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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 KIM Junki

  • 2020년 8월 24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4일


8월 초 지독한 장맛비가 잠깐 그친 틈이었다. <소녀 이야기>(2011)의 김준기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역 앞에 핀 무궁화를 보았다. 꽃은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데, 이 날따라 눈길을 준다는 게 머쓱했지만 내내 무심했던 사람이 언제 또 관심을 가질까. 그래서 기념일을 지키는 거겠지. 신작이 없다며 인터뷰를 사양하려던 김준기 작가는 ‘8월이라서 왔구나’ 싶어서 수락했다고 한다. 이제 세 달 째 회사를 쉬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그는 작년 8월 <소녀 이야기>의 테스트 영상으로 만들었던 김복동과 이막달 님의 인터뷰를 유튜브 채널에 공개하기도 했다. 한 편으로 부족했던 걸까. <환>(2015)과 <소녀에게>(2017)까지 연달아 일제시대를 그린 과정과 코로나 시국에 회사에서 독립한 이유를 들었다.


등대지기 (2001)

1991년 공주전문대(현 공주대) 만화예술학과에 갔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 생각이었나?

그땐 만화였다. 만화를 좋아했다. 『보물섬』 좋아하고.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첫 작품인 <생존>(1995)는 어떤 내용인가?

학생 작품이었고 되게 거칠게 만들었다. 도스MS DOS 상에서 애니메이터 프로라는 프로그램으로 라쏘 툴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세이브하며 작업했는데, SICAF에서 상을 탔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단편과 비슷할 수도 있다. 세 명의 할아버지들이 사막 같은 데서 카드놀이하고 있는데, 멀리서 로봇이 하나 다가온다. 할아버지들이 그 로봇을 막기 위해서 싸우고 맨 마지막 할아버지가 기계랑 같이 자폭하면서 끝나는데, 나중에 나무 위의 인큐베이터에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가 자라고 있는 그런 상황. 대사도 없고 그때는 1초에 몇 프레임이냐 하는 초당 프레임 수도 몰랐다. 그래서 되게 느리게 느껴진다. 한 프레임 한 프레임 해서 GIF로 세이브를 한 후에 바로 디지베타로 떴다. 그래서 속도나 그런 걸 잘 몰랐다. 재밌었다. 젊었을 때 그런 치기가 좋았던 것 같다. 


1999년까지 이포인트라고 멀티미디어 회사에서 5년 정도 있었다. <큐빅>(1996)은 김병갑 감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만들었다. 그것도 재밌었다. 한 남자가 감옥 같은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어있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 바퀴벌레가 벽에 붙어 기어가는 걸 보고 이 사람이 벽을 막 올라간다. 떨어지고 다시 시도하고 떨어지고 다시 시도하고 정상에 도달한 것 같았는데, 어떤 거대한 여자가 남자가 갇혀 있는 큰 큐빅을 들고 있다가 휙 하고 뒤집는다. 

 

(회사에서) 어깨너머로 3D라는 걸 아주 조금 배우고 편집 툴이라는 걸 봤다. 그때 윈도우라는 걸 처음 쓸 때였는데 혼자 뭘 해보고 싶더라. 내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거다. 

 

<등대지기>(2001)가 시작할 때 스튜디오 이름이 ‘애노키오Anocchio’다.

애니메이션과 피노키오를 합해서 이름을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의 어원)이 라틴어로 '생명을 불어넣다'잖아. 그러면 정말 애니메이션에 근접한 건 피노키오 내지는 프랑켄슈타인이겠다는 생각에, 그래도 피노키오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애노키오라고 했다.


인생 (2003)


우리 세대가 다 재패니메이션이나 일본 만화책 보고 살았다. 나는 과격한 스타일인데 처음으로 3D를 배우고 10분 내외로 뭔가를 만들려고 하니까 이야기는 좀 다르게 가게 됐다. <여섯 시 내 고향> 이런 걸 보는데 신촌이었나? 새벽마다 거리를 쓰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무도 그 거리가 왜 깨끗한지 몰라. 그거 보고서 '그렇구나, 내가 여기가 왜 더럽지'라는 생각은 해도 '여기가 왜 깨끗해졌지?'라고는 잘 생각을 안 하잖아? 그런 느낌에서 발전이 됐던 거 같다. 스스로 그리고 싶은 작품에는 못 미치지만 내가 가진 3D 실력에 어울리는 내용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등대지기>를 1년 3개월 정도 혼자서 만들었다. <등대지기>도 그렇고 <인생>(2003)도 그렇고 <룸>(2005)도 그렇고 <소녀이야기>도 그렇고. 나의 발톱을 드러낸 적은 없다. 

