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 FOCUS_JOUNG Yumi
- seoulanimator
- 7월 24일
- 14분 분량
존재의 집에서 낯선 나를 만나곤 한다
- 정유미의 상자를 들여다 보기

01.
바닥에 선을 긋는다, 네모.
안과 밖이 나뉜다. 공간은 경계를 따라 구획된다. <연애놀이>는 네모 ‘안’으로 들어와서 놀이를 시작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놀이를 마친다. 선을 기준으로 삼아 놀이의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는 범위가 한정된다. 네모 안은 네모 밖과는 구분되는 고유한 세계를 이룬다.
네모를 쌓는다, 육면체.
위, 아래, 앞, 뒤, 좌, 우로 배치하면 상자가 된다. 상자에서도 안과 밖이 나뉜다. 상자 안에 무엇인가를 넣을 수도 있고, 밖으로 꺼낼 수도 있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상자로 인형의 집을 만들었다. 상자 속에 인형을 넣으면 상자는 인형에게 집이 되고 세상이 된다.
우리가 사는 집은 네모난 구획들로 이루어진 상자와 닮았다. 우리는 자신들의 집, 각자의 방에서 저마다의 세상과 우주를 꾸린다. 육면체의 세상, 입방체의 우주에서 누군가는 밖을 지향하고, 누군가는 안에 침잠한다. <먼지 아이>는 집과 아주 작은 상자를 담고 있다.
02.
<나의 작은 인형 상자> (2006), <먼지아이> (2009), <연애놀이> (2013)는 한정된 구역을 명확히 내세운다.
그 공간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우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의 세계이다. 그래서 자칫 착각할 수 있다. 홀로 머무는 외로운 장소, 세상과 단절된 공간 (이를 테면 고립무원, 외딴섬, 유배지, 밀실, 은신처, 갈라파고스, 떠돌이 별, 자기만의 방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는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함께 등장한다. 가족, 숨어있던 작은 먼지 아이, 연인... 물론 이들이 정말 내가 아닌 ‘남/타자’에 그치지 않는다. 인형의 집에서 가족들은 나와 닮아 있다. 먼지 아이도 나와 닮았다. 그러니 이들은 나의 다른 모습들, 분신과 같다. 연애 놀이를 하는 연인은 ‘나’를 닮지 않았지만,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파트너, 동반자이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공간, 나의 세계, 나의 우주에서 또 다른 나 (나의 다면성이거나 나의 결핍)를 마주하게 된다.
03.
나의 공간에서 만나는 다양한 ‘나’는 어떻게 그곳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인형의 집에서 나-가족들은 이미 할당된 자신들의 구역 (화장대 앞, 주방, 거실)에서 나를 만난다. 나는 그들의 존재에 당황하지 않는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선택권 없이 본래 주어진 것.
먼지 아이는 내가 그 존재를 깨닫기 훨씬 이전부터 나와 함께 있었는지 모른다. 발견하지 않았다면 늘 그곳에 있었을 테다. 나의 눈에 띄었을 때, 먼지 아이는 나의 시야에서 숨고자 한다. 어쩌면 먼지 아이에게도 자신만의 공간, 세계, 우주가 있었거나,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침투했을 수도 있다.
연인은 연애 놀이를 함께 하기 위해 그곳에 나와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기꺼이 신발을 벗고 입장하였고, 나갈 때는 신발을 다시 신고 퇴장한다. 네모를 이루는 선 안에는 나름의 절차와 의례, 예의와 규칙이 있고, 나와 연인은 그것을 따른다. 서로가 서로를 초대했을 수도 있다.
04.
자의든 타의든, 원했든 원치 않았든, 나의 공간에서 다양한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떠한 결과를 낳을까?
인형의 집에서 만나는 가족들에게 나는 “함께 집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갈 여유가 없다”, “밖은 위험하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이야기에 익숙하다. 신화와 우화가 반복했고, 내 안의 ‘나’가 종종 들려주는 전형적인 변명들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뻔한 변명의 유혹을 돌파해야 한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반대편의 나’를 극복하는 것이다.
