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 FOCUS_JUNG Seunghee
- seoulanimator

- 18분 전
- 11분 분량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정승희가 애니메이션으로 설정하는 문제들

Log 0. 불안, 영혼을 잠식하다
2001년, <정글>. 청년 X가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늘 불안하다.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라도 다스리고자 약을 먹는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안전해야 할 침실조차 그를 위협한다.
2024년, <기억은 먹구름>. 침대는 다시 등장한다. 침대 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을 업로드하려 한다. 정작 자신의 과거 기억은 삭제되었기에 늘 같은 꿈만 꾼다. 여전히 침실은 안락한 사적 공간이 아니다.
근 25년 동안 바뀐 것은 없는가? 불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편재하는가?
Log 1. 문제 설정
정승희는 질문을 만든다.
작품들이란, 모름지기,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다. 창작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작품 속에서 찾는다. 작품을 만든다는 건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근사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질문으로부터 답을 찾는다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을 정해 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질문을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이 기만이나 억지, 위선, 허위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답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묻곤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답으로부터 질문을 만드는 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해 놓은 답에 맞춰 질문을 던지다 보면 원래 생각했던 답이 틀리다고 여겨질 때도 있다. 답에 어울리는 질문을 찾다가 더 나은 질문이나 답이 떠오르기도 한다. 창작(그리고 삶)은 늘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하기 마련이다.
정승희가 질문을 만든다는 얘기는 질문과 답, 또는 답과 질문의 관계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을 부각하려 꺼낸 말이다. 정승희의 애니메이션에서 감독은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미리 정하려 하지 않는다. 많은 이가 생각하는 답과 그에 어울리는 질문을 무리 없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정승희는 질문이 달라지면 답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론 우리도 알고 있다), 질문을 구성하는 순간 그 질문은 이미 답을 결정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도 우리는 알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더 파고들면, “문제 설정problematique”, 즉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지적 담론을 작동시키는 권력의 실천이라는 인식에 다다르게 된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답정너”가 왜 문제적인지 꽤나 진지해지는 지점이다.
정승희의 작품들은 “세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존재론,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같은 인식론을 항상 안고 간다. (고갱의 작품 제목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은 개별 작품 하나뿐만 아니라, 정승희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꿰뚫고 있다. 그 속에서 기존의 질문과 답에 의심을 던진다.
Log 2. 신경쇠약과 탐욕 사이
<정글>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청년 X는 한시라도 편치 않다. 무엇이 그를 불안케 하는 걸까?

헌데 불안에 사로잡힌 X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정글>이 만들어지기 1년 전, 이문주의 <낯설음>에서도 젊은이의 불안한 시선이 등장한다. 두 작품 모두 모노톤으로 불안을 담고 있다.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모노톤을 선택한 것일 수 있지만, 이미 색을 잃어버린 세상이기에 불안을 자아낸 것일 수도 있다. IMF 사태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그리고/또는 세기말의 정서가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그리고/또는 창작자 본인들이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던 시기여서 그럴 수도 있다.
<정글>에서 불안은 청년 X만 겪는 증상은 아니다. 세상은 이미 정글이고,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상태는 둘 중 하나다. 거리를 거칠게 내달리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하든, 무리 속에 묻혀 무작정 뛰든), 병원 대기실에서 지루하게 머무르거나. 달리기와 기다리기, 양극단의 진폭에서 상태란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정글이 되어버린 세상이란 모두가 모두를 향해 싸워야 하는 전쟁터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사냥터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주어지지 않는다. <정글>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스케치이다. 불안으로 영혼이 잠식당한 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자의 심경을 투영한 풍경. 원인의 진단과 분석 대신 상황의 묘사와 기술이 앞선다.
불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정글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빛과 동전> (2004)은 <정글>의 기원과 유래를 찾고자 한다.

탐욕, 끊임없이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못하는 갈망, 처음에는 있는지 조차 몰랐지만 일단 스위치가 켜진 이상 멈추지 않는 욕구. <빛과 동전>의 15분은 욕망의 탄생과 발전을 따른다. 그러니까 <빛과 동전>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자연스레 <정글>에 다다르게 된다. 바꿔 말하면 <빛과 동전>의 첫 부분은 <정글>과는 정반대 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모노톤 대신 색감이 가득하고, 불안 대신 평화, 폭주 대신 평화로운 생기를 담은 세상 말이다.
