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 KANG Minji
- 2020년 9월 24일
- 13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4일

드로잉에서 오브제까지 단편 애니메이션과 광고, 워크숍과 전시 등 15년 동안 포트폴리오를 다채롭게 쌓아온 강민지 감독은 올해 초 연남동에 둥지를 틀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프레임바이프레임Frame by Frame을 법인으로 설립했다. 사람들과 함께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9월, 수도권은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 중이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는 강민지 대표를 만났다.
요즘에 바쁜 일은 없나?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받은 단편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애니메이션 작가, 설치 작가, 만화가, 미디어 아티스트 이렇게 네 명이 팀을 꾸려서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수어로 말하는 대안 학교 학생들과 예술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4개월 동안 하는 건데, 비대면으로 해야 돼서 초반에 기획했던 걸 실행할 수 없게 됐다. 바꾸고 또 변경하고 계속 이런 상황이다. 창의인재 멘티 두 분이 홍보영상 만드는 것의 멘토링도 맡았다.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하는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인가?
10월 말까지다. 10월에 '전국농학생모여라 파티'라는 페스티벌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 페스티벌을 위한 예술 활동을 준비했던 건데, 비대면/거리두기로 변경해서 다른 방식으로 열 것 같다. 대안으로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대부분 카톡으로 소통을 하는데,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수어를 제1의 언어로 쓰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다. 한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단다. 이 사람들한테는 한국어가 제2 외국어다. 문법이 다르다. 카톡은 수어를 해야 되니까 영상통화로만 할 수 있다. 핸드폰을 들고 한 손으로 수어를 하는 것도 힘들고 한글을 아는 친구들은 문자로 텍스트를 하니까 한글을 모르는 친구들은 거기서 소외된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주로 쓰는 단어들, 그런 표현들로 수어 이모티콘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학생들의 수어 표현 동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따서 GIF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순수 미술 작가님이 전시 결과물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아는 작가분을 통해서 들어왔다. 이번에 '프레임바이프레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랑 일을 나눠서 하자 했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었던 애니메이션 하는 후배와 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하고 있다.
여러 개를 운영을 할 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나? 일이 동시에 진행할 때 관리에 대한 책임감도 있을 텐데.
계속 이렇게 해와서 오히려 스트레스가 덜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들어오는 일을 내 손으로 다 만들어서 쳐내는 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프리랜서들 일이 없어진 상황이니까 일이 들어오면 같이 나눠서 해야 된다는 게 더 강하게 생겼다. 제작에서 벗어나서 일정 관리하고 작업 체크하고 미팅만 하니까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다.
뾰루지 (2026)
한서대 영상애니메이션과 졸업작품으로 <뾰루지>를 만들었다.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스톱모션 기법이 섞여있다. 크레디트에 촬영과 연기가 있는데 로토스코핑을 한 건가?
로토스코핑이랑 드로잉이랑 조금씩 섞여있지만 주는 로토스코핑이다. 로토스코프는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드로잉 애니메이션은 시공간을 뒤틀어버릴 수 있다. 그걸 섞었다. 짧게 여러 가지로 촬영을 하고 내가 붙이고 싶은 대로 신Scene과 신 사이를 드로잉으로 이은 거다. 화면 자체가 울렁울렁하게끔 만들었다. 배경도 방 모서리에 문이 걸쳐져 있는 말이 안 되는 방이다. 인물 중심으로 촬영을 하고 드로잉으로 후작업을 한 거다.
학교에서는 주로 재패니메이션이랑 미국 애니메이션 류를 따라가는 느낌이었는데, 재미를 못 느꼈다. 학교 다닐 때 맨날 놀러 다녔던 것 같다. 배낭여행 다니고. 졸업작품 해야 되는데, 뭘 해야 될지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래서 내 상태를, 졸업작품을 만들어야 되는 스트레스를 표현했다.
스트레스받으면 뾰루지가 나는 편인가?
어릴 때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랐다. 아파트여도 항상 숲이 있고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잎사귀 뒤에 벌레들이 알을 차곡차곡 까놓았다. 그런 거 보는 게 재밌었다. 그게 기억에 남았나 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뾰루지>에 나온 것처럼 (뾰루지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내가 어릴 때 봤던 잎사귀 뒤의 빼곡한 알들이 있던 꿈을 꿨다. 졸업작품을 기획했어야 되는 시기여서 이걸 만들어 보자 했었다.
여러 가지 기법을 쓰는 것은 능숙한 기법이 없어서인가, 한 가지 기법을 쓰는 게 지루해서인가?
둘 다인 것 같다. 나는 그림은 여전히 지금도 잘 못 그리고, 왜 잘 그려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 째는 대학 때 처음으로 본 유럽이나 캐나다 애니메이션이 되게 신기했다. 실험 애니메이션 작업을 보면서 나도 저런 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뾰루지>에서도 종이가 구겨진다. 드로잉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매체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애니메이션의 장점인 것 같다. 여러 가지를 다 섞을 수 있으니까.
Hello ! (2006)
<Hello!>도 같은 해에 만들었다. 어떻게 만들었나?
