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KIM Changsoo
- seoulanimator
- 5월 24일
- 21분 분량
김창수

병실에서 누나를 간호하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어둠의 저편>(2015)의 주인공은 김창수 감독을 빼쏘았다. 서울로 상경해 만화가 문하생부터 원화맨까지 그림을 업으로 삼은 지 20년 만의 첫 연출작이다. 업계로 돌아갔다가 원하는 건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급히 <보편적인 삶>(2018)을 만들었다. 본래 데뷔작으로 점찍었던 <먹이들>(2020)에서 일부를 가져왔던 건데, 기대치 않은 상을 받았다. 예상 수명을 3년씩 연장하며 <먹이들>을 만들었다. <사라지는 것들>(2022)과 <엄마의 집>(2024)은 감독 본인의 엄마 이야기다. 먼저 간 딸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엄마는 <사라지는 것들>에서 위안을 찾는다. <엄마의 집>은 인간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그린 장편의 밑그림이다. 그 긴 이야기의 일부인 “긴 밤”을 준비하는 김창수 감독을 만났다.
2025년 5월 인터뷰
남김없이 소진한다
만화가 지망생
첫 작품 <어둠의 저편> 앞에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원래는 제가 만화를 그리려고 했었어요. 군대를 제대하고 광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화 공모전을 준비했었어요.
공모에 냈던 건 어떤 거예요?
배구 만화였어요. 제가 스포츠 중에 테니스 하고 배구를 좋아하거든요. 그때 『슬램덩크』 영향을 받아가지고 한 거죠. 단편처럼 원고 한 편이 완결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저는 오프닝처럼 1화 느낌으로 했어요. 막 보여주고 싶은 것만 넣고 “자 이제 시작이야” 그러면서 끝나는 거 있잖아요.
만화는 독학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 제가 아그리파를 그렸었는데, 미술 선생님이 칭찬을 하시는 거예요. 미술을 하라고 했었는데, 저희 집이 형편이 어려웠어요. 부모님이 돈이 없으니 너는 공고에 가서 취직을 해야 된다 해서 기계과로 갔는데, 저하고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실습 시간에 적응을 못하니까 계속 학교 도서관에 있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내내 불행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게 제 자양분이었던 거죠. 크지 않은 학교니까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보고 근처에 만화가게에 있는 만화를 장르 가리지 않고 다 봤던 것 같아요.
만화도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보게 됐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시골에 있었고 고등학교 때 광주로 와서 자취를 했어요. 제가 다닌 공고는 3교대여서 주간이 2시 반 정도에 끝났어요. 시간이 너무 많잖아요. 하루에 300원짜리 만화가게가 있었는데, 10시인가 12시까지 있을 수 있었어요. 학교 끝나면 저녁을 안 먹고 집 근처 만화가게에 계속 있는 거예요. 황제, 황성, 박봉성, 이현세, 고행석 대본소 만화 다 보면, 황미나 순정만화 다 보면, 무협지, 여성 로맨스 소설, 있는 것들은 다 봤어요. 매일 가다시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만화들을 따라 그렸어요.
군대 제대 후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 『소년챔프』와 『아이큐점프』를 비치했었는데 그걸 보고 공모전에 도전을 결심했어요. 근처 만화학원에서 실제 원고에 필요한 것들을 알게 됐고, 처음 응모했는데 7명이 뽑힌 1차에 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제 만화 그린다’ 그랬는데 3명을 뽑는 2차에 안 됐어요. 그때 응모한 원고를 보고 『월간챔프』에 연재하시던 강기연 작가님이 문하생 해보지 않겠냐고 전화하셔서 1995년에 서울에 올라온 거죠.
작가님이 시나리오랑 데생하고 주인공 얼굴 펜터치를 하면 제가 나머지랑 배경 펜터치 작업을 했었죠. 그러다 1년쯤 됐을 때 작가님이 만화는 자기도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예전에 연재를 그만두고 방배동에 있던 삼원동화에 애니메이션 하러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게 선택권을 줬어요. 같이 애니메이션을 하러 가거나 아님 다른 만화가 문화생으로 소개해 준다는. 그때 작가님이 보여준 게 <마녀 배달부 키키>(1989)였어요. 그래서 작가님은 원화를 하고 저는 동화를 시작했는데, 몇 달 있다가 작가님은 그만두고 다시 만화를 하신다고 해서 ‘나는 그냥 이걸 하겠다’ 그때부터 작업자로 동화를 쭉 하다가 원화를 했어요.
신참 애니메이터
삼원동화에서는 어떤 작업을 했나요?
삼원에서는 주로 미국 동화작업을 했어요. <101마리 달마시안>이나 워너 브라더스에서 했던 게 많았어요. 1996에서 1998년도 일 텐데, 국내 일 중에 기획에 들어가는 게 있었어요. 번개맨인지 뭔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미국 쪽 일만 하다가 국내 일을 한다고 이거 잘해야 된다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국내 일은 기획에서 끝난 게 아니라 파일럿이든지 방영이 됐나요?
그 기획이 실현됐는지 안 됐는지를 모르겠어요. 삼원에서 동화를 하고 다른 회사 원화팀으로 가서 미국 만화체 일을 했었거든요. 실베스터와 트위티, 노란 카나리아 머리 큰 새 있잖아요.
루니 툰이요.
그거 하는 팀에서 원화를 시작한 거죠. 그러다가 일본 일도 조금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원화 팀에 가면 일단은 원화 연출 감독이 되는 걸 목표로 하는데, 저한테는 그게 매력적이지 않은 거예요.
제가 만화를 했을 때는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연출 감독이 정점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대신 표현해 주는 사람이었어요. 또 그때 같이 작업했던 친구들은 애니메이팅, 실제로 움직임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들처럼 액팅 자체가 재밌다기보다 제가 만든 이야기를 그림으로 전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미국 일을 시작하면 계속 미국 일만 하고 일본 일로 시작하면 일본 일을 했거든요. 계속 이 일을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일본 일을 하러 가니까 미국 일보다 더 부속품이 되는 느낌이랄까요. 그때의 제 능력으로는 기획 쪽 일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어서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싶네요.
호원: 그 시기 중간에 IMF가 있거든요.