조화와 균형은 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깨진다. 선의로 포장된 교류, 호기심이 촉발한 거래, 노동을 대신하는 편리... 이랑족이 보여주는 15분의 서사에는 인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밭을 가는 농경에서 시작하여 기계 설비가 삶의 전반을 재편성하는 전환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실재를 상실하고 그림자가 이를 대체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널리 쓰이게 된 때는 <빛과 동전>으로부터 약 6년 후인 2011년 무렵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를 출판한 해도 2011년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빛과 동전>이 전적으로 문명의 전개에 할애된 역사학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판적 사회학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는 역사학과 사회학적 인식이 어느 정도 깔려 있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문명이나 역사적 사건을 지칭한다거나, 현상의 전반을 사회학적 진단으로 몰아가려 하지는 않는다. 빛으로 동전을 만들고, 동전으로 빛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 단순히 자본주의와 같은 제도를 빗댄 것이 아니다.
작품은 욕망이란 보편적이면서도, 어떻게 특정한 계기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하면서 탐욕으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야 불안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욕망-탐욕-불안은 연결된 것이다.
Log 3. 애니메이션이라는 감각 기관
<정글>과 <빛과 동전>에서 정승희가 보여준 현실 비판적 시선은 당시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이 지향한 방향성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해외나, 독립 애니메이션들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것보다는 은유와 풍자를 통해 우회하는 경향성이 크다. 그래서 ‘독립’이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이다). 그럼에도 정승희가 차별성을 보이는 지점은 소재나 주제, 서사, 장르에 있지 않다. 물론 <빛과 동전>이 이야기의 구성과 호흡의 길이, 움직임의 충실도 등에서 그 이전의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내디딘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출발점에서부터 정승희가 보여준 ‘남다른’ 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문제 설정”이었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영역은 서사에 있지 않다. 정승희의 문제 설정은 작품 속에 담긴 (관념적인)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담은 (물질적인) ‘형식’에 놓여 있다. 한마디로, 서사가 (미리 정한) 답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제작 방식이 하나의 답(이자 그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의 출발)이다.
정승희에게 애니메이션은 질문을 시작하는 지점이면서, 구체적인 문항으로 질문의 형태를 잡아가는 구현체이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예민한 탐침에 해당한다. 이때 ‘애니메이션’은 그저 막연히 피상적으로 떠올리는 보통 명사(이를 테면, “1초에 24 프레임의 개별 이미지로 이루어져서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식의 애니메이션)가 아니다.
‘당연하게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기보다는 아예 너무나 낯선 것! 마치 ‘빛을 삼키는 동전으로 작동하는 기계’를 처음 접하는 이랑족처럼, 애니메이션이라는 존재 자체와 그것을 이루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정승희에게는 생소한 것이고, (하지만 너무나 쉽게 기계의 편리에 길들여져 버린 이랑족과는 달리) 그것들을 일일이 짚고 따져 보면서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가는 것이 정승희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니까 <정글>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오는 모래 질감은 그저 디지털 드로잉 프로그램에서 펜/브러시 옵션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다. 기존의 회화와는 다르게 디지털이 선사하는 옵션의 선택지가 무작정 편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한계와 제약으로 여겨지는 식이다. 그래서 굳이 실제 모래를 구입하여,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 이를 디지털 툴의 사용자 설정으로 옮겨서 자신만의 질감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샌드 애니메이션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서, 아날로그적 제약과 디지털적 제약 사이에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고자 한 시도, 그럼으로써 정글 속에서 불안을 ‘애니메이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구현한 질감 속에 비로소 불안이 감각적으로 물질화될 수 있었다. 덕분에 현대 사회의 정글은 ‘모래성’이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암시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빛과 동전>에서 애니메이션은 ‘빛’과 ‘그림자’를 새롭게 모색한다. 이는 단지 ‘실루엣 애니메이션’을 기법적으로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빛이 있고 없음만으로 구현되는 문제가 아니다. 작품 전체를 흐르면서 빛은 서서히 그 힘을 잃는다. 빛을 소비하는 기계란 영화 장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림자가 빛을 대신하고, 현실이 그림자에 밀려난다는 설정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동시에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디지털 영상이 빚어낸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디지털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모두가 그런 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반복하는 “당연한/자연스러운” 생산 방식 (또는 창작 방식)에 그칠 수는 없다. 정승희에게 디지털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자신에게 주어진 ‘낯선 감각 기관’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 익숙한 현실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낯설게’ 접하고 대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문제의식을 거두고, 새롭게 문제를 설정하는 것은 낯선 감각 기관 덕분에 가능하다.
