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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The Sea on the Day When the Magic Returns

  • 작성자 사진: seoulanimator
    seoulanimator
  • 8월 24일
  • 12분 분량

최종 수정일: 8월 27일

마법이 돌아온 날의 바다 The Sea on the Day When the Magic Returns | 2022 | 24mins | dir. 한지원 HAN Ji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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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바다를 건널 때 우리는 마법을 만난다


01. 첫 2분

시작은 어둠이다. 


연인들이 주고받는 달짝한 밀어, 알듯 말 듯 한 속삭임과 고백. “사랑하고 나서부터 마법을 잃어버렸나 봐,” 세진은 말한다. 그리고는 별안간 들리는 알람 소리, “따르르릉 따르르릉.” 날이 밝았는지, 꿈이었는지 판단도 하기 전에 휴대전화에 뜨는 스케줄 “관광통역사 3차 영어면접시험, 오늘 오전 8:00.” 메시지를 따라가기 바쁘게 휴대전화는 물속으로 빠져든다. 이로부터 카메라는 줌 아웃, 또는 달리 아웃dolly out으로 쑤욱 빠지면서 시야를 넓힌다. 바다로 빠져들기 직전의 차 안, 운전대를 꽉 붙잡은 채 당황하는 세진. ‘사고를 당한 것일까?’ 우리가 상황 파악을 하려 할 때, 별안간 벌거벗은 사내, 준호가 작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추락과 동시에 에어백처럼 덮치는 준호, ‘위기에서 구하려 나타난 수호 정령 같은 존재인가?’라는 기대를 품으려는 순간, 세진과 준호는 어느새 침대 위에 있다. 당황한 표정의 세진이 “마법이 사라졌어”라고 내뱉자, 다시 화면은 물에 빠진 차 안으로 이동. “그놈의 마법, 마법...” 준호가 세진에게 조롱 섞인 말을 건넨다, “거짓말쟁이...” 그리고는 저해상도의 역광, 로우 앵글로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회전체...


작품의 첫 2분, 작품 제목이 나타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상황들은 종잡을 수 없다. 꿈속에서 벌어지는 전개처럼, 일종의 자동기술법을 따르는 장면들일까? 죽음 직전에 눈앞에 펼쳐지는 주마등 같은 현상일까? 아니면 예지몽?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관계와 상황과 사건과 의미가 무엇인지는 작품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야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정신없이, 그러면서도 유려하게, 하지만 숨 가쁘게 펼쳐지는 오프닝 2분은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는 별다른 준비 없이, 시쳇말로 ‘가드도 올리지 않은’ 상태인데, 상대는 1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현란한 펀치 세례를 날리는 것 같다. 그 기세에 눌려 정신을 잃을 즈음, 1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소리처럼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라는 제목이 뜬다. 


휘몰아친 2분 동안 거칠게 숨을 내쉬기도 했고, 물속에 빠진 그녀를 따라 숨을 꾹 참기도 한 것 같다.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 (이후 필요에 따라 <마돌바>로 줄임)의 오프닝은 그랬다. 처음 보았을 때도, 그 이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눈가리개를 쓴 채로 천천히 상승하다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안대를 벗고 주변을 둘러보려는 순간, 급전직하 고꾸라지다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빙글빙글 회전하듯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수차례 타다 보면 어떤 경로를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 알지언정, 가속도와 원심력은 여전하다. 마치 우리 몸을 현실의 중력장 밖으로 집어던질 것처럼 군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면이 나올지, 그래서 어떻게 전개될지 알면서도, 첫 2분은 항상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02. 꼬여버린 관계, 망쳐버린 계획

거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찾아온 고요처럼, 제목 다음에 나오는 장면은 거의 정적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세진이 차 안의 준호와 마주친다. 정체된 차량 행렬처럼, 둘 사이의 대응도 멈춘 듯 더디다. 애써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정산에 필요한 형식적인 대화도 없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 것만으로 당황한 것일까? 준호의 차 안에는 아내, 그리고 아이가 함께 타고 있다. 그러니까 앞서 함께 했던 연인들은 이미 남남이 되었고, 준호가 결혼을 하여 2세까지 얻었으니 그간의 시간도 제법 흘렀다.* 헤어졌지만 세진은 준호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했나 보다. 그는 작아진 모습으로 여전히 그녀 앞에 출몰하곤 한다. 연민이나 미련이 남아서 그를 붙잡아 두는 건 아닐 터. 그는 그녀에게 비아냥대고, 힐난한다. 둘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길래 그리 구는 걸까?