먼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선택지는 둘이다. 없애거나 받아들이거나. 처음엔 없애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작정하고 없애려 들지도 않았지만, 먼지 아이 또한 필사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치열한 대립에서 한참 벗어난, 다소 무기력한 몸짓들. 그를 통해 감춰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결국 자리를 한편 내주고, 밥을 나눈다. 나는 나를 닮은 먼지 아이를 (또는 먼지 아이를 닮은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연애 놀이는 연애를 위한 놀이이다. 승과 패는 중요하지 않다. 놀이를 하면서 알콩달콩 정분을 쌓으면 된다. 어른이기 전, 아이의 순수함으로 함께 즐기면 된다. 추억과 회상의 시기로 돌아가서 상상 속에 꿈꾸던 낭만을 키우면 된다. 그런데 웬걸! 상대방은 승부에 집착한다. 지기 싫어한다. 봐주는 건 없다. 맘대로 되지 않자 삐치고 토라지고 등 돌리고 죽은 채 한다. 동심은 파괴되고, 그냥 어린애처럼 군다. 이런 인간을 연인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한다면 성숙한 반려자로 삼기 어렵다. 하지만 연애의 감정이라는 건 예상과 통제의 영역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왠지 저 인간에게 측은지심이 든다. 내팽개쳐야 할 텐데 되려 보살펴 줘야만 할 것 같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진다. 누구로 인한 눈물인지 분명치 않다. 상대가 야속해서, 아니면 내가 답답해서? 그제야 사내가 반응을 한다. 놀이는 예상을 따라 흘러가지 않았지만, 결국 둘의 관계는 이전보다 가까워진 듯하다. 연애란 참 어렵다.
05.
나를 위한 공간에 나 이외의 다른 이가 들어왔다.
질문과 권유와 설득과 투정과 포용과 놀이와 경쟁을 거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환대’일까? 누군가를 특정하여 초대하고, 설렘 속에 기다리고, 반갑게 두 팔 벌려 맞이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환대는 아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환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환대의 대상이 타자, 나와는 다른 정체성과 경험과 배경을 지닌 자이며, 통상적인 초대에서 벗어나 불쑥 또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며, 거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공동체의 다양성을 키우고, 연대와 관용과 포용과 공존의 가치를 확인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대는 기대와 설렘, 반가움 이외에도, 당혹스러움, 불편함, 경계심, 의심, 양보 등을 거쳐야 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차별과 혐오, 편견과 모욕, 비난과 멸시, 거부와 추방의 말들을 거침없이 외쳐대기도 한다.
정유미의 <나의 작은 인형 상자>, <먼지아이>, <연애놀이>는 ‘환대’라는 단어가 널리 소개되기 이전에 세상에 나왔다. 대신, 작품들은 여성의 ‘성장’ 서사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릇된 평가는 아니다. 기실, 나의 공간에 들어온 이들은 엄밀히 타자라기보다는 나의 분신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애써 부정하려 했던 나의 여러 모습들과 이야기하고, 실랑이하고, 경쟁하는 와중에 마침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결말은 나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치유이자 성장의 모습임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세 작품을 통한 성장 서사는 이로써 완성된 것일까? 세 번의 자기 인정을 거치면서 정유미는 스스로 자신과 화해한 것일까?
06.
<연애놀이> 이후로 정유미는 애니메이션 신에서 홀연 사라졌다. 자신이 천착하였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두 찾았기 때문일까?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화해와 성장의 이야기를 모두 풀어냈기 때문일까?
정유미의 활동 소식은 애니메이션이 아닌 그림책을 통해서 들려왔다. 애니메이션만큼이나, 그림책 작업에서의 성과 또한 눈부시다. 그녀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로부터 그림책의 세계로 이주한 것일까? 그림책 작업이 이전 애니메이션 작업들을 출판하는 것이었던 만큼, 그림책은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난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가능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세계가 되었을 수 있고, 그리하여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애니메이션은 그녀가 떠나버린 집이 되고 만 것인가?