Log 4. 세계-사회에서 세계-우주로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관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와 질문들...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생산 방식에 대한 고찰은 감각 방식을 되물었고, 그렇게 재설정된 감각 방식은 존재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질문은 계속해서 다시 설정된다. <우주보자기>가 탄생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러 모로 <우주보자기>(2015)는 정승희의 애니메이션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긴 공백기가 포함된다. 10년 가까이 떠났다가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복귀한다면 공백은 그 이상의 채움으로 화답한다. 떠나 있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얘기이고,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만큼 이전과는 다른 위치에서 ‘새롭게’ 바라본다는 말이고, 덕분에 기존의 시야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주보자기>는 시야를 우주로 넓혔다. 그래서 이제부터 외부의 세계는 우주가 된다. <정글>과 <빛과 동전>도 외부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세상이고, 사회였다. 세계-사회를 다룬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사회라는 제도-시스템에 의해 제약을 받고, 그 속에서 갈등해야 했다. 불안과 욕망은 한편으로는 실존적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부과된 문제이기도 했다. <우주보자기>는 사회와 역사에서 벗어난다. 우주 속의 나는 질문한다. “세상이란, 우주란, 그리고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란...?”
존재와 우주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묻는다. 드로잉 기반의 2차원 애니메이션이 전제하는 이미지의 차원이란? 2차원 애니메이션이 기반하고 있는 평면성이란?
평면성은 종이, 즉 애니메이션 작화지나 셀과 결부되어 있다. 디지털은 고스란히 이들의 물성을 이식받는다 (흉내 낸다). 클린업은 2차원 평면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절차이다. 예전에 카메라 아래에서 (셀 또는 작화지에 그려진) 아트웍을 평평하게 눌러주던 플래튼flatten이라는 유리판은 조명이 그림자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하는 용도였다 (물론 유리판에 먼지 같은 것이 묻지 않도록 매번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먼지, 그림자, 주름, 지운 자국, 다듬어지지 않은 선 등은 모두 2차원 평면성을 깨뜨리는 위험 요소이다. 평면성이 침해당하는 순간, 관객은 2차원 세상에서 튕겨져 나간다.
<우주보자기>는 2차원 평면성에 대한 (관객과의) 약속을 깬다. 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정승희가 택한 방법은 2차원을 이루던 기존의 재료를 좀 더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대뜸 3차원 오브제를 들이미는 게 아니라 (가장 쉬운 도발 방법이기는 하다), 종이를 컷아웃으로 전환하여 캐릭터로 만들고, 배경을 보자기로 대체하는 식이다. 그러면 2차원을 이루던 재료에는 변함이 없지만, 캐릭터는 컷아웃으로 다뤄지면서 제한적인 양감을 갖게 되고, 보자기는 언제든 주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처럼 재료의 활용법을 전환함으로써 2차원 평면성이 흔들리게 되는데, 이는 2차원 애니메이션이 기반하고 있던 우주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주보자기>는 이를 이야기라는 서사 속에, 그리고 당연하게도 작품이 설정하는 문제 제기에 반영한다. 우리가 있는 세계-우주란 무엇인가, 중심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인가, 우리가 있는 우주 말고도 또 다른 우주가 있는가, 등등…
주인공으로 설정된 아이처럼,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 품었을 질문이다 (인터뷰에서 밝히듯, ‘아이’ 정승희도 그런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국한되는, 맹랑한 의문에 머물지 않는다. 평행 우주Parallel Universe나 다중 우주Multiple Universe를 설명하기 위해 커튼(幕)이나 막(膜, brane)을 비유로 들 때 과학자들(미치오 카쿠와 브라이언 그린은 이 분야에서 셀럽 과학자이다)도 종종 보자기와 같은 천을 활용한다. <우주 보자기>에서 정승희가 직접 염색을 하면서 보자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그저 미적으로 우주를 표현하려는 시도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디지털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인 물성을 회복하려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천은 말 그대로 우주 자체이다. 문제 설정이란 때론 이렇게 웅장한 스케일로 구현될 수 있다!
