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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JEON Jinkyu

  • 2020년 12월 24일
  • 11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5일


2020년 끝자락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이다. 애니메이션 전공생을 대상으로  기획된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의 기획 상영회 [찾아가는 애니살롱전]도 학교 대신 온라인 에서 열렸다. 11월 12일 마이크로소프트 팀즈, 11월 26일 줌으로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초대 손님은 전진규 감독이었다. 상영된 <죽음의 상인>(2019)은 그의 도쿄예대 석사과정 1학년 작품이다. 지난해 휴학을 하고 귀국했다가 올해 온라인으로 복학하게 된 그는 한국에서 졸업 작품이 될 <상실의 집>을 제작 중이다.



많이 바쁜가?

지난주에 (도쿄예대 졸업) 심사가 끝나자마자 외주가 들어왔다. 6개월 동안 5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데, ​잘 안 나와서 내가 마무리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2D라는 게 중간에 들어가서 살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분량을) 줄여서 처음부터 다시 하기로 했다. 2주 안에 1분 40초 정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도쿄예대를 다시 휴학한 건가?

수료한 거다. 학점은 채웠는데, 졸업작품을 내년에 제출해서 심사를 다시 받을 거다. ​작업이 길어져서 나도 좀 난감한 면은 있는데, 졸업 후에 개인 작업하기가 힘들 것 같아 길게 가더라도 제대로 찍어놓는 게 미래를 볼 때는 더 나을 거라 판단해서 졸업을 연기했다.

<상실의 집>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상태인가?

10분에서 12분 정도 되는데, 연출은 다 나왔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바꿔야 할 것 같다. 러프 동화는 3분의 1쯤 됐다.


색 없이 흑백 라인드로잉 이미지로 완성되는 건가?

인스타그램에 할머니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정도를 완성 기준으로 생각 중이다. 부분적으로 스틸 이미지가 들어간다.

 

어떤 장면이 스틸로 연출되나?

엔딩 크레디트와 과거 회상 장면이다.


공익근무를 요양원에서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머리가 철사같이 엉키고 관리받지 못했는지... 지저분한 노인들이 많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노인들의 머리를 잘라야 했다. 그 행위가 언뜻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머리가 지저분하고 몸 상태가 안 좋은 노인들은 사실 버려진 거였다. 삶의 막바지에 타인에게 머리를 강압적으로 잘려야 하는 형편이 됐다는 게 불쌍했다. 작품의 오프닝은 머리를 밀리는 노인들의 모습을 공익요원인 나의 시선으로 보는 장면이다.

​근무 기간은 24개월이었다. 2010년 2월에 시작해 2012년 1월에 끝났다. 나는 요양원 일을 하기 싫어했다. 노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일반적인 군인은 아예 사회랑 단절되어서 살지만 공익요원은 사회랑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그런 입장에서 보니까 더 혼란스러워서 그 일에 적응을 못했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오직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요양원 생활할 때 제일 힘들었던 건 소변을 치우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으레 이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며 젊은 사람들에게 일부로 빈정대며 짓궂게 행동하는 노인 몇몇의 행동이었다. 옛날 참전용사들은 공익요원을 (젊은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단 듯 행동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던 중 치매가 심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매우 말랐는데, 손이 거칠고 컸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힘든 일을 많이 해서 손이 커진 거라고 들었다. 나중에 찾아온 할머니의 따님 손은 너무 고왔다.


오전 7시 정도에 항상 기미가요를 부르는 할머니도 계셨다. 번개가 치는 날에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으셨는지 비명을 지르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작품에서는 불꽃놀이로 바꾼다. 젊은 사람들은 불꽃놀이 보면서 즐거워하지만, 노인들은 그걸 보면서 비명을 지르도록 연출할 계획이다. 그러면서 공익요원으로 있는 내가 과거와 현실 그리고 미래 사이에 있고, 불꽃놀이와 함께 시간이 뒤섞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엔 노인들을 혐오했지만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큰손 할머니와 고운 손을 가진 딸의 만남을 보면서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노인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면서 끝나는 장면이 엔딩 크레디트다. 거기에 미리 그려놓은 한국전쟁 관련 일러스트가 나온다.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던 게 마지막 크레디트에 나오는 이미지다.