07.
예나 지금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훌륭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돌연 애니메이션 신을 떠난 창작자를 종종 접하게 된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집’이 더 이상 편치 않을 때 떠나기 마련이다.
한때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자신만을 허락하는 작업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 집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곳에서 가장 깊은 내면 속 우주를 거닐기도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관장하는 조물주로 살기도 했을 터. 그러다 별안간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덮치게 된다. 계속 머물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자신의 공간, 작업실을 폐쇄하고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는 창작자들도 있다. 떠나 있는 동안, 더 큰 모험을 했거나, 더 강한 외로움을 경험했거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면서 기분 전환을 하고 한가득 생기를 품고 오는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고립되지 않을 대안, 창작이 구속이 되지 않을 해결책을 찾아서 귀환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캐롤라인 리프를 꼽을 수 있다. 샌드 애니메이션 (<거위와 결혼한 올빼미The Owl Who Married a Goose>, 1974)과 페인트 온 글라스 기법 (<거리The Street>, 1976)을 통해 애니메이션만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미학을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한동안 애니메이션을 떠났다. 유려한 메타모포시스 전개를 가능케 했던 두 기법들은 모두 카메라 아래에서 한 번의 호흡으로 움직임을 구현하도록 애니메이터를 강제했다. 그러니까 빛이 들어오지 않는 촬영실 안에 감금된 상황에서, 애니메이터는 카메라와 아트웍 사이의 작업대에 포박당한 채, 한 프레임씩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했다.* 더욱이 아트웍 작업과 촬영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시퀀스 작업을 도중에 중단할 수도 없었다. 애니메이션을 떠난 그녀는 그간의 고립과 단절, 구속에 대한 반대급부로 야외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10년 남짓 지나서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을 때, 캐롤라인 리프는 더 이상 어두운 촬영실-작업실에 고립되지 않고도 작업을 할 수 있는 대안으로 스크래치 온 필름 기법을 선택하였다. <두 자매Two Sisters> (1991)라는 작품은 그렇게 가능했다.
*샌드 애니메이션 기법과 페인트 온 글래스 기법은 움직임을 순차적으로 한 프레임씩 만들어내는 Straight Ahead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한 호흡의 움직임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장점은 있으나, 분업화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움직임을 키 프레임으로 분할하고 그 사이에 인비트윈을 채워 넣는 Pose-to-Pose 방식은 셀 애니메이션과 같은 기법에서나 가능하다.
08.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들려온 정유미의 복귀 소식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동시에 떠오른 궁금증들. 첫째 그녀에게 새롭게 할 얘기가 있을까? 그러니까 ‘성장’ 이후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둘째, 애니메이션이라는 집은 그녀에게 안온한 장소가 되었을까?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 작업에 무언가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을까?
2022년, 즉 <연애놀이>로부터 대략 10년 후에 선보인 <존재의 집>은 위의 궁금증들을 관통하는 듯하다. 제목부터 ‘존재’와 ‘집’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14년에 출판된 『하우스 오브 픽션』에 수록된 「이사」라는 그래픽 중심의 스토리텔링 작업에 기반한다 (‘이사’라는 단어 자체에 ‘집’과 ‘옮기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애니메이션으로부터 그림책으로 나아갔던 시도와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그러면서도 흥미롭게도 「이사」는 애니메이션적인 형식을 차용한다. 시간의 순차적인 진행에 따른 변화를 담아냈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원리를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할 때, 이전의 작업 방식과 ‘어떻게 달라졌는가’하는 점이다.
정유미가 찾아낸 답은 간결하다. 바로 ‘레이어’이다.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레이어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거나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정유미의 작업에서는 마치 ‘차원의 도약’과도 같다. 이전까지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인 드로잉 관습을 따랐다. 드로잉은 표면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드로잉 작업은 종종 스트로크와 터치를 통해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는 시도를 중시한다. 반면 레이어는 표면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만나면서는 투명도 (실제 촬영에서는 빛의 투과율)에 제약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레이어의 물리적 두께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이론적으로는 무한대에 가까운 (하지만 결국 하드웨어의 용량에 제약을 받고 말지만) 설정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정유미의 세계, 우주는 레이어를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두둥!