Log 5. 세계-우주 안에서 관계 맺기
세계가 재편되었다. 무려 우주적 차원에서 말이다.*
* <우주보자기>의 영어 제목이 “Fabric Cosmos”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공간적 차원의 space나 universe가 아니라, ‘질서’라는 철학적/인문학적 의미를 더한 cosmos이다.
그러면 세계 속에 자리하는 나의 위치가 바뀌고, 나와 세계와의 관계도 바뀔 것이다. 문제 설정이란 이런 거다. <정글>과 <빛과 동전>에서 내가 세계와 맺었던 관계는 이제 달라질 테다.
<안개 너머 하얀 개>(2018)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점에서 <정글>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정글>이 모래 질감으로 세상을 뒤덮었다면 <안개 너머 하얀 개>는 자욱한 안개로 세상을 감쌌다. <정글>에서 세상을 건너다보는 주인공의 시선은 자신의 안식처에서마저 불안에 떨리곤 했다. 외부의 거친 질주가 내면의 불안을 야기했고, 그렇게 흔들리는 내면의 상태가 외부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도, 내적 안식도 좌절되고 만 채로 <정글>은 끝난다. 울음이 신음으로, 신음이 절규로 이어지면서... 그리하여 <정글>의 마지막은 시선에 속박된 이미지가 아니라, 시선에서 벗어난 소리가 차지한다 (글 후반에 적었듯이, <안개 너머 하얀 개>에서는 소리가 사라지자 하얀 개도 시선에서 사라진다).
<안개 너머 하얀 개>는 스스로 내부에 머물던 주인공 소녀가 결국 안개 속 외부로 나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여기에는 목줄에 묶여 있던 개가 기어이 구속에서 벗어나 제 또래와 어울리는 상황이 함께 한다. 소녀는 묶인 상태의 개를 동정하지만, 결국 소녀를 바깥 세계로 이끌어 낸 것은 측은함의 대상이었던 개다. 그래서 이 둘은 일방적인 주어-목적어, 즉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목적어가 주어로, 주어가 목적어로 되는 전환을 맞이한다. 관계 속에서 자리 바꿈을 하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소녀가 목격한 것은 목줄을 풀어주는 누군가의 손길이다. <정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배려!

이러한 새로운 세계-우주 속 관계를 그리기 위해 정승희는 어김없이 애니메이션을 재설정한다. 이를 위해 건드리는 것은 다시, ‘선’이다. 2차원 애니메이션에서 선은 형태를 이루면서, 동시에 내부와 외부를 가른다 (클린업은 이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선은 윤곽,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분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승희는 <정글>에서 모래 질감으로 펜/브러시를 세팅하였다. 그렇게 그려낸 형태는 매끈한 선으로 똑 떨어지지 않는다. 모래알 선은 (2차원적) 폭과 (3차원적) 두께를 함께 지니기에, 선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뭉뚝하게 만들어낸다. 이러한 선 때문에 내부와 외부는 서로를 침투한 상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안개 너머 하얀 개>에서 선은 ‘그린다’라기보다는 ‘지운다’라는 의미로 다뤄진다.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명료하지 않게 된 풍경과 대상을 함께 담아내야 할 때, 새로운 ‘선’은 경계를 지우는 역할을 한다. 안개가 더욱 짙어질수록 선이 지닌 ‘경계, 테두리, 분할, 윤곽, 형태’와 같은 본래의 기능이 약해진다.