그때 제가 최저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IMF든 아니든 저는 상관이 없었던 거죠.(웃음)
어차피 외국 일 받아서 하면
맞아요. 환율 때문에 돈이 더 올랐다고 했지만 역시 저완 상관없는 일이었어서.(웃음)
우리나라에서는 원동화 하시는 분들이 팀으로 옮겨 다니면서 여러 회사 일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근무형태가 달라졌지만, 그때는 원동화 작업자 대부분이 프리랜서였거든요. 감독님이 팀을 꾸려서 PD제 같은 걸로 할 때도 있고 회사 소속으로 할 때도 있어요. 제가 일했던 때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기도 했고 감독님들의 파워가 되게 셌어요. 감독님들과 관계가 잘 유지되지 않으면 일을 받는 것도 그렇고 정산이 계속 밀리는 거예요.
공과금도 내고 먹고살아야 되는데 돈을 제때에 못 받게 되다 보니 캐릭터 회사에 잠깐 다녔었어요. 그러다 지금 스튜디오 미르의 전신인 JM 애니메이션에도 얼마간 있었어요. 제가 원화에 익숙하지 않은 때였는데 그 원화팀에 친구가 있어서 <아바타: 아앙의 전설>(2005) 원화로 참여한 거예요.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어쩌다 대상 포진이 온 거예요. 한 달 동안 요양을 하면서 곧바로 또 그렇게 할 엄두가 안 나서 인테리어 하는 친구 사무실에서 6개월 정도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또 그런 갈증이 이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을 다시 해야겠다.
2004년도인가 <천년여우 여우비>(2006)를 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 기획부터 같이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창작일은 하청일과는 다르니까 여기서는 감독님이랑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거다 해서 간 거죠. <천년여우 여우비> 끝나고도 원화는 신인 정도였어요. 기획 작품이 이어지질 않으니까 선우에서 하는 일을 하든가 다른 회사에 가야 되는데, 그러기가 싫은 거예요. 장형윤 감독이 그때 중편 <무림일검의 사생활>(2007)을 지원받은 거예요. 또 아는 사람을 통해서 거기 원화 하러 갔었죠.
지금이아니면안돼
그게 장형윤 감독과의 첫 만남인가요?
네, 장형윤 감독이 감독을 하고 박지연 감독이 조감독 하고 할 때 목동 한국콘텐츠진흥원 지하에서 처음 만났어요. 거기서 연상호 감독도 알게 돼서 이후로 <사랑은 단백질>(2008) 작업하고 <돼지의 왕>(2011)까지 하려다가 진행이 잘 안 돼서 저는 <마법 천자문>(2010) 하러 갔다가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4)로 가는 과정에서는 계속 창작 일을 계속했어요.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할 때도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단편이라는 걸 잘 모르니까 막연하게 장편을 생각했어요. 그때 이미 장형윤 감독이랑 박지연 감독은 단편으로 엄청난 성과를 냈을 때거든요. 작품을 만들면 당연히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는구나 했어요.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할 때 <낙타들>(2011)에 제가 작화로 참여를 한 거예요. 그때부터는 장형윤 감독이랑 박지연 감독이랑 핵심 스태프로 일을 하게 되니까 이야기하는 것들이 많아졌죠.
두 분이랑 저랑 책 읽는 것도 영화도 음악도 비슷해서 어느 정도 서로 이야기가 되니까 그분들을 통해서 단편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이겠구나 해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끝나고서 단편을 기획했어요.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저는 두 분이 제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기획하면서 피드백을 받으셨나요?
처음에는 <어둠의 저편>이 아니라 <먹이들>을 기획을 했었어요. 원래 제목은 “벌레”였는데, 2013년도에 기획을 해서 제작지원 냈는데 안 됐어요. 기획서를 준비를 하려면 이미지를 그려야 되잖아요. <먹이들>처럼 터치도 들어가고 어두운 뭔가를 하고 싶은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이 없고 작화를 했으니까 그때의 제 능력으로는 아트웍 이미지를 단색으로 단순하고 밋밋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어요. 이야기는 되게 무거운데 이미지는 너무 가볍고 완성도가 부족했던 거죠.
<먹이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의 원형이니까 첫 작품으로 하고 싶었거든요. 제작지원이 안 되니까 장형윤 감독이 “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거를 꺼내”래요. 그게 아버지의 죽음이었거든요. 이게 나한테 너무 크니 내가 작품을 할 수 있을 때 풀어야겠다는 게 있어서 처음에는 그것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벌레”였는데, 뭐가 돼야지 연결될 거잖아요.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해서 <어둠의 저편>을 기획을 했어요. 고마운 게 장형윤 감독과 박지연 감독이 거기에 대해서 별 이야기를 안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니까 영화제에서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괜찮을 것 같다고 했지. 보셔서 아시겠지만 달리 도움을 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물론 그 두 분이 하는 걸 옆에서 보고 배웠지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어야 된다는 고집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획서의 초반 외에는 따로 보여주지는 않았어요.
“벌레” 기획안을 냈을 때도 안 보여주셨나요?
그때는 보여줬죠. 그때 이야기는 괜찮다고 그랬었는데, 이야기든 이미지든 내가 하지 못하면 어차피 보여줘도 똑같으니까 그 이후로는 제가 혼자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지는 미술을 잘하는 분한테 맡겼으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제 작품이니까 제가 다 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둠의 저편 (2015)

<어둠의 저편>은 거의 선화 이미지로 제작지원이 됐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하고 서울애니메에션센터가 있었잖아요. 그때는 콘진이 조금 빨랐는데, 콘진은 안 됐고 센터에서 됐는데, 심사 2차 발표를 할 때도 이미지가 약하다 다른 이미지로 할 생각이 없냐라고 했어요. 저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미지고 이야기도 여기에 맞다 생각한다”라고 했어요. 제가 다르덴 감독이나 켄 로치 감독을 좋아하는데, 처음부터 이거는 실사 다큐 같은 느낌으로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족들끼리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잘 안 했어요. 해봐야 서로 상처만 되는 일이고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는데, 저는 내 작품을 일단 하고 싶었고 이걸 가족들이랑 보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을 때 가족들이 다 놀란 거죠.
영화제에는 누가 왔나요?
막내 누나는 그전에 돌아가셨고 넷째 누나랑 형은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못 오고 첫째, 둘째, 셋째 누나랑 조카들이 광주, 대전에서 왔어요.