**일례로 1930년대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도입한 멀티플레인 카메라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셀 애니메이션에 쓰이는 셀룰로이드의 투명도를 활용하여 여러 장의 레이어를 배경부터 전경까지 분할하여 깊이감의 환영을 살리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이때 각각의 2차원 레이어 사이에 실제 3차원의 간격을 두어 배치한 구조는 19세기의 디오라마 세팅과 유사하다.
09.
그렇다면 집 (공간, 세계, 우주)과 존재에 대한 사유는 어떻게 변화, 혹은 발전하였을까?
<존재의 집>은 밖에서 안으로 향한다. 어떻게?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나의 작은 인형 상자>의 경우를 따르자면 문을 열면 된다. 그렇다, 문은 그런 용도이다. 열어서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통과하거나, 닫아서 들고 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문의 쓰임새이다. 당연히 <존재의 집>에도 문이 달려 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정석 플레이는 거절한다.
그 대신 취한 방식은 말 그대로 ‘파괴’적이다. 집이라는 건축물을 이루는 요소와 부분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허물어 나간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의 집>은 집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 집이라는 구조물을 무너뜨리면서 집 안을 드러낸다. 즉 외부의 누군가가 내부로 침입(좀 더 진중하게 표현하자면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향해 내부를 (거의 강제로) 개방한다.
파괴에도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한 방에 날려 버리는’ 폭파이다. 목적이 집이라는 건축물의 제거에 있다면 가장 단순 명료한 선택지이다. 여차하면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의 집>은 파괴의 결과만큼이나 파괴의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집이 부서지는 과정이 작품 전체의 분량을 차지한다. 이때 과정으로서의 파괴는 마치 스스로 붕괴되는 것처럼 다뤄진다. 집은 파괴의 대상, 즉 “파괴하다”의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이자 목적어인 ‘재귀대명사’처럼 굴면서 “파괴하다”를 마치 재귀동사처럼 활용한다. 왜, 어째서?
<존재의 집>에서 (수백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집은 한 꺼풀씩 자신의 겉을 걷어내면서 자신의 내부를 조금씩 드러낸다. 부분들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는 일종의 리듬감이 살아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리듬은 수동적인 파괴나 무기력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내딛는, 잘 짜인 보법과도 같다. 예정된 파괴, 계획된 붕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걸까? 파괴와 붕괴가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면, 무엇보다 그 행위의 주어가 ‘집’이라면, 가능할 수 있다. 집이 건축물로서의 객체/대상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존재의 집”이라면, 집은 존재를 위한 집이고, 존재에 의한 집이며, 존재 자체가 집과 등치, 동격을 이룬다.
스스로 붕괴되는 과정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존재이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또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그녀’를 드러내는 허물어짐의 과정은 그 안에 남아 있던 (혹은 숨어 있던)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폭로일까, 고백일까, 아니면 구조일까? 이에 덧붙여, 마지막에 남은 것 (아마도 마지막 레이어에 그려진 것), 집 안 가장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것은 세계의 중심일까? 아니면 세계의 끝일까?
10.
<존재의 집>에 이어 연달아 발표된 <파도> (2023) 또한 제작 기법과 형식, 발표 매체 등의 면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우선 이 작품은 상영에 한정되기보다는 전시 공간에서의 관람을 염두에 두었다. 관람객이 원한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볼 수 있으며, 작품 속 상황의 전개 또한 반복을 기본 구조로 삼고 있다. 반복의 구조는 등장하는 인물들을 각자 하나 씩의 레이어에 할당, 배치하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다룰 수 있다.