그래서 제목처럼 안개 너머 ‘하얀 개’는 작품 속에서 형태를 잃어가면서 ‘하얀 안개’라는 깊이를 상실한 평면을 향해 점점 빠져들어 간다. 1차원 선이 희미해지면서 2차원 평면이 확장된다. 선으로 구별되던 개체들 (주체와 대상)이 안개 속에서 경계와 거리를 지워 나가는 형국이 펼쳐진다.
만약 이러한 진행을 그대로 놔뒀다면 <안개 너머 하얀 개>는 말레비치Kasimir Malevich의 절대주의Suprematism 작품 <흰색 위의 흰색White on White> (1918)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말레비치의 시도는 완전한 無, 제로, 소멸, 무한을 지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직전에 등장한 영화에 의해 새롭게 세팅된 평면, 즉 “스크린”을 가리키기도 한다. 스크린은 캔버스를 대체하고, 그 위에 빛을 담아 운반한다 - <빛과 동전>에서 사유한 바로 그 ‘빛’ 말이다.
** <안개 너머 하얀 개>와 <흰색 위의 흰색>, 두 제목이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개 너머 하얀 개>의 영어 제목은 A White Dog over the Fog로, dog와 fog라는 운율을 살리고 있으며, 개와 안개 사이에 전치사를 ‘over’로 쓴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안개 너머 하얀 개>는 절대주의가 설정한 그 ‘절대’의 경지까지는 가지 않는다. 이 작품이 추구하는 것은 해탈과 초월이 아니라, 존재로의 복귀와 회복이기 때문이다.
Log 6. 정글 또는 숲
재차 반복하지만, 정승희에게 애니메이션은 세계/우주를 접하는 ‘감각 기관’이다.
우리의 감각 중에서 시선/시각이 누렸던 지배적인 위상은 <안개 너머 하얀 개>에서 흔들린다. 하얀 개의 목줄이 처음에는 끊어지지 않았다. 다만 줄을 매어 두었던 쇠닻이 뽑혀서 개를 따라 이러저리 끌려간다. 그리하여 시계 제로의 안개 속에서 하얀 개의 행방을 쫓으려면 땅에 끌리는 쇠붙이 소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관계의 우위가 시선에 따른 권력에서 비롯된다면, 안개는 가시거리를 제한함으로써 시선에 구속된 관계 (그것이 지배적이든, 동정적이든 상관없이)를 무력화힌다.
땅을 긁는 쇠닻 소리, 즉 청각이 개와 소녀의 관계를 재편한다. 소리를 내는 쪽이 주도권을 갖는다. 물론 덕분에 소녀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므로, 소리는 일종의 구원자, 해방자의 역할을 한 셈이다.* <빛과 동전>에서는 빛을 잃음으로써 시선의 권력을 빼앗기고, 세계로부터도 소외되는 처지였다. 반면 <안개 너머 하얀 개>에서는 시선의 권력을 (잠시) 유예함으로써 비로소 소외로부터 구원받게 된 것이다.
* 이후 하얀 개가 자신의 목줄을 완전히 끊어버렸을 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소녀는 개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개는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시각은 더 이상 지배적인 감각이 아닌 걸까? 재편된 세계/우주에서 불안은 극복된 걸까? 존재는 구원을 통해 회복된 걸까? 이러한 질문을 하나의 문장으로 조합하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우주에서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제자리를 찾았는가?” <보이지 않는 눈>(2021)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안티 테제’를 제시한다. 화해와 평화, 안식은 아직 멀다.

제목과는 달리 처음부터 눈은 확대된 동공으로 시작한다. 장난감 총에 달린 조준경으로 타깃을 겨누는 아이의 눈동자. 사격 연습을 몇 번 하고 이내 실전에 돌입한다. 모노톤, 거친 질감, 숲, 내달리기,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 <보이지 않는 눈>의 장소는 마치 <정글>의 연장선 같다. 정글은 숲이 된다.