제가 애니메이션 한다고 했을 때 누나들은 TV에 나오는 그런 걸 생각을 하고 영화제에서 뭐 한다니까 장하다 하고 왔는데, 와서 보니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상영이 끝나고 영화제에서는 다들 고생했다 하고 이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날 밤에 누나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 당시에 느꼈던 게 각자 다르잖아요. 그때도 가족이 다 흩어져 살던 때여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게 저 하고 형이랑 엄마였으니까 누나들은 나중에 정리된 상태에서 본 건데, 그걸 통해서 ‘아 이랬겠구나’ 알게 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조영각 PD님(2015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이 작품을 보시고서 이 살풀이를 해야지 다음 게 나온다고 잘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살풀이를 했다는 말이 어쩐지 위로가 됐고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호원: 2015년에는 제가 40대 초반이었는데, 50대가 되니까 이 작품이 확 오는 거예요.
<어둠의 저편> 캐릭터가 딱 제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겠구나 하는 데다가 상황도 진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 같잖아요. 그런데 GV를 할 때 질문이 없었어요.
이런 경험 없이 봤으면 저도 몰랐을 것 같아요.
누나가 광주에 있었는데, 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느라고 저희 집에 오고 그랬었어요. 매형은 광주에서 애들 케어를 해야 되니까 매형이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제가 가서 간병했거든요. 누나랑 있으면서 죽음이라는 게 실제적으로 오잖아요. 거기 중환자분도 계시고 옆에서 죽어 나가고 그랬어요. 아버지의 죽음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누나의 일이 없었으면 이런 작품도 못하지 않았을까.
호원: 이 작품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다 보니까 전에는 안 보였던 게 보였어요. 표정을 멀리서 잡는데, 눈이 살짝 떨리고 입이 살짝 떨리면서 겉으로는 내뱉지 못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의 흔들림을 애니메이션으로 잡아내는 게 이제 보이는 거예요.
첫 작품을 이걸로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작품을 몇 편 만들어 보고 세 번째 정도에서 하고 싶었어요. 두 가지가 큰 게 있었는데, 하나는 가족한테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야겠다였고, 다른 하나는 이미 제가 작업자로서 오래 일을 했으니까 작화나 그런 게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였어요. 작화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어요. 정말 고심을 해서 했거든요.
영화 쪽에서는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작화에 대한 부분을 알아봐 주겠지 생각했었어요. 근데 이런 디테일한 표정이랄지 어떤 식으로 작화를 구성을 했는지에 대해서 질문 자체가 없는 거예요. 저는 오랫동안 작업자로서 일을 하다가 작품을 한 거니까 작업자로서의 제가 쌓아왔던 능력을 보여주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호원: 관객들은 충격적인 죽음에 제압을 당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는 식이었을 텐데
그래서 색을 빼고 선으로 떨림을 주는 게 감정을 전달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피드백이 없는 거예요.
비율도 그렇고 스타일이 사실적이니까 로토스코핑이지 않을까 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질문했으면 아니라고 이거 진짜 다 작화를 한 거라고 했을 텐데.(웃음)

호원: 그때는 죽음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는데, 10년 후 보니까 죽음이 안 보이고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은 그래서 무슨 마음이었을까. 이 사람의 시선으로 누님을 보니까 화면을 뒤집는 게 보여요. 그다음에 누님을 주물러 주는 장면이 저한테 킬링 포인트인데, 정말 감독이 이거를 안 그리면 <사라지는 것들>에서 할머니가 고양이 염 해주는 것도 못 그리고
맞아요. 그게 연결되는 거예요.
호원: 남겨진 사람이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마지막 신체 접촉을 하는 게 되게 중요했구나. 아버지는 방치됐기 때문에 내가 그거를 못한 거야.
이게 진짜 핵심적인 거예요. 어떤 분은 제가 죽음에 대해서 너무 천착한다고 하는데, 그게 너무 강렬한 기억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제가 무서워서 아버지 염하는 걸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의 임종도, 염하고 입관하는 과정도 지키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 거에 대해서 집착적으로 구는 것도 제가 마지막에 어머니를 간병을 한 이유도 아버지처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것보다 이후에 정말로 마지막이 됐을 때 누나도 임종을 제가 지켰거든요. 그때는 수분이 거의 없어지고 뼈밖에 안 남는 상태였어요. 이 변형된 신체를 만진다는 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아버지는 부풀었는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된 거잖아요. 이 장면이 필요했던 게 그때는 몰랐지만 저한테는 그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던 거죠.
막내 누나 보낼 때 저희 어머니가 자식 죽은 데는 가면 안 된다고 그래서 장례식을 안 가시더라고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 누나의 마지막을 왜 안 보고 싶었겠어요? 그게 <사라지는 것들>에서 염하는 것으로 표현됐던 거예요.
사라지는 것들 (2022)

<사라지는 것들>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어둠의 저편>하고 나서 장형윤 감독이랑 박지연 감독이랑 파리를 갔었어요. 그때도 유럽 한 달 살기 그런 게 있었잖아요. 저는 거기서 성균관에 관한 장편 시나리오를 썼어요. 제작지원을 받아 파일럿 영상까지는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대중적이지도 않고 EBS에 어울릴 만한 이야기여서 진행이 잘 안 된 거예요. 이후로 지금이아니면안돼에서 나와서 업계에서 작업자로 중국 일인가 일본 일인가 6개월 정도 했는데, 너무 행복하지가 않은 거예요. 돈은 훨씬 많이 버는데,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구나.
제작지원 시즌도 아닌데, 당장 그만두고 한 게 <보편적인 삶>이에요. 제가 <먹이들>을 못했잖아요. 어떻게든 벌레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거기에서 인물을 한 명을 떼왔어요. <먹이들>은 사회 전체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보편적인 삶>은 그 인물을 세워서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혼자서 3개월 정도 만든 것 같아요. 5분 안 되는데, 서울국제초단편 영화제 우수상을 받았어요. 애니메이션 시작하고 처음 받은 상이었고, 온전히 혼자서 만든 작품이라 그 상이 터닝포인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작품을 계속해도 되겠구나.’

