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FOCUS_KIM Kangmin
네 편의 애니메이션, 세 편의 영화제 트레일러, 그리고 김강민
어느 유전자 운반자*의 판타스틱한 탈주기
이 글에서 다룰 애니메이션 감독은 김강민이다. 그리고 살펴볼 작품은 그가 이전에 만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Buche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트레일러들이다. 영화제 출품을 위해 만든 ‘작품들’이 아니라, ‘영화제’ 자체를 위해 만든 작품들이 중심이다. 그러니까 이번 글은 꽤 신선한 기획이면서도, 몹시 낯선 시도이다. 물론 단순하게 풀자면 그가 만든 ‘판타스틱’한 트레일러들을 제대로 음미해 보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음미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가능한 접근법들을 떠올려 보자.
우선 ‘영화제 트레일러’라는 기능.
그저 ‘제 n회 영화제’라는 정보를 고지하는 정도인가? 그럴 리가! 영화제 트레일러는 해당연도 영화제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작품이다. 모든 상영 섹션에서 매 회차마다, 맨 처음에 등장한다. 트레일러가 망작이면 영화제의 첫인상을 구겨버린다. 여러 작품을 보려는 영화제 씨네필 관객에게는 그만한 고역도 없다. 멋진 영화제 트레일러라면 그 자체로 영화제의 정체성을 한 방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영화제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영화제라는 행사는 그 스스로 “영화란 무엇인가”를 되묻고 답해야 한다(라고 영화제 관계자들은 짐짓 비장하게 말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영화제 트래일러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묻고 새롭게 답하는 영화제란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종합선물세트를 추구하는 ‘메가’ 사이즈의 영화제도 있지만, 특정 장르나 테마에 집중하는 영화제도 있다. 판타스틱 영화제는 말 그대로 장르 특화적이다. 이 점이 BIFAN 트레일러의 범위를 한정해 주는 효과도 있지만, “판타스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문제를 한번 더 꼬아버릴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묻고 새롭게 답하는 판타스틱한 영화들을 보여주는 영화제란 무엇인가]의 답을 트레일러로 보여줘야 한다. 김강민의 트레일러 연작은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그다음 김강민의 작품들과 트레일러의 관계.
영화제가 트레일러 제작을 위해 특정한 창작자를 선정, 섭외하고, 그것도 세 번이나 맡기려면 무엇보다 해당 창작자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이루어졌을 테다. 당연히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훌륭했으며, 그 작품들이 영화제와 결을 같이 한다는 판단을 기반으로 맡겼을 것이다. 제작을 의뢰받은 창작자로서는 기존의 작품과 새로운 트레일러를 어떻게 관계 맺을지 고민하게 된다. 비슷하게? 아니면 완전히 다르게?
이 글이 전적으로 ‘트레일러’에만 집중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트레일러를 통해서 김강민의 기존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조금 더 깊이 (때론 새롭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기존 작품들을 통해서 트레일러 연작을 비로소 온전히 바라볼 것인가? 물론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두 영역을 모두 경유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에는 김강민의 애니메이션들로부터 출발하여 트레일러 연작으로 다다르는 경로를 따라보고자 한다. 영화제 트레일러에 대한 글쓰기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니까 (물론 양쪽으로 빈번히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잃게 되고 말겠지).
글을 단도직입적으로 트레일러에 한정하여 시작하지 못하는 까닭은 김강민의 애니메이션들과 트레일러들이 기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닮았으면서도 (판타스틱하게) 뒤틀려 있다. 우리는 닮음이 아니라 ‘뒤틀림’에 주목하고,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 어째서? 기존 애니메이션으로부터 트레일러의 뒤틀림이 적용되는 곳은 기법이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분위기와 정서이다.
<38-39℃> (2011), <사슴꽃> (2015), <점> (2017), <꿈> (2020)은 가족의 이야기이고,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버지-나’의 관계(<38-39℃>)로부터 ‘나-아들’(<점>)로 이어지고, 과거의 기억(<사슴꽃>)으로부터 불길한 미래의 조짐(<꿈>)으로 확장된다. 김강민이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꽤나 따뜻하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나 리안의 초기작들(<결혼 피로연>(1993), <음식남녀>(1994))처럼 다소 삐걱거려도 결국 서로를 위하고 이해하는 이야기를 전하는 듯싶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현실적이고, 누군가에게는 비현실적이다. 이 차이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점에서 김강민은 나름 화목한 가족을 경험했거나, 가족의 기억을 화목하게 바라보려는 성숙함을 키웠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마지막에 보여주는 사진들은 작품에서 다룬 이야기가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물증으로 제시된다 (<사슴꽃>, <점>). 사진은 허구가 아닌 실제임을 밝히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그 속의 아이 (김강민 그리고 아들)가 애니메이션으로 다뤄진 캐릭터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러운지 확인시켜 준다. 게다가 묘한 안도감과 웃음까지 이끌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선은 작품 내부가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뒤로 옮겨가 있고, 그렇게 작품의 종료와 함께 시선은 작품 밖으로 빠져나온다 (마치 곤히 잠에 빠져든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오는 부모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러한 온화함을 김강민 애니메이션의 주된 정서라고 여기고 있었다면, 그가 만든 BIFAN 트레일러들과 마주한 순간 몹시 당혹스러워진다. 섬세함, 따스함, 부드러움 따위는 지워진다. 날카로움, 차가움, 난폭함이 몰아닥친다. 이토록 강렬한 정반대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그가 꽁꽁 숨겨 놨던 또 다른 본성인가, 아니면 그저 잠시동안 허용된 일탈인가? 물론 이런 질문과 의심을 던지면서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처럼 굴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트레일러가 선사한 낯선 충격 덕분에, 김강민의 애니메이션들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볼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균열이 보였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매끈하게 마감 처리해 버린 부분들을 찾아볼 기회다.
