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I Am a Horse
- seoulanimator

- 9월 24일
- 10분 분량
나는 말이다 I Am a Horse | 2022 | 7mins 58secs | dir. 임채린 IM Chaerin

기세로 돌파한다
반복적 발생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
이 말은 에른스트 헤켈이 1866년에 “발생반복설(Recapitulation Theory)”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 이래, 한때 진화론(적 발생)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었다. 해당 분야 연구자들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론으로 용도폐기 했지만, 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중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는 그 변화를 적어도 20세기 후반까지는 반영하지 않은 듯싶다. 과학적 진리 여부와는 별개로, 위 문장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특히나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진단하고 평가할 때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유지된다 (인문예술 분야는 과학적 엄밀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법이다).
임채린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위 문장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 첫 번째 이유. 이제까지 제작된 임채린의 애니메이션은 개별 작품들이 일련의 모티프들을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경향성을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임채린이 자기 복제의 굴레,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의 고유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독특한 재료를 이미지 제작의 질료로 삼으며, 그로부터 나름의 동세를 구현하면서 내러티브의 영역 바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작품은 개체를 이루면서도, 그것들의 집합은 분명 임채린의 작품 세계라는 계통을 구축한다.
두 번째 이유. 이때 임채린의 작품들은 질문의 핵심을 ‘문제의 기원과 발생’에 둔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의문이란 “도대체 발생의 근원에 무엇이 있었고, 어떻게 자라났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권력 작동의) 기제를 구축했는지”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이 점에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라는 문장이 재차 유효하게 떠오른다. 임채린의 애니메이션들은 발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로부터 무엇이 발생하는지를 복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임채린의 작품을 통해 “발생반복설”을 떠올리게 되는 세 번째 계기는 그 적용 범위가 단지 임채린의 애니메이션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 애니메이션’ 자체의 계통적 발생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논내러티브, 탈재현적 추상 이미지, 새로운 소재/재료의 탐색, 인접 매체와의 연계를 통한 확장적 실험, (성-정치를 통한) 대안적/전복적 미학 등등... 우리는 ‘실험 애니메이션’을 막연히 하나의 영역으로 뭉뚱그려 간주하곤 한다. 허나 그 속에는 다양한 계열과 계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적이기도 하고, 때론 상호 배타적이기도 한다. 실험 애니메이션은 이처럼 다양한 계열과 계보에서 특정한 하나만을 선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험 애니메이션은 엄선이 아니라 조합을 통해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며 등장한다. 이종 교배 같은 조합 말이다. 이 점에서 분명 임채린의 애니메이션들은 실험 애니메이션의 발생론을 충실히 따른다.
그리하여 이 글은 <나는 말이다>라는 특정 개별 작품에 대한 글이면서, 동시에 이제껏 제작, 발표된 임채린 애니메이션들을 ‘계통 발생적’으로 수시로 소환하고 관통하게 될 것이다.
발생의 기원
“내 외할머니가 꿈꾼 엄마의 태몽은 호랑이었고, 엄마가 꿈꾼 나랑 내 쌍둥이의 태몽은 야생마였다.”
