다.
# 02. Young Artists
전시는 네 개의 붕괴 영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붕괴, 즉 무너지는 것들을 보여주려면 그 이전 상태 또한 보여줘야 한다. 산 황, 소피 마리아 비커스, 오이슬, 양윤경, 이들 네 명의 젊은 작가들이 이전까지 어떠한 창작을 해왔는지 알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맞이한 붕괴, 무너짐에 함께 할 수 있다. 이제껏 행해 온 창작의 자취를 더듬고 나서야 마침내 그 붕괴의 충격과 여파를 가늠할 수 있다.
네 명의 개인 작업과 하나의 공통 접점. 메인 홀에 다다르기 위해서 지나야 할 경로가 마련되어 있다. 하나의 경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니 선택해야 한다. 순차적으로 빙 돌거나, 몇 개의 교차점을 거치거나, 이미 걸어온 곳을 다시 찾아 나머지 곳과 비교하거나...

어떤 조합을 통해 최적화된 경로를 찾든, 출발점은 하나다. 입구에서 산 황의 작업들부터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전시회장을 나갈 때 다시 그 작품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소개된 산 황의 기존 세 작품은 서로 다르다. 네 개의 목판을 길게 이어 붙여 그린 아크릴 화 <Another Heaven>부터 VR 애니메이션 <Satellite>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가장 원초적인 회화의 방식부터 가장 첨단의 영상 이미지 테크놀로지까지 산 황은 두루 자신의 창작에 활용하였다. 정작 VR 영상을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체험해 볼 수단이 전시에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편이나 결함으로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아트 미디어/테크놀로지 아트가 전시 공간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VR 기어와 컨트롤러 같은 도구적 장비를 걷어냈을 때 오리지널 영상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다. 투박하고 거친 목판 회화,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불완전한 세팅으로) 재생되는 VR 애니메이션은 어쩌면 이 전시회의 상징적인 단면이자, 이번 전시가 궁극적으로 다루려는 ‘현재’의 상황을 단박에 제시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가장 근원적인 원초성과 가장 핫한 테크놀로지의 공존, 또는 상충. 이 팽팽한 긴장 옆에 2분짜리 애니메이션 <Mountain>이 재생된다. 최대한 정제된 컬러와 거친 라인 드로잉, 무엇보다 거침없이 내달리는 움직임의 동세가 시선을 붙잡는다. 2D 드로잉 애니메이션이 지닌 본연의 매력이 가득하다. 인간과 대지, 산, 자연, 나아가 우주가 질주의 생명력 속에서 하나로 묶인 듯하다. 무엇인가 무너진다면, 산 황에게는 아마도 이 에너지의 우주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다음에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메인 홀로 직행한다면 그 길목에서 소피 마리아 비커스의 작품들을 만나야 한다. 벽에 걸린 두 점의 아트웍, <Reassembled>와 <Rebuilding>이 유혹한다.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바라볼지 내심 시험에 들게 한다. 관조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화사한 그래픽 이미지를 마주할 터이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그 속에 정교한 디테일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젊은 감성으로 새롭게 탄생한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나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himboldo의 작업들처럼, 소피 마리아 비커스의 프린트 아트웍은 섬세한 부분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결코 부분이 지닌 특징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종합으로서의 전체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꺾어진 전시 벽에는 그녀의 이전 영상 작업인 3D 애니메이션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언뜻 직전의 프린트 아트웍과는 다른 결의 작업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가장 3D 애니메이션다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지닌, 왠지 익숙한 형식의 영상으로 제시되는 <Aeons Ark>는 6분 30초 분량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내러티브의 주변에 머물던 풍경이 점차 눈에 드러나고, 이것들이 마치 옆 벽면에 있던 프린트 아트웍의 디테일을 가리키며, 나아가 ‘방주’에 실릴 개별적 생명체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소피 마리아 비커스가 예비할 붕괴는 작은 부분들로 섬세하게 구축된 세상일 것이다.