한정된 공간에 다수의 인물이 저마다의 동선을 따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는 설정은 즈비크 립친스키Zbig Rybczinski의 <탱고Tango>(1981)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탱고>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 ‘고립’과 ‘익명’에 머무는 것에 비해, <파도>는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제한적이나마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집’도, 특정할 ‘나’도 없다. 집에서 벗어난 바깥세상의 바닷가에 다수의 사람들이 홀로, 그리고 짝지어 등장한다. ‘집 안의 나’는 의외의 곳에 있다. 정유미는 이 작품의 출발점을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해운대 풍경, 그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라고 밝힌다. 즉 실제 자신의 작업실 창밖을 통해 본 모습이다. 이러한 위상을 뒤집어 보자면, 우리는 작품 속 사람들이 저 멀리에서 ‘작업실 안의 정유미’를 건너다볼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저쪽’에서 바라보는 ‘이쪽’의 모습은 마치 <존재의 집>과도 같은 상황일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집 안은 세계의 중심인가, 아니면 세계의 끝인가”라는 질문이 유지된다.
11.
10년의 공백은 그만큼의 갈망으로 채워져 있던 걸까?
정유미는 멈추지 않는다. <파도>에 이어 <서클> (2024)을 선보인다. 이 둘은 반복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나아가 <존재의 집>, <파도>, <서클>은 하나의 무대에서 하나의 시퀀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지만 ‘레이어’ 덕분이다. 이 세 작품은 마치 앞선 세 편의 성장 서사와 무게 균형을 맞추는 것 같다. 서사 드라마가 전형적인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의 영화 문법을 따랐던 반면, 하나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미니멀한 모더니즘 연극 무대를 연상시킨다.
이야기 전개의 극적 고조, 인물 간의 갈등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저마다의 레이어 위에서 고유의 리듬을 따르는 반복적인 패턴이 놓인다. 템포와 타이밍, 동선만 잘 계산하여 유지한다면 애니메이션 제작은 혼자만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멀티플 레이어’를 활용하는 정유미의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은 필요에 따라 혼자서도, 그리고 여럿이서도 연주할 수 있는 탱고일까? (물론 혼자 추는 탱고는 없지만...) 상호작용하는 레이어 (층위)라는 점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노먼 맥클라렌의 <캐넌/카논Canon> (1964)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는 공통적으로 ‘돌림노래’의 형식을 따르면서 각각의 층위에 할당되어 교차한다. 그런 점에서 ‘레이어’라는 층위로 쌓인 이 작품은 대위법 구조와 닮아 있다.
다시 말해 정유미의 <파도>와 <서클>에서 각자의 레이어 위에서 움직이는 개별 인물들의 반복적인 동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전체의 얼개와 얽힘 속에서 제대로 진가를 발휘한다. 이는 <존재의 집>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각 부분이 결국 전체의 붕괴로 누적되는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레이어는 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건축적이며,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집이 된다.
12.
바닥에 나뭇가지로 선을 그린다, 이번에는 동그라미.
한편으로 <서클>은 <연애놀이>와 닮아 있다. 선이라는 경계를 두고 나뉘는 안과 밖, 공간 안에서만 허용되는 규칙과 질서.
이번에는 참가자가 늘었다. 들여다보면 제법 눈에 익은 이들도 있다. 연애 놀이를 하던 바로 그 커플도, <파도>의 해변가에 나왔던 이들도 보인다. 정유미의 유니버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것일까?
작품은 단순하다. 아이가 그려 놓은 동그라미 안으로 사람들이 한 명씩 차례로 들어선다. 여유 있던 공간이 채워질수록 사람들은 조금씩 자리와 자세를 바꾸면서 새로운 사람을 동그라미 안에 들인다. 동그라미를 그린 아이가 제 발로 쓱쓱 선을 지우자, 사람들은 다시 하나씩 떠난다.
단순하기에 질문이 쏟아진다. 동그라미는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왜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동그라미 안의 사람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가? 아이는 왜 동그라미를 그렸고, 왜 동그라미를 지우는 걸까? 사람들은 어째서 다시 제 갈 길로 가는가?...