<나는 말이다>는 태몽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작품에 대한 소개이며, 감독(과 쌍둥이 자매)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작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자, 감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케일을 키우자면 기원은 창세기이고, 미시적으로 좁히면 배아, 즉 엠브리오이다. 한편으로 태몽은 문화적이면서도 심리적인 차원에서 “상징화”의 기원이다. 이는 마치 운명의 질서가 새겨지는 순간과도 같아서, 일단 그것이 명명되는 때부터는 더 이상 역행이나 변화, 번복, 수정이 불가능한 ‘신탁받은 예언’, ‘프로그램된 숙명’ 일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의미를 밝히듯, 태몽은 “태아의 성격, 장래 및 운명을 예측”한다. 엄마의 태몽에 따라 임채린은 자신이 ‘야생마’의 성격, 운명을 타고났다고 전해 들었을 테다. 흥미로운 지점은 자신의 태몽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가 꾼 엄마에 대한 태몽까지 소개한다는 점이다. 호랑이와 야생마. 이는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에서는 여성에게 ‘상당히 드센 팔자’로서 꽤 꺼려지던 대상이다.*
작품 도입부에서 자신의 태몽에 대해 소개를 한 다음, “우리 외할머니, 엄마, 그리고 쌍둥이한테 이 작품을 바칩니다”라고 헌사를 적음으로써, 감독은 태몽으로 연결되는 모계적 관계를 부각한다. 외할머니는 호랑이 기운(또는 팔자)의 엄마를, 호랑이 기운의 엄마는 야생마 기운(팔자)의 쌍둥이 딸을 낳음으로써, 3대를 관통하는 혈연적 정통성을 강하게 긍정하게 된다. 여기에는 혹여 이러한 태몽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시어머니 등과 같은 부계적 혈통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일례로 1960-70년대에 제작, 상영된 한국 영화 중에는 ‘말띠’와 여성을 결부한 제목의 영화로 <말띠여대생>(1963, 감독 이형표), <말띠신부>(1965, 감독 김기덕), <말띠며느리>(1979, 감독 이형표)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공통적으로 ‘말띠’ 태생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러한 편견을 확인, 강화하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태도에 대해 풍자하고 ‘미신’으로 취급하면서 말띠 여성의 진취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그려내고자 하였다. 말뿐만 아니라 호랑이의 경우도 <범띠 가시네>(1970, 감독 이상언)처럼 일종의 풍자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존재의 생기
말의 몸뚱이에 사람의 상반신, 반인반마가 내달린다. 신화 속 켄타우르스, 그중에서도 영웅들(헤라클레스, 이아손, 아킬레우스 등등)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케이론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남성의 가슴이 아니다. 젖가슴을 내놓은 것으로 보아 태몽 속 주인공을 내세웠으리라. 거친 필치에 담긴 말과 인간의 근육, 그것들이 내뿜는 기세. 성별은 여성이지만 관습적으로 부여된 ‘부드러움’은 없다. 애초에 반인반마의 본성이 그리 거친 것인지, 아니면 거침과 부드러움, 강함과 유연함의 구분이 반인반마에게는 성별과는 무관하게 개별자의 속성인지 알 수 없지만, 인간 속세의 고정관념으로 반인반마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다음 등장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그중 하나의 젖가슴이 드러나고, 다른 하나가 어루만지며 빨아 당긴다. 가슴을 제외하곤 두 사람의 골격과 근육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들 또한 반인반마처럼 강건한 육체를 지니면서, 그 안에 뜨거운 기운을 담고 있다.
이윽고, 질주하는 반인반마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어 하나, 둘, 몸뚱이에 박힌다. 뒤엉켰던 두 사람 중에 젖가슴이 달린 이가 누워있고, 그 가슴을 탐하던 이가 흰 천을 덮어준다. 활력과 폭력,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대립쌍이 함께 한다.
그리고는 이제 긴 머리, 젖가슴, 울끈불끈 한 근육의 존재가 등장하여 춤을 춘다. 이 자는 누구일까? 어떤 의미의 춤을 추는가? 앞선 두 상황을 매개하는 자일까? 반인반마에게 젖가슴이 있고, 부둥켜 엉킨 두 인물 중 하나에게도 젖가슴이 있듯, 춤추는 이는 말의 몸뚱이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던 상대로부터 벗어나서 비로소 하나의 독립자로 태어난 존재일까? 아니면 춤추는 이로부터 반인반마와 부둥켜 엉킨 두 인물이 파생된 것일까? 혹은 반인반마는 야생마의 태몽을 타고난 감독 자신, 뒤엉킨 두 사람은 야생마의 운명을 잉태하게 될 부모, 그리고 춤추는 이는 현존재로서의 감독일까?