          

<등대지기> 만들고 그때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있던 김성주 씨를 만났다. "애니센터에 이런 지원책이 있는데 안 하는 거예요?” 이래서 <인생>을 지원받아서 했다. <인생>하고 2004년에 <룸> 만들다가 맞물려서 <마지막 왕>을 작업했다. 2005년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프리 프로덕션 공고가 떠서 냈다가 덜컥 됐다. 장편 시나리오를 처음 썼는데 2006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시나리오 마켓에서 <마지막 왕>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갖고 뭔가를 해보려다가 1년 반 정도 시간이 허비됐다.


The Roo,m (2005)


<룸>이 애노키오로는 마지막 작업이었나?

그렇다. 독특한 시나리오를 생각했는데, 실험체로 뚱뚱한 쥐와 작은 쥐의 뒤를 꿰매 놓고 플라스크 같이 주둥이가 좁은 데서 과학자가 먹이를 주는 실험실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적이 있었다. <날개>라는 집사람의 단편에 내가 그런 기획을 해줬는데, 그 실험체로 스토리가 될 것 같아서 디벨롭을 해본 거다. 무리수가 조금 있었지. 그래도 애니메이팅은 재미있게 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왕>으로 장편을 진행하려고 시도만 하던 때 몇 개월 정도는 <소녀 이야기>를 준비했다. <원더풀 데이즈>(2003) 때 잠깐 알았던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이경학 교수님이 “와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작품 해봐라”하셨다. 2008년 8월에 청강에 가면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도 찾아갔다. 처음에는 싫어하셨다. 그동안 나와 같이 할머님의 인터뷰를 따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단다. 게다가 2008년이면 할머니들이 건강이 안 좋으셔서 인터뷰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만들겠다고 나 같은 놈이 불쑥 찾아가니까 처음엔 좀 난감해하셨다. 몇 번 찾아가니까 자료실을 열어주셨다. 한 며칠,  많은 할머님들의 증언을 듣고 봤다.


소녀이야기 (2011)


김복동 할머니, 이막달 할머니 증언 가지고 4분 정도 되는 예제 파일을 학생들과 1년 정도 작업을 해서 정대협에 갔다. 그 예제 영상을 보고 <소녀이야기> 작업을 허락해 주셨다. 처음에는 김복동 할머니, 정서운 할머니의 인터뷰 분량을 같이 제작하려고 생각했다. 두 분이 꽤 사실적으로 기억을 말씀해주셔서 그 부분을 교차해서 쓰려고 했다. 원래는 20분 분량인데, 제작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정서운 할머니 먼저 만들자 해서 10분 정도로 만든 게 <소녀 이야기>였다.


김복동 님이 더 알려진 분인데, 정서운 님으로 해야겠다고 정한 이유가 있나?

2008년까지만 해도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김복동 할머니는 살아계셨고 정서운 할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서운 할머니로 한 것 같다. '김복동 할머니를 했으면 더 좋았을까' 하기는 했는데, 할머니들의 증언을 가지고 그렇게 판단하기가 싫더라. 지금도 그렇다.


<소녀이야기>를 하다가 야스쿠니 문제하고 군함도 문제에 꽂혔다. 그전에는 몰랐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든 말든 우리가 상관할 문젠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심각하더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합사 돼 있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이 합사 되어 있는 거다. 김희종이라는 분이 "나 살아있는데 거기 합사 하면 어떡하냐? 내려라" 했더니 "이미 신으로 격상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내릴 수 없다." 이딴 소리를 하면서 (일본) 대법원까지 가서도 안 된 거다. 심지어는 일본인 할머니가 전쟁 통에 아들 셋을 다 데려가 죽여놓고 국가가 아들들을 야스쿠니에 합사 시켜서 전쟁 영웅으로 이용하는 것이 싫어서 "내 아들 내려놔라, 나는 싫다." 했는데 그것도 안 됐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딸이 할머니가 되서까지 투쟁하고 있었다. 대만인들도 있고 오키나와 사람들도 있고 거기다 2차 세계대전 끝난 다음에 전범 재판에서 사형당한 전범들도 6~70년대에 모르게 거기다 싹 다 합사 시켜놨다. 야스쿠니 신사는 정말 일본의 저의를 의심해봐야 된다. <환>(2015)도 한 3년 6개월인가 만들었다. 2011년 <소녀이야기> 끝날 무렵에 시작해서 2015년에 완성을 했다.


(2015)


<환>을 작업하는 중간에 여성가족부 장관한테 연락이 왔다. 2014년 앙굴렘에서 만화 작가들과 ‘위안부 피해자 특별전'을 했는데 <소녀이야기> 영상이 첫 시작에 많은 기여를 했다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여성가족부에서 <소녀이야기>와 같은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 사업을 진행했고 나는 일본군 할아버지들의 양심 고백으로 <소녀이야기> 다음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2년 동안 꽤 많은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정대협, 나눔의 집, 여성가족부 어디에도 일본군 할아버지의 증언이 없었던 거다.  결국에는 개인적으로 찾았다. 한 6개월 넘게 걸렸다. 윤미향 대표님하고 김동희 국장님이 일본에서 사회활동을 하시는 분하고 연결을 해주셨다. 거기서 기존에 녹음해 놓은 가네코 야스지라는 할아버지 한 분을 찾았다. 네모토 조주라는 분은 내가 직접 일본에 가서 녹음을 했다.