전시 동선은 위와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다. 산 황과 소피 마리아 비커스 사이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오이슬이 마련한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빛의 공간이다. 메인 상영 영상인 <푸른 점Blue Dot>을 이루는 청사진 이미지들, 그리고 라이트 박스 위에 얹힌 필름 작업들. 이러한 이미지는 빛으로 가능했고, 빛을 통해 제시된다. 청사진은 빛이 남긴 흔적이고, 라이트 박스의 빛은 필름 이미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오이슬은 이미지, 특히 영상 이미지의 근원에 빛이 있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빛이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시간의 지속이 필요하다는 것도 밝히고자 한다. 빛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것, 그것이 영상이고 애니메이션이다. 이를 재확인하려는 듯, 오이슬의 공간 한쪽에 그동안의 애니메이션 작품 <시 속>과 <비늘>이 모니터 속에서 재생된다. <시 속>은 젊은 시인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시를 낭송하는 가운데,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시를 형상화한다. 시의 시간성은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육화 된다. <비늘>의 제작 기법인 페인트 온 글라스는 물감과 빛으로, 움직임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프레임씩 진행해 나가는 스트레이트 어헤드straight ahead의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오이슬이 마주할 무너짐은 빛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일 테다.

어떠한 동선을 거쳤든 양윤경의 공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메인 홀을 거칠 수밖에 없다. 이때 선택해야 한다. 붕괴를 다루는 네 편의 메인 영상을 감상한 후 양윤경의 작업들을 볼 것인지, 아니면 애써 메인 영상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양윤경의 공간으로 들어갈 것인지. 전자를 따르면 양윤경의 작업은 메인 전시의 에필로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후자를 따르면 참여 아티스트들의 이전 작업들을 모두 확인한 후, 비로소 그들의 공통적인 접점을 찾아 메인 홀로 향할 수 있을 테다. 동선이 제공하는 전시의 서사를 선택하기 위해 얼마큼 고민했든, 양윤경의 공간은 그 고민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린다.

양윤경이 다룬 다양한 소재를 관통하는 건 실이다. 실은 천을 관통하였고, 종이를 꿰뚫었으며, 회전하는 디스크를 가로질렀다. 실은 각자 떨어져 있던 대상들을 연결하고, 제 나름의 형태를 이루고자 하며, 회전이 만들어내는 잔상을 통해 감춰져 있던 형상을 드러낸다. 실은 말 그대로 ‘봉합suture’한다. 그 봉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다양하게 떠올릴 수 있다. 바느질, 외과 수술, 주체에 대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라캉에 기반한 영화 이론... 무엇을 봉합과 연관 짓든, 양윤경의 실뜨기 놀이에 우리는 이끌린다. 전시된 아트웍들을 기꺼이 만지고, 넘기고, 펼쳐보면서 실이 관통하고 봉합한 것들의 연관성을 확인한다. 회전하는 디스크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카메라 기능을 통해 바라본다. 나아가, 형태 없이 모인 소리들의 콜라주 트랙에 새로운 형태를 입힌 <Embodying Voice>나 영수증의 파편들로부터 일상의 삶을 재구성한 <The Innumerable Things That Exists>처럼, 양윤경에게 바느질과 영상은 동일한 위상을 가진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나면, 우리 또한 실과 바늘이 아직 닿지 않은 부분들을 찾아 우리 스스로 꿰고 이어보려 한다. 마치 그 실이 <너의 이름을>에 나오는 ‘무스비むすぶ’ 인양 말이다.
*장치의 메커니즘 측면에서 재봉틀과 영화 카메라 (그리고 영사기)는 아주 닮아 있다.

#03. 아방가르드의 족적들
전시회장에서 어떤 동선을 따라나섰든, 네 아티스트의 이전 작업들, 즉 무너짐 앞에 놓이기 전까지의 작품들을 살피다 보면 문득 이들 앞에 남겨진 발자취를 떠올리게 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대략 한 세기 이전부터 별안간 분주하게, 때론 경쾌하게, 가끔은 묵직하게, 어쩌다는 머뭇대기도 한 발걸음의 흔적들.
우리는 이를 아방가르드 영화*의 족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보란 듯이 과감히 붓을 꺾고는 결연히 영화 카메라를 선택하였고, 누군가는 캔버스를 스크린으로 확장하고자 하였으며, 어떤 이는 사진으로부터 영화로 진화 (또는 도약)하고자 했고, 때론 회화와 사진과 영화와 무대 사이를 종횡무진 활보하기도 하였다.
