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5_SPECIAL_JUNG Seunghee
- seoulanimator
- 2일 전
- 19분 분량
최종 수정일: 12시간 전

2005년 <빛과 동전>으로 제1회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정승희 감독은 2024년 제20회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기억은 먹구름>을 상영했다. 딱 20년 만이다. 최신작부터 거슬러 3년 간격으로 <보이지 않는 눈>(2021), <안개 너머 하얀 개>(2018), <우주보자기>(2015)를 발표했지만 <빛과 동전>과 <우주보자기> 사이 10여 년은 비어있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변동이 컸던 90년대 중반 2000년대 초반, 다양한 공부모임을 찾아다니고 탄광마을에서 벽화를 그렸던 대학 시절, 졸업 후 애니메이션 수업들을 찾아다니며 만든 습작들과 스스로 인정한 첫 작품 <정글>(2001), 한 시절을 마무리한 <빛과 동전>까지 풍파에 희미해져 가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렸다.
2025년 10월 스페셜 : 정승희
보이지 않는 것
공부
호원: 제가 감독님을 처음 본 게 1999년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디지털영상랩이었어요.
네, 기억나요. 제가 전공이 회화거든요. 졸업하고 창작활동을 계속하려는 친구들은 주로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을 갔었는데, 저는 그 당시 집에 경제적으로 좀 문제가 생겨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접어두고 낮에는 여의도에 있는 디자인회사 직원으로, 밤에는 미술학원 강사로, 요즘 말로 투잡을 하며 바쁘게 보내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몇 년 보내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좀 생겨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습작처럼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컴퓨터만 다룬다고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 뭔가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당시 애니메이션 교육과정이 있던 경희대, 퓨처아트, 미메시스 같은 데를 알아보러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뵀던 것 같아요. 저는 경제활동도 병행해야 했는데 당시 교육기관 커리큘럼이 다 길었어요. 한국영화아카데미도 알아봤는데, 그때는 다니는 동안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못했어요. 그런데, 미메시스에 갔을 때 제가 전체 과정을 다 하는 건 어렵다 하니까, 당시 미메시스를 운영하던 전승일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꼭 필요한 것만 따로 한 달 동안 가르쳐 주셨어요.
한 달 동안 하시면서 뭔가를 만드셨어요?
뭘 만든 건 아니에요. 페인터로 그림을 레이어로 쌓아서 디지털로 셀애니메이션처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다른 교육프로그램들에선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저는 한 달 동안 컴퓨터를 활용해서 디지털로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만 배운 거예요.
호원: 퓨처아트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2D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하나의 로드맵 코스와 같은 게 “포토샵이랑 페인터로 그리고 편집은 프리미어로 한다”.
맞아요.
맥은 회화과 다닐 때 배웠나요?
학교에서 배운 건 아니고요, 학교 외부 모임에서 무크지 같은 걸 만들면서 맥을 다루기 시작했고, 졸업 후에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프리랜서로 홈페이지 만드는 일을 하면서 포토샵, 쿽익스프레스(QuarkXPress), 홈페이지 만드는 프로그램 같은 걸 다뤘어요. 그 당시엔 애플샵에 프로그램마다 작은 매뉴얼 책자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책자를 사보면서 익혔던 것 같아요.
여의도의 회사는 뭐 하는 곳이었나요?
오래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기업이나 연구소 같은 곳에서 발행하는 책자도 만들고 홍보물 디자인도 하던 회사였어요. 포토샵으로 표지도 만들고, 인쇄소 가서 밤새 책자 인쇄되는 거 검수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여의도에 회사가 많잖아요.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친구들과는 달리 아침에 출근해 점심이면 우르르 몰려나와 밥 먹고 저녁에 또 우르르 퇴근하고 하는 회사원의 삶을 반복하다 보니 점점 창작하는 삶과 멀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살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도 생기고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난 창작자니까 이 모든 경험이 다 창작의 기반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들이 나중에 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호원: 1차 문화 르네상스처럼 자본들이 문화 쪽으로 투자를 했던 무렵이기도 해서 여의도 쪽에서도 되게 바쁘게 돌아간 것 같아요.
네, 그랬던 것도 같아요. 그런데 제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서 월급도 제때 주기 힘들어지고 해서 그만뒀어요. 그다음에 어린이책 출판사도 좀 다니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홍보용 브로셔 같은 것도 만들고요. 그렇게 출판 쪽 일을 하다가 창작할 시간적 여유를 만들려고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홈페이지도 만들고, 컴퓨터프로그램 아이콘 디자인 작업 같은 것도 했어요. 당시는 웹 초기라 홈페이지 디자인하고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규모가 큰 프로젝트도 할 수 있었어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는 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틈틈이 하기 시작했는데, 습작하듯 만든 작품들이 인디포럼 같은 독립영화제에 상영되기도 했어요. <정글> 작업할 때쯤에는 퓨처아트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입주해서 시작한 애니메이터 양성과정에 참가했어요. 그때 단순히 애니메이션을 디지털로 만들 수 있다 수준을 넘어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해보자는 욕구들이 있어서인지, 현역 감독님들, 우리가 봤던 일본이나 미국 애니메이션 외주하셨던 분들을 한 파트씩 초청했어요. 그야말로 물리적 원칙부터 시작해 제대로 작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어요.