동그라미는 영어로 서클이고, 서클에는 동아리, 모임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동그라미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랬을 때, 동그라미를 이루는 선은 제도에 대한 은유일까? 그렇다면 선-제도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무리에 불과한가? 사회라고 부르려면 지속-유지의 시간, 공통된 목표와 합의된 가치 규범, 소속감, 상호 작용 등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들이 하나의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일종의 공동체적 지향점일까? 선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것은 규범을 준수한다는 것일까? 새로운 진입자를 위해 조금씩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공동체로의 받아들임, 즉 환대일까? 그럼에도 어째서 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거나 말을 건네지 않을까?
아이가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지우는 설정은 ‘제도’라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관념의 영역에 놓인 명목론적 존재라는 뜻일까? 동그라미가 지워지면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놀이에 일시적으로 참여했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무리라는 얘기일까? 동그라미가 지워지자마자 당장 떠나지 않고, 잠시 주저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머물렀던 것은 사회적 소속감의 여운 때문일까?
13.
나는 <서클>을 개인의 집, 내면세계에서 벗어난, 사회와 세상에 대한 은유로 보았다. 정유미가 집에서 나와서 세상 밖으로 나갔다고 여겼다. (내 학부 전공이 사회학이었기 때문일까?)
인터뷰 중에 정유미는 내가 <서클>을 바깥의 시선으로 접근한 것을 흥미로워했다. 자신은 <서클>을 자기 내면의 모습으로 다뤘다고 답했다. 창작자와 비평가가 상반된 접근을 할 때, 이야기는 옮고 그름의 판결을 뛰어넘어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확장된다.
<서클>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나’가 다양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작은 인형 상자>의 연장선에 있다. 또한 <서클>은 내 안의 다양한 ‘나’만큼이나, 내 밖의 다양한 ‘타인’을 하나의 영역 안에 묶는다. 그래서 <연애 놀이>에서 확장한 ‘사회 놀이’로 전환할 수도 있다.
비평가는 창작자와의 대화를 통해 본래의 의도를 듣고, 창작자는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가능성을 관객 (중의 하나인 비평가)를 통해 새삼 확인한다. 작품은 종종 이런 식으로 의미의 놀이터가 되곤 한다.
14.
10년의 휴지기 이전의 작품 세편과 이후의 작품 세편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문득 그다음 작품이 어떠한 모습을 할지 궁금해졌다. 정유미는 즉각 새 작품을 공개했다.
<파라노이드 키드> (2024).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2005년, 그녀는 그동안 그림일기 형식으로 온라인상에 선보였던 (그렇다, 바로 “싸이월드” 감성이다!) 일러스트들을 모아서 동일한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대학 졸업 직후이자, 이제 막 애니메이션을 익히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은 이렇듯 언제나 교차한다.
『파라노이드 키드』에 실린 그림들은 20대 초중반이었던 정유미의 내적 심상을 꽤나 과감하게 표현한 것들이다.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자기애와 자기부정, 자기 보호와 자기 파괴, 자아도취와 자기 비하... 이처럼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진자 운동 속에서 과대한 자의식과 억눌린 무의식이 서로 뒤엉킨다.
나는 또 다른 나와 마주하기도 하고, 서로 등을 돌려 외면하기도 하며, 잘라내고자 하는가 하면, 비워진 구멍을 채워 넣으려 하기도 한다. 나의 육신이 반으로 쪼개지기도 하고, 날카로운 가시에 마구 찔려 피를 흘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 덩어리의 자신을 안과 밖이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로 규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내면을 이미지로 풀어내려 한 이 작업들은 당시에 유행한 어휘로 풀자면 ‘엽기적’이고, 지금의 어휘로는 ‘괴랄하다’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를 그저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시도로 돌릴 수만은 없다. 정유미는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인체에서 더럽고 나쁜 액체 (Ill Liquid)를 배출해 내는 작업”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달리 말하면 그녀의 강렬한 이미지는 일종의 정화 의식인 셈이다. 무의식의 폭주처럼 보이지만, 기저에는 지나치리만큼 혹독한 자기 성찰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15.