선후관계가 무엇이든, 우리는 ‘야생마’, ‘쌍둥이’와 같은 태몽과 탄생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춤은 자신 안에 본래 충만하게 차 있는 에너지를 내뿜는 생명의 춤, 활력의 춤이면서도, 본성을 가두고 억제하려는 외부의 구속을 떨치는 거부의 춤이며, 외적 폭력이 가하는 고통에 대한 몸부림, 분노의 춤, 진노의 춤이기도 하다.
날것의 기운을 가득 담은 춤과 거친 필치는 돌연 간결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넘어간다.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이미지이다. 바로 이중섭이 자주 그린 아이들의 모습. 네 아이가 서로 얽히고 뒤섞이며 빙빙 돈다. 그리고는 이내 이중섭의 또 다른 대표 이미지, 황소가 반인반마와 같은 거센 선으로 그려진다. 황소의 몸부림과 아이들의 모습이 교차한다. 이는 앞선 도입부에서 등장한 반인반마와 두 인물의 관계 (그리고 춤추는 자까지)와 대칭을 이루면서도, 이 이미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힌트를 준다. 대립적이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생기,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끔 만드는 내면의 활력.

생기의 발현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운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 존재는 발생에서부터 생기와 함께 한다. 생기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지닌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생기와 활력이 지닌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허용치 않으려 한다. ‘야생마-여자’는 팔자가 드세니까. 그래서 외부 세상은 제도와 관습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다스리려 한다. 그러나 누르면 누를수록 폭발 임계치에 다가간다. 질주, 몸부림, 춤사위, 뒤엉킴 등은 존재 안에 가득한 에너지를 운동으로 분출하는 현상이다.
움직임은 가속을 받으며 더욱 격해지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순환과 반복의 다음 단계는 융합과 변신이다. 황소는 아이와 뒤엉키면서 사슴*과 그 위에 올라탄 여인으로, 그리고 반인반마로, 거듭해서 형태를 바꾸어 나간다. 이러한 전개는 맨 처음에 등장한 반인반마로의 회귀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단순히 처음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회귀의 과정 속에는 ‘반인반마’에 담겨 있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다종성’이 있다. 말, 소, 사슴, 사내아이, 여자, 폭력, 화해, 질주, 절규, 집착, 욕정, 삶, 죽음 등등... 이는 단지 ‘야생마-여자’라는 태몽 때문에 짐 지워진 운명의 무게일까? 아니면 발생의 씨앗인 엠브리오에 담긴 본래적 속성일까? 배아의 발생 과정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세포 분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복귀한 반인반마의 존재는 이전보다 한층 역동적이면서도 더욱 격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무방비 상태로 화살을 맞는 대신, 이젠 손에 칼을 쥐고 있으며, 때론 거센 춤사위를, 때론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를 뽐내기도 한다. 마치 황소의 기운과 아이의 풋풋한 생기가 더해진 것만 같다. 그럴수록 형태를 이루는 선은 스스로의 운동성을 지니면서 추상의 영역으로 옮겨가려는 긴장감 어린 형세를 이루기도 한다. 이렇게 구상과 추상이 혼재하는 동세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운동 에너지가 최대치에 다다랐을 때, 형태는 다시 한번 변화, 분리된다. 황소 속에 삼켜졌으리라 여겨지던 아이들이 이제는 반인반수의 상체를 이루고, 하나를 떠나보낸 것으로 여겨졌던 두 사람도 나란히 내달린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젖가슴을 달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의 남녀-부모를 대신한 쌍둥이 자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란히 달리던 것들 (젖가슴 달린 사람들, 그리고 아이의 상반신을 한 반인반수들)은 이내 서로를 향해 덤벼들고 칼과 창과 방패를 휘두른다. 혼전 속에서 선들은 다시 카오스의 실타래처럼 얽힌다.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이도 복귀한다. 그의 춤은 이전처럼 여전히 뜨겁다.