그의 이야기들은 정말 따스한가? 가족들은 모두 행복한가? 기억은 아름다운가? 서로가 서로를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되묻다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는 대답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때론 일방적이었고, 때론 정도가 지나쳤으며, 때론 고통스러웠고, 때론 숨 막힐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다만 그것을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도덕률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가족의 호의를 거절, 거부, 부정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불편했지만 그 자신이 내색하지 않고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불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싫었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체화할 수 없는 어린 상황이었고, 그것을 실체화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미 성숙해져 버린, ‘엇갈린 시간차’가 작동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면 그의 작품들이 주는 맛이 ‘달콤>쌉쌀’함에서 ‘쌉쌀>달콤’함으로 살짝 달라진다. 그리하면 사진들이 던지는 분위기도 평면적인 하나의 정서가 아니라, 모순되고 상충하는 느낌들이 중첩되면서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를 하나의 완결된 정서가 아니라 미세한 균열과 불완전한 봉합 상태로 접근할 때, 비로소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텍스쳐와 촉감이다. 김강민의 애니메이션들은 촉촉함, 매끈함, 투명함, 부드러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마다 주된 재료, 소재를 바꾸고, 그것이 지닌 물성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공을 들인다. 각각의 작품에는 고유한 질감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거칠고 까끌한 텍스쳐는 우리의 눈을 건드린다. 빛은 재료의 표면 위에서 난반사되기도 하고, 얇은 종이 뒷면을 어슴푸레 비추기도 한다. 그러한 질감을 접하다 보면 먼저 눈이 간질거렸다가 점차 우리 손끝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살갗이 간질거리기도 한다.
텍스쳐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할 때, 작품 속에서는 실제로 촉각을 건드리는 장면들의 비중이 커진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내고, 모기가 살갗을 뚫고 피를 뽑아먹고, 점을 벅벅 문질러댄다. 이를 통해 캐릭터/인물이 이야기/기억 속에서 느끼는 감각이 관객에게 전이된다. 장면 속 상황이 사랑과 이해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압박인지 주인공도, 감독도, 관객도 명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촉각을 통해 자극을 공유할 수 있다. 부드럽지만은 않은, 따뜻하지만은 않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느낌. 명료하게 언어로 실체화할 수 없는 감정.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상태. 그래서 유예시키는 판단 (앞서 말한 ‘엇갈린 시간차’와도 연관된다).
김강민의 애니메이션에서 이러한 ‘판단 유예’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작품 속에 순간순간 삽입되었다가 사라지는 실험적인 영상들도 포용할 수 있다. 전체 콘셉트에서 벗어난 스타일, 컬러, 텍스처, 형상, 속도를 지닌 실험적인 인서트 영상은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결코 포착해내지 못하는 주관적, 내면적 상태를 반영하는데 적합하다. 갈등, 분노, 당황, 흥분, 폭주, 고통…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강한 에너지 상태의 감정들이 실험 영상에 담긴다 (어쩌면 구체적 언어로 ‘실체화’되지 못했던 느낌/감정/상황에게 허용된 형상화일 수도 있겠다).
불편한 감정과 거친 감각은 이제껏 넷 편의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잘 관리된 듯싶었지만, 임계치를 향해 서서히 증폭되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김강민의 BIFAN 트레일러는 기존의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연결되어 이어진 일종의 배기 기관, 혹은 내연 기관의 성격을 지닌다. 애니메이션에서 꾹꾹 응축될수록 트레일러에서는 더욱 강하게 폭발하게 된다. 쫓기며 내달리고, 숨 가쁘게 올라갔다 급격하게 추락하는 2017년의 트레일러는 강한 출력값으로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이듬해 2018년의 트레일러는 속도를 줄이되, 대신 그 에너지를 파괴와 생성으로 전환시킨다. 원자와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해체와 재배열이니 만큼, 에너지는 더욱 강력해야 한다. 그리고 3년 후인 2021년 트레일러는 스케일을 한껏 키운다. 마치 개체의 종을 바꾸고, 그것이 속하는 생태계를 뒤엎으려는 시도, 즉 유니버스의 질서를 새롭게 배치하는 기획처럼 보인다.