<보편적인 삶>을 하면서 색을 칠해 보니까 의외로 괜찮더라고요. <먹이들> 하고 나서 계속 작품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다음으로 하려던 게 “검은 개”였어요. 재개발 지역에 개만 남겨지는 이야기였어요. 저희 어머니를 개로 표현을 해서 가족들이 다 떠나버리고 혼자서 마지막을 맞는 거였는데, 그때
<늙은 개>(2018, 감독: 최민호)가 나와버려
딱 그걸 본 거예요. 제가 최민호 감독님 하고 지금도 자주 만나는데, 이거를 먼저 하면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감독님도 자기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 거예요. 비슷하더라도 또 표현하면 다를 거다 하는데, 핵심이 너무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하고 써놓은 이야기들 중에 상여 이야기 하고 어머니가 고양이 묻어주셨다는 이야기를 합친 거죠. “검은 개”에서 고양이 부분이 들어오니까 진짜어머니 이야기로 해야겠다 하고 딸 이야기가 들어오고 싹 바뀌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게 관계에 대한 이야기 같더라고요. <사라지는 것들>은 관계를 조금 더 확장해도 되겠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집이나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같으니까 존재들을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해서 그거를 엮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라지는 것들>을 할 때 “높고 고요하다”는 문장을 가지고서 했거든요. 어머니가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식이 일곱이 있는데 사회적인 성공을 못 시켰다. 어머니 본인 스스로는 욕심이 많았는데, 시집와서 제대로 안 되니까 다른 사람들 자식 자랑을 할 때 그게 마음에 남았던 거 같더라고요. 힘들게 사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생각하는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놓지는 않으셨어요. 그런 것을 종합해서 내가 느끼던 어머니의 정신의 높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거를 칼라로 쓴 시로 표현하고 싶어서 대사도 없고 장면들도 정적인 이미지로 한 거였어요.
코로나 시기에 작업했겠어요.
2020년부터 작업했어요.
혼자 작업했나요?
그때부터 제작지원 기간이 7개월인가 그랬어요. 이거는 색도 들어가고 도저히 혼자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미지들은 다 잡고 작화랑 나머지 다 하고 미술 하는 분을 구해서 같이 미술하고 음악이나 맡겨야 되는 것들은 맡겼어요.
모델이 되는 공간은 광주예요?
네, 어머니가 사셨던 집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도 혼자 계시니까 또 혹시라도 그런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전에는 전화도 자주 안 했거든요. 전화를 더 자주 했는데, 안 받으면 형이나 근처에 사는 누나한테 “빨리 가봐라. 오늘 통화됐냐” 그러는 와중에 형이 광주로 내려가서 어머니랑 함께 살게 됐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너무 놓이는 거예요. 근데 웬걸 한 세 달 정도 됐나 어머니가 야반도주를 하신 거예요.
같이 못 살겠다고
우리 어머니가 너무 독립적인 분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섬세하고 어머니가 봤을 때는 약한 분이셨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자식들이랑 같이 사는 것도 자기 공간이 없어져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도 혼자 오래 사셨던 분이라 자식이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맞춰야 되는 것도 힘들었던 거죠.
집을 얻고 나서 저한테 전화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어디다 얻었냐 하니까 광주에 임동이라는 데 얻었다 그래서 내려갔어요. 그때가 여름이었어요. 주소를 찾아서 골목골목으로 가는데 하수구 냄새가 심하더라고요.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벨을 눌러서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아니 나가는 건 그럴 수 있는데, 자식들한테 이야기를 했으면 좀 더 괜찮은 데를 알아볼 수가 있잖아요. 거기서 하룻밤을 자면서 너무 미치겠는 거예요.
누나들한테 전화해서 이건 진짜 아니다. 어떻게든 엄마를 다른 데로 옮기자 그랬는데, 집이 안 나가요.
그런 집이니까 비어 있었겠죠. 다른 집으로 옮길 때도 엄마를 내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재개발 지역에 있는 노인에 대한 걸 하게 된 거죠. 거기에 고양이들이 또 많잖아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 거죠.

어머님은 <사라지는 것들>이 완성된 이후에 돌아가신 건가요?
2021년 12월에 배급을 맡겼는데, 어머니가 2022년 2월 말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3월 초에 안시에서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았어요. 어머니가 도와주셨구나 진짜 딱 그 생각이 드는 거예요.
코로나 시기에 어머니 간병하면서 작업을 하신 건가요?
간병할 때는 <엄마의 집>이 센터에서 지원받은 초기였어요. 센터는 콘진보다 제작기간이 더 길잖아요. 내가 몇 달은 엄마를 위해서 빼야겠다 그랬어요. 코로나 때는 간병인이 한 명밖에 안 됐잖아요. 그때 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다른 형제보다는 제가 보내드리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제가 있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길 바라기도 했거든요. 근데 결국은 몇 달 후에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사라지는 것들>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가는 부분에 어두운 대나무 숲 있어요. 그게 실제 어머니 계시던 집 뒤편에 있었나요?
거기는 도시니까 없고요. 시골에 살았을 때 집 뒤에 대나무 숲이 있었어요. 대나무 숲 들어가면 서늘하기도 하고 타닥타닥 소리가 나는 게 이상해요. 아무도 없을 때 그러면 무섭기도 하고 분위기가 그렇거든요. 그 위에 사당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대나무 사이를 지나서 사당이 나오고 사당이라는 곳이 또 그런 의식을 하는 곳이니까 그게 연결되는 느낌으로 제 기억에 남았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동네에서 꽃상여를 했던 기억이랑 해서 현실과 다른 곳이 있다면 중간 단계를 대나무숲으로 설정하는 게 좋겠다.
호원: 어렸을 때 상여가 이 작품에서처럼 느리게 갔어요?
그렇게 느리지는 않은데, 느려요. 앞에서 요령잡이 하시는 분이 천천히 가거든요. 그럼 따라서 맞춰야 되거든요. 근데 <사라지는 것들>은 그거라기보다는 삼보일배하는 식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처음에 꽃상여 행렬 전체가 다 보이는 장면이 나올 때는 그렇게 하거든요. 근데 연출을 하다 보니까 세 번 걸어가고 한 번 하는 걸 보여주려면 너무 많은 신들이 필요해서 계속 보여줄 수가 없는 거예요.
삼보일배가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식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애니메틱 할 때 그걸 계산해서 했어요. 거기서 최대한 빼더라도 그 시간과 리듬이 있을 거잖아요. 제 나름대로는 세 번 울리고 한 번 하고 나서 움직이고 하는 것을 고려해서 맞춘 거거든요.