순환, 해체, 변신, 재조합, 반복... 이러한 순환 고리는 무엇을 향한 것일까?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춤추던 이는 반인반마로 대체되고, 칼과 창과 방패를 지니지 않은 몸뚱이에는 처음처럼 화살들이 날아와 박힌다. 또한 바닥에 드러누운 (젖가슴 달렸던) 상대에게 흰 천을 드리우자 그 속에서 남근이 불끈 솟아난다.** 가슴을 탐하던 두 사람 (직전까지 흰 천을 덮어주던 이들) 사이로 제3의 존재가 기어서 다가온다 (그러니까 그들의 아이로도 볼 수 있다).
이후부터는 더 커다란 진폭으로 카오스적 요동이 전개된다. 반인반마의 아이들은 사슴 무리로, 다시 용으로, 숨 가쁘게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제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모습에서는 거대한 남근이 흔들거리고, 잘린 머리채를 들고 걸어가는 반인반수에게는 두 사람이 달라붙어 있으며, 나란히 달리던 두 인간은 뒤섞이다가 어느새 한 쌍의 반인반마로 바뀌고는 또다시 분리와 대립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식...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엎치락뒤치락하며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재배치한다.
* 때론 나귀 같고, 때론 늑대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이중섭의 그림으로부터 ‘사슴’을 떠올리게 된다.
** 임채린은 <꽃>에서 생식기의 혼종을, <메이트>에서 짝짓기의 재설정을 시도한 바 있다.

흔적으로서의 존재
이처럼 <나는 말이다>는 종국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나 선형적 시간 흐름의 여지마저 남기지 않는다. 오로지 선의 움직임에 담긴 역동적 기세만을 작품에 품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케 된다. 작품은 형상을 만들었다가 뒤틀고 엉켰다가 다른 형상을 이루는 선, 그리고 그것에 기세를 부여하는 필치를 부각한다.
하지만 도드라지는 필치만큼이나 이 작품의 중량감을 담아내는 영역이 그 아래에 깔려 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선을 도드라지게 받쳐주다가 점차 선과 대등한 존재감으로 떠오르고, 마침내는 선마저 집어삼켜 자신의 부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영역. 바로 애니메이션 작화지처럼 사용된 쿠킹포일의 물성이다.
이미 임채린은 <아이즈앤혼즈>(2021)에서 플렉시글라스를 재료로 삼아서 각 프레임 이미지를 그 위에 그리고, 레이저 커팅으로 새기고, 다시 판화로 제작하는 이중, 삼중의 작업을 하였다. 또한 그 전의 <메이트>(2019)에서도 동판화 작업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실험적 시도 속에서 소재, 재료가 지니는 물리적 성질은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하나의 환영illusion이 아닌, 구체적 창작/노동의 실체를 담아내는 증거물이 된다.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일견, 판화와 영화는 ‘복제’라는 단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긴밀한 친족 관계처럼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판화와 영화 사이에 사진이 들어가면 그 친족의 연관성이 좀 더 분명해진다. 판화가 사진으로, 사진이 영화로 점차 그 역량을 확장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사진이 판화를, 영화가 사진을 대체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판화와 애니메이션을 나란히 놓는 순간, 친족의 긴밀함에 뭔가 불편한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애니메이션을 이루는 개별 프레임 이미지를 판화 작업으로 마련한다는 건 ‘비효율적’이다 (감독과 절친한 사이라면 ‘어리석은 짓’이라 말하며 말렸을 테다). 어째서 판화-사진-영화라는 연속선을 판화-사진-영화-애니메이션으로는 연장하기 어려울까?
