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Dark Cloud Memories
- seoulanimator

- 2시간 전
- 10분 분량
기억은 먹구름 Dark Cloud Memories | 2024 | 11mins 55secs | dir. 정승희 JUNG Seunghee

It Just Works
# System Rebooting... 2011년, 아이클라우드
2011년 6월, 스티브 잡스는 세계 개발자 회의에서 애플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해 발표한다. 서비스 이름은 “아이클라우드 iCloud”. 그로부터 4개월 후 잡스는 영면에 들었다. 클라우드 론칭은 그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 되었다.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는 많은 이들이 바랐던 혁신, 즉 뭔가 쌈박한 아이폰 새 모델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애플 기기 간의 데이터 동기화’라는 목적은 일단 “동기화시킬 제품들을 구매하라”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클라우드를 통한 데이터 저장과 동기화’라는 편리성은 (바로 나로 대표되는) 테크노 머글에게는 “그냥 외장 하나에 다 때려 넣고, 필요할 때 USB로 파일을 옮기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정도”로 여겨졌다. 물론 잡스는 그 이상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지녔다. 당시로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부터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해왔다고 한다. 디지털 기기들이 발전할수록 기기간 연결과 파일 저장 및 공유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견했다. 테크노 머글이 보기에 아이클라우드 소개에서 인상적인 것은 “구름”과 “생태계”라는 비유적 표현이었다. 그건 마치 텍스트 기반에서 그래픽 기반으로 인터페이스를 갈아엎으며 사용자에게 한껏 다가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바탕화면과도 같았다. 가시적인 형태로 몸을 드러낸 테크놀로지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데이터의 클라우드 전송, 실시간 공유라는 이야기는 <공각기동대>(1995)의 ‘전뇌화’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와우!
# Resume Log Files... 불안을 둘러싼 시제
앞서 정승희의 작품 세계를 다룬 포커스 원고를 ‘불안’이라는 말로 시작한 바 있다. <정글>의 불안과 <기억은 먹구름>의 불안이 동일한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두 작품 사이에 대략 25년의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글>은 2000년대 초반에 많은 이들이 겪었을 불안을 다룬다. 세상은 모두를 폭력적인 경쟁 속에 밀어 넣는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거나,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이거나. 그러나 정글 속 경쟁은 과거 시제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 시제이다. 우리는 여전히 정글에서 살아남고자 매일 발버둥 친다. <정글>이 다루는 불안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기억은 먹구름>이 다루는 불안은 얼핏 근미래 상황처럼 보인다. 기억의 저장, 공유라는 테크놀로지 때문에 그리 여겨진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를 잠시나마 ‘괄호’ 속에 넣는다면 시제는 달라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때론 의지에 반하여, 기억은 우리로부터 점차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남는 기억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억에 대한 불안은 근미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현재에도 늘 우리와 함께 했다. 그러니까 <정글>의 불안과 <기억은 먹구름>의 불안은 우리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늘 함께 할 여러 불안 중 두 모습이다. 즉 <정글>의 불안과 <기억은 먹구름>의 불안은 동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정글>의 불안이 과거에 속하고 근미래에는 <기억은 먹구름>의 불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25년 전에도 우리는 정글의 불안과 기억의 불안을 함께 가졌고, 현재에도 여전히 기억의 불안과 정글의 불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불안은 완전히 별개인 걸까?
# Configure Library... 미세 조정
<정글>과 <기억은 먹구름>을 나란히 놓았을 때, 우리가 좀 더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은 괄호로 잠시 묶어두었던 테크놀로지를 꺼내는 상황이다. 2000년대 초, 테크놀로지와 연결된 기억은 어떠했을까? 2025년 현재의 테크놀로지와 연결된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스마트 폰도, 클라우드 서비스도 없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근미래’로 상상되는 기억-테크놀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1995년 작, <공각기동대>는 대표적인 ‘예언서’와도 같았다. 그리고 <매트릭스>(1999), <다크 시티>(1998), <오픈 유어 아이즈>(1997), <엑시스텐즈>(1999), 등의 작품이 잇따랐다. 대부분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러니까 <정글>이 만들어진 2001년에도 <기억은 먹구름>이 다루는 기억-테크놀로지-불안은 익숙한 근미래 풍경이었다. 당시 이미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되고 있었고, 세상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21세기 들어 오시이 마모루 본인을 비롯한 일본 애니메이션 진영에서는 <아바론>(2001), <이노센스>(2004), <파프리카>(2006) 등의 작품으로 화답한다.