호원: <사라지는 것들>은 할머니가 고양이를 염해 주는 거 그다음에 고양이들이 할머니 상여를 나르는 거 이 두 개를 딱 접은 작품이에요.
형식적으로는 그게 맞아요.
호원: 상여의 삼보일배 호흡이 잡히니까 할머니가 고양이를 염을 해 주는 게 하나의 순간으로 지나가지 않고 물을 받아서 수건에 적셔서 털 하나하나 닦는 게 상여 지나가는 시간만큼이 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까지 염하는 시간을 딱 짜서 맞춘 건 아니지만 염 자체가 의식이잖아요. 어떤 형식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상여 행렬의 삼보일배도 정해진 형식인데, 저는 마음이 형식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마음만으로는 알 수가 없잖으니까 이런 형식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싶었어요. 노인이 고양이를 닦고 쓰다듬고 묻고 푯말 꼽는 것까지가 저는 하나의 완결된 것이라고 봤거든요. 고양이들이 노인이 써준 이름표를 소중히 안고 방울소리를 따라가는 형식을 보여주고 싶었죠.
<사라진 것들>은 제가 사운드에 정말 공을 들였거든요. 사운드 작업을 해주신 분이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대나무 타닥타닥 하는 소리를 너무 넣고 싶었어요. 거기에서 메인으로 잡은 게 쾅쾅 벽 부수는 소리 하고 방울 소리하고 그다음에 대나무 소리거든요. 저한테는 사운드적으로도 이미지적으로도 앞 하고 뒷부분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대나무 밭이 중요했던 거예요.
호원: 그 사운드는 누가 하셨어요.
사운드는 센터에서 박현희 선임이 기본적으로 정말 잘해 주셨는데, 제가 넣고 싶은 게 또 있으니까 나중에 추가하고 추가하고 그렇게 작업을 했습니다.

안시에는 직접 가셨어요?
안시가 <사라지는 것들>의 공식적인 첫 상영이었거든요. 제가 사운드에 신경을 썼는데, 한계가 있었던 거죠. 제가 집에서 부족한 것들은 채워 넣었는데, 그렇게 좋은 데서 들어보니까 너무 아쉬운 거예요.
믹싱이 끝난 상태에서 추가하신 건가요?
네, 작업용 컴퓨터에서는 안 들리는데 거기서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리잖아요. 저거는 내가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들어가 있고 저게 왜 깔려 있지 그것도 있고, 저만 아는데 저게 언제까지 이어질지 막 조마조마하는 거예요. 그런 데다가 영화관마다 상영 컨디션이 다르다 보니 색도 제가 생각했던 거하고 다른 거예요. 거기도 본 영화관에서 상영할 때 하고 다른 영화관에서 상영할 때가 또 다르더라고요.
저승의 하얀 꽃밭 있잖아요. 메밀꽃밭도 생각났는데, 국화인가요?
국화가 아니라 목화예요. 여기가 저승 같은 느낌도 있지만 어떤 우주 같은 공간이길 바랐어요. 구름 위일 수도 있고 어떤 꽃밭일 수도 있는데, 이 공간에 맞는 꽃을 하고 싶은 거예요. 국화로 하면 그 몽글몽글한 느낌이 안 나는 거예요. 어렸을 때 저희 집에서 목화를 했었거든요. 목화 따기에 대한 어머니와의 추억도 있고 또 목화는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더 쓰임이 있는 식물인 거예요. 죽고 나서 말라서 솜으로 쓰여서 옷이 되든 이불이 되는 거예요.
목화의 하얀 부분이 꽃잎인가요?
그게 꽃이라고 봐야 되는 거겠죠. 솜이 안에서 벌어지는 거거든요. 나중에 딸 때는 완전 잎이 말라비틀어져요. 가시 같은 게 있어서 딸 때 막 찔리고 너무 아팠어요. 계속 수그려서 따야 되고 아픈데 장갑은 없고 어렸을 때 싫었어요.
<사라진 것들>을 기획할 때 어머니의 정신이 이어진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극 중에서는 고양이를 통해서 이어지지만, 저한테로 이어지고. 존재들의 기억을 통해서 어떤 게 이어진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목화가 거기에 딱 맞는 거예요. 그래서 첫 이미지를 목화 장면으로 잡았어요.
저는 <사라진 것들>을 상영할 때 정동진영화제가 제일 좋았어요. 정동진은 밤에 상영하니까 공간이 완전히 확장이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때 저녁까지 비가 내리다 그치다 그래서 조마조마했는데, 밤에 상영이 시작되면서 비가 그치고 별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고양이 꽃상여행렬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생각했던 대로 화면이랑 하늘이 연결되면서 너무 좋더라고요.
호원: 컬러로 시작해서 상여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블랙/화이트를 강조했어요.
어렸을 때 빨갛고 노란 원색 상여꽃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거예요. 죽음이라는 이미지도 덧씌워져서 무섭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 종이꽃에 바람 불면 종이 부딪히는 소리가 왠지 이상했어요. 색을 구성을 할 때 앞에는 최대한 채도를 낮추고 상여꽃을 확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을 해야겠다. 그러려면 뒤에 공간이 어두워야 되고 다른 보이는 것은 하얗게 구성한 거죠.
호원: 그 장면을 모니터로 보면 안 되고 영화제 스크린으로 봐야지 밖에 우주까지 연결되는 거죠.
그래서 정동진에서 너무 좋았어요. 저는 제가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 작업을 하거든요. 이게 큰 화면에서 어떻게 나올까 생각하면서 그려요. 정동진은 밤에 야외에서 상영하니까 화면이 큰 데다가 옆에 아무것도 없이 진짜 거기만 한 데가 없었던 것 같아요.
<먹이들>에서 먹는 꽃은
그거는 국화 맞아요. 처음에 기획할 때는 제목을 벌레라고 한 것도 <먹이들> 원형이 카프카의 변신이었거든요. 바퀴벌레 같은 벌레가 되잖아요. 제가 생각했던 거는 큰 고깃덩이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고깃덩이를 먹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너무 직접적이어서 사람을 동물로 바꿨는데, 동물이 고기를 먹는 것도 너무 직접적인 거예요.
돼지들이 꽃을 먹으면 어떨까. 얘들은 어떤 불안이나 사회적인 압박에 자살이든 사회적 타살이든 되는 건데, 방에 갇혔을 때 불안과 압박에 못 이겨서 뭔가로 변해서 먹게 된다면 꽃이 되면 좋겠다. 그러면서 장례식 화환에 쓰이는 국화를 쓴 거예요.