공익근무요원이 배치되는 요양원은 국립시설 인가?

내가 공익 근무했던 10년 전에는 공익요원들을 대부분 사회복무요원으로 배치했는데, 국립시설이든 사립시설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알기론 참여 정부 때 법이 바뀌면서 요양원 시설을 늘렸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체크를 해보니까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시설들이 많았다. 5년 동안 기준에 맞게 환경을 바꾸고 재심사를 하기로 했는데, 내가 그 기간에 공익요원을 했었던 거다. 그때는 공익요원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면 안 된다는 매뉴얼이 없었다. 요양원마다 고생한 애들도 있고 아무 일 안 한 애들도 있다. 요즘에는 공익요원들에게 허드렛일은 안 시키는 것 같다. 

 

근무는 서울에서 한 건가?

집 주변으로 배정받았다. 내가 일산 신도시에 산다. 신도시 외곽지역 구일산 쪽은 되게 가난하다. 구일산 쪽에 있는 요양원을 다녔었다. 치매도 등급이 있는데, 1등급 노인을 많이 모시면 요양원이 지원금을 많이 받는다. 상태가 심각하신 분들은 좋은 요양원에서 안 받아주고 그런다. 내가 근무한 요양원은, 그러니까 가난한 외곽지역에 있는 열악한 요양원일수록 그런 분들이 많이 들어온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시청 쪽의 노인복지 담당자에게 자문을 구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쭉 일산에서 살았나?

어렸을 적에는 서산에 살았다. 바닷가 쪽에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와 지금까지 일산에서 살고 있다.

 

그림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렸나?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엄마한테 얘기해서 입시미술학원에 다녔다. 석고 소묘라든지 입시 디자인이라든지 정물 수채화 이런 걸 3년 동안 배웠다.

 

미술과목만 좋아하는 학생이었나?

나는 사회과목 좋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게임 일러스트레이션, CG 페인팅이 유행했을 때다. 그때 유명했던 사람이 김형태라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림을 보면서 '와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느꼈다. 당시에 게임 일러스트레이션 중에 유명했던 사람들이 한예종 출신이 많았다. '저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지?' 해서 알아봤더니 "그 학교는 천재만 가는 학교야"라는 풍문을 어디선가 듣고 가고 싶어 졌다. 내 주변에 만화 그리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기 가면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이 많겠구나' 막연하게 동경했다.

나는 고등학생때 우울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소 주눅들어 있었고 통념적인 길에서는 약간 벗어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했다.


게임도 많이 했나? 

우리 집 컴퓨터 사양이 안 좋았고 연년생 형이 컴퓨터를 잡고 놔주질 않았다. 형이 게임하는 걸 구경했다. 형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는데, 너무 재밌어 보였다. 가상세계이지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 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한예종 들어갔더니 기대가 충족되었나?   

나는 동기들을 굉장히 잘 만났다. 동기들이 너무 잘했다. 처음에 들어가서 헷갈렸던 거는 나는 비주얼적인 거에 끌렸던 사람인데, ​애니메이션은 타인과 소통하고 다소 내러티브적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봤던 게임 일러스트레이터 선배님들은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으셨다. 한예종은 감독을 키워내는 학교였다. 원래는 게임 일러스트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학교에 들어가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다 보니까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니메이션 감독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됐다.   

 

1~2학년 때 작업은 뮤직비디오였다. 음악 좋아하나?

그때 당시에 음악 굉장히 많이 들었었다. 록도 되게 많이 들었다. 그때는 새로운 것들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들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듣는 것만 듣는 것 같다. 그때에 비하면 호기심과 진취적인 면이 없어졌다.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플갱어 (2013)

<도플갱어>는 3학년에 복학해서 작업한 건가? 팀 작업이다.