거칠게 말하자면 판화의 복제는 하나의 원본 이미지를 ‘증식’시키는 일이다. 영화의 복제에도 이러한 원본 프린트로부터의 복제, 즉 ‘카피 프린트’의 증식이 유지된다. 그런데 영화라는 매체의 ‘복제성’을 말할 때에는 원본 프린트의 복제뿐만 아니라, 외부 피사체에 대한 ‘광학적 복제’라는 함의도 함께 한다. 이러한 광학적 복제는 바로 사진술로부터 비롯한다. 사진술은 피사체로부터 반사된 빛을 렌즈라는 광학 장치로 집약하여 필름의 감광유제에 ‘복제’해낸다. 그래서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는 ‘빛photo’의 ‘기록graph’이 가능해진다. 영화비평가 앙드레 바쟁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부제목을 통해 우회로를 거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판화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낯선 거리감은 바로 사진적 재현/복제에서 비롯한다. 광학 장치, 감광유제, 여타의 사진술이 대체했던 외부의 재현/복제 대신, 애니메이션은 매 프레임에 다시 인간의 인위적인 노동/창작을 불러들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판화의 공정을 끌어들이는 것은 판화 작가에게나,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에게나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실험 애니메이션의 ‘실험’은 종종 “비효율적”이라고 지적받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임채린의 판화 작업은 그런 점에서 ‘실험적’이다. 하지만 단지 무모해 보이는 것을 시도했다는 점만으로 실험성을 부여받을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굳이 그 실험/시도를 해야만 한다면, 비효율을 상쇄하고도 남을 성취”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임채린의 작업은 가치를 증명한다. 석판화/키친 석판화로 만들어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질감의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으로 태어났다. 디지털로 판화의 효과를 어쭙잖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그림을 그리고 부식시키고 찍어낸 ‘실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고려할 지점이 있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임채린의 앞선 판화 기반의 애니메이션이 들이) 던지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존재의 기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러티브에 담긴 메시지로 찾는 대신, 애니메이션 이미지의 존재론적 근원과 연결시킬 수는 없을까? 기실, 이 접합점이 <나는 말이다>가 이루어 낸 예술적, 실천적 성취이다. 아주 살짝 퍼스의 기호학을 인용하자면, 판화도 사진술도 인덱스index로서의 기호적 특성을 따른다. 대상 또는 실체와 밀접하게 연결된 물리적 흔적이 인덱스로서의 기호이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다>를 이루는 판화 이미지는 부식된 알루미늄 포일이라는 구체적인 재료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매 이미지 작업에 개입하는 (어쨌든 효율적이지 않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애니메이터의 존재를 흔적으로 기록하고 드러낸다.
움직임의 환영을 자연스럽게 구현하고자 한다면, 프레임 하나하나를 만들어내는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 촬영 도중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즉 스스로의 물리적 흔적을 지워야 하는 것이 애니메이터의 존재론적 숙명이다. 하지만 판화 작업을 비롯하여, 소위 ‘실험’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지워진’ 존재인 애니메이터를 의도적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이쯤에서 ‘지워진 존재’라는 말을 통해 스멀스멀 이 작품의 출발점인 ‘발생의 기원’이 떠오르고 포개질 것이다. 체제로부터 부정당하는 존재, 그 존재를 발생 단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 이를 통해 지워질 운명으로부터 되살려내는 흔적의 기록. <나는 말이다>가 “개체 발생을 통해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문장을 환기시킨다면, 그러한 계통에는 임채린의 필모그래피뿐만 아니라 ‘실험 애니메이션’이라는 계통 또한 포함된다.
* 그럼에도 ‘무모함’ 앞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핀스크린 기법을 고안해 낸 알렉산더 알렉세이예프Aelexander Alexeieff이다. 알렉세이예프는 자신의 판화 작업을 애니메이션에서도 구현하고 싶어 했다. 그가 찾아낸 설루션은 요철이라는 판화의 물리적 요건을 반영하되, 매 프레임을 일일이 새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부분만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평평한 판 위에 핀을 촘촘히 박아 넣음으로써 가능했다. 핀의 길이를 조절하여 요철을 만들고, 잉크 대신 조명을 이용한 그림자로 그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존재의 각인
다시 발생의 기원으로부터 돌아가 보자. 기원은 개체라는 개별자의 발생에도 해당되지만, 개체를 둘러싼 세상의 발생에도 적용될 수 있다. ‘태몽’을 축복이 아닌 저주 또는 불길한 예언으로 작동시키는 가부장적 권력-이데올로기 또한 기원과 기제가 있을 터.