*그날 밤 미니미 준호가 “여전히 그 시험 준비하는군. 세 번 정도 떨어지지 않았나?”라고 깐족이듯 말한다. 두 사람이 연인일 당시에도 세진이 관광통역사 시험 준비를 하던 것으로 보아, 대략 2~3년 전에 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준호의 아이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아 보이니, 준호는 세진과 이별 후, 얼마 안 지나서 현재의 아내와 교제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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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만 세진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니다. 세진의 아빠는 세진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준호와 이별한 후 혼자 생활하는 세진이 안쓰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아빠는 그저 당신만을 생각할 뿐이다. 겉으로는 딸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아빠는 딸에게 신세한탄하며 투정을 부릴 뿐이다. 아빠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진이 아니라 엄마일 테니까. 


엄마가 아빠를 떠난 지는 한참 되었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엄마는 세진을 데려가지 않고 아빠에게 남겨두었다. 세진은 엄마를 원망하는 걸까? 아니면 엄마를 이해하는 걸까? 알 수 없다. 떠난 이후로 엄마는 세진을 찾지 않았다.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세진과 아빠에게서 떠났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세진이 어렸을 적, 가족들이 하와이에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 속에서 만큼은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이제 그 사진에서 엄마의 얼굴은 잘려 나갔다. 엄마 얼굴이 사라진 사진은 한동안 앨범 속에 방치되었을 텐데, 지금은 세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세진은 잘려 나간 빈칸에 엄마 얼굴을 그려 넣었다). 세진이 아빠 집에 갔다가 챙겨 왔으리라. 아빠도 그 사진을 자신의 휴대전화로 찍어서 보관했나 보다. 세진에게 ‘그 사진’을 전송하며 행방을 묻는다. 세진이 나중에 확인하지만, 잘려 나간 엄마의 얼굴은 아빠의 트럭 운전석에 붙어 있다. 아빠는 그렇게 늘 엄마의 웃는 얼굴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 그리움? 원망? 미련? 자책? 희망?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아빠와 엄마 사이의 결별이 세진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엄마가 떠난 건 세진이 어렸을 때였으니. 이후 준호는 세진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기대케 하는 상대였을 테다. 자신의 부모가 보여주지 못한 다정한 관계, 자신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따뜻한 애정을 세진은 준호에게서 찾을 것이라 기대했을 터.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복을 안정적으로 지켜줄 보금자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거기서 사달이 나버렸다. 분양사기를 당했다. 그 후로 준호와 헤어졌고, 세진은 그곳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준호가 분양사기를 막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사기의 충격으로부터 세진을 지키지도 못했다. 물론 둘 사이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빠와 엄마 사이의 사연도 잘 알 수는 없다. 


이렇듯 세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아니 도움은커녕 외려 발목만 붙잡으려 대는 사람들, 징글징글한 인간들, 어떻게든 살아보려 아등바등 댈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려는 인간들... 안 좋은 일은 피하가지 않을뿐더러, 연달아 터지기 마련이다, 아무렴. 준호와 마주치게 된 건 하필 영어면접시험을 하루 앞둔 오후였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으로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길에 아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늘 당신 하던 대로, 한탄과 하소연과 푸념, 그리고 공갈 섞인 으름장을 늘어놓는다. 8시간 후면 시험, 아침 일찍 세탁소에 들려 옷을 찾아서 늦지 않게 시험장에 가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새벽 6시 30분에 뜬금없이 날아든 메시지, 아빠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그동안 준비한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03. 움직임과 몽타주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에서 한지원은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다른, 연출적으로 큰 폭의 도약을 시도한다. 


앞선 작품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정석적인 드라마 문법을 따박따박 밟아가면서 섬세하게 감정선을 조율해 가는 편이었다. 물론 필요할 때는 특유의 번뜩이는 감각이 돋보이는 장면을 만들어 냈지만. 정석 플레이라는 말은 하나의 장면 다음에 어떤 장면으로 호흡을 조절하면서 사건을 전개할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한지원의 감성은 탄탄한 안정감을 기반으로 삼아 적재적소에서 변속을 하면서 무리 없이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갔다. 