하지만 청설모를 사냥감 삼아서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안개’처럼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공간감atmosphere을 뿜어낸다. 숲은 모호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총을 겨누며 좇는 아이들, 이리저리 도망치는 청설모. 이들의 시퀀스를 따르다 보면 어느덧 시선이 증식한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대상을 겨냥하는 아이의 눈, 도망치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청설모의 눈, 그리고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숲 전체를 에워싸는 눈... 그리고 숲은 하나의 눈만 지닌 것이 아니라,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기저기 곳곳에 눈들을 배치하고 있다.
시선이 늘어날수록 상황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바뀐다. 처음엔 조준경에 맞춰진 아이의 눈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숲 중심에 다다르자 어느덧 아이들의 기세는 위축된다. 서서히 불안을 느끼고, 서늘한 공포마저 퍼지는 것 같다. 시선의 주체에서 피사체로 대상화되면서 시선을 장악했던 힘이 사라져 버렸다.
시선-권력의 전환점은 꽤 인상적으로 연출된다.
# 청설모를 겨냥하는 아이의 눈동자
# 조준경 건너편으로 보이는 겁에 질린 청설모의 눈
# 아이들과 청설모의 대치
# 다시 조준경에 놓인 아이의 눈
# 조준경 너머로, 그러나 이번엔 잔뜩 공격적인 청설모의 눈 (그리고 그 속에 가는 선으로 그려진 아이들, 시선 속의 시선 1)
# 이에 위축되며 시선을 돌리는 아이
# 시선의 자리를 대신하는 총구
# 총구의 구멍에서 다시 아이의 눈동자로
# 겁에 질린 아이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결연한 청설모의 표정. (시선 속의 시선 2)..
불과 20초 (3:25-3:44) 사이에 전세가 뒤집어지고, 우주의 질서가 요동친다.
위협을 맛본 아이들은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들은 결코 쫄지 않았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대며 과장이 섞인 씩씩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간다. 더 이상 시선은 아이들의 것이 아니다. 숲을 채웠던 수많은 눈, ‘보이지 않는’ 눈이 비로소 전면에 드러난다. 작품의 중간 지점, 4분에서부터.
청설모 대신 개미를 공격하며 아이들은 여전히 놀이를 계속하지만, 아이들의 총질은 보이지 않던 눈들을 계속 깨어나게 할 뿐이다. 보이지 않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이전까지와는 다르다. 이는 단지 작품 속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관객 또한 깨어난 ‘보이지 않는 눈’으로 숲을 본다. 개미의 눈으로, 거미의 눈으로, 나무의 눈으로, 땅의 눈으로... 그래서 땅바닥의 시선으로는 발걸음이 어떻게 보이는지, 개미굴 속에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어떠한지 낯설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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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이루는 개별 시선을 따라 세상을 보다 보면 비로소 숲 전체에 담긴 세상을 종합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마치 입체주의를 연상시킨다). 시선과 세상의 관계를 다루는 <보이지 않는 눈>은 <안개 너머 하얀 개> 뿐만 아니라 <우주보자기>와도 연결된다. <우주보자기>가 우주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아이의 시선에서 세상 전체를 보고자 했다면 (그래서 시선의 주체는 아이, 대상은 우주이다), <보이지 않는 눈>은 세상 전체의 시선으로 아이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세상/우주가 시선의 주체, 아이는 대상/피사체이다).
이러한 전환이 바로 정승희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주는 ‘문제 설정’이다. 그리고 항상 애니메이션은 감각 기관으로 작동한다. 재편된 세계-우주에서 시선을 비롯한 감각은 더 이상 특정한 지점에 한정되지 않고 편재한다. 정승희의 문제 설정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답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변주이자 발전이다.
그래서 원하는 답을 찾아낸 걸까? 그럴 리가! <정글>에서 출발한 불안은 아직 잠재워지지 않았다. 불안은 <기억은 먹구름> (2024)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왜, 어째서? 이를 위해서는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단순한 수사적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문제 설정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은 전망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엇인가”라는 현재 상황의 진단이 전제로 깔려야 한다. 이 글은 일단 ‘구버전’에서 멈추기로 한다. “업데이트 후 다시 시작”하려면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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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원 Joint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