*종종 아방가르드 영화와 실험 영화를 혼용하여 쓰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다루는 유럽 출신의 20세기 아티스트들의 작업은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실험’은 그들이 2차 대전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그리고 미국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실험 정신’이 등장하고 나서에나 붙일 수 있을 테다.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장 콕토Jean Cocteau, 만 레이Man Ray, 라슬로 모호이너지Laszlo Moholy-nagy, 나아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명성에 다소 가리긴 했으나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비킹 에겔링Viking Eggeling, 오스카 피싱거Oskar Fischinger, 노먼 맥클라렌Norman McLaren 등, 애니메이션에 더 가까이 다가간 이름들도 빼놓을 수 없을 테다.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움직임과 동세를 추구한 산 황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디테일 속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개미’가 가장 대표적일 터-담으려 한 소피 마리아 비커스에게서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그의 영화 파트너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까지)는 물론이고, 영화 카메라를 마치 현미경 (때론 망원경)으로 다루면서 광학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를 포착하려던 아방가르드 영화의 선구자들을 환기할 수 있다. 시와 영상을 결합시키고자 한 오이슬의 이전 애니메이션은 제르멘 뒬락Germaine Dulac과 장 콕토 등이 구축했던 시네포엠cinepoem의 한 갈래를 떠오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청사진 기법을 활용한 오이슬의 작업은 만 레이의 레이요그래프rayograph, 모호이너지의 포토그램photogram의 연속선 위에 놓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양윤경의 작업들에서는 마르셸 뒤샹과 친구들을 유쾌하게 계승하려 한 시도들을 감지한다. 영수증 파편은 그 자체로 레디 메이드와 같으며, 긴 폭의 천을 가로지르며 재획정한 바느질의 실뜨기는 다리미 바닥에 날카로운 스파이크들을 덧댄** 다다이즘 난센스를 한번 더 비튼 듯 쾌감을 남긴다. 바느질을 LP 디스크와 결합한 작업은 페나키스토스코프Phenakistoscope의 원리를 활용하면서도, 뒤샹의 로토릴리프Rotoreliefs***처럼 회전하면서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만 레이가 1921년에 제작한 <선물 The Gift>라는 작품이다. 양윤경의 바느질은 마치 만 레이의 다리미로 긴 천을 훑을 때 생겨난 생채기를 봉합하는 작업처럼 다가온다.
***이는 옵아트 효과를 내는 그래픽 중심의 작업과 뒤샹식 말장난을 문장으로 풀어낸 활자 중심의 작업으로 구분되는데, 이 둘 모두 뒤샹의 1926년 실험 영화 Anémic Cinéma (굳이 번역하면 <빈혈증 영화>이겠으나, 제목에 쓰인 프랑스어 단어 Anemic자체가 Cinema의 철자를 재배열한 아나그램Anagram이다)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이러한 유비성으로 말미암아, 20세기 초중반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과 21세기 현재의 “실버라이닝” 아티스트들이 동일한 노선과 전략을 취한다고 여기며 전시의 중심으로 향해 간다. 그 한복판에서 붕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세기의 아방가르드처럼 전방위적으로 무너뜨리고자 하는 포격 소리로 가득할까? 무너져내라는 것들이 내뿜는 파편과 먼지가 자욱하게 내 시야를 가릴까?
#04. 다시, 붕괴의 한복판
네 명의 젊은 작가들이 이전까지 꾸려왔던 창작의 여정을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전시장의 중심에 선다. 내게 마련된 자리 위에서 붕괴의 절정을 목격할 관람자로서의 기대감과 소환된 기성세대로서의 책임감이 교차한다.
헌데, 불현듯, 이 중심의 무대가 내가 예상했던 공간 배치가 아님을 깨닫는다. 밀실과 같은 화이트 큐브에 갇힌 채, 네 벽면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들’의 영상으로 무기력하게 압도될 것이라는 기대 (또는 각오)와는 다르다. 공간은 트여 있다. 기역자로 꺾인 두 벽면만을 활용한다. 소환된 심판대에서 어쩔 줄 몰라할 꼰대-기성세대를 불쌍히 여겨 퇴로를 열어둔 것일까? 덕분에, 각오했던 폐소(閉所)의 두려움을 잠시 거둔다 (초기 기획 단계에서 상영 공간은 세 면으로 이루어진 ‘ㄷ’ 자 배치였다).