<정글>은 그래서 제가 작화에 중점을 뒀던 거 같아요. 그때 '영우프로덕션' 하시는 정우영 감독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감사하게도 수강생들을 다 자기 회사에 가서 작업하게 해 주셨어요. 거기서 동화작감 하시는 분도 보고, 원화 하시는 분들이 키를 잡는 거, 라인테스트 하는 거, 수작업으로 채색하는 거, 당시 전통적인 2D 셀 애니메이션 시스템의 전체 과정을 보고 경험하게 된 거죠.
호원: 미메시스 끝나고 그리로 연결이 된 거예요?
아뇨, 바로 이어진 건 아니고요,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미메시스는 <허기>(1998)랑 <지금, 이곳>(1998) 만들었을 때쯤인 것 같아요. 그다음에 <잃어버린 우주>(1999)도 했어요.
2000년 정도였죠.
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교육과정은 아마 그쯤이었을 것 같아요. 그 뒤에도 배움의 욕구는 계속 있었어요. <빛과 동전> 시작할 때쯤엔 계원조형예술대학(현: 계원예술대학교)에서 누구 초청해서 특강 한다고 그러면 찾아가서 학부생들하고 같이 배우기도 했어요.
호원: 2003년, 2004년 무렵에 강의도 하셨죠.
네, <정글> 만든 후에 연출이나 영상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서, 프리랜서를 하면서 공부와 창작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대학원에 갔어요. 그즈음에 계원이랑 영화아카데미에 강의를 나가면서 <빛과 동전> 작업을 했어요.
회화과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간 거 아니에요?
그렇죠
화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 건 당시 분위기 영향인가요?
아무래도 사회 분위기나 시대의 영향을 무시하진 못하겠죠. 근데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단순히 그리는 행위보다는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창작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는 했어요.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 때 화가가 되겠다니까 엄마가 동네 미술학원에 보내주셨는데, 입시 미술학원이었던 거예요. 언니 오빠들이 입시 미술하는데 저는 너무 어리니까 옆에서 상상화 하라고 해서 매일 새로운 주제를 주면 상상해서 그리는 그런 걸 하다가 고학년부터는 데생도 하고 수채화도 그리고 그랬어요. 마침 동네에 예중 예고도 있어서 거기 들어가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됐죠.
제가 한 네다섯 살 때부터 실존적, 존재론적 고민을 했거든요. 그리고 <우주보자기>의 주인공이 했던 질문처럼 '우주는 어떤 모양일까?', '끝없이 무한하다는 건 어떤 걸까?', '이 우주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렇게 우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어떨 때는 밤마다 먼 우주에 떠서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고요. 보통 아이들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니까 나를 중심으로 우주가 생겨나고 사라져야 되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주가 존재했고, 내가 죽은 뒤 나 없이도 우주는 지속된다는 걸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어요. 그런 유한성과 무한성 사이에서 정신이 아득해졌고, 공황이 올 것 같은 답답함 끝에서 마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듯 세상이 막 일그러지는 듯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험을 하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가끔 되살아나곤 해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런 존재론적 고민이 제가 창작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보지 못하는 세계, 무한한 세계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상상하며 그려나갈 때 비로소 그런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창작하는 것도 마감에 쫓기고 그러면 힘들 때가 있지만, 창작하지 않는 시간이 더 견디기 힘드니까 밥 먹고 자고 하는 것처럼 작업이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된 것 같아요. 또, 창작하기 위해서도 제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도 하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 구체적인 결과물을 떠나서 뭔가를 창작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려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대학에 진학해 회화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회화가 창작되고 유통되는 현실에 실망해서 영화나 음악처럼 좀 더 다양한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술을 대중화하고 미술관 밖에서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미술에도 관심을 가져서 탄광촌에서 벽화를 그리기도 했었고, 학교 밖 모임에서 인지 과학이나 뇌과학, 심리학,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영화이론 같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나 감정, 관념 같은 것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 행사나 홍대 주변 카페에서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 같은 걸 보면서 '어릴 때 봤던 애니메이션과는 좀 결이 다른, 내가 하고 싶은 회화적인 표현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낸 애니메이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떻게 제작하는지 막연하니까 그땐 내가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게, 1991년이었나 1992년이었나 정확하진 않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었던 것 같은데 그 행사 때 상영할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선배가 도와달라 해서 잠깐 작업을 도왔던 경험이 있어요. 돌이켜보면 그게 제가 처음 참여한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작품이지만, 필름 셀에 점 하나씩 찍어가며 눈 내리는 장면도 만들고 배경도 그리고 그러면서 '아,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알게 됐고, 그 기억이 나중에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에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동기나 선후배들이 좀 있었어요. 장편애니메이션 만들고 싶어서 서울무비에 들어간 선배도 있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 하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유학 준비를 하는 동기 후배들도 있었고, 외부 모임에서 같이 영화이론 공부하던 친구나 후배가 영상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것도 보고, 알게 모르게 그런 주변 환경이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 뒤로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도 다니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혼자서 정리해 뒀다가 IMF 외환위기 전후 시점쯤에 작업을 시작해 본 거죠. <허기>는 인디포럼에서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품에 공감하는 관람평도 듣고 그랬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해 잘 모를 때 만든 거라서 제대로 움직임을 표현하거나 연출하거나 그러진 못했죠. 그렇게 <잃어버린 우주>까지 만든 이후 좀 더 제대로 배워봐야겠다 해서 <정글> 만드는 시점쯤에 아까 말씀드린 교육 과정에 들어갔었던 거예요.