2001년의 <정글>과 2024년의 <기억은 먹구름>이 이루는 대칭/비대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995년의 <공각기동대>와 2011년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함께 봐야 한다. SF적 상상을 현재의 테크놀로지가 ‘완전히’ 구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테크놀로지가 기존의 문제 설정을 어떻게 미세하게 조정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억을 인간의 뇌-육체로부터 저장 장치-기계로 이식, 관리한다는 1995년의 SF 설정은 미래를 향하는 상상의 비전이면서도, 데카르트의 영혼/육체 이분법이라는 근대 철학의 기원에 한껏 기대기도 한다. 다른 한편, 1995년은 테크놀로지 측면에서 ‘윈도우 95’와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대표된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 대중화되던 중요한 해이다. 따라서 뭔가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SF를 구현하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다.
허나 불과 5~6년 후, 세기말을 거치면서 상황은 한 걸음 더 진전한다. 여전히 우리의 기억은 인간의 ‘뇌’에 머물지만, 기억의 매(개)체는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빠르게 넘어간다. 사진은 필름 카메라 대신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고, 음악은 mp3를 거쳐 스트리밍으로 진입하고 있으며, 조만간 영화와 같은 동영상도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룬다. 어느새 사람들은 유선 전화에서 벗어나 재빨리 휴대전화로 갈아탔다. <매트릭스>에서는 최신 ‘노키아 폰’이 ‘미래스러움’을 한껏 뽐낸다. 아직 스마트 폰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스티브 잡스가 클라우드 서비스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가리킨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우리 뇌에서 곧바로 클라우드 서버로 전송,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저장의 매(개)체를 통해서 그 가능성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정글>이 선보인 바로 2001년 무렵 말이다. 불안 속에서 내달리는 ‘질주’는 테크놀로지 입장에서는 ‘모바일/모빌리티’의 기세로 번역될 법하다. 존재의 불안, 질주, 모바일/모빌리티... 이것들이 뒤섞이면서 <매트릭스>의 ‘노키아 폰’을 이룬다. <정글>이 급변하는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정승희가 테크놀로지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2004년에 발표한 <빛과 동전>은 감히 ‘시뮬라크르에 대한 우화’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테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테크놀로지에 잠식당한 존재를 기원에서부터 전개,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단편임에도) 긴 호흡으로 과정을 담아낸다.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저장 디스크를 책 속에 숨기는데, 이 책 제목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Simulacra & Simulation』이다.
# Corrupted File Recovery... 기억을 찾아서
<기억은 먹구름>은 그저 2001년이나, 2004년, 또는 2011년에 제작되지 않았을 뿐이다. <정글>이 만들어진 시기에 <기억은 먹구름>이 만들어졌거나, <빛과 동전> 대신 <기억은 먹구름>이 제작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2024년의 <기억은 먹구름>과는 다른 이야기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2011년에 론칭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목격한 덕에 2024년의 <기억은 먹구름>이 좀 더 설득력 있는 ‘근미래’적 불안을 다룰 수 있었다.* 애써 ‘기억을 클라우드로 업로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객에게 작품 속 상황을 설명하는 수고로움을 덜었다. ‘구현된’ 테크놀로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테크놀로지 설정에 들어갈 노력과 시간을 아낀다는 얘기다, 감독에게도 관객에게도 다행이다.