맞닿은 두 면에 두 작품씩 나란히 영사된다. 디지털 영상 옆에 아날로그 영상이 짝을 이룬 배치가 90도 꺾여 조응한다. 소피 마리아 비커스와 산 황은 디지털을 강조하고, 양윤경과 오이슬은 아날로그를 내세운다. 그래서 매끄러움과 거침이 대조를 이루고 충돌한다. 이로 인해 붕괴의 에너지는 서로를 증폭시킬 테다. 아니면 대비가 길항으로 작용하며 서로의 기세를 완화하고 중화시키려나?
소피 마리아 비커스의 <재구성Reassemble>은 무너지는 인간의 신체와 이를 바쁘게 분해하는 개미들, 그리고 개미들에 의해 ‘재구성’된 인간의 신체로 무너짐을 풀어낸다. 이때 개미는 인간의 얼굴을 닮고, 분해되어 재구성된 인간의 육신은 꽃과 식물의 모둠으로 제시된다. 그렇게 새롭게 완성된 모습은 프린트 아트웍으로 보았던 <재구성>에 담겨 있다. 즉 우리는 프린트 아트웍의 이미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 형태에 이르렀는지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 덕분에 조금 더 세부 디테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산 황의 <다성음악Polyphony>는 작은 싹으로부터 자라나는 줄기들, 이로부터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이내 시들어 떨어지는 꽃잎과 줄기로 마무리한다. 이때 각 줄기들은 동시에 자라나지만 점차 자신들의 속도로 꽃을 피우고는 이내 저마다의 삶을 살고는 본래의 마침표로 수렴한다. 여러 식물의 피고 짐이 어우러져 ‘다성음악’을 이루는 것이다. 비커스의 인간-식물로부터 산 황은 식물을 이어받은 셈이다. 물론 더 눈여겨본다면 산 황의 식물들 또한 동물의 가죽과 살, 피부이 어우러진 혼종적 형태를 구현하기에, 비커스의 구성 방식과 호응한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놓인 오이슬의 <푸른 점>은 비커스의 인간-식물-개미의 관계에서 인간을 선택한다. 이때 인간은 별들의 충돌에 의해 먼지처럼 흩어지는 빛을 주우려 하는 존재이자,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 집합적 존재이며, 결국에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한 점으로 보이는 존재이다. 그래서 오이슬의 영상은 비커스의 작품과 맺는 관련성만큼이나, 한 점에서 시작하여 다수로 얽혔다가 다시 하나의 점으로 회귀하는 ‘다중음악’적인 구조에서 산 황의 작품과도 맞닿는다. 우주 먼지로부터 비롯된 원자 단위의 물질들이 합쳐지고 분해되면서 자연과 우주의 일부를 이루며 순환한다는 점에서 오이슬과 비커스, 그리고 산 황은 붕괴와 생성의 사이클을 따라 저마다의 궤도로 공전한다.
이러한 작품들 사이의 연관성은 양윤경의 <(紅線) Suture-무너지되, 끊어지지 않는>에서, 제목 그대로 ‘봉합’된다. 붉은 실의 바느질은 비커스의 개미 무리가 이루는 행렬과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부분들을 엮어서 다시 인간을 봉합,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에 대한 변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붉은 실은 산 황이 식물들로 꾸린 다성음악적 구성과 형태적으로도 연결된다. 실은 때론 단순하게, 때론 복잡하게 얽히고 정돈된다. 오이슬의 점으로 흩어지는 빛과 인간의 관계 또한 실을 꿰어나가는 바느질과 그 실로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실뜨기로 새롭게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양윤경이 제목으로 삼은 “무너지되, 끊어지지 않는”이라는 뜻 자체를 스스로 시각화할 뿐만 아니라, 제목을 이루는 세 가지 언어 표기-한자, 영어, 그리고 한글-가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문화적 배경을 하나로 엮는 또 다른 ‘바느질’ 임을 확인시킨다.