하지만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는 롤러코스터이고, 우리는 거기에 꽁꽁 묶여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질주해야 한다. 그럴 때, 움직임은 필수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작품은 극명하게 나뉜다.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한다. 롤러코스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완급조절을 하듯, 특히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잠시 유지할 때에는 그 이후에 펼쳐질 속도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듯, 고요한 바다, 잔잔한 물결은 곧 휘몰아칠 사건을 예고한다.


<마돌바>에서 움직임은 인물과 카메라 모두에 적용된다. 


먼저 인물의 움직임부터 얘기하자. 일반적으로 한지원의 작품들에서 캐릭터의 움직임은 크게 과장되거나 단순화되지는 않는 편이었다. 다시 말해 정형화된 카툰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을 따르지 않되, 그렇다고 굳이 자신만의 액팅 스타일을 구축하는 편은 아니었다. 캐릭터의 움직임은 대개 드라마 전개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행동과 반응을 무리 없이 표현하는 식이었다. 단 <학교 가는 길>(2013)은 예외인데, 특히 세상 밖으로 나온 개 마로의 시선에서 때론 과장되거나 때론 단순하게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마로의 심리 상태, 즉 두려움과 간절함을 반영한 의도였다. 


<마돌바>에서 독특하게 드러나는 인물의 움직임은 일상적인 동작이 아니라, 가히 ‘몸부림’이라 할 수 있는 지점들이다. 벌거벗은 채로 등장하는 (작은) 준호의 움직임을 보라. 세진과 연인이었던 때에 준호는 지극히 평범한 (또는 사실적인) 동작으로 움직이지만, 나체 미니미 준호는 꽤나 과장 섞인 동작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불쑥 들이댄다. 말 그대로 도발적인 동작을 의도적으로 해대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실제 준호가 아니라, 세진의 심리상태가 투영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심기를 건드리고, 약 올리고, 조롱하고, 아픈 곳을 찌르고, 야유하는 ‘몸부림’이 평범하거나 사실적일 수는 없다. 예전 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말의 동정, 연민, 부끄러움, 염치, 책임감, 미안함, 애틋함, 미련,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도발만을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기에 ‘몸부림’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관광통역사가 되려는 진짜 이유를 확인시키려는 “너도 너네 엄마처럼 아빠를 버리려고 하잖아”라는 지적일 테다. 미니미-준호는 세진이 감추고픈 자신의 속내, 죄책감, 상처, 절망감, 자신에 대한 의구심 등 자기 무의식의 발로에 가깝다.


​​그 반대편에 세진의 ‘몸부림’이 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몸부림들, 이를 테면 자신을 옥죄는 현실로부터, 징글징글한 인간들의 관계로부터, 결코 아름답지 않을 기억의 찌꺼기 들로부터... 질식사 직전의 아빠를 차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몸부림, 익사 직전의 위급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 그러니까 발버둥 치고 허우적거리고 울부짖고 내팽개치듯 내달리는 모습들은 고스란히 몸부림이 된다. 면접장에서 온몸을 꼿꼿이 세운 채, 긴장해 있는 정적인 움직임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담아내는 카메라 또한 그에 맞춰 격하게 움직인다. 


오프닝에서 보았던 줌 아웃/달리 아웃은 이러한 카메라 움직임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세진의 클로즈업된 얼굴로부터 점점 빠져나가 옆좌석, 통로, 비행기 창, 마침내 상공에 떠있는 비행기를 보여주는 엔딩의 카메라 동선은 오프닝의 느린 변주와도 같다. 물에 빠진 위기 상황에서 마법을 소환하려 할 때에도, ‘뚫어뻥’부터 가구, 자동차를 거쳐 비행기가 차례로 들이치는 모습을 따라 카메라는 움직였다.


<마돌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지점에서도 카메라는 우리의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다. 바로 한밤 귀갓길, 세진이 운전하는 차가 도로 옆 아파트 분양 광고로 향해 날아가다가 이윽고 건물의 뒷면을 드러내는 장면.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궤적은 그저 건물의 앞과 뒤를 보여주는 180도 트래킹에 그치지 않는다. 광고 이미지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예비 수요자를 현혹하지만, 그 뒤에는 분양사기 피해자들이 처한 ‘현재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카메라는 하나의 동선을 따르면서 현재-미래-현재의 시간대를 관통하고, 현실-환상-현실의 차원을 넘나 든다. 흔히들 하늘을 비행하는 시선-카메라를 애니메이션만의 고유한 상상력이라고 꼽지만,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예상치 못한 충격파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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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원의 과감한 연출적 도발이자 도약은 인물과 카메라의 움직임에 그치지 않는다. 