<정글>은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을 받았고, 시체스, 전주, 부천 같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영도 했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며 만들던 시기라 저한테는 어찌 보면 학생 졸업작품 같은 느낌이 있어요. 본격적으로 주제와 연출에 집중하며 만들기 시작한 작품이 <빛과 동전>이에요. 그전에는 머릿속에는 있는데 내가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까 표현하지 못한 게 많았었는데, <빛과 동전>부터는 그래도 어느 정도 표현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호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그리는 걸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대학교 입학했을 때는 학생운동 끝물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해서 의식 있는 미대생들이 추구했던 그림들이 있었을 거고 졸업할 무렵에는 또 서태지와 함께 새로운 문화 시기였어요.
제가 1990년에 입학해 1994년에 졸업했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시작된 세계화 흐름을 타고 정말 다양한 조류의 이론과 문화 흐름이 봇물처럼 쏟아진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게 시대를 못 쫓아간다는 생각도 했고, 저도 학교 생활보다는 아까 말씀드렸던 다양한 대학에서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이런저런 학교 밖 모임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던 것 같아요.
호원: 1994년 무렵이면 소비문화와 대중 이미지를 미술 쪽에서 새롭게 치고 나가는 격동의 시기였어요.
네, 졸업하고 제가 애니메이션 하기 전부터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이론이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한창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이런 것들이 유행하하던 시점이긴 했어요. 그래서 회화 진영에서도 시간성이나 움직임이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탄광촌에 그림 그리러 갔던 거는 학교 다닐 때 동아리 활동이었나요?
동아리 활동은 아니었고요. 제가 3~4학년 때 벽화 그리는 작업을 했던 건데, 그때가 한참 태백의 탄광이 폐광될 때였어요. 태백 탄광촌에서 '광부화가'로 알려진 황재형 작가님과 함께 성당에서 제공한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어요. 제가 대학에서 학술부를 했었는데, 같이 학술부 하던 언니가 아는 목사님이 신부님, 황재형 작가님과 함께 기획한 벽화였어요.
폐광되는 탄광촌을 문화를 통해 활성화하려는 운동의 일환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첫 해에는 학생 7~ 8명 하고 황재형 작가님이 함께 작업했고, 다음 해에는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여서 신부님이 제공해 준 공간에서 한 달 이상 동안 숙식하면서 한 겨울에 야외에서 불 때 가면서 그린 거죠. 태백의 겨울은 정말 춥거든요. 이걸 3학년 때 하고 나니까 4학년때도 또 하게 되고…
벽화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그림으로 생각돼서 벽화를 좀 더 예술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렸어요.
같은 곳에서요?
태백은 태백인데 하나는 고한읍에 있는 성당 담벼락이었고, 하나는 기차 타고 가면서 보이는 3층 정도 되는 사슴목장 건물이었어요 그때는 공사장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남자 선배들이 있어서 건물에 비계도 설치하고 했는데, 사슴들이 막 뛰쳐나오고 다양한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낮에는 벽화 그리고 저녁에는 황재형 작가님과 함께 다양한 직업과 연령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호원: 학교 다니면서는 이문주 감독님을 만난 적은 없었나요?
이문주 감독님이 회화과 2년 후배예요. 서로 활동하는 범위나 모임은 달랐지만 학교 안에서 뭐 하다 보면 같이 하게도 되고 가깝게 지냈어요. 덕분에 퓨처아트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거죠.
여러 가지 분야의 공부 모임들은 학교 다닐 때 한 건가요.
2학년 때부터 졸업 후 몇 년 뒤까지 계속 이어졌어요. 공부한 내용을 무크지 같은 형태로 독립출판하기도 했고요. 거기서 공학, 의학 사회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전공자들을 만났어요. 각자 자기가 잘 아는 분야를 맡아서 세미나도 진행하고 같이 책 읽고 토론하고 그랬어요. 영화에 대한 공부도 하고 철학, 미학, 인지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어요. 그때의 경험이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분야들을 통합해서 사고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같아요.
그런 모임들은 어떻게 조직이 되는 거예요?
초기에는 뜻 맞는 몇 사람이 만들고 그 사람들이 후배나 친구들을 데려오고 하면서 점점 커져간 거죠. 저도 친구 따라가게 되었고요. 대학 2학년 때 멋모르고 따라가서 첫날 세미나했던 게 헤겔철학이었던 걸로 기억돼요.
당시 다른 학생운동 단체처럼 사회과학만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정치적인 사회운동을 하던 곳은 아니었어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모임이어서 재미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저의 준거집단 비슷한 모임이 되었는데, 거기서 나눈 생각들이 나중에 창작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조리한 상황,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상황을 보면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힘들어했는데, 그때 했던 공부 모임은 그런 문제들의 원인을 찾고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제 나름대로 작은 실천을 해나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던 같아요.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보이는 세계 이면의 보이지 않는 실재, 분명히 존재하지만 편견, 사상, 시각적 한계 등으로 인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저의 관심사였는데, 20대의 다양한 학습을 통해서 그런 관심사를 제 작품의 주요한 테마로 가져갈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확보한 것 같아요.
습작: 허기 , 지금, 이곳 , 잃어버린 우주

지금은 하나 하는데 몇 년, 오히려 잘할수록 더 오래 걸리게 되잖아요.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대학생 습작하듯이 이미지 편집하는 수준에 약간의 움직임을 더해 만들었던 것 같아요.