2012년 1학기에 복학했다. 비메오에서 해외 작품을 보다 보니까 저 정도 퀄리티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하는 방법도 모르니까 팀으로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때 제일 이슈가 됐던 게 스티브 잡스다. 마음 맞는 사람 셋이서 스티브 잡스 사망 1주년 기념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재밌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보다 너무 모르는 거였다.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 사람의 철학이랑 우리의 철학을 담아내는 데 셋다 자기의 명확한 시선이 없었다. 나는 나름의 시선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을 설득하려다 보니까 내가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우리가 뭘 멋있게 느꼈나 얘기하다 보니 그 사람은 자기의 직관을 믿고 밀고 나갔던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학생 때는 그런 것이 멋있어 보였다. 그때는 많은 것에 휘둘렸으니까. 


평범한 삶을 사는 내가 있고 자기 꿈을 펼치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기획이 한 네 번 엎어졌다. 비디오 보드 네 개가 나왔으며 내용과 연출이 다 다르다. 마지막에는 진짜 급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많았지만 적어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결과물은 안타깝지만 기획이라든지 시나리오를 짜고 연출을 하는 방식에 대한 공부는 정말 많이 됐다.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른 팀은 어땠나?

우리는 서로 싸우고 의견 충돌하면서 서로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아 갔는데 , 다른 친구들은 가볍게 접근해서 즉흥적으로 만들고 결과물도 재밌게 나왔다. 그 친구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겠지만 그렇게 보였다. 우리 작품은 경직되어 있었고 그 친구들 작품은 날 것 같은 꾸밈없는 맛이 있었다. 팀작업은 저렇게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결과물을 비교하며 속 쓰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메테리얼 걸 (2015)


<메테리얼 걸> 기획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공익 근무하면서 스케치를 했던 게 있다. 욕망이라는 주제로 해골 같은 캐릭터들이 나오고 명품이 날아다니고, 당시에 마돈나의 <Material Girl>(1984) 노래도 많이 들었었다. “나는 머티리얼 걸이고 머티리얼 월드에 살아”라는 가사에서 차용했다. 2010년의 아이디어에 2013년에 살을 붙였다.

처음에는 잔혹 동화였다. <메테리얼 걸>은 동물농장에 살던 주인공이 주변에 갑자기 백화점이 생기면서 삶이 변한다는 이야기인데, 처음에는 주인공이 동물을 하나씩 죽여가면서 명품 비스름한 것들을 만드는 엽기적인 내용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초안이 더 재밌다는 평이 많았다.


CJ문화재단 지원받을 당시의 이야기는 어떤 상태였나?

초안으로 받았다. 지원이라는 걸 처음 받아봤다. 학생이니까 아르바이트해서 몇 십만 원으로 한 달 살았는데, 한 번에 통장에 천만 원 넘게 꽂히니까 너무 부담이 됐다. '이 시나리오로 확신도 없는데 내가 해도 돼?'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나리오 좀 봐달라고 감독님들이라든지 주변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정말 몇 번을 고쳤다.

 

어떻게 알고 찾아갔나?

오성윤 감독님은 CJ 문화재단 지원할 때 심사위원이셨다. 그때 당시에 시나리오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다. 그래서 그냥 찾아갔다. 재학생 때 저 사람 내용 참 잘 쓴다 느꼈었던 선배님들 그리고 업계에서 일하고 계신 선배님들, 페이스북 친구로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찾아가서 물어봤다. 이렇게 당돌하게 접근을 해도 작업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람들이 호의적이었다.


<메테리얼 걸>은 졸전 때까지 완성을 못했다. 

2013년에 4학년이었다. 2013년 12월이었던 한예종 졸전 마감은 포기하고 2014년 2월에 있던 CJ 상영회 때 급하게 완성을 해서 상영을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너무 창피했다. 인생에서 수치스러웠던 기억 중에 하나다. 상영이 끝나고 정신 차리고 2015년 졸업할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만들었다.