* 인터뷰에서 정승희는 <기억은 먹구름>의 기획과 지원, 제작, 발표 사이의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근미래 설정이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더라고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기억은 먹구름>은 기억이 지워진 자가 자신의 기억 속 “쌍둥이”를 찾으려 애쓰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기억과 관련한 테크놀로지 설정이 근간을 이룬다. 어설픈 테크놀로지 예언자/주술사처럼 기억-테크놀로지를 건드렸다가는 씨알도 안 먹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덕분에 “클라우드”라는 현실적 시스템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기억’과 ‘저장/기록’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2011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에 속할 설정을 지금은 현실의 경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빛으로 동전을 만들면서 그 동전 때문에 빛을 잃고 그림자로 변해가듯, <기억은 먹구름>에서도 쌍둥이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으려 할수록 나머지 기억들은 더욱 빠르게 사라져 간다. 어째서 주인공은 그리도 쌍둥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쌍둥이에 대한 기억을 필사적으로 복구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불길한 예감이 번져가는 것을 느낀다.
“쌍둥이”는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 짐작 가능한 반전일 테다. 희미해진 기억의 흔적으로부터, 가상이 진실에서 벗어나 허상을 쫓게 되면서 생기는 비극적 갈망 같은 이야기. 굳이 SF라는 장르를 택하거나, 테크놀로지 설정에 기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끌어올리자면 그 쌍둥이는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궁 속에서만 함께 했던, 하지만 둘 중 하나만 태어나고 말았던 상황. 그래서 더 비극적으로 들린다 (물론 이때에도 굳이 SF/테크놀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쌍둥이”의 실체를 둘러싼 이러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을 기억의 주체로 상정했을 때 가능하다. ‘주인공=주체’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주인공=주체’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주인공≠주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주인공=대상’이고/이거나and/or ‘실제 주인공은 다른 이’ 일 수 있다. 쉽게 풀자면 이렇다. 주인공의 기억으로부터 쌍둥이가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기억 자체가 외부에서 주입된 결과물이라면? 즉 애초에 쌍둥이가 없거나 있거나 상관없이, 쌍둥이에 대한 기억 자체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이 아님에도 집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 주인공은 공인된 기억 저장소의 클라우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는 형편인지라, 어쩔 수 없이 비공인 기억 저장 시스템을 이용한다. 그랬을 때, ‘비공인’ 공유를 통해 자신의 기억이 다수의 타인들에게 공유, 노출될 수 있는 위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지불식 간에 타인들의 기억이 자신에게 공유, 이식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은 진실을 알 도리가 없다. 끔찍한 건 자신’만’ 그 진실을 모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물론, 모두가 진실에 대해 알 수 없는 상황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런 상황, 왠지 낯설지 않다. 맞다. 바로 <트루먼 쇼> (1998)가 다루는 상황이다. 세기말 <매트릭스>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며 쏟아져 나온 작품들 중에서 가장 차별화되면서도 가장 섬뜩한 작품 (심지어 테크놀로지를 전면에 내세운 SF 장르도 아니었다)! <기억은 먹구름>을 ‘기억 속 쌍둥이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해하다 보면 우리가 다다르는 지점 중 하나는 <트루먼 쇼>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름 훌륭한 서사이고, 성찰이다. 허나 여기서 만족할 정승희가 아니다, 아무렴!
# User Setting.... 테크놀로지가 요구하는 ‘나’라는 형식
<기억은 먹구름>을 ‘기억’에 대한 이야기로 한정시킬 이유는 없다. ‘먹구름’은 단지 은유적 표현으로 쓴 단어가 아니다. 먹구름은 클라우드와 호응한다. 클라우드는 테크놀로지가 구현된 특정한 형식이자 구조이다. 이때 특정한 테크놀로지는 특정한 환경을 설정한다. 테크놀로지가 마련한 환경 속에 들어갈 때, ‘나’라는 주체는 ‘사용자user’라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게끔 요구받는다. 즉 세계와 ‘나’ 사이에 테크놀로지가 개입할 때, 테크놀로지는 ‘나’를 사용자로 설정하여 세계와 연결시킨다 (포커스 원고에서 정승희의 애니메이션을 ‘감각 기관’이라고 빗댄 표현과 이어지는 얘기다). 여러 기기가 데이터-기억을 공유하는 테크노 생태계에서 나의 자리에 사용자라는 역할이 놓인다.