20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의 일러스트를 현재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작업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우선 정지된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해야 한다. 움직여야 하는 그림은 그저 하나의 행동, 사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서와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외적 운동이 아니라 내적 운동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일러스트-장면을 어떤 식으로 배열을 해야 하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각각의 그림들은 서로 연결되어 이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파편적으로 배치되어야 하는가. 인과 관계나 선후 관계가 개입하는가, 정서적 온도나 분위기로 일정한 묶음을 꾸릴 수 있는가. 각각은 일정한 운율을 만들어내는가, 처음과 끝을 명확하게 보여줄 것인가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고민의 지점은 20년 사이에 ‘나’의 무엇이 바뀌었고, 바뀌지 않았는지, 그래서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야 할지, 현재에 적합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숙고의 결실을 기대한다면 (혹여 이전의 『파라노이드 키드』를 구하여 한 장면씩 대응시켜 나가는 열정이 함께 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애니메이션 <파라노이드 키드>의 특정 장면과 거기에 함께 하는 내레이션에서 전율 (또는 울컥함)을 느낄 수 있다. 스포 방지를 위해, 그리고 관객의 관람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놓고 구체적인 포인트를 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정유미는 스스로와 화해하는 법을, 스스로를 환대하는 법을 담아낸다. 수줍게 고백컨데, 이 장면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안도하였다. 정유미가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더는 멀리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말이다.
16.
‘성장/성숙’이라는 주제는 초기 3부작에서 서사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작품 속 인물의 성장/성숙과 창작자의 성장/성숙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성숙은 그렇게 단숨에, 그리고 한방에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다. 더욱이 초기의 세 작품을 통해 이미 창작자가 자신의 삶에서 성장/성숙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더 이상 할 얘기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20년이 지난 후의 정유미가 20년 전의 정유미를 안아줄 때, 우리는 어째서 정유미가 자신의 출발점으로 “기어이”, 그리고 “이제야”, 돌아오게 되었는지 할 수 있다. 20대에는 그릴 수 없던 이미지, 쓸 수 없던 문장이 지금 비로소 가능한 까닭은 그간의 긴 여정 속에서 건져 올린 수확물이기 때문일 테다.
17.
과거의 나, 자기 안의 또 다른 나를 보듬고 안아주어서 한 차례 더 내적 성장을 이룬 이가 그다음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선택 중에 하나는 자신이 다루었던 이야기들, 거쳐갔던 지점들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주와 발전, 심화와 도약을 통해 이전과는 달라진, 한층 깊어진 사유와 안목을 드러내어 성장과 성숙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안경>은 그간 익숙했던 정유미의 세계를 불러내면서, 그 세계를 이루던 요소들을 한껏 명확하게 배치하고, 그럼으로써 그동안의 작업을 종합적으로 드러내고, 그 속에 놓인 문제들을 검토하고,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는 시도이다.
<안경>이 포커스를 맞추는 지점은 명확하다. 정유미가 이제껏 천착해온 두 가지 핵심, 바로 집,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하는 낯선 나.
18.
<안경>에는 두 개의 건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안경점, 또 다른 하나는 시력검사대 너머로 보이는 집. 전자를 외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후자를 내면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검사대를 통해 드러나는 집은 <존재의 집>에서 무너지던 바로 그 집과 닮아 있다. 그 집에 배치된 거실, 서재, 침실은 <나의 작은 인형 상자>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예전에 경험한 곳을 ‘재방문’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내면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집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안경점을 거쳐야 하고, 시력 검사대를 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입장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집 밖으로 나오는 것과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미 말한 바 있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시도를 보여줬다. <존재의 집>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집을 허무는 과정을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들어가고 나가는 절차를 정성껏 담은 작품은 <연애놀이>였다. 신발을 벗고 입장하고, 퇴장할 때 신발을 다시 신는 모습은 마치 엄숙한 의식(儀式)을 치르는 것처럼 다뤄졌다.
내키는 대로 벌컥 문을 열고 드나드는 게 아니라, 통과 의식을 따른다는 얘기는 하나의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집 안이든 집 밖이든, 나의 내면이든 나의 외부이든, 선 안이든 선 밖이든, 모든 구분된 영역에는 그곳을 지배하는 고유한 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영역이 요구하는 질서와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질서에 순응하여 영역에 머물거나, 질서를 거부하며 영역에서 벗어나거나, 불편하게 견뎌내는 것이다.