2013년에 경험했던 게 시나리오 갖고 뒤집어 바꿔봐도 기간만 길어지지 결과물이 안 나온다는 걸 알았다. 곽기혁 선생님을 찾아뵀더니 원동화만 죽어라 해봐라 해서 원동화만 해봤다. 2014년 버전이랑 지금 완성된 버전의 장면은 다 똑같다. 이전 버전에 원동화랑 배경만 처음부터 다시 다 그렸다.

 

학교를 수료한 상태에서 작업만 얼마나 했나?

1년 다 썼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아뒀던 돈이 있었고 지원금도 많이 남았었다. 정말 작업에만 집중했다. 


<메테리얼 걸>을 완성한 다음 스튜디오 쉘터로 들어간 건가?

2015년에서 들어가서 2017년까지 다녔다. 졸업 상영회가 2015년 1월 정도에 있었고 그 뒤 반년 정도 백수 기간이 있었다. 시나리오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가서 연출이나 그런 걸 배우고 싶었다. 찾아보니까 <뽀로로>, <코코몽> 같은 유아용 애니메이션 만드는 데 아니면 소규모 제작회사였다. 오돌또기도 가봤는데, <메테리얼 걸>을 보면서 너를 어느 포지션에 집어넣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한 6개월 동안 방황을 했다. 그때 남은 돈을 다 털어서 동남아시아 여행을 갔다. 그리고 돌아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스튜디오 쉘터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튜디오 쉘터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했다. 선임이 키를 잡아주면 그 중간에 애니메이션 채워주는 일을 했다. 


스튜디오 쉘터에서 도쿄예대 입시를 준비한 건가?

졸업하고 나서 스튜디오 쉘터 들어가기 전에 여행을 하면서 깨달았다. 학교 생활은 정말 성실하게 했었는데, 나와봤더니 할 줄 아는 게 없더라. 컴퓨터도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다니면서 서양인들과 많이 섞였는데, 그 친구들은 모닥불 하나만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물만 있어도 수영하고 그랬는데, 내가 너무 놀 줄을 모르고 흥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외국어 한 마디도 못했다. 회사생활이 조금 무료하다는 느낌이 들 때쯤 생에 처음으로 운동을 했고 주말엔 외국어를 배웠다. 제일 쉬울 것 같아서 일본어를 시작했다. 회사에서 한 2년 비슷한 일을 했더니 다른 걸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았다. 2017년 6월쯤 도쿄예대 진학을 생각했다.

도쿄예대 입시 때 뭘 준비했나?

실기는 하나도 준비 안 했다. 제일 불안했었던 게 한자를 몰라서 시험지를 못 읽을 것 같았다. 일본어를 회화 위주로 배워서 시험 6개월 남기고 한자 공부만 했었다.


도쿄예대 입학하니까 어땠나?

어떤 동기들이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 친구들은 서로 다 알고 있더라. 인터넷이라든지 ‘누가 시험을 본대’, ‘누가 굉장히 유명한 애래’ (하는 소문으로) 알고 있더라. 자기네들끼리 패가 나뉘었다고 해야 되나.

어딘가에 속하지 못했나?

아무래도 좀 그랬다. 도쿄예대 처음 들어가면 여러 가지 과제가 있다. 그중에서 팀 작업을 하는 게 스톱모션 과제다. 스톱모션 같이 한 애들이랑 졸업할 때까지 친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걔네들이랑 친해져서 계속 잘 지내야겠다 생각했는데, 나랑 같이 팀이 매칭 된 친구들이 학교를 잘 안 나오는 애들이었다. 내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들어온 거니까 이 친구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물살을 타고 가보자 해서 나도 한 발 물러서서 작업했다.  

 

지도교수는 누구를 지망했나?

나는 평면애니메이션을 할 거였기 때문에 1순위가 야마무라 코지 선생님이었다. 학생의 3분의 1이 야마무라 선생을 희망하더라.


<High and Dry>는 평면애니메이션 수업에서 한 건가?

맞다. 그때 기간을 짧게 주고 선생님이 랜덤 하게 음악 소스를 던져 주셨다. 이거 갖고 아무거나 만들어라. 