1년 넘게 진행을 했을 때, 가네코 야스지 할아버지 유족들이 할아버지 인터뷰 사용 허가를 철회했다. 그래서 다른 할아버지의 사례로 바꿨다. 그것 때문에 좀 오래 걸렸고 한참 진행을 하고 있는데, 2015년 12월 28일에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 그게 박근혜 정부 때였다. 그래서 2016년 봄에 <소녀에게>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내용으로 바꿀 수 있냐는 문의를 받았었다.(웃음) 와 그때 진짜. 그걸 어떻게 바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제 작품관과도 반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행된 비용 정산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는 중에 (정권이) 바뀌었다. 2017년 4월에 청강대에서 마지막 컷까지 작업해서 렌더링하고 집에서 편집 마무리를 짓고 여성가족부에서 차기 장관님께 보고를 드렸다.


사람들이 "왜 이런 작품을 계속하고 계세요?" 하면 "내 목표는 일본 입국 거부?"(웃음) 

독도 간 사람들보다 (이런) 작품 한 사람들에게 그래야 되는 거 아닐까?


소녀에게 (2017)


예전에 해외 작가들과 협업 프로젝트에 이름이 있는 걸 봤다.

독일에서 한 번 하자고 한 적 있었다. 근데 무산됐다. 그런 것들은 많다. 100개 중에 한 두 개 되는 거잖아. 나한테도 그런 게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테크트리를 잘못 탔나?'(웃음)  

 

인생에 다 분기점이 있다. 테마게임처럼 여기서 이걸 선택하는 나와 저걸 선택하는 나. <소녀이야기>까지 하고 다른 걸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환>까지만 하고 다른 걸 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건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다시 한번 자신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 안 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코로나 시대에 회사에 육아 휴직을 제출하고 나만의 작업을 하고 있다.


만화과에 들어가서 어떻게 애니메이션을 할 생각을 했나? 수업도 없지 않았나?

만화도 수업 없는 것은 비슷했다.(웃음) 나는 3D 애니메이션이 좋아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작업을 했다. <마지막 왕>을 썼을 때도 그랬다. <소녀이야기>를 하게 된 건 <마지막 왕> 때문이다. 그때부터 내 일제시대의 관심이 계속 이어져 왔다. 지금도 외주 받아서 쓴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가 중국 만주 쪽 항일 운동에 대한 이야기다. 만주에 있었던 위안부 얘기와 항일운동, 호랑이가 등장하는 기획안이 있었다. '이건 그 사람밖에 쓸 사람이 없는데?'하고 지인분이 연결해 주셨다. 지금 2고 째 작업을 마쳤는데 꽤 괜찮게 나온 것 같다.  휴직 기간 동안에는 평소에 상상하던 독특한 상상을 시나리오로 썼고 지금 공모전에 접수해 놓은 상태이다. 

2003년 <인생>으로 SICAF 단편 대상 타고 인터뷰에서 장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3D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게 영화가 됐든. 드라마가 됐든. 웹툰이 됐든 난 상관없다. 도구는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요즘처럼 자유로운 플랫폼 시대에 꼭 3D 장편 애니메이션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된다.


요새는 3D 애니메이션을 이렇게까지 비싸고 힘들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좋아하고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게 뭐지? 유튜브 보면서 게임 하는 거잖아. 내 아이들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은 그런 소비자의 소비 패턴에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했고 우리 모두 그것을 들었다. 요즘은 그 말이 너무나 확실히 증명되고 있는 시절이다.

지금 생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 웹툰이나 드라마 쪽으로 소재를 찾는 공고가 그렇게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무모하게 도전해 보려고 한다. 1999년에도 지금과 거의 같은 고민으로 28살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던 것 같다.


내가 1999년에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고, 단편을 계속했던 건 누군가 나의 전투력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던 거다. 2020년에 내가 회사를 쉬는 이유는 내 아이디어를 웹툰이 됐든, 드라마가 됐든 영화가 됐든, 그대로 썼을 때 그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를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서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수요를 찾는다. 같이 일할 사람들을 찾고 싶다. 나를 오해하지 마라. 나는 독립투사가 아니다.(웃음) 

 

누가 "가장 하고 싶은 건 뭐예요?" 그러면 게임이다. 지금 너무 만들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코로나 시대 하고도 너무 잘 맞다. 사람들이 밖에 못 나가고 게임을 하면서 왜 레벨 노가다를 하고 파밍을 하고 싸우기만 해야 돼? 힐링만 하면 안 돼? 그런 게임. 그리고 VR 기기를 모든 가정에서 한 대씩 가지고 있을 만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

2020년 8월 8일 @과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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