정승희는 ‘나’라는 기억 클라우드 사용자의 모습을 꽤 적나라하고도 강렬하게 디자인한다. 전자뇌 수술 장면을 통해서도 드러나듯, 두개골 윗부분을 절개한 상태에서 전자뇌가 부착된다. 이때 실제의 눈 위로 전자뇌의 눈이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눈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눈)이 놓인다. 이러한 설계와 디자인에서 단연 부각되는 것은 ‘눈’이다. 본래의 눈은 감아야 하고, 이를 대신한 전자뇌 눈이 개방된다. 눈은 이제 센서 (인공 감각기관)로써의 기능만 수행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눈이 지니고 있던 진정한 의미를 간파한다. 눈은 그저 시각 기관이 아니다. 눈은 우리의 의식을 외부에 전하고,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드러내는 기능도 갖고 있었던 게다. 인공적인 눈이 우리의 얼굴을 차지하는 순간, 거기에는 어떠한 감정도, 의지도, 생명력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옷은 흡사 강제 수용소의 복장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불현듯 직전의 작품들, <안개 너머 하얀 개>와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리게 된다. ‘눈-시선-본다’를 다룬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정승희는 ‘눈-시선-본다’를 그저 우리의 신체 기관에 한정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우주에 편재하고, 이를 애니메이션이라는 확장된 감각 기관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 눈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지닌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려는 빌드업으로 여겨진다. <기억은 먹구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감정과 의지와 생명의 징표로써 말이다.*
* SF 장르의 영화에서 ‘눈’은 ‘인간/비인간’을 구분하는 상징으로 빈번히 등장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시계태엽 오렌지> (1971), <블레이드 러너> (1982), <터미네이터> (1984),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 등등.
뿐만 아니라, ‘기억 저장소/기억 공유 시스템/기억 클라우드 서비스’라는 테크놀로지 생태계는 사용자의 몸동작도 새롭게 설정한다. <기억은 먹구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움직임은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이다.* 이 세 가지 동작은 테크놀로지가 ‘사용자’에게 허용하는 움직임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은 이 세 가지 동작에만 반응하며, 이를 수행하지 않는 (또는 수행하지 못하는) 자는 ‘사용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기실 <기억은 먹구름> 이전에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는 SF 영화에서 무척 쿨한 동작이었다. <아이언 맨> 시리즈에서 자비스를 다루는 토니 스타크가 그러했고,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프리크라임을 다루는 존 앤더튼이 그러했다. 이때 이들은 능동적인 사용자였다. 능동적인 사용자가 다루는 자비스와 프리크라임라는 테크놀로지 시스템은 대상/객체에 머문다. 시스템은 동작의 지배 아래 놓인다. 반면 <기억은 먹구름>에서 주인공은 수동적 사용자이며, 기억 저장소와 같은 시스템은 대상/객체가 아니라 사용자의 행동을 규정하고 제어하는 상위에 있다. 수동적 사용자의 동작은 시스템의 지배 아래 놓인다.
* 이는 서울독립영화제 2024의 프로그램 노트에 김보람 감독이 적은 표현이다.