<허기>는 어떤 내용이었어요?
그 작품을 만들던 시기는 제가 20대 후반, IMF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대였어요. 졸업 후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경제적 압박을 느끼며 지내던 때였죠. 그렇다고 단순히 개인적인 배고픔을 그린 건 아니고요, 젊은 세대가 마주한 현실과 욕망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던 그 시대를 담고 싶었어요. '욕망'과 '허기'라는 대비를 통해, 20대의 보편적인 감정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려 했어요.
호원: 이거를 인디포럼에서 상영했나요?
네 , <허기>랑 <지금, 이곳>도 같이 상영했고, <허기>는 비디오에 수록되기도 했어요. <잃어버린 우주>는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상영했고요.
<잃어버린 우주>는 어떤 내용이에요?
음, 이게 디지털 파일로 없다 보니 저도 본 지가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한 젊은이가 내면의 우주를 점점 잃어가며 괴로워하고 한편으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으려 애쓰는 이야기였어요. 모든 개인은 하나의 우주와도 같다는 위로를 건네기 위해 만들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 작품은 좀 서정적인 작품이었어요. 음악도 그렇고.
호원: SICAF에는 출품하지 않았나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제가 정규과정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만들기 시작한 건 아니라서 <허기>, <지금, 이곳>, <잃어버린 우주>는 학생이 습작하듯 작품 하나하나 발표하며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출품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사실 출품 정보도 잘 모르기도 했고 그 당시엔 배급사도 없었으니 어쩌다 알게 된 것만 출품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음악은 괜찮은 분들이 해주셨어요. 성기완 작가님이 <잃어버린 우주> 때부터 해 주셨거든요. 3호선 버터플라이*에서 음악도 하시고 시집도 내시고 프랑스어 번역도 하시고 다재다능한 분인데, <잃어버린 우주> 해주시고 <정글>까지 해 주셨어요. <정글>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절규하는 거 있잖아요. 그건 그냥 본인이 했다고 하시면서 넣어주셨어요. 그때는 제가 작업비를 충분히 드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음악에다 직접 목소리 녹음까지 해주셨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지요.
*1999년 성기완, 박현준, 김상우, 남상아가 결성한 록밴드
<정글>은 제작 지원을 받으신 건가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사전제작지원받고,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장비지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35mm 필름도 만들었어요. 집에서 비디오로 봤던 유명한 작품들을 극장 가서 봤더니 완전 다른 작품이더라고요.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도 정말 다른 작품을 본 것 같을 수 있구나 그래서 필름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 당시에 영화진흥위원회에 디지털영화를 필름으로 전환하는 걸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나중에 만든 <빛과 동전>도 거기에 선정돼서 35mm 필름으로 만들었어요. 배급사에서 필름은 보관하기 힘드니까 둘 다 영상자료원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호원: 2000년에 영화제 상영을 했는데, 영상 자료 데이터베이스에는 2001년으로 표기가 돼 있어요.
그전에 베타로 상영하다가 35mm 필름으로 만들 때 수정작업을 해서 2001년으로 했던 것 같아요. 한 장 한 장 필름으로 떠야 하니까 사이즈도 그렇고 조금 손을 봤던 걸로 기억해요.
<정글>은 옛날 학생 운동의 트라우마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무지성적인 집단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에요. 학교 다닐 때도 당시 학생운동권의 집단주의를 비판하며 논쟁하곤 했고요. 그런데 그건 <정글>의 주된 테마는 아니었고요. 사회에서도 그런 현상은 비슷하게 벌어지니까 포괄적으로 다루긴 했어요.
<정글> 보면 어딘가 같은 곳을 향해 우르르 정신없이 몰려다니다 사라지는 장면이나, 악몽을 꾸는 장면은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적 이슈, 선동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군중들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의지를 지켜내기 어려운 개인의 심리를 표현한 부분이에요.
<정글>을 만들던 시기가 IMF 금융위기가 터지고 2~3년 지난 시점이었는데, 잘 조직된 문명사회처럼 보였던 곳이 사실은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정글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본적으로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우울과 불안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정글>이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도 받았기 때문에 작화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지금 보니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보이던데, 그래도 완성도 있게 만들려고 움직임에 조금 더 신경을 썼어요.
모래 사진을 찍어서 스캔을 받고 그거를 페인터에서 붓이나 스프레이 패턴을 만들어서 쓰셨다는 거죠?
네.
필모그래피를 보면 과거에는 디지털과 신기술을 활용하다가 점점 수작업으로 회귀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작품이 오묘한 게 보이는 건 모래 애니메이션 같은데 실제로는 컴퓨터로 다 만든 거예요.
제가 형식과 내용이 맞는 걸 생각했기 때문에 모래의 상징성을 적용하고는 싶었거든요. 그런데 샌드애니메이션은 제가 생각한 연출방향과는 맞지 않았고, 디지털로 어떻게 모래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실제 모래를 촬영해서 페인터에서 펜툴에 모래펜을 만들어 패턴 화해서 채색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거예요.
호원: 제가 당시의 관객 입장에서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게, ‘거친 입자를 잘 살렸구나’ 질감이 보였고 불안정한 상태의 사람이 역동적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폭주하는 게 보였고 ‘이걸 통해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는구나’ 그 세 개가 딱 꽂혔는데, 이번에 보니까 동선 뽑는 거랑 카메라 무브먼트도 그렇고 ‘이렇게 애니메이팅을 잘했단 말이야?’