이 지점에서 임채린은 예상치 못한 정전(正典, canon)으로 이중섭을 지목한다. 이제껏 이중섭은 불운한 천재로서 연민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고난과 고독 속에서도 동심과 가족애를 잃지 않았던 예술가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는 권력의 작동 반경에서는 벗어난 인물이었다. 허나 임채린은 이중섭을 다시 읽고자 한다. 현재의 젊은 아티스트에게 과거의 불운한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 활동을 위해 아내에게 의존하는 비주체적 존재로 비친다. 적어도 아내와 동등한 책임감으로 가족을 부양하지는 못했다. <아이즈앤혼즈>에서 비판했던 피카소와는 다른 강도와 태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말이다>에서 이중섭은 세간의 일반적인 호응에서 벗어나 나름의 재평가 절차를 거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이중섭을 부정하는가? 그럴 리가! 임채린은 젊은 창작자로서 호기롭게 이중섭을 기존의 틀에서 빼내어 확장시킨다. 불운하고 나약한 아비의 그림자 (이는 가부장의 뒷모습이기도 하다)를 걷어내고, 본래 지니고 있었을 생의 활력을 되살리되 그 폭을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 여성에게까지 너르게 가져가고자 한다. 흰 소의 기운을 야생마에게도 나누고자 한다.
그러하기에 키친 석판화에 쓰인 알루미늄 포일은 자연스레 이중섭의 은지화와 연결된다. 이때 포일도, 담뱃갑 속 은종이도 단순히 종이의 대용품은 아니다. 포일과 은종이는 흔적을 기록한다. 표면 위에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표피를 가르고 긁고 생채기를 내면서 기어이 그 아래로 날카롭게 침투한다. 그렇게 새겨진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창세기>가 ‘타투’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점을 떠올려보자 (물론 직접 피부에 이미지를 새기지는 않았지만...). 타투 그리고 판화가 고된 작업인 이유 중 하나는 표면을 새겨 나가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이미지는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우리가 이중섭의 은지화에 정서적으로 한층 더 깊이 있게 반응하는 까닭 또한 그것이 곤궁한 형편을 보여주는 소품에 그치지 않고, 거친 흔적을 특유의 질감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을 새롭게 설정하고 규정한다는 것은 세상을 담을 ‘판’을 새롭게 짠다는 의도이다. 일찍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그러했고,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그러했으며,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 칸딘스키의 뜨거운 추상, 이윽고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등이 그러했다. 새롭게 재편된 ‘판’에는 이에 합당한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티스트들은 늘 자기 이전의 세대를 뒤집고, 뛰어넘었다. 그리고 기꺼이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이 점에서 임채린의 애니메이션들은 기존의 질서를 물구나무 세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창세기가 다시 쓰이고, 성별이 재설정되고, 짝짓기가 재규정되고, 피카소와 이중섭이 재해석되었다. 그렇게 전복되고 재배치된 질서는 표면에 새로운 층위를 쌓거나 파내면서 날카롭게 흔적을 새겼다. 그리고 거칠게 기세를 뿜어 내면서 꿈틀대고 내달렸다.
이제 임채린은 그다음 단계를 준비 중이다. 의식적으로 ‘개체와 계통 발생의 되풀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새로워질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임채린은 “발생반복설”을 넘어서는, 진화의 그다음 단계를 어떻게 모색해 나갈까? 진화학자들은 새로운 환경과의 만남이 진화를 촉발한다고들 얘기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현재의 상황은 분명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환경’ 임에 틀림없다.
나호원 Joint Edit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