이처럼 네 영상을 수시로 넘나들며 서로의 관계를 잇다 보면, 이 공동 전시 구역이 단지 붕괴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퍼뜩 깨닫게 된다. 움직임, 운동, 변화는 자연, 인간, 우주, 사회 등등, 아주 미시적인 수준에서부터 가장 거시적인 범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총체적으로, 동시에,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리듬과 속도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나를 향해 쏟아질 것이라 단단히 준비했던 붕괴의 충격파는 나를 덮치지 않았다. 긴장감에 단단히 그러쥐고 있던 주먹을 그제야 슬며시 풀어본다.
붕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들은 무너졌다. 다만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다. 한편으로 어리둥절함에, 또 한편으로는 머쓱함에 전시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무너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종결 어미로 맺지 않았다. “When Things Collapse”도 완성형 문장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너짐, 붕괴, Collapse는 귀결점이 아니라 하나의 단계, 이행 지점을 차지하면서, 이 프로젝트의 계기로 작동한다. 그리고 네 작가들은 그 지점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무너짐으로부터 다시 살아남을, 붕괴로부터 형성을, 그리고 다시 무너짐/붕괴를, 그리고 다시 살아남/형성을...
이때, 네 편의 영상은 모두 1분 30초의 길이를 따른다. 그렇다면 이들은 동시에 발생하여 동시에 소멸하며 동시에 부활하는 걸까?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간다. 기획 당시 의도로는 정확한 ‘동기화’를 추구했으나, 여건 상 구현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의도치 않은 오차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상들은 제각각 시간차를 통해 제 나름의 생성-붕괴의 사이클을 진행한다. 그래서 어느 작품이 무너져 내릴 때, 다른 작품은 살아난다. 비동기화의 카오스가 아니라, 끊임없이 깨어나는 삶으로 충만해진다. 이것이 바로 “무너지되, 끊어지지 않는” “다중음악”이다. 우주는 늘 그렇게 쉼 없이 “재구성”된다.
#05. 붕괴 이후, 붕괴로부터
붕괴의 한복판에서 빠져나온다. 메인 전시에 이르렀던 동선을 돼 밟아 가며 작가들의 이전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처음의 동선을 따랐을 때, 나는 한 세기 전 아방가르드의 실천들을 떠올리며 ‘실버라이닝’의 작가들을 아방가르드의 후예, 계승자로 가늠했다. 하지만 돌아 나오는 길에서 확인한 것은 과거 아방가르드와의 유사성이 아닌, 현재의 차별점이다.
둘 사이에는 닮음만큼이나 큰 다름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붕괴’를 둘러싼 입장 차이가 크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에게 ‘붕괴’는 적극적인 목적성에 기반한다. 그들은 당대의 체제와 제도에 대한 붕괴를 꾀하고자 하였다 (지역적, 시기적으로 뿐만 아니라 동일한 소집단 내부의 구성원끼리도 입장 차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반면 본 전시회를 꾸린 네 명에게 붕괴는 능동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삶을 삼키려는 상황이다. 이때 붕괴는 젊은 아티스트를 목적어로 삼는다. 즉 20세기의 아방가르드는 자신들의 실천 속에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새로운 예술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세상을 주도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젊은 예술가들을 드러내고 반영하고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하기에 실버라이닝 작가들은 아방가르드를 그저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험은 좀 더 명확히 집중되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을 전시 공간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
이를 테면 스크린 위에 투사하는 세팅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감춰져야 했던 애니메이션 아트웍 자체의 물성과 영화 장치의 메커니즘이 비로소 제 모습을 공개한다. 필름 이미지의 시원이 되는 ‘감광’, 즉 빛에 대한 반응이 시아노타입 작업으로 부각되고, 한 땀 한 땀 이어나간 바느질은 낱개의 프레임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영화 필름film strip의 구조와 영화 카메라/영사기의 구동 원리인 ‘간헐적/단속적(斷續的) 움직임intermittent movement’을 명확히 가리킨다.
해체와 재구성의 대상에는 애니메이션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과정’도 포함된다. 스크린 위의 움직임을 갤러리 공간 속에 풀어놓는 시도, 그리고 스크린의 영사 속도를 전시장에서 새롭게 변속하는 시도. ‘1초당 24 프레임’이라는 표준의 구속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분량의 이미지를 손으로 넘기거나, 턴테이블의 회전 속도와 휴대폰 카메라의 반응도가 결합하여 새로이 움직임의 환영을 빚어내고자 한다.