테크놀로지가 행동을 통제할 때, 즉 행동이 테크놀로지의 규율에 따를 때, 그 몸놀림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현재의 일상에서 경험적으로 목격할 수 있다. 우선, VR 기어를 뒤집어쓰고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 (그렇다, 게임이라는 테크놀로지 장치와 만나면서 우리는 ‘사용자’가 아닌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호명된다)의 모습. 플레이어는 VR 기어가 보여주는 VR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동작을 그대로 따르는 ‘아바타’를 ‘조종’한다. 그는 나름 진지하다. 주변에서 그의 움직임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거나, 움찔움찔 피하는 모습)을 보는 이들은 그런 모습을 재밌게 구경한다 (사실 VR 게임에서 가장 재미난 것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몸짓을 구경하는 거다). 이 정도는 애교다. 또 다른 사례는 스몸비smombie, 즉 스마트폰 좀비이다. 시선을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한 채 길을 걷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좀비의 움직임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VR 게임 플레이어는 재밌기라도 했지, 스몸비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실상 <기억은 먹구름>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스몸비의 몸짓과 닮았다. 거대한 스케일의 장치가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신체와 움직임은 테크놀로지의 자장 안에 갇혀 버린 신세다. 덕분에 횡단보도 앞 바닥에 안전을 위한 조명 시설을 설치하기도 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신체 너머, 현실 세계의 지형까지도 재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는 무엇을 위한 몸짓일까? 몸짓의 (인터페이스) 대상은 무엇일까? 우리 몸은 무엇과 접속하고자 하는 걸까? 그것은 어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 Biometric Registration... 테크놀로지와 세계와 나
<기억은 먹구름>에서 나의 감각은 세계/자연과 직접 연결되지 못한다. 나의 눈은 외부 세계를 직접 보지 못한다. 전자뇌의 인공 눈을 경유하고, 꼭대기에 달린 시스템의 눈으로 통제받는다. 단절된 감각은 홀로그램이라는 우회 경로를 거쳐서 접속된다.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는 결코 세상의 실체를 향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홀로그램만을 터치, 스크롤, 스와이프 할 뿐이다. 홀로그램으로 구체화되는 증강현실은 세계와 ‘나’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세계와 나를 직접 연결하는 대신, 그 사이에 별도의 레이어로 삽입되어 나와 세계를 ‘중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나 사이의 매개/중재의 구조가 완전히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홀로그램이나 증강현실이라는 테크놀로지 대신 ‘언어’를 넣어도 상관없다. 세계 대신 ‘자연’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 평이하게 풀자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자연스러운가? 이는 언어의 중요성을 일컫는 것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를 테면 “본래 자연과 구분되지 않는 합일 상태에 있던 인간은 언어의 도입과 함께 자연/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었다”라는 비판.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달구어진 논쟁 지점이다. 누군가는 언어 이전, ‘자연과 하나 된 인간’으로의 복귀를 촉구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연과 인간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소외는 존재의 불가피한 조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때로는 종교의 영역에서, 때로는 철학의 영역에서, 때로는 혁명의 목소리로, 때로는 보수적 회귀의 목소리로, 때로는 정치적 실천으로, 때로는 예술적 표현으로, 제각각 외치고 되뇌고 읊조리고 웅얼거렸다.
<기억은 먹구름>은 단순히 ‘언어’의 역할을 ‘홀로그램’의 몫으로 대체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세계/자연/우주와 나 사이에 놓인 홀로그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제도와 절차, 규율로 진화한다. 그러니까 홀로그램은 기억 저장/공유라는 테크놀로지 서비스가 하나의 구체적 형상으로 실체화embodied 되고 육화incarnated 된 것이다. 홀로그램으로 현현된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지각과 행동을 제어한다. 우리의 기억을 들여다 보고, 축적하고, 거래하고, 판단한다. 테크놀로지는 인간 주체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형국이다. 테크놀로지는 홀로그램을 외형으로 삼고 있지만, 그 속에는 더 커다란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사고팔고, 의탁하고 공유하고,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하는 등등의 사회적 행위 기제. 얼핏 자연스러운 경제 행위 같아 보이지만, 애초에 운동장은 기울었고 승패는 정해져 있다. 홀로그램에 감춰진 테크놀로지 시스템은 ‘완벽한 기억’을 약속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끊임없이 불안을 가중시킬 뿐이다.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억은 사라집니다!” “비공인된 나만의 기억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알고리즘은 “충전, 업데이트, 메모리 확장, 구독”이라는 무한 반복의 굴레를 우리에게 씌운다.* 게다가 사생활 보호 옵션과 공유 옵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이른바 옵션 장난질까지 더해지면, 끝까지 버텨낼 재간이 없다. 언젠가는, 모두가 파산하고 말 테다.
* 유사한 설정이 같은 해 발표된 정휘빈의 <엔터티>에도 등장한다. 다만 <엔터티>에서는 이를 사회적 안전망 및 연결망과 결부시켜 장르적 장치로 활용하였다.