역동적인 장면은 정적인 장면과 충돌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은 환상적(이라 여겨지는) 상황과 나란히 배치된다. 내면의 갈등은 외부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쉼 없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뒤엉킨다. 롤러코스터는 단지 속도만으로 우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측을 불허하는 복잡한 궤도를 따라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운동량과 방향을 투하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론 위치 에너지를, 때론 운동 에너지를 체화(體化)하게 된다. 이렇듯 <마돌바>는 충돌과 병치, 이행과 간섭의 몽타주를 통해 세진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한다.


<마돌바>의 몽타주에서 언급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움직임과 몽타주가 결합되는 접점이다. 한 인물의 움직임이 유지되는 가운데, 장소가 바뀌는 이른바 ‘매치 트랜지션’match transition. 꽤나 근사하고 세련된 연출법인데 한지원은 이를 그저 스타일적으로 차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매치 트랜지션을 적용하는 순간, 마법의 효과가 발생한다. 난감한 사고 현장에서 막바로 면접 장소로 전환하는 마법, 시동이 걸리지 않는 트럭에서 곧장 항공사 티켓 부스로 옮겨가는 마법.*

이러한 활용법은 영화의 초기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술사 출신의 조르주 멜리에스는 야외 촬영을 하던 어느 날 일어난 우연한 발견에 대해 종종 언급하곤 했다. “큰길에서 촬영하던 중, 필름이 카메라 속에서 엉켜버려 잠시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촬영을 이어갔다. 그날 밤, 촬영한 분량을 현상하여 확인하다 보니 ‘사람을 가득 싣고 달리던 마차’가 화면 가운데에서 갑자기 ‘관을 실은 장의사 마차’로 바뀌는 놀라운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는 트릭 촬영술 중 하나인 ‘스톱 액션stop action’ 촬영술 (하나의 동작/피사체를 촬영하다가 중간에 카메라를 멈춰서 이동/바꿔치기한 후 촬영을 재개하는 촬영술)의 계기가 되었다. 아직 내러티브 확장을 위한 본격적인 몽타주, 신과 신을 연결하는 장면 편집이 도입되기 이전에 일어난, 영화와 마술이 조우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멜리에스의 당당한 발언과는 달리, 이미 1895년 (8월 28일) 에디슨 스튜디오에서는 키노토그래프를 가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The Execution of Mary, Queen of Scots>이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을 촬영했다. 멜리에스가 영화를 촬영한 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대중적으로 공개한 1895년 12월 28일 이후에나 가능했다.


04. 현실, 판타지

“제가 관광통역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영영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이 튀어나온 독백이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세진이 관광통역사를 준비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흉가처럼 방치된 분양사기의 현장으로부터, 갑갑한 톨게이트 부스로부터, 당신의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엉겨 붙으려는 아빠로부터, 깔끔히 사라져 버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 곁에서 머무는 전 연인(의 기억)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수단이 관광통역사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또 하나의 인물, 그리고 목적지가 있다. 혹시 엄마를 찾아 나서려는 것 아닐까?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엄마는 세진을 그리워할까 (마찬가지로 세진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걸까)? 어른이 된 당신의 딸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바다에 빠졌을 때, 잠시 나타났던 엄마는 (아마도 함께 여행 갔던 하와이의) 화산섬에 있었다. 그곳은 실재할까?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 속 세진이 처한 현실은 꽤나 ‘사실적’으로 다뤄진다. 미장센, 소품, 상황, 사건들은 특별히 미화되거나 인위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이며 ‘있을 법’ 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수시로 개입하는 평행한 흐름은 ‘환상적/비현실적’이다. 말하자면 여러 층위의 다중 우주가 얽히면서 서로에게 침투하는 식으로 작품은 전개된다. 