19.
<안경>을 통해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 바로 공간이 품고 있는 불편함이다.
불편함은 불분명함이기도 하고, 불안함이기도 하다. 안경점도, 시력 검사대 너머의 집도 불분명하고, 불안하고, 불편하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 <먼지아이>, <연애놀이>, <존재의 집>, <서클> 등등, 그간의 작품들에서 공간들은 불편했다. 다만 이들 공간은 전면에 부각되기보다는 배경으로, 무대로, 세트로 한두 발짝 물러나 있었을 뿐이다.
<안경>은 두 개의 건물을 통해 공간을 우리 앞에 들이민다. 그제야 우리는 실내를 관심 있게,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레트로 스타일을 추구하는 오브제들. 정작 한 곳에 모아 두면 저마다 이질적인 시공간적 기원으로 말미암아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 그리고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려진 것들 (때론 천 아래에, 때론 커튼 뒤에, 어쩌면 가구 속에 감춰져 있을 것들).
독일어 단어 unheimlich. “집과 같은heimlich”, “고향 같은heimisch”, “친밀한vertraut” 같은 단어들의 반대말인 unheimlich를 영어로 옮긴 것이 바로 언캐니uncanny이다.*** 언캐니에 관한 해석과 적용, 사례 연구와 비평은 다양하고 점점 더 넘쳐나지만, <안경>은 (그리고 정유미의 애니메이션들은) 단어의 출발점을 정확히 가리킨다. 집은 말 그대로 ‘집과 같이 편안해야’ 하는데, 실상은 불편하고, 불안정하고, 불명확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두려운 낯섦」, 『예술, 문학, 정식분석』, 열린책들, 2020년, 419-470쪽. 인용은 419-422쪽에서 가져왔으며, 프로이트의 원문은 1919년에 발표되었다.
20.
집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이질적인 오브제들 때문일까? 아니다. 사물들은 장식물로써, 소품으로써 언캐니 한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언캐니 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집이 불편한 이유는 그곳에 ‘낯선 나’, ‘나와 다른 모습의 나’가 있기 때문이다. 반복하자면 <나의 작은 인형 상자>, <먼지아이>, <연애놀이>, <존재의 집>, <파도>, <서클>, <파라노이드 키드>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나’들.
이들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리고 때론 두려워하고 때론 회피하면서, 정유미의 작품들은 꽤 오랜 시간을 반복해서 묻고 답해 왔다. <안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낯선 나’가 나를 기다린다.
21.
<안경>은 불편한 집과 낯선 나를 재방문한다.
이번에는 분명히 예전과 다르다. 쓰고 있던 안경을 밟아 깨뜨렸다. 기존의 편견, 고정관념을 부수는 선언과 같다.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기, 당황하기 않기, 물러서지 않기, 부정하지 않기...
이제 해야 할 일은 “내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나’는 주어이자 목적어, 즉 재귀대명사, 그리고 ‘안아주다’는 재귀동사. <존재의 집>에서 “집이 집을 파괴한다”와 닮은 문장이다. 하지만 주어의 나와 목적어의 나는 다른 모습이다. 분열증, 즉 파라노이드paranoid의 자아가 ‘안아주다’를 재귀동사로 활용함으로써 마침내 나는 나를 품어줄 수 있다. <파라노이드 키드>가 20년을 묵혀둔 과제의 해법이 <안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22.
존재의 집, 존재가 머무는 집, 존재의 내면에 자리하는 집.
그곳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매번 다시 세워지는 곳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는 곳일까? 그 안에 있는 낯선 나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걸까? 그 낯선 나도 나를 낯설어할까?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텅 빈 동그라미 안으로 새 한 마리 날아와 잠시 머물다 떠난다. <서클>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고요한 여백 속에서 다시 찾아올 누군가의 자리를 마련한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