정점은 “인증/비공인”의 구분을 들이밀 때이다. 인증된 시스템, 시스템의 인증을 받는 기억, 비공인 시스템, 그래서 인정받지 못하는 기억. 구분과 경계, 분리, 차별, 불이익이 형성된다. 누가, 왜,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위해서? ‘인증/비공인’이라는 구분을 통해 테크놀로지 시스템의 정체가 가늠된다. 제도, 기관, 권력, 자본, 기업, 사회, 정부, 국가 등등... <정글>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정승희는 <정글>로 순순히 회귀하지 않으려 한다. ‘비공인’을 단일한 하나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증’이 품지 못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위해 열어 둔다. 그러니까 ‘비공인’에는 야매, 불법, 편법, 비제도권, 뒷거래, 무허가/무면허, 사설 시스템, 어둠의 경로, 암시장, 비공식, 지하 경제, 다크넷/다크웹, 미인증 시스템/서비스, 비인가 시스템, 장외 거래, 비상장 시장 등등...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하고, 경쟁하거나 상호 부정하는 것들이 ‘인증’의 반대편에서 한 무리를 이룬다. 말하자면 ‘비공인 기억 저장 시스템’은 작품 속에서 일종의 회색시장gray market으로 그려진다.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당장의 필요는 (저렴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곳. 이곳에 업로드하는 기억은 설령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지 언정, 그럼으로써 차라리 공유되지 않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언제든 손실될 위험이 있지만, 공인 시스템이라고 100% 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을뿐더러 (과학은 섣불리 100%를 말하지 않는 법!), 어차피 주인공의 상황은 이미 바닥에 다다르지 않았던가.
# Restart to Complete the Update.... 어쨌든 우주는 잘 돌아간다
인터뷰에서 정승희는 비공인 기억 저장 시스템을 독립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도 했다. 감독의 말마따나 비공인 시스템은 제도의 경계에서 고유의 가치를 유지하는 독립 영화, 독립 애니메이션을 위한 틈새일 수 있다. 제도의 인증을 통해 획일화된 기억만을 생산, 유통, 소비, 재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 담긴 비공인 기억의 파편들에는 정승희의 작품들에 등장했던 청설모, 우주 보자기 등이 담겨 있다. 말 그대로 정승희의 아카이브. 이미 만들어졌거나, 작업 중이거나,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작업을 위해 메모하고 기록하고 테스트했던 다양한 흔적들이 하나 가득 쌓인 보물 상자. 제도에 포섭되어 박제화된 이미지가 아닌, 언제든 자신만의 이야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씨앗들.
정승희의 필모그래피를 이루는 작품들은 특정한 스타일이나 장르, 톤 앤 매너를 일관되게 추구하지는 않는다 (<정글>부터 <기억은 먹구름>까지, 어느 하나 닮아 있지 않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지도 않는다 (질문은 매번 새롭게 설정된다). 작품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서사의 전략도 다르다.
그런데도 작품들은 서로에게 침투하면서 연결된다. 이전 작품의 상황이 이후 작품의 배경이 되고, 앞선 작품에 등장한 이미지가 그다음 작품의 어딘가에 인용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작품의 전제가 또 다른 작품의 부연으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 다양한 변용까지 더하면 작품들 사이의 연결망은 더욱 촘촘해진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보다 보면, 자주 그 이전이나 이후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된다. 필모그래피 전체는 스스로 하나의 우주관 (또는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나가며, 개별 작품은 이에 대한 각론과도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비공인 기억 저장 시스템에서 우리는 정승희의 우주를 재발견한다. “It Just Works.” 아이클라우드 론칭에서 스티브 잡스가 던진 말이다. “잘 굴러 가요.” 맥락에 따라 긍정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쓸 수 있는 문장.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알아서 잘 작동한다는 얘기. 비공인 시스템은 완벽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예기치 않은 가능성을 향해 굴러간다. 정승희의 우주도 그렇게 잘 굴러가고 있다.
나호원 Joint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