가장 사실적인 층위에서는 통역사 시험을 앞둔 세진이 새벽에 아빠의 문자를 받고 그를 구해내려다 함께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가장 비현실적인 층위에서는 엄마의 마법이 작동하고, 나체-미니미 준호가 나타나 세진에게 말을 건다. 엄마의 마법과 준호의 미니미가 같은 층위에 속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판별하기는 어렵다. 준호는 세진의 심리적 투사체에 가깝지만, 엄마 역시도 (준호처럼) 세진의 내면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별도의 마법계에 속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배치된 또 하나의 층위에는 정해진 ‘스케줄’을 따라 진행되는 사건의 축이 있다. 말 그대로 캘린더에 기입된 스케줄이자, 정확한 시간으로 표시되는 일정들이다. 이곳에서는 “예정대로” 일들이 일어나고 진행된다. 책상 위에 빽빽하게 짜 놓은 시험 준비 스케줄, “D-1”, “D-0”, “세탁소 들러서 정장 찾기, 오전 6:30”, “관광통역사 3차 면접, 오전 8:00” 등등. 아빠가 남긴 메시지에 표기되는 시간 (오전 6:27, 6:29, 6:30)과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시간 시그널 (“7시를 알려드립니다”)은 사실적인 층위와 스케줄의 층위가 교차하는 접점으로, 마치 알리바이처럼 작동한다.


하나의 층위에서 다른 층위로의 이동, 특히나 ‘매치 트랜지션’을 통한 순간 이동은 이 작품이 어디까지가 사실/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마법/판타지인지 단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진과 아빠는 어떻게 바다에서 구조된 것일까? 세진은 3차 면접을 제때 치를 수 있었던가? 그래서 세진은 원했던 관광통역사에 합격하는 것일까? 그리고 세진은 엄마를 만난 (혹은 만날) 것일까? 스케줄 층위로 포함시킬 수 있는 세진의 비행기 티켓은 현실과 마법을 둘러싼 궁금증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탑승권 왼쪽에는 14FEB17, 오른쪽에는 17JUL14. (한지원은 이를 단순한 착오라고 얘기하지만, 프로이트는 실수 속에 무의식이 담겨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날짜 표기 실수는 감독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인가?) 


현실과 비현실의 뒤엉킴은 최근작인 <이 별에 필요한> (2025)에서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 (<이 별에 필요한> 리뷰 참조). SF 장르이면서도 근미래의 청춘 로맨스이자 일종의 도전과 모험을 담은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개연성을 기반으로 난영과 남영 엄마의 연결, 난영과 제이의 관계, 조난당한 난영의 생사여부 등을 좇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로부터 빗겨 나가는 또 다른 진행 방향을 작품 속에서 감지하게 된다. <학교 가는 길> 또한 마로의 여정 속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분리, 교차를 담아낸다.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분류틀을 소환한다. 사실주의 대 판타지, 양극단의 대립이거나 양 끝점 사이에 놓이는 스펙트럼. 하지만 판타지 소설 연구자인 브라이언 애터버리Brian Attebery의 말처럼, “사실주의와 판타지는 하나의 척도에서 양극에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좀 더 사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브라이언 애터버리,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푸른숲, 2025), 415-416쪽에서 인용. 자세한 논의는 2장 “마법이 현실 세계로 뻗어나간다면 - 판타지와 사실주의” 참조.


물론 이러한 판단은 우리도 이미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므로, 한지원의 작품을 평가할 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보다는 SF 작가(판타지도 썼다)이자 비평가인 조애나 러스Joanna Russ가 소개한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Samuel R. Delany의 접근 방식, 즉 가정법을 통해 소설의 장르를 새롭게 바라본 접근법이 좀 더 참신할 것이다.*조애나 러스,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포도밭, 2020), 53-56쪽.


“보고문학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자연주의 소설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판타지는 자연주의 소설의 가정을 가져다가 뒤집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SF에서 가정의 단계는... 한 번 더 바뀐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난” 사건을 팩트로 전달하는 것이 보고문학 (르포르타주)이라면,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은 자연주의를 이루는 허구적 사건이며,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은 판타지적 사건이다. 그리고 SF가 다루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은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조에나 러스에 따르면 “일어날 수 없었던” 판타지적 사건은 “일어날 리 없고, 존재할 리 없는” 사건이다. 그녀는 바로 이 점, 즉 현실을 위반하고 어기고 부정하는 (일어날 리 없고 존재할 리 없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 판타지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반면 SF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고, 자연주의는 (어쨌든 일어날 수 있었던) ‘개연성’에 기반한다. 