지금 보면 좀 어설퍼 보이긴 하지만, 그전에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연출 장면이 머릿속에 있어도 표현하기가 힘들었는데, 애니메이팅에 좀 자신감이 생기면서 나름대로 동적인 연출을 적용해 본 거예요.
모래 애니메이션을 할 수 없었던 거는 물리적인 문제였어요 아니면 자연적인 느낌과 디지털적인 결 결합하는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건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한테는 모래의 상징성이 중요했어요. 개인과 집단, 현대 사회의 불안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모래 입자 알갱이 하나까지 보이는 걸 원해서 모래 텍스처를 활용했던 거예요.
또, 동화 작화나 화면 전환을 영화적으로 연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래 애니메이션은 캐릭터 움직임이나 카메라 워크가 제가 원했던 방식과 좀 달랐기 때문에 맞지 않았고요.
그러니까 모래를 애니메이션에 사용하는 건 아닌데, 모래가 주는 느낌은 살려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채색하는 방법을 여러가지 시도하다가 페인터에서 브러시를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철물점 가서 모래를 샀고, 그때는 디지털카메라도 없을 때니까 모래를 상자에 담아 동네 촬영 스튜디오에 가서 여러가지로 찍어서 베이스 텍스처로 했어요.
작업 자체는 전부 2D로 하신 거예요?
채색은 컴퓨터에서 하고, 동화 작화는 다 작화지에 그렸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우영 감독님 스튜디오에 가서 라인테스트 하는 걸로 촬영해서 바로 움직임을 확인하며 작업하니까 애니메이팅 수정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단축돼서 좋았어요. 보통은 스캐너에 타프(peg bar) 붙여놓고서는 작화지 끼면서 하잖아요. 스캔을 하나 하나 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라인테스트하기도 힘들었는데, ‘라인테스트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구나’ 하며 놀랐죠.
스캔한 게 아니라 촬영으로 들어온 데이터를 쓰신 거예요?
아뇨, 작화하는 중에만 라인테스트 카메라로 촬영했고요, 최종적으로 채색할 때는 스캔해서 했어요. 컴퓨터의 장점은 키워서 할 수 있는 거니까 작화를 해상도 높게 스캔해서, 레이아웃에 맞게 크기 조절하고 그다음부터는 열심히 채색했죠

중간에 남자가 걸을 때 카메라가 드론처럼 날면서 360도로 돌아요.
호원: 내 기억으로도 그전까지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걷는 것과 카메라가 움직이는 걸 동시에 한 적은 없어요.
제가 회화를 전공해서인지 보는 시각에 민감하고, 시점의 변경을 이용한 영화적 연출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래선지 일러스트 할 때도 레이아웃 잡는 게 영화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요. 그전까지는 제가 시간도 그렇고 애니메이팅 하는 것도 숙련되지 못해서 시도하지 못했었는데, 애니메이팅 배울 때쯤 마침 <정글>을 만들게 됐고 관객이 주인공의 하루를 쫓아가며 캐릭터에 감정 이입할 수 있고, 불안과 긴장감을 연출하기에도 적절해서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면서 캐릭터랑 배경이 동시에 움직이는 연출을 시도해 본 거죠.
호원: 주인공 남자 얼굴이 처음 나올 때도 그렇고 엔딩 때도 일그러지면서 울잖아요. 근데 중간에 살짝 웃는 것처럼 나오는 게 조울증이나 약 때문에 강제로 웃게 되는 거를 넣으신 건가요 아니면 그냥 일그러지다 보니까는 웃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요.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변화하는 감정을 표현하려 한 건 맞아요. 그러니까 단순히 괴로워서 운다기보다 미묘한 어떤 감정, 어떻게 보면 웃픈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표정의 변화를 표현했어요.
약 종이 같은 거를 세 번 정도 꺼내서 먹잖아요. 그거는 신경안정제 같은 건가요?
어떤 약을 처방해 줬는지는 명확히 표현하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내기 힘든 상태라 이곳저곳이 아픈 거죠.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몸이 이유 없이 아파오잖아요?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검사를 하는 장면도 나오고요. 원인을 찾지 못해도 증상 완화를 위해서 뭔가 처방을 해주고, 약은 계속 먹지만 계속 어딘가 아픈 상태인 거죠.
옛날에 정말 종이 펼쳐서 가루약을 먹었는데 요즘에는 찢어서 먹는 걸로 나오죠.
호원: 요즘에는 포켓인데 예전에는 종이에다가 약을 넣어서 세모로 반 접고 고깔처럼 집어넣었죠.
작품 시작한 게 2000년쯤이니까...
호원: 2000년대 초반에 의약 분업 생기면서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와야지 약국에서 조제를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조제약 포장이 바뀐 거예요. 약국에서 자체 조제를 할 때는 이틀 치, 사흘 치 조금만 줘도 되니까 싹싹싹 했는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병원 처방은 일주일 치, 열흘 치, 한 달 치가 되니까는 양이 많아져서 기계 포장으로 바뀌었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말씀하니까 기억나요.
호원: 제작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셨죠?
