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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 HAN Byung-a

  • 2020년 1월 24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시간 전


새해의 보름을 넘기고 설을 열흘 앞둔 평일 저녁, 아슈비아만화영화프로덕슌을 찾았다. 퇴근 시간대였고 스튜디오는 한산했다. 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자리에서 새로운 작품의 배경을 만지고 있는 한병아를 찾았다. 2007년 결혼 후 남편과 스튜디오를 꾸렸고 10년 만에 회사를 떠나 작업실을 구했다. 로맨스에 웹애니메이션도 시도했고 새로운 작품의 제작지원도 받았다. 2019년 여름, 장편 <별의 정원> 개봉 이후 작업실을 정리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인터뷰 전날에는 지원받았던 신작 배급을 맡기고 왔다. 이제 한숨 돌리는가 싶지만, 벌써 준비 중인 기획이 여럿이다. 따로 법인도 등록했다. 무소처럼 강직하고 싶어 “뿔”이라 이름 지었다. 한병아의 숨 가쁜 행보를 따라잡으려고 연초부터 서둘렀다.


이상한 나라 (2002)

<이상한 나라>에는 벌거벗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화려한 무늬의 뱀이 등장한다. 뱀은 인간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강자와 약자를 가른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 같은데, 등장인물들의 생김새는 부처를 닮았다. 

작품을 만들기 전 인도에 다녀온 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획할 때 동양화풍을 추구하긴 했지만, 기독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자라면서 교회에 많이 의지 했다. 대여섯 살 때 동네 언니 따라 교회에 갔다가 재수 때까지 열심히 다녔다. 사실은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종교가 사람이 흐트러지지 않고 스스로를 다잡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교회를 다닌다. 

어렸을 때 좋아한 애니메이션이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만은 잘 그렸다. 재수할 때 디즈니의 <알라딘> (1992, 한국 개봉 1993)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애니메이션과가 없어서 비슷해 보이는 디자인과에 갔다.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서 손바닥만 한 한예종 애니메이션과 1기생 모집 광고를 발견했다. 아무한테도 얘기를 안 하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준비해서 시험을 봤다. 1차 붙고 2차 붙고 그때 3차까지 있었는데, 3차까지도 붙었다. 그때 그 광고를 봤을 때 그 느낌과 흥분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뭔가 막 이렇게 우주의 에너지가 나를 공격했다가 싹 빠지는 느낌? 가슴이 뛰고… 그런 기분으로 뭔가를 하면 되게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어쩌다 한 번씩 그런 느낌이 와서 일을 하면 성공한다.


큰 꿈을 안고 한예종에 들어갔는데, 예술적인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곳이라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건 가르치지 않았다. 3학년이 될 때까지 약간 열등생 취급을 받았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다섯 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다. 잠깐 돌아와서 돈을 벌고 다시 실크로드를 타고 파리까지 가서 한 달 반 넘게 있었다. 돌아와서 복학을 했더니 졸업작품이 닥쳐왔다. 포토샵 겨우 여는 수준이었고 능숙한 게 없었다. 이야기를 짜고 아트워크를 만들고 스토리보딩을 하고 애니메틱스, 동화, 편집, 사운드까지 하나하나 졸업작품을 하면서 배웠다. 작업을 끝내지 못할까 봐  매 순간이 두려웠다. 그렇게 열심히 한 편을 완성했고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처럼 성실하고 매 순간 긴장을 놓치지 않고 일하려는 편이다.


이상한 나라 (2002)
이상한 나라 (2002)

찔레꽃 (2004)

두 번째 작품 <찔레꽃>은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작이다. 

<이상한 나라>를 만들고 용기가 생겨서, 혼자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제안도 있었고 여러 가지 기회들이 있었지만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나오고 싶어 졌다.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고 2년 정도 달콤하고 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서 간 김에 반년 정도 눌러앉았었고 돌아와서 <찔레꽃>을 만들다가 히말라야도 갔다왔다. 

 

<찔레꽃>은 내 꿈 이야기다. 실크로드 중간 어디쯤에서 낮잠을 자다가 꾼 악몽이다. 너무 무서워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깼다. 꿈에서 나는 굉장히 어린아이였고, 죽은 엄마를 찾아서 무덤가를 헤매는데 엄마를 보고 다가가니 계속 귀신이었다가 마침내 진짜 엄마한테 안겼더니 나를 안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엄마의 치맛자락이 훵 비어있었다. 무서워서 와악 소리를 지르면서 떨어지는데, 웃으면서 깼다. 강렬한 꿈이었다.