호원: 이승과 저승의 경계 느낌이 신비롭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해요.
높고 고요하다는 문장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거를 장례 행렬로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까 하면서 그 장면을 계속 봤어요. 대사가 나오면 분위기도 흐트러지고 음악도 많이 쓰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상여꽃하고 고양이들이 상여를 든다는 이미지만 해도 세니까 다른 것들은 다 죽이고 최대한 빼는 식으로 했어요.
호원: 고양이 눈빛은 살렸어요. 고양이가 할머니한테 말하는 거니까.
전반부에서 노인이 염을 하고 나서 고양이를 쓰다듬어 손을 떼면 바람이 슉 불어요. 그래서 고양이 수염이 쓱 날리면서 고양이가 감사의 표시로 웃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후반에 고양이가 표정으로 말할 때 그것이 수미쌍관으로 반복되게끔, 그걸 관객들이 알면 더 좋고 아니어도 좋다는 의도였어요.
호원: 비슷한 장면으로 <고양이의 보은>(2002, 감독: 모리타 히로유키 )에 고양이 왕국의 임금 행차 장면이 생각났어요.
꽃상여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이긴 하지만 고양이로 한다는 거는 비슷하니까 고양이를 실사랑 비슷하게 정교하게 가야겠다. 그리고 꽃상여 꽃도 제일 중요한 이미지니까 미술작업하신 여백님한테 문양식으로 하지 않고 한 땀 한 땀 해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고양이 보은>이나 다른 애니메이션과 차별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미술을 맡아주신 여백님이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 이상을 보여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 작품 작업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스튜디오 창해
두 번째 작품부터 스튜디오 창해가 크레디트가 붙어요.
제 호예요. 두 번째 작품부터 저와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는 피디님이 선물해 주셨어요. 피디님이 유교 종단의 총부인 성균관에서 의례부장 직을 맡고 계시거든요. 제가 장편으로 기획했던 조선시대 성균관 이야기에 도움을 청한 것을 계기로 작품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호원: 그분이 프로듀서 이름으로 나오는 박광영 씨인가요.
네. 그분이 저를 봤을 때 사람이 깊고 진중한 건 좋은데,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어서 그게 항상 아쉽다고 했거든요. 창해가 드넓은 바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갖고 있는 걸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름 덕분인지 작품들이 더 잘 되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지금 기획하는 장편이 성균관과 관련된 건 가요?
성균관 이야기는 <어둠의 저편> 다음에 장편으로 기획했던 이야기고, 지금 하는 건 병원에서 엄마 간병했던 거를 주로 해서 노인부양에 관한 이야기들을 묶은 거예요. <엄마의 집>도 장편에서 초반에 나오는 부분인 거예요. 제가 재작년에 독립장편 제작지원을 받아서 애니메틱을 50분 정도 했었거든요.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고 투자는 안 되고 또 투자할 정도로 이야기가 크지도 않고 그러니까 올해 중편 제작지원으로 병원에서의 이야기만 따로 만들 거든요. 나머지 부분은 내년에 중편으로 하든가 본편 나머지로 하든가 해서 <엄마의 집>이랑 엮어서 장편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 아니면 장편을 완성하기 정말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엄마의 집 (2024)
<엄마의 집>이 인디애니페스트 출품했을 때는 “죄인들”이었어요.
제일 초반에 제작지원했을 때는 “엄마를 부탁합니다”였어요. 근데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있어서 다른 걸로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코로나 때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계시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죄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죄인들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상황에 있는 분들을 죄인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은 거예요. 사람들의 상황이 다 다른데 제가 그랬다는 것만으로 그런 상황에 있는 분들을 비난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어요.
장편으로 갔을 때는 노인 요양병원 이야기도 나오는데, 실제로 제가 요양원에 있는 분들을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엄마가 계실 때 면회는 가봤지만, 잠깐 본 거 하고는 완전 다르잖아요. 저희 누나 한분은 요양보호사로, 한분은 요양병원에서 일을 하거든요. 누나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제가 경험한 게 아니니까 그렇더라고요.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려면 실습을 해야 돼요. 그래서 6주 동안 필기 공부하고 2주 동안 요양원에서 실습을 했어요. 그게 딱 <엄마의 집> 배급하기 전이었어요. 제일 처음에 낸 영화제가 인디애니페스트였거든요.
요양원 실습하고 나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그전에 다른 요양병원에도 계셨는데 거기서도 뛰쳐나오셨거든요. 그러면서 저한테 전화로 “여기 있으면 내가 죽겠다고, 여긴 지옥 같다”라고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노인들께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몰랐어요. 근데 요양원에 실습하러 가보니 그곳에 계신 노인분들이 대부분 집에 가고 싶어 해요. “집에 보내줘” 그러는데, ‘집이라는 게 뭔가. 자식들 입장에서 요양원에 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저는 요양원을 실버타운쯤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거기 가면 친구들도 있고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전문인이 케어해 주니까 낫겠다 싶었는데, 그분들에게는 집이 아닌 거죠.
호원: 집에서 케어를 하다가 힘드니까 실버타운 같은 요양원에다 모셔야지 해놓고 정작 가봤더니
가서 봤는데, 좋아요. 자기가 직접 생활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제가 갔던 데는 가톨릭 재단에서 하는 수녀님이 원장으로 계시는 정말 좋은 데였어요. 기저귀도 천 기저귀를 지하실에서 매일 세탁을 해가지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욕창이 아무도 없어요. 간호사분들도 그렇지만 요양보호사분들이 정말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호원: 모시고 오면 그때부터 죄인이 되는 거죠.
엄마를 모실 때도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운 거예요.
그런 데다 저희 어머니는 워낙에 까탈스러운 분이시기도 하고 사람하고 관계도 그렇게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과연 저기서 잘 계실까.
요양보호사 실습은 <엄마의 집> 파트를 다 만들고 하셨나요.
배급을 하기 전이니까 거의 마지막이었죠. 그 경험을 하고 나서 조금 수정을 하고 제목도 <엄마의 집>으로 했어요.
장편 제목도 “엄마의 집”으로 가나요?
“잃어버린 산”이에요. <엄마의 집> 보면 나오는 산과 연결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산이라는 게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중의적인 표현이에요.