 

Brain Cleaner (2018)


<Brain Cleaner>는 언제 작업했나?

<High and Dry> 다음 과제였다. 야마무라 선생님이 Gravity, 중력에 대해 얘기했는데, 설명이 모호해서 학생들 작업이 다 제각각으로 나왔다. 나도 내 멋대로 <Brain Cleaner>라는 걸 좀 길게 만들었다. 며칠까지 내라 그러면 작업해서 수업시간에 다 같이 본다. 야마무라 선생님은 별 얘기는 안 하신다. 그냥 웃으면서 ‘야바이' 이런 식이다. 나한테는 항상 노코멘트였던 거 같다. 

 

학생들은 서로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하는 편인가?

일본 친구들은 많이 조심스럽다. 좋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접대식 멘트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피드백이라는 건 솔직한 의견을 들어야 되는 건데, 동기들이랑 그런 얘기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Brain Cleaner>까지 2018년에 한 건가? 

1학기에 스톱모션이랑 <High and Dry>, <Brain Cleaner> 다 했다. <Brain Cleaner>가 (제작 기간이) 1주 조금 넘었나? 일본에서 생활을 해야 하니까 외주도 같이 했다. <High and Dry>는 더 짧게 걸렸던 것 같다. 작업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몇 장을 그렸고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스톱모션은 한두 달 정도 잡았던 것 같다. 셋이서 해야 하니까 약속 잡고 모이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시간이 걸린 거지 실제 작업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니신라면, 요코하마 블루라인 CM도 1학년 때 작업했나?

그것 말고도 많다. 인터넷에 올릴 수 없는 것들이. 그리고 또 다른 한국에서 받기도 했고. 쉘터에서 유학자금을 모아서 갔는데,  일본에서 생활해보니까 버는 돈은 없는데, 돈을 까먹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외주라는 게 항상 주기적으로 있는 게 아니니까 불안하잖아. 그래서 막 받았던 것도 있다. 

일이 몰려서 벅차진 않았나?

유학생 때는 그거 아니면 할 게 없었다. ​나가면 다 돈이니까.


놀 땐 확실히 놀아야겠고 일할 땐 확실히 일하는 성격인 것 같다.

성격 상 멀티태스킹을 못한다.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한다. 학교 다니면서 제일 부러웠던 게 애니메이션 작업하면서 연애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랑 어디 가서 술도 많이 마시고 공부도 하는 애들이었다.  

 

<메테리얼 걸>은 1년을 다시 작업했는데, 도쿄예대 재학 중 작업량을 보면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메테리얼 걸> 때문에 빨라졌다. 내가 볼 때 <메테리얼 걸>은 별로 좋은 작업은 아니지만 내 일생에서 필요했었던 과정이었다. 1년 동안 작업하면서 손이 빨라졌다. 원동화 작업 속도가 정말 빨라졌다.

 

<죽음의 상인>도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5개월 만에 만들었다고 했다.

4개월, 5개월 그럴 거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도플갱어>라든지 <메테리얼 걸>할 때는 스토리보드랑 내용 쓰는 것만으로도 6개월에서 8개월을 소모를 했는데, 엄청 비약적인 발전이지. (웃음) 머리를 비우고 해 버렸다. 대학생 때는 주변을 너무 신경을 썼던 것 같았는데 대학원 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음의 상인 (2019)


작업할 때 글로 쓰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편인가?

원래는 그렇게 하는데, <죽음의 상인>은 바로 콘티로 들어갔다. 의식의 흐름대로 한 것 같다.   

 

해골과 새라는 테마는 오래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그렸던 것 같다. 중학생 때 낙서할 때도 많이 그렸던 것 같다. 내가 까마귀나 독수리나 이런 동물을 좋아하기는 한다. 이미지로서의 새. 의외로 스피디한 걸 좋아한다. 새의 등 뒤에 고프로 같은 카메라 달고 찍는 촬영이라든지 번지 점프 이런 거 좋아한다. 고소공포가 없다.

 

비행보다는 새 자체의 이미지가 많다. 