 

어느 새벽, 작업을 하다가 국악 프로그램에서 강은일의 [웡이 자랑]을 들었다. 음악과 꿈을 애니메이션에 녹이기로 했다. 이연실의 [찔레꽃]도 엄마 없는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찔레꽃]을 중심으로 앞뒤에 제주도 자장가 [웡이 자랑]을 붙였다. 나는 항상 음악에 묻어서 간다고 생각한다. 만들면서 게으름 피웠던 부분은 음악에 많이 도움을 받는다. 내 작품에서 가장 완벽한 건 음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찔레꽃>이 국악축전 작업인가 했다. 

한예종에서 2005년 국악축전 예술감독이었던 윤중강 국악평론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상한 나라>를 보고 하셨을까? "국악 애니메이션이라는 꼭지를 만들 건데 나한테 좀 진행을 해봐라. 그리고 너도 작가를 해라." 해서 내가 그 꼭지 감독들 섭외랑 총괄 진행했다. 강은일의 해금 연주를 되게 좋아했다. 강은일의 [오래된 미래]를 선택하면서 <찔레꽃>과 어떻게 보면 음악적인 연결고리가 생긴 거다.

<오래된 미래>는 온라인 공개를 안 했는데 국악축전에 묶여있는 건가? 

아니다. 내가 그 작품을 만들 때 열심히 안 했다. 내가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이어서 그랬다.


모두가 외로운 별 (2006)


<모두가 외로운 별>에서는 톤이 변한다. 핑크색 팬티 한 장 걸친 털북숭이 남자와 입술, 사람 얼굴을 한 노란 개, 혼자만 다른 색종이에 그려진 여자 등. 명랑만화에 나올 듯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원래 내가 낙서를 많이 한다. 평소에 하던 낙서로 아트워크를 잡았다. 2년 동안 외로운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도 가끔 만나는 친구들, 제일 가까운 친구들의 캐릭터를 녹여낸 게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다. 나도 당연히 있고. 대중적인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하기로 결정했던 원래 욕망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거라 생각한다. 전문사 졸업작품이었고, 졸업은 2008년에 했다. 학점을 채웠어야 했다.


숙녀들의 하룻밤 (2011)


<숙녀들의 하룻밤>은 결혼 후 첫 작품이다. 

하고 싶어서 했다. 갑자기 어느 날 떠오르더라. 아이를 낳고 보니 어렸을 적이 많이 떠올랐다. 삶의 기억나는 변곡점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들의 나를 다시 보면 어떨까. 어 이것도 괜찮다 싶어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서 교외 러브호텔에 가서 하룻밤에 글을 썼다. 스튜디오 일을 잠깐 놓고 3개월 만에 만들었다. 배경은 다른 친구가 하고 나는 동화하고 편집하고 했는데 동화도 연기도 부족해서 만듦새가 아쉬웠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 게 창피하기도 했다. 몇 년 동안은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았다.

2015년 DMC 단편영화페스티벌에 초청 상영을 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봤더니 너무 좋았다. 좀 촌스럽지만 촌스러운 대로 되게 진정성 있는 작품이야 이건.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작품에 조금 자신감을 갖게 됐다. 작년까지도 여러 군데서 상영이 됐는데, 내가 내 거를 사랑한 다음에 많이 찾아주는 것 같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2탄을 기획하고 있다.


서른여섯에 아줌마는 좀 그렇지 않나?

내 말이. 애야 애. 너무 아줌마처럼 그렸다. 오히려 요새 그 작품을 보면서 내가 이해를 하는 게, 그때 지레 마음이 너무 늙었었구나. 3자를 4자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흔여섯이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그때 서른여섯이었으니까 적당히 아줌마를 대변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쎄스 로맨스 (2017)

다시 5~6년이 지나고 <미쎄스 로맨스>가 나왔다. 2017년은 회사에서 나와서 내 작업하겠다 한창 말하던 때였다.

회사가 내가 없어도 굴러갈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서 나왔다. 갑자기 내 거를 하려고 하니까 되게 막막했다. 어렸을 때 할리퀸 로맨스 많이 봤고 순정만화도 많이 봤다. ‘나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그동안 만든 게 너무 심각했던 것 같아. 로맨스를 살짝 해볼까?’ 했다. 실은 2014년에 제작 지원을 냈다가 한 번 떨어졌는데 패키징을 바꿔서 2015년에 지원을 받았다. 