지금 중편은 “긴 밤”이거든요. 엄마 간병하면서 생사의 고비가 오니까 생명 연장에 대한 DNR 동의서*를 써야 했어요. 동의하겠다고 하면 심폐소생술이나 그런 기본적인 조치를 안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고열로 정신이 없으니까 가족들이 그걸 써야 되는 거예요. 가족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안 되고 전부 다 동의를 해야 돼요.
제가 봤을 때 노인부양 문제에서 특히 간병에서는 가장 안 좋은 게 끝을 장담 못한다는 거예요. 진짜로 한 달이라는 기간이면 온몸을 바쳐서 하는데, 한 달이 될지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가족 사이에서도 DNR 동의에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왠지 그 이후의 일들을 책임져야 될 것 같은 거예요. 장편은 이런 이야기들이 포함된 노인부양에 관한 이야기예요.
*Do Not Resuscitate (연명 소생술 하지 마세요)의 약자

장편의 일부였기 때문인지 과거 작품들의 사실적인 부분과 우화적인 부분이 융합된 거 같아요. 양 캐릭터는 속죄양이에요?
제가 첫 작품을 마흔네 살 때 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단편 그만두고 장편 할 때잖아요. 그 나이대에 볼 수 있는 시선으로 하게 되니까 다른 분들이랑 차별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장편을 할 때도 내 나이의 시선으로 노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 온전히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게 내 시선으로 할 수 있는 나만의 강점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엄마의 집>을 단편으로 구성했을 때 사람을 직접 버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고려장이 연상되잖아요. 고려장이 우리나라에 있었던 풍습도 아니고요. 그래서 동물로 하고 싶은데, 너무 동떨어진 동물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토끼나 고라니도 그렇고 곰도 그렇잖아요. 그렇다고 호랑이라 할 수는 없고. 양이 우리나라에 있을 법도 하면서 양이 무리 동물이잖아요. 종교적으로 희생양의 상징도 있어서 적절한 것 같더라고요.
호원: 양의 성격이 이중적인 게 우리가 볼 때 순한 것도 있지만
더울 때 들러붙고 추울 때 떨어지고
호원: 아들 양 보면서 그래서 저 성깔이 나오나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해서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거죠. 자식 캐릭터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설정했는데, 양은 책임감을 버리고 싶어 하는 자식이었고 영수는 죄책감을 떠안는 자식이었던 거죠. 결국은 영수가 책임감과 죄책감을 다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보니 다른 뭔가가 필요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거죠.

호원: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1983) 보셨어요?
그거는 못 봤고 책은 봤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식량도 없고 애들이 고생하는데 자기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가 너무 쌩쌩한 거예요. 생니를 뽑는 그 어머니의 마음 있잖아요. <엄마의 집>에서도 늙은 양은 영수가 자식이라는 걸 알 거잖아요. 늙은 양이 치매도 있고 설정상 아무 대사가 없지만, 영수한테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지시를 해주거든요. 저는 그 마음인 것 같아요.
바위산에 까마귀들이 나오잖아요. 저는 까마귀들이 요양원에 부모를 맡긴 자식 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자식들이 옆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깍깍거리면서 요양원에다가 마음을 남겨둔 거죠.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못하고 빨리 죽기를 바라고 그래야지 편해지니까.
작년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한국 장편 피칭을 한 적이 있어요. 싱가포르인가 영화 제작 배급 하시는 분과 미팅을 했었는데, 노인 부양 이야기가 유럽보다는 아시아권이나 남미 쪽이나 가족 관계가 중시되는 곳에서 훨씬 더 공감을 가질 만한 이야기인데, 너무 무겁다. 해피엔딩이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노인 부양에서 결말은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게 문제가 해결되는 거예요.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해방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돌아가셨으면 좋겠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 전문가들에게 잘 케어받다가. 그래서 제가 요양원의 실제가 궁금했던 거예요. 방송에서는 안 좋은 부분만 나오잖아요. 그런가 했는데, 너무 좋아요.
실습생을 받으려면 좋은 시설이야겠죠.
맞아요. 그 정도 되니까 받은 거예요. 그때 우리 팀이 갔을 때 10명인가 됐는데, 증상에 따라서 1, 2, 3층 따로따로였어요. 저는 2층에 있었어요. 첫날 8시간 끝나서 같이 버스를 타러 왔어요. 대부분 저보다 나이도 많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상황을 많이 알고 계신 분들이었어요. 오늘 어땠냐고 서로 물어보는데,, 두 가지가 공통적인 게 너무 좋다. 새 건물은 아닌데 청결하고 케어를 잘해준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고 싶지 않다였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부모님이 계실 때 제일 마음이 편한 사람은 그분들의 자식들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자식들이 와서 봤을 때 관리가 잘 돼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는 이 케어를 받다가 돌아가시면 좋겠다인 거죠. 딱 그 마음이 제 마음이었더라고요. 내가 아니어도 케어를 잘 받으며 편하셨으면 하는 그 마음은 진짜겠구나. 자식이라도 돈 끊어버리고 유기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공격하는 까마귀도 있어요. 그런 것을 형상화했어요.
호원: 너무나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어느 시기든 어느 지역에서든 모두가 한 마디씩은 할 거예요.
제작 지원을 받으려면 완성 시나리오가 있어야 되니까 시나리오는 거의 다 완성된 상태였거든요. 애니메틱도 다 한 상태였고. 그런데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요양원에서 실습을 하고 나서 시나리오를 다듬었어요. 에피소드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때 보고 경험했던 시선만 가지고서 대사나 상황을 조금씩 거기에 맞게 다시 썼거든요. 그랬는데 PD님이랑 그전에 봤던 가까운 몇 분들이 보더니 되게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더 밀도가 높아지고 좋아졌다고. 관점이라는 게 정말 중요하구나. 에피소드가 똑같은데도 대사나 그런 걸 통해서 인물의 성격들이 바뀌는구나. 말씀하신 것처럼 이거는 상상해서 할 수 있는 거하고 다른 것 같더라고요.
호원: <엄마의 집>이 갈림길에서 끝나잖아요. 장면이 끝나는데도 깜빡이 소리를 엔딩 크레디트 끝까지 살려놓았어요.