새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는 존재 같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왜 나는 계속 새를 그리고 있었을까? 


까마귀와 독수리는 죽음을 연상하게 한다. 해골도 그렇다.

마이너하고 어두운 감성이 있는 편이다. 만화 같은 거 보면 나는 빌런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탐미적이고 신비로운 것들도 좋아했었다. 한 번은 로마의 군인들이 까마귀를 몰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까마귀가 머리가 좋아 로마군을 따라다니면 먹이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로마에 대항하는 이민족에게는 멀리서 보이는 까마귀 떼를 보고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한다. 로마의 장군이 승리를 해서 본국으로 와 개선식을 할 때면 병사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외치며 공식적으로 장군을 디스 하는 전통이 있었다. 개선식 날 장군이 너무 돋보이면 신들의 질투를 사 죽게 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리더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너도 한낱 인간일 뿐이다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그 대목이 마음에 들어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팔에 문신을 하려 했지만 아직 하지 않았다. 

죽음을 기억하고 너도 한낱 인간일 뿐이다라는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스티브 잡스가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말도... 나는 내일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말을 자주 되뇐다.


<상실의 집>은 언제쯤 끝날 것 같나?

2021년 11월까지 갈 것 같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정이나 계획이 없잖아. 그럼 그거대로 늘어지게 되어있다. 마감이 짧으면 짧은대로 하고 길면 긴 대로 하게 되더라. 

 

졸업하고 나서는 취업을 할 계획인가?

(급여가) 따박따박 들어오면 내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울 수가 있다. 생활이 훨씬 더 알차게 굴러가는 거 같다. 프리랜서는 시간은 많지만, 시간 많은 사람이 더 시간이 없을 때가 있다.

 

장기적으로 안정이 되면 하고 싶은 게 뭔가?

지금은 딱히 생각해 둔 건 없다. <상실의 집>이 단편이라서 못했지만 더 담고 싶은 내용들은 되게 많았다. <상실의 집>이 완성된 다음에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 볼까 하는 계획도 있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 나는 계속 변하는 사람 같다. 그림을 보더라도 옛날 그림이랑 지금 그림이 많이 다르다. <메테리얼 걸>과 <죽음의 상인>도 다르다. 항상 다음엔 전혀 다른 거(를 하고 싶다). 어두운 거 두 개를 했으니까 도리어 밝은 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내용 없고 영상미만 있는 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 남미 여행도 가보고 싶다.


온라인 상영회에서 학생들에게 “집중”이 필요하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뭘까 생각했다. 내가 나이 들면서 느꼈던 게 '좋아하는 거를 잃어버리면, 쉽게 말해서 덕력을 잃어버리면 창작이 안 된다’였다. 학교 다닐 때도 덕후, 덕력이 있는 애들이 만든 작품이랑 무던하게 사는 애들이 만든 작품은 발칙함이라든지 상상력이라든지 힘이 좀 달랐다. 평소에도 그 생각만 계속 날 정도로 빠져서 좋아하는 게 집중력인 거 같다. 결국엔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창의적인 걸 할 수 있는 것 같다. 

 

작품을 할 때도 그 상황에 어떤 감정을 그려내기 위해 집중을 하면 그거대로 나온다. 항상 뭔가에 빠져있는 거는 젊었을 때 밖에 못할 것 같다. 덕력을 잃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학생 때는 타인한테 많이 맞췄었다. 그러다 보니까 <메테리얼 걸>도 겉 보기에 예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도플갱어>도 그랬고 <메테리얼 걸>도 처음이 제일 날 것의 맛이었는데, 결과물은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쓴, 날카로운 게 없어지고 무난해진 느낌이라 나중에 후회가 됐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

스튜디오 쉘터를 경험하고 도쿄예대에 왔을 때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도 단편이라면 자기 주관대로 만드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색을 뺀 이유도 그렇다. 색이나 필터 이펙트 써서 예쁘게 만드는 것 보다도 내가 느꼈던 것,  내가 요양원에 있을 때 봤던 노인들의 표정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Zoom 인터뷰 2020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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