‘아줌마 로맨스의 대가가 한 번 돼볼까?’하면서 스토리 몇 개를 구상했다. 아줌마들이 채워지지 않는 게 있다. ‘나도 한 때는 꿈이 있었고 나도 빛났던 순간이 있었고 다시 불타고 싶고’ 잃어버린 꿈과 어떤 자존감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만드는 건 가성비가 떨어지니, 혼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쁜 그림에 동화를 절제하고 스토리나 연기에 힘을 주려고 했다.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재미없지는 않았다. 근데 캐릭터가 매력이 없었던 것 같다.


<미쎄스 로맨스> 시리즈 계획은 접었나?

<미쎄스 로맨스>를 통해서 웹애니라는 걸 경험해 봤다. 네이버 그라폴리오 웹애니 공모전이 뜬 걸 보고 ‘이건 플랫폼이 웹 기반인 게 맞아.’ 생각해서 앞부분을 쪼개서 1분 30초, 2분 정도 2개를 올렸다. 공모전은 됐다. 과연 아줌마 로맨스는 웹에서 아줌마들이 많이 안 보는 콘텐츠인 것 같아서 좀 다른 형식으로 풀어볼까 한다. 나만 좋아서 하는 작품을 하는 건 진짜 너무 사치스럽다. 대중적으로도 많이 인지됐으면 좋겠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아주 짧은 초단편으로 예쁘게, 애니메이션도 상품도 전시도 패키징을 해보는 게 올해 목표 중 하나다.


미쎄스 로맨스 (2017)
미쎄스 로맨스 (2017)

우주의 끝 (2020)

<우주의 끝>은 언제부터 들어갔나?

애니메이션센터에서 2018년에 지원을 받았다. 그냥 뭔가 할 게 필요했다. 데드라인도 필요하고 지금 내가 뭘 하지 않으면 끝날 것 같았다. 장편 개봉하고 나서 시나리오를 열 번 이상 고쳤다. 아주 커다란 실패가 이 얘기를 만든 것 같다. 장편 끝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힘들었다. 죽을 것 같더라. 원래는 주인공이 죽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죽을 것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이렇게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어떤 마음으로 남은 삶을 정리할 수 있을까? 죽을 만큼 힘든 사람, 죽음에 처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랑 아무 상관없지만,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  

스토리 하고 캐릭터 잡는 것, 아트워크 고민한 시간을 따지면 1년 반 정도가 걸렸는데 본 제작은 3개월 걸렸다. 들고 파서 예쁘게 나오면 행복하고 진짜 재미있는데, 나는 마냥 그런 걸 즐길 수 있는 작가는 아니다. 옛날에는 하나 잡고 내내 고민하고 이런 게 되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고는 초기 기획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본 제작은 빨리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장편을 해보니까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초기 기획이 단단하면 중간에 손실이 훨씬 적어진다.


이번 작품도 전에 비해서 톤이 또 확 바뀌었다. 마지막에 춤추는 씬은 약간 <라라랜드> 느낌이 났다.

<라라랜드>가 떠올랐다니까 좋다. 그러니까… 죽을 사람이지 않나. 내가 만일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나의 마지막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주 힘들 때 조차도 좀 유쾌하고 싶었다. 유쾌하게 소화하다 죽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마지막에 춤도 사실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냥  처음에 정한 러닝타임대로 끝냈다. 더 섬세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뭐든 더 했으면 더 좋지.


이번엔 캐릭터들이 다 동물이다.

처음에는 토끼만이었다. 자기 일도 남편 직장도 불안한 가정이 외곽으로 이사 가는 상황을 사람으로 표현하자니까 너무 멀멀했다. 그래서 동물로 하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해서 그냥 토끼를 그려 봤다. 다른 캐릭터도 동물로 형상화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캐릭터 잡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여우나 고양이는 한 번에 슥슥 그려서 완성했다.

다 동물인데, 학원 이야기하는 아줌마 중 하나는 사람 같아 보이더라.

사람이다. 곰으로 할까 그랬는데, 사람도 하나 들어가야지. 사람도 동물인데. 진짜로 의식의 흐름처럼 그린 캐릭터들이다. 토끼 가족은 계속 다듬었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자료 찾은 거에서 착안해가지고 그냥 슥슥슥슥 그리고, 되게 재밌었다. 이 작품 때문에 내가 그 연말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몰입하니까 다른 어려움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진짜 힘들었던 어떤 순간에 나를 위로했고, 너무 감사해서 나는 계속 작업을 해야겠구나 이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끝 (2020)
우주의 끝 (2020)

2020년 1월 16일 @구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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