단편에서는 결말이 중요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는 그 장면을 하고 싶어서 그걸 한 거죠. 삼거리에 서울하고 양평이 있는데 그게 저는 책임감과 죄책감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반대로 보면 이게 바뀌어요. 내가 자식이었을 때는 서울이 죄책감이고 양평이 책임감이잖아요. 근데 아빠일 때는 양평이 죄책감이 되고 서울이 책임감이 되는 거거든요. 양갈래 장면이 이 인물의 책임감과 죄책감에 대한 고민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겠다 싶더라고요.
먹이들 (2020)

작품들 크레디트를 보면은 318, 123, 101, 501이 있어요.
제가 살았던 집 주소 그리고 작업실이었거든요.
318은 저희 시골집이었고 123은 제가 서울에서 <어둠의 저편> 작업할 때 집이었고 그다음은 <보편적인 삶> 할 때 집 호수예요. 그게 꼭 적고 싶더라고요.
501은 노원글쓰기모임과 따로
501은 노원에 살던 그 집이었어요. 그전에 독서 모임을 했었는데, 독서모임은 책을 읽어야 하는 건데, 작업하다 보니까 시간이 잘 안 맞는 거예요. 글쓰기 모임은 집 근처이기도 했고 프로를 지향하는 분이랑 아마추어 분들이랑 섞여 있었어요. A4 한 장 정도로만 쓰면 거기에 대해서 서로 합평을 하는 거였죠.
저는 단편을 우리 전문 집단에서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한 적이 없어요. 혼자서 해야 되는데 그래도 보편적인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는 거예요. 거기가 딱 적당했어요. 나이도 좀 어린 분들이랑 제 또래도 있었고 성별도 섞여 있어서 <사라지는 것들>부터 거기서 같이 이야기를 했어요.
<먹이들>을 첫 상영한 게 노원글쓰기모임이었어요. 거기에 기자분이 한 분 계셨거든요. 그분이 보시더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셨어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서 그만큼 몰두하는 작업을 해서. 제가 어떻게 작업했다는 걸 계속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딱 저를 표현하는 거였어요. <어둠의 저편>이 첫 작품이었고 두 번째는 그냥 만든 거였고 <먹이들>이 제일 하고 싶은 거였잖아요.
두 작품 해봤으니까 이건 제대로 해보고 싶은 거예요. 제작지원도 되고 기회가 잘 맞았죠. 제 나름으로는 정말 공을 들였어요. 작업자들도 되게 피곤하게 하고 그랬어요. 집에서 거의 새벽 4시 정도까지 작업을 했거든요. 그러면 아침에 10시, 11시 정도에 일어나잖아요. 비몽사몽에 커피를 마시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모든 것을 다 소진한 느낌인 거예요. 이대로 죽어도 좋겠구나 너무 행복하다. 내가 이런 순간들을 위해 작품을 하는구나 하는, 한동안 그 상태였어요. 그만큼 했는데, <먹이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상영이 안 됐어요.
핀란드 탐페레에서 했을 때는 못 가고 작년에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특별전 했을 때 비로소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먹이들>도 제가 사운드를 엄청 신경을 썼거든요. 성우분들도 진짜 혼신의 연기를 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극장 사운드로 제가 했던 게 어떤 식으로 구현이 되는지 보고 싶었어요. <먹이들>을 제 컴퓨터로 가끔씩 봤었는데 작은 화면에서 볼 때는 사운드로 인물들을 압박하는 게 그렇게 안 오는데 큰 화면에서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예선을 하시는 분들이 만약에 극장에서 봤으면 상영이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더라고요.
<먹이들>은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을까요?
제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죽음이라는 게 결국은 삶으로 연결이 되잖아요. 급작스럽게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제가 느꼈던 공포가 어마어마했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산소에서 유품을 태우면서 사람의 인생이 너무 허망한 거예요. 나도 안 좋은 방식으로, 그것도 갑자기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일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누나 돌아가시고 나서 작품을 해야겠구나 한 거예요. 최근까지 제가 3년을 상정하고 살았어요. 내가 3년을 살 수 있다면 뭘 해야 될까. 돈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해야겠는 거예요.
<먹이들>도 그렇게 한 이유가 뒤를 생각을 안 한 거죠.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거니까 이걸 하다가 죽어도 좋아. 여기 인물들이 다 저예요. 카프카의 소설도 실존의 문제였던 거잖아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서 혼자서 생활했거든요. 저한테 삶이라는 건 진짜 실존이었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고 하잖아요.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공격한다고 인식을 했던 거예요. 잡아먹힐 것 같이 움츠리고 있으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죠. 내가 보는 우리의 가족이 그랬고 밖에 나와서 보니까 나를 둘러싼 세계가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야지만 내가 살 것 같은 거예요.
카프카의 『변신』을 봤을 때도 너무 이해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벌레가 됐을 때 가족의 시선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것들이 내가 느꼈던 것과 정말 다르지 않구나. 이거는 꼭 해야겠다. 제가 좀 어린 친구한테 이걸 보여줬는데, 무섭다고 보기 싫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집요하게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고흐도 좋아하지만 마크 로스코도 좋아해요.
그래서 방이 그렇게 빨갛군요.
마코 로스코 작품을 모티브로 표현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제가 느꼈던 불안이었던 거죠. <먹이들>에서 가장 핵심이 불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불안이 저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욕망이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여기에 있는 인물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서 다 불안한 거예요. 불안을 웃음으로 표현한 건데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호원: 재밌는 게 마크 로스코의 공간에다가 고흐의 인물을 넣으면은 프란시스 베이컨이에요.
그분들도 저처럼 불안에 시달렸던 걸까요.(웃음) 죽음을 상정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구나. 아까 3년 이야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야지만 내가 제대로 살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10년 가까이하다 보니 번아웃이 왔어요.(웃음)
3년은 기획부터 해서 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주기인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3년. 1년은 바로 끝이니까 뭔가를 할 수가 없어요. 5년은 너무 길고 3년이면 그래도 1, 2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내가 죽음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는 적절한 시간 같더라고요. 작품이 1년 아니면 1년 반이면 끝나잖아요. 그 기간에 온전히 내가 나를 소진하고 3년 후에 죽는다면 1년이나 1년 반의 기간은 그 여진의 기간이어도 되겠구나. 저는 작품을 하면서 뭔가가 없어지더라도 그건 불태워지는 거지 소모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돼도 좋겠다 싶었던 거죠.
인터뷰 2025년 4월 23일 @ 서교동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