아울러, 영사기의 재생 메커니즘에서 배제된 애니메이터의 작업, 말 그대로 프레임을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는 창작의 과정 또한 비로소 전시 공간 속에서 되살아난다. 우주의 시간을 압축한 <푸른 점>처럼, 애니메이션은 시간을 늘리고 줄이는 재주에 능한데, 무대를 상영관이 아닌 전시장으로 옮겨서 그 재주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그리함으로써 마침내, 전시장을 꾸리는 플로어 플랜은 애니메이션을 분해하여 풀어낸 전개도가 된다.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움직임의 환영’을 이루는 애니메이션의 물리적 성질들을 오이슬과 양윤경은 횡단하고, 이들과 직교하는 산 황과 소피 마리아 비커스는 목판부터 디지털까지 다양한 매체적 형식을 종단하며 펼쳐낸다.
이렇게 전시 공간을 재편함으로써, 애니메이션은 상영관에서 재생되는 한 번의 삶 대신, 그 속에 담아 두었던 여러 층위의 시간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즉, 소피 마리아 비커스가 <재구성>에서 보여주듯, 전시는 애니메이션을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주변과 함께 어우러진 ‘확장된’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 06. 교신의 메시지
무릇 예술가의 삶에서 불안은 편재한다. 젊은 아티스트의 불안 또한 예나 지금이나 있기 마련이다. 비단 ‘젊다/연륜이 있다’처럼 나이나 경험치에 따라 ‘불안이 있다/없다’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은 늘 불안과 함께 한다. 불안은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의 작업물이 얼마나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호응이 어떠할지에 대한 불명확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작품에 대한 호응, 이해, 전달을 둘러싼 불안은 한편으로는 기대감, 설렘의 연장이기도 하다. 기대와 불안이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창작자를 매 순간 이끌기도 한다. 물론 이런 얘기는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또는 결국에는 잘 될 거라는 낙관적인 위안이 작동할 때나 먹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젊은 아티스트의 불안은 어느 순간부터 제도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를 꼽자면 대학이라는 교육 과정일 테다. 아뜰리에, 스튜디오, 공방 등이 모두 대학에 흡수되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익힘과 배움이 커리큘럼으로 재편되면서 표준화된 제도를 이룬다. 그러하기에 졸업은 제도가 허용하는 졸업 전시회라는 쇼케이스를 거쳐 현실 속으로 별안간 내던져지는 배출구로 작동한다. 마치 서커스 쇼에서 대포에 장전된 인간 포탄처럼, 카운트 다운과 함께 제도-대학 밖으로 냅다 발사된다.
펑!
펑!
펑!
펑!
졸업의 순간, 세상에 쏘아 올려진 젊은 아티스트의 발아래에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발판이 없다. 대신, 혼돈과 불안과 붕괴의 난기류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한동안 날아가야 할 것이다. 이때 시선을 아래와 뒤가 아니라 위와 앞을 향하면 구름이 보이고, 그 가장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볼 수 있을 테다.

전시의 입구에서 만난 산 황의 <Mountain>을 출구에서 다시 마주한다. 깨어나고 내달리는 동세, 어느새 내 발에도 그 추진력을 장착해 본다. 한껏 게으르고 나태하고 안일했던 나의 발걸음이 혹여 세상의 붕괴에 일조한 것은 아니었을지 싶었던, 알량한 자책감을 애써 떨쳐내 본다. 섣부른 낙관 (그리고 비관)과 성급한 위로 (그리고 좌절, 또는 분노)는 위험하기 마련이다. 내가 할 일은 구름 너머를 향해 날아가는 “실버라이닝”의 궤적을 꼼꼼히 기록하며, 응원하는 것일 테다.
1분 30초 길이의 네 작품을 상영관에서 보았다면 그 분량만큼의 실험적 환영을 따라갔을 테다. 하지만 빛을 쫓는 6분 대신, 6분을 빚어내는 과정을 더듬으며 한 걸음씩 걸어 본다. 전시가 허용하는 동선들을 따라 애니메이션을 사유하는 것은 언제나 멋진 경험이다. 나는 나만의 동선으로 실뜨기를 한 것이다.
나호원 Joint Editor
작품 이미지 제공: 실버라이닝
*이번 리뷰는 도암갤러리 전시비평과 같은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