그때는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로 구인구직난에 올려서 받아서 일할 때니까 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는 있잖아요. 밤에 하고 새벽에 하고 그런 시절 중간중간에 한 거였는데, 영화흥진위원회 제작지원받은 작품이라서 마감이 있으니까 아마 1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기간 안에 끝냈죠. 한 살 한 살 먹는다는 게 지금 한 살 하고 그때 한 살은 느낌이 다르잖아요. 어릴수록 같은 1년이라도 훨씬 길게 느껴지니까요. ‘1년 안에는 끝내고 다음 해에는 새로운 걸 해야겠다.’ 작화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써서 나중에 채색할 때 시간이 촉박해서 제 동기가 중간중간 와서 채색하는 거 도와줘서 기간 안에는 끝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디지털로 하니까 수정이 편해졌는데, 어떻게 보면 끝도 없이 수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오랫동안 붙들고 있게 되기도 해요. 지금은 영상을 한 번 만들었다가 수정해서 내가 다시 렌더링 해서 전달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스튜디오 잡아서 베타로도 만들어야 되고 한 번 필름을 뜨면 수정 못하잖아요. 돈도 엄청 들고. ‘아쉬워도 끝이야’ 그래서 그렇게 늘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정글>과 관련된 공부 모임을 한 친구들이라든지 지인들하고 작품을 같이 보셨나요?
그때는 이미 모임은 끝났을 때였어요. 시대가 변해 공식적인 조직은 해체되었고, 가끔 개인적인 만남이나 연락만 주고받을 때라서 작품을 같이 보진 않았어요.
빛과 동전 (2004)
<빛과 동전>은 제1회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당시에 몸이 안 좋아 수술하고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집에 누워있을 때였어요. 인디애니페스트 폐막식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꼭 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가 얼떨결에 상을 받아서,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너무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작품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빛과 동전>을 기획할 때가 30대 초반이었어요. 제가 하늘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는 원경, 근경이 동시에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는데요, 마침 살던 곳이 호수공원을 끼고 있던 작은 오피스텔이라 매일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었어요. 마감에 쫓겨 밤낮으로 작업하다가 창밖으로 공원 풍경을 바라보곤 했는데, 평일 낮에는 사람들이 없다가 해 질 녘이면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공원의 불이 켜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열심히 뛰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하는 거예요.
그때 해 질 녘 역광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빛과 동전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역광으로 사물을 보면 원본과 그림자가 합쳐져 실루엣만 보이잖아요. 실루엣은 그림자를 닮았는데 그림자는 아니고 실체 또한 아니죠. 거기서 빛을 동력으로 삼는 그림자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어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다 해 질 녘이면 실루엣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을 그렇게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발전시키게 된 것 같아요.

제목이 “빛과 그림자”가 아니고 “빛과 동전”이잖아요.
빛으로 동전을 만드는 데, 그 동전으로 다시 빛을 만들잖아요. 그리고 동전을 만들수록 빛과 그림자가 사라지고요. 동전을 빛과 그림자를 매개하는 시스템적 순환의 고리로 설정한 거죠. 동전을 만들어내는 그림자인간도 빛과 동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원본과 그림자를 넘어선 독자적인 시뮬라크르적인 실루엣 시스템은 그걸 움직이는 사람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했어요.
호원: 이랑족이 밭 가는 전통 사회 다음에 기계가 나오는 산업 사회 다음에 시뮬라크르 정보 사회로 인류 역사의 세 단계가 작품 안에 우화처럼 녹아들어 있어요.
맞아요.
호원: 애니메이션에서 15분은 거의 두 편, 세 편 만드는 분량이에요.
제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연쇄적인 세계관이 있었거든요. 스토리보드를 그리다 보니 15분 정도는 돼야 그런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제작지원이 됐으니 기간 안에 만들어야 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두세 편 분량이라 마감은 다가오는데 감당이 안 돼서 정말 힘이 들었어요.
등장인물도 셋이잖아요.
변화에 비판적인 친구,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친구, 중립적인 친구 이렇게 셋으로 설정했어요. 갈등 구조를 드러내기에 적절하면서도 최소한의 캐릭터를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최소한의 사회 같은 건가요.
그렇죠. 셋에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는 둘이나 넷은 아닌데 그렇다고 다섯. 일곱은 감당할 수 없을 때 대표적인 갈등 구조를 표현할 수 있고 특징들을 하나씩 담을 수 있는 걸 따지다 보니까 만들어진 거예요.
호원: 이 작품은 음악도 쓴 것도 그렇고 인물들의 동선 짠 거 보니까 무용극으로 해도 될 것 같았어요.
<우주보자기>까지는 사운드랑 음악을 분리하지 않고, 음악이 사운드를 포함하는 식으로 했어요. 제가 음악과 움직임과 리듬이 하나가 되는 방식을 선호했거든요. <빛과 동전>은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하려고, 인물의 움직임을 마임이나 무용 동작을 연구해 적용했어요. 애니메이팅도 그런 느낌을 살려 타이밍을 설정했어요. 그래서 무용극 같은 느낌을 받으신 것 같아요. 제가 정박이 아닌 살짝 밀리는 템포의 음악이 취향이라 그 타이밍에 맞춰 움직임을 만들었고, 음악과 사운드도 그에 맞는 리듬을 만들고 싶어서 음악감독님한테도 엇박 리듬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음악 하신 분은 예전에 모임 했을 때 만났던 분인데,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셨어요. 그 분한테 음악과 캐릭터 움직임이 맞아떨어지는 리듬을 만들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호원: 거기 쓰인 악기도 인도네시아 전통 악기 가믈란처럼 뚱뚱뚱뚱하면서 비트가 살아 있어요.