잠재적 에너지가 이 정도 수준으로 쌓였던 것일까? 물론 ‘판타스틱’한 영화제의 색깔에 맞추기 위해 출력값을 강제 증폭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묘하리 만치 타깃은 일치했다. 김강민의 사적 이야기를 이루는 기원과 BIFAN이라는 영화제의 심벌이 포개어지는 지점. 초기에는 “깨비”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현재는 “환상 세포”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영화제의 심벌은 이제껏 BIFAN의 포스터와 트레일러 역사에서 종종 머리를 대신하곤 했다. 김강민의 트레일러에서도 사람의 머리통은 여지없이 날아가고 환상 세포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좌우 한 쌍 형태의 이 세포는 어째 유전자 염색체로 불러도 될듯하다 (모든 세포 속에는 새포핵이 있고, 세포핵 속에는 유전 정보를 담은 DNA가 담겨있다).
김강민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족 이야기를 결속시켰던 기원은 바로 유전체이다. ‘점’은 유전자에 각인된 여러 형질 중 하나가 발현한 것이다. 점을 아무리 박박 문질러 지워내려 해도, 피부만 쓰리고 아플 뿐이다 (마찬가지로 트레일러에서 재료의 물성이 두드러지는 지점은 형태가 녹거나 바스러질 때, 즉 철저히 파괴될 때 비로소 물성의 미학이 극한에 다다른다). 유전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실험적 인서트 영상들이 혈관과 세포, 신경망 같은 우리 몸속 생물학적 상태를 연상케 하는 점을 떠올려 보자. 지울 수 없다면 부수고 새로 만드는 수밖에. 차마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엄두를 내지 못한 (무려) ‘존재론적 리셋’을 영화제는 ‘판타스틱’하게 허용하고 권장한다, ‘“이상해도 괜찮아 Stay Strange”.
영화제가 김강민에게 정서의 뒤틀림을 허용했다면, 김강민은 자신의 애니메이션 기법과 형식을 통해 영화제에게 영화의 정의를 환기시킨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너무나 기본적이기에 쉽게 간과되는 원리, 바로 프레임 바이 프레임. 이것을 김강민’만’의 고유한 기법/형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은 이 원리를 늘 신선하게 재발견하게끔 한다. 김강민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스톱 모션’ 보다는 ‘프레임 바이 프레임’라는 말로 바라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스톱 모션은 라이브 액션, 스톱 액션과 구분되는, 프레임 바이 프레임 기반의 촬영술이다. 즉 스톱 모션과 프레임 바이 프레임은 동어반복인 셈이다).
2017, 2018년도 BIFAN 트레일러에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원리는 캐릭터의 동선을 따라 친절하게 제시되었다. 영화 발명 직전, 에티엔 쥘 마레가 시간 사진술chronophotography로 포착한 연속적 움직임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마레의 사진 이미지는 이후, 3차원 오브제로 재구성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김강민은 이를 더욱 멋지게 트레일러 속에 구현해 냈다. 영화제는 이렇게 영화의 기원을 확인하면서 스스로를 재규정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시도는 2017년도 트레일러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메인 캐릭터의 머리가 공격을 받고 형태가 뒤틀리면서 파괴되는 지점이다. 여러 색의 클레이를 뒤섞은 덩어리를 얇게 썰어가면서 단면을 촬영한 이 장면은 스트라타Strata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실험 기법의 묘미는 단층면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물론, 미리 클레이의 레이어를 계산하여 의도된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스트라타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인 우연성을 잃게 된다). 머리-뇌를 클레이 덩어리로 대체하는 시도는 흥미롭다 (뇌 상태를 검사할 때 쓰는 MRI, CT 촬영도 원리적으로는 스트라타 애니메이션과 같다). 비정형적인 추상 애니메이션을 통해 사진적 리얼리즘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버리면서 ‘판타스틱’한 이미지를 제시했으니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지점은 김강민 애니메이션의 실험적 인서트 장면들과 연결고리가 된다.
김강민의 BIFAN 트레일러는 2021년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의 애니메이션은 2020년 <꿈>에서 멈췄다.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는 남겨두었던 꿈이야기를 하곤 했다. 차기작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등 떠밀며 재촉하지는 않겠지만, 은근하게 채근해야 할 수는 있을 테다. 2024년 올해의 BIFAN은 “BIFAN+”라는 명칭으로 리브랜딩을 시도한다. 핵심은 AI와 영화의 만남이다. 그리고 김강민은 지금 AI를 가지고 자신의 이전 작업들에 적용시키며 자기만의 탐색을 진행 중이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두 궤적이 다시 만나는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도킨스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을 유전자 기계, 유전자 운반자로 이해한다.
**기원을 명시하기는 쉽지 않지만, 오스카 피싱어가 왁스 덩어리를 연속적으로 잘라가며 촬영한 일련의 실험들에서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Wax Experiments, 1921~1926). 왁스 실험을 끝낸 이듬해 1927년, 오스카 피싱어는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급하게 거처를 옮기면서 (야반도주에 가까웠다) 자신의 여정을 한두 프레임씩 기록하여, 의도치 않은 스트라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München Berlin Wanderung ,1927). ‘Strata’는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뮌헨-베를린 기록이야말로 진정한 스트라타 애니메이션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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