<이 별에 필요한>이 근미래의 설정을 통해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SF를 지향한다면,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의 중요한 전환점들은 확실히 ‘가능성’이나 ‘개연성’보다는 “일어날 리 없고, 존재할 리 없는” 판타지적 사건으로 기운다 (굳이 그들을 ‘머글’이라고 대놓고 전제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마법사’라고 증명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번거롭다). 하지만 여전히 <마돌바>에는 “일어날 수 있었던”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도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05. 절체절명, 간절함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 


사실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에둘러서 다다른 까닭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너무 이르게 제시했다가는 자칫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마술’ (판타지, 초현실/비현실)과 ‘리얼리즘’ (현실/사실)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은 사실적 상황에 대한 치밀하고 정교한 빌드업이 전제 조건이다. 이때에도 그저 객관적인 외양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구조와 원리에 대한 진단이 받쳐줘야 한다. 마치 광고판 겉면에 보이는 번지르르한 청사진을 그럴싸하게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면에 감춰진 비참한 실상을 드러내는 연출처럼 말이다. <마돌바>는 이러한 전제 기반을 작품 속에서 탄탄히 다졌다. 마법이 적용되지 않는 장면들은 현실의 원리와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법이 작동하는 기제이다.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마법을 구사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지점, 가장 절박한 시점에 마법이 구현되어야 한다. 단 이때에도 마법이 모든 갈등과 모순을 단숨에 해결해 버리면 의미가 없다. 거칠게 말하자면,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마술은 문제 해결보다는 모순된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에 더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니까 마술적 리얼리즘은 현실의 문제를 치밀하게 진단한 끝에 당장의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는 대신 마술적 상상으로 벽을 허무는 시도이다. 농도와 밀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랬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그러했으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그러했다. 


세진이 마법봉을 휘두르는 마법 소녀가 아닌 까닭도 그저 마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다. 세진은 삶의 가장 가파른 곳, 가장 깊은 곳에 이르러서 간절히 원해야 했다. 그러한 벼랑 끝에 다다르도록 현실의 삶이 세진을 몰아가야 했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혹은 더 이상 숨을 쉬기 어려울 때, 그제야 마법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마돌바>의 관건은 마법이 ‘돌아오는’ 바로 그 정확한 순간을 세팅하는 것에 있다.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그 순간의 마법에 수긍하고 동의하도록 말이다.


절박한 순간에 간절히 소망하여 되찾는 마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한지원은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자신의 경험에서 찾는다. 세진과 같은 또래로서, 그동안 거쳐온 삶의 여정에서 겪었을 개인적 좌절, 방황, 고통, 고뇌, 상처, 시련, 상실, 불안 등등, 구체적인 사연은 다를 수 있겠지만 가해진 강도는 같았을 것이다. 작품의 첫 장면, 어둠 속 준호와의 대화 속에서 세진은 말한다. “널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마법을 잃어버렸나 봐.” 작품의 처음과 중간에 세진은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는 마법”이라고 말한다. 하와이 가족 여행을 떠났던 어릴 적, 세진이 기념품 가게에서 조그마한 장신구를 갖고 싶어 했을 때, 엄마는 마법으로 그것을 세진에게 건넸다. 작품의 막바지, 사진 속 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마법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단다.” 


그렇다면 세진은 마법으로 준호라는 사랑을 획득한 걸까? (그래서 “사랑은 마법 같은 것”이라고 우리가 상투적으로 부르는 걸까?) 적어도 둘 사이가 행복했을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던 걸까? 준호도 이를 간파했는지, 농담처럼 “나를 제일 갖고 싶었나 보군”이라 농담처럼 던진다. 그랬던 준호는 이별 후에 미니미의 모습으로 “마법을 쓸 줄 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며 힐난한다. 준호와 헤어지고 사랑이 깨졌을 때, 마법은 여전히 세진 안에 있었던 걸까? (마찬가지로 엄마가 여전히 마법을 쓸 줄 안다면, 아빠를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그래서 세진은 마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걸까?


한지원은 세진에게 (혹은 세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려 한 것 같다. 마법은 전적으로 사랑과 일대일 대응하는 건 아니다. 때론 사랑이 모든 것을 채울 때도 있겠지만, 삶이 언제나 사랑만으로 가득 채워질 수만은 없다. 그건 사랑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전능하다고 섣불리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현명하다면 사랑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사랑과 삶은 공존할 수 있다 (아빠는 사랑을 잃었고, 삶마저 잃게 될 지경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있다. 


세진은 바라던 곳을 향해서 떠난다. 그녀가 원한 건 도피가 아니었다.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견뎌냈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를 얻어낼 수 있었다. 굳이 마법이 있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힘들었지만 버텼기에 우리가 마법이라고 부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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