정확히 어떤 악기 음원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작품 속 세계가 현실의 농촌 같아 보이진 않고, 우리가 모르는 가상의 느낌이길 바라서 음악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씀은 드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기에 지리산에 귀농해 살던 친구가 있었는데, 배경 찍으러 지리산에 놀러 갔다 그 지역에서 유명한 오카리나 연주자의 공연도 보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오카리나 연주를 참고 삼아 뭔가 자연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신비한 관악기 같은 느낌도 주문했던 걸로 기억나요.
움직임과 음악을 맞췄으면 좋겠다고 의뢰했으면 움직임이 완성된 걸 전달한 거예요?
작화나 편집은 다 된 상태였고 채색만 조금 남은 상태에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호원: 이것도 2D로 하신 거죠.
원화 동화는 종이에 했고, 채색은 디지털로 했는데, 자연의 빛과 인공적인 조명이 비추는 세계를 구분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제가 나름대로 붓도 만들었어요. 한 번에 붓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칠해야 해서 그림도 많은데 그걸 다 칠하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주인공이 세 명이니 작화도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움직임에서 욕심을 냈는데, 캐릭터가 많잖아요. 원화에 작화하고 배경도 제가 다 그려야 되고 채색도 해야 되고 학교 나가서 강의도 하고 다른 일도 하다 보니까 저도 거의 <빛과 동전> 캐릭터들처럼 산 거죠. 하루 종일 앉아서 창가 보면서 작업을 했어요.
작업량이 너무 많다 보니 마감 기한까지 혼자 다 감당하기 힘들어서 나중에는 구인구직란에 올려서 스탭을 구했어요. 공고를 내면 참여해 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이 오시긴 했어요. 자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 저보다 경험 많은 동화 작감하시는 분부터 학생들까지 여러분이 지원하셨는데,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경험 삼아 알바비 정도 번다는 느낌으로 할 수 있는 분만 같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대부분 단기간 몇 컷만 작업이 가능해서 계속 새로 스탭을 구하다 보니 지금까지 작품 중 스탭이 제일 많은 작품이 됐어요. 강의 나갈 때 가끔 들러서 인사드렸던 이용배 교수님도 제가 마감에 쫓기는 거 아시고 한 두 컷 해주셨고요. 동화랑 채색을 그런 식으로 몇 컷씩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했어요.
나우누리나 하이텔 같은 컴퓨터 통신 구인구직이었나요.
제가 회사 홈페이지 만드는 알바 할 때도 그랬고 분야별로 구인구직란이 있는 데가 있었어요. 90년대에는 하이텔 같은 피씨통신망에서 구인구직을 했던 것 같고, 2000년대에는 프리챌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했던 걸로 기억해요.
호원: 2004년이면 그래도 모뎀은 아니었을 거예요.
2000년대라서 모뎀은 아니고 인터넷전용망이었을 것 같아요. 모뎀 시절에는 통신하면 전화도 못 받고 그랬는데 그때는 메신저로 데이터도 주고받으며 작업했으니까요.
그 당시만 해도 편집할때 용량이 큰 작업들은 버퍼링이 심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래서 혼자 다 하기가 힘드니까 구인 구직에서 만난 스태프랑 인터넷으로 데이터 주고받으면서 몇 컷은 같이 작업하고 그랬어요.
호원: 웹하드에다 올리고 다운로드 하고
그때 카톡은 아니지만 메신저로 대화를 할 수가 있었어요.
MSN 메신저도 있고 네이트온도 있고
어떤 프로그램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메신저를 띄워서 대화창에서 설명하면서 작업했던 것 같아요.
마감은 점점 다가오고 15분이나 되니까 강의하면서 동시에 작업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방학을 이용해서 집중적으로 몰아서 했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저도 미친 듯이 그리고 칠하면서 작업했던 것 같아요.
호원: 움직임이 3D 냄새가 나는데 이랑족 움직일 때도 그렇고 코인 기계가 움직일 때도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일일이 그린 게 아니라 애프터 이펙트에서 패스를 건 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의자만 3D로 했고, 나머진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다 그린 거예요. 그때가 작화 제일 열심히 했던 때에요. <정글> 때 한 번 그렇게 했으니까, 욕심이 더 나서 작화 붙여서 길게 늘이는 것도 해보고 별 거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작화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이 이랑족과 기계 움직임이 같이 나오는 장면들이 많은데, 각자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 타이밍이 딱 맞아야 하니까 그렇게 서로 반응하게 타이밍을 조절하면서 작화는 게 젤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작화지는 보관하기 힘들어서 일부만 가지고 있는데, 다시는 그렇게 작화지에 일일이 그리는 건 못할 것 같아서 몇 박스 되는 걸 쌓아 놓고 보관하기도 했어요.

호원: 중간 지나서 그림자 세계에서 많은 사람하고 기계들이 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그것도 일일이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애니메이팅 했나요?
캐릭터들 움직임은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그렸고 그걸 애프터이펙트에 위치 별로 앉혀서 카메라가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한 거예요.
호원: 어차피 신 분량은 똑같은데
그 부분은 연출적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정글> 때와는 달리 애프터이펙트의 힘을 빌려서 작업이 훨씬 수월했어요.
제가 이성강 감독님 <마리이야기>(2002) 때 한 달 정도 에프터이펙트로 합성 작업을 했어요. 따로따로 그려진 걸 애프터이펙트 안에 넣어 합성하면서 캐릭터의 명암이랑 그림자 애니메이팅을 애프터이펙트 안에서 하시더라고요. 그때 '아, 애프터 이펙트를 잘 활용하면 장편도 소수의 인원으로 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그 후에 애프터이펙트에 있는 여러 기법들을 공부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 같아요.
저는 원본과 가상보다는 외세에 의한 자본주의 식민지화 악순환으로 읽었거든요.
빛과 그림자 원본과 가상 이런 설정을 통해 그런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한 거예요. 원본과 그림자 구도에서 시뮬라크르적인 실루엣 인간이 나오고 그들이 다시 새로운 실재가 되는 과정, 그러니까 그림자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끝없이 복제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게 자본주의의 확장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말씀하신 대로 그런 확장과정이 지닌 물질적 사회적 조건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만, 단순히 경제 시스템뿐 아니라 사회와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악순환을 표현하고도 싶었어요.
또 사회적인 함의 외에 빛과 그림자, 실루엣이 가지는 상징성 자체를 표현하는 것도 관심사였고요. 제가 실루엣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 세계 이면의 무언가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든요. 나중에 제가 일러스트 했을 때도 실루엣으로 표현을 많이 했는데요, 그런 논리를 깔아서 아이디어를 확장해 가는 게 제 나름의 방식이에요.
첫 번째에 삼총사가 나왔을 때는 어딘지 잘 모르겠는 판타지 세계 느낌인데 제일 마지막은 한복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체적으로 현실 세계처럼 보여요.
그 장면은 초반에 '자신의 세계를 끝없이 복제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그림자 인간이' 이랑족 앞에 처음 등장할 때랑 비슷한 모습으로 다른 세계에 나타나는 장면이잖아요. "처음 하고 달라진 눈으로 봐. 다시 보니 다르게 보이지 않니?" 이런 의도도 있긴 했어요.
그리고 처음부터 리얼한 사람들과 배경이 나오면 작품이 단순한 현실 비판으로만 읽힐 것 같아서 그러진 않았던 건데, 마지막 한 장면 정도니까 한국인 듯 아닌 듯 현실 세계에 있는 사람 정도의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그리고 사회 시스템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조건을 파괴하면서 생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현실에도 존재하니까요.
호원: 그림자 인간들이 가진 원본을 잃어버린 가상으로서의 그림자라는 영역이 있는 것 같아요. 오프닝에서 세 명의 남자들이 실루엣으로 그려지잖아요. 이거는 원본이 있는 빛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그림자죠. 이 두 차원, 원본이 있는 자연적인 그림자에서 원본이 없는 그림자를 만나는 식으로 보이더라고요.
맞아요. 처음 아이디어를 생각했을 때도 그런 장면에서 출발했어요. 동일한 원본을 가진 그림자와 똑같아 보이지만 원본에서 벗어나 시뮬라크르가 된 그림자가 있는 거죠. 제가 쓴 논문 제목처럼 작품 속에서도 처음에는 까만 나비가 날다가 마지막 크레디트에는 모양은 똑같지만 하얀 나비가 된 게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실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죠.
호원: 디지털 호접몽처럼
장자의 나비 이야기는 그런 맥락에서 자주 등장하니까요.
공백
<빛과 동전>에서 <우주 보자기>까지 10년 동안 공백이 있어요.
<빛과 동전>을 완성한 게 2004년이었죠. 당시에 제가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계속해서 창작하기 위한 안정적인 창작 기반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했던 시기였어요. 그때는 제작지원도 많지 않았고, 지원금도 제작기간 동안 작업에만 몰두하기엔 충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작지원을 받지 못하면 작업이 어려우니 '이게 제작지원에 뽑힐까?' 그런 고민을 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작품 자체가 아닌 제작지원이 목적인 것처럼 주객전도가 되어서 회의가 좀 들었어요.
15분짜리 <빛과 동전>을 한 스타일로 계속하다 보니,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갈증도 있었던 거 같아요. 애니메이션 작업 호흡이 엄청 길잖아요. 뭐 하나 하면 1~2년 투자를 해야 하는데, 저는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때는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어요. 제가 수술을 받다가 마취가 잘못되는 바람에 수술 중 각성을 겪었거든요. 그 트라우마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생겼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피하다 보니 한동안 예전처럼 활발하게 외부활동을 못하게 된 것도 있었고요.
그런 상황일 때 제가 상을 덜컥 받은 거예요. <빛과 동전>이 영화제에서 많이 초청을 받았는데, 건강도 그렇고 마음 상태도 그래서 영화제 참여도 거의 못했어요. 애니메이션을 다시 하든 안 하든 일단 한 단계 마무리는 잘했다 생각하고, 언제가 다시 할 수 있게 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죠. 기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좀 더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고나 할까요.
<빛과 동전> 작업을 마무리한 후에, 다시 애니메이션 작업할 때까지 한동안 제 작업보다는 외주 작업을 주로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동화책이나 그림책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동화, 논픽션, 그림책 등 다양한 작품을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호흡이 짧기도 하고 다양한 주제에 맞게 다양한 표현을 실험해 볼 수 있었어요. 또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전체의 흐름을 보기도 하고 새로운 지식도 얻게 되는 재미도 있었고요.
2025년 10월 스페셜 : 정승희 "보이는 것과 보는 것"(10월 25일 게시 예정)으로 이어집니다.
인터뷰 2025년 8월 28일 @ 평창동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