졸업작품을 한 학기 더 해서 2006년 여름 학기에 졸업을 했다. 나는 그때 바로 캐나다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토플 학원을 다녔었다. 너무 힘들더라. 집에서도 계속 반대했다. "그만 하고 엄마의 일을 배워라" 하다가 "뭔가를 보여주는 건 이번 연도까지다"하고 마감을 줬다. 빨리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Hello!>는 대학 때 읽은 착시, 연상에 관한 책에서 본 연상 심리 실험에서 구상했다. 한 사람이 어떤 이미지를 통해 출발하고 그 이미지가 변형되는 과정에 대한 한 페이지짜리 짧은 실험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되게 재미있겠다. 또 여러 사람들이 한 편을 같이 작업하면 혼자 고되게 지루하게 작업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해야지. 그럼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지?' 전화번호부에서 집 주변 단체들의 리스트를 무작정 뽑아서 전화했다. “애니메이션 수업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데 어떠냐?” 여러 군데 계속 전화를 하다가 ‘SOS어린이마을'이라는 전 세계 체인 보육원에서 선생님이 관심을 갖고 와달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이건 아이들과 하면 좋을 것 같다. 조건이 있다. 1년 동안 미술 수업을 해달라” 하셨다.
<Hello!>는 첫 수업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선생님이랑 미팅하고 그다음 주에 바로 아이들과 수업을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 어색할 때 하나의 게임 방식을 만들었다. 내가 그림을 한 장을 던져주고 타이머로 시간제한을 뒀다.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원화를 그린 거다. "픽실레이션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어떻게 하는 거야. 촬영을 이렇게 하는 거야" 장비 주고 아이들이 알아서 하게끔 했다.
(2시간짜리 수업시간에서 만든) 소스를 가지고 한 3주 동안 내가 드로잉하고 채색도 했다. 출연자들 중에 얼굴이 나오는 아이들도 있고 가려진 아이들도 있다. 그 지역에 엄마 아빠가 일을 해서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은 얼굴이 나와도 된다 해서 얼굴이 노출 되어 있다. 가려진 친구들은 얼굴을 감춰줬으면 좋겠다 해서 아이들이 그린 자화상을 내가 합성했다.
<Hello!> 만들 때는 돈이 없어서 ‘헬로'라는 제목의 곡을 몇십 개를 뽑았다. 내가 나름 자르고 믹싱 해서 만든 이상한 음악이 <Hello!>의 배경음악이다. (웃음) 한 달 만에 나온 작품이다. 그런데 나도 좋았고 (같이 만든) 친구들도 좋아했고 예상외로 영화제도 많이 갔다.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집에서도 하고 싶은 거 해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즐겁게 참여했나?
일단 재밌게 해 주려고 신기한 걸 가지고 갔다. 카메라랑 삼각대도 계속 들고 가서 맘대로 보라고 놓고 컴퓨터 노트북도 가지고 가서 설명해주고. 혼자 하다가 너무 버거워지면 미술 하는 다른 친구들도 가끔씩 같이 가서 협동 수업도 했다. SOS어린이마을이 되게 좋다. 산책하면서 가을이면 자연 재료 같은 거로 수업했다. 솔직히 수업이라기보다는 그리고 만들고 노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SOS어린이마을 가기 전에 워크숍 수업을 해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애니메이션 만들게 해 줬으니까 했다.
피아노가 있는 풍경 (2006)
수업은 자원봉사였는데, 실질적인 밥벌이는 어떻게 했나?
2006년 9월부터 내 외주 인생이 시작됐다. 아는 선배가 MBC 드라마넷에서 HD 영화 타이틀이랑 엔딩, 샌드 애니메이션 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너 할 수 있어?” 해서 학교에서 10초짜리 실습해본 걸로 “나 잘한다.” 덜컥 물었다. 두 달 정말 몰두했다.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에서 국민은행 샌드 애니메이션 광고 할 사람을 찾는다고 “잘하시냐?” 해서 “나 잘한다.” 또 덜컥 맡아서 했다.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인터넷에서 광고회사 리스트 뽑아서 “나 이런 거 한다. 프로젝트 있으면 같이 하고 싶다” 메일 보내고 대학 선배들 만나면 “나 이런 거 잘한다. 일 있으면 빨리 물어다 달라”라고 뻔뻔하게 (웃음)
2010년까지 샌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것 같다.
그 후에는 유행이 사그라들었다. 한참 붐이었을 때 그쪽만 파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기엔 샌드 애니메이션이 막 너무 재미있지는 않았다. 일로써만 하고 작업으로는 해본 적 없다.
종이 한 장 (2008)
<종이 한 장>은 외주를 하다가 내 걸 하고 싶어서 한 건가?
외주는 외주대로 가고 단편은 계속 하고 싶었다. 제작지원 처음 된 게 <종이 한 장>인데, 그것도 후순위여서 예산이 되게 작았다. 그때는 적은 금액도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신났는지 열심히 만들었다.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2008년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일반부문 우수상을 받고 정말 희열같은 걸 맛봤다. 그때부터 일중독자가 되어 외주와 단편을 계속했던 것 같다.
<종이 한 장>은 변형된 아담과 이브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존재인데 다른 느낌이 가장 확실한 게 성별이잖아. 그래서 남자, 여자 캐릭터가 됐다. 사실 내가 표현하고자 한 건 종이 한장이 변형되는 재미였다. 남녀의 얘기라기보다는 사소한 의견으로 갈등 상황이 되는 거를 종이 한 장에 담아보고 싶었는데, 캐릭터가 남자, 여자로 되니까 사랑이야기로 비춰지는데, 그건 아니다.
후반부에 종이가 접혀서 화면이 바뀌는데 이건 합성한 건가? 아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접었다. 남자 신에서 접히는 거 여자 신에서 접히는 게 다르다. 남자 신은 남자 신대로 접어서 트레이싱을 다 한 거고 여자 신은 여자 신대로 접어서 또 트레이싱을 한 거다. 수작업이다.
그때 콘진 제작지원 기간이 짧아서 6개월 만에 작업을 마쳤어야 했다. 트레이싱은 내가 다 하고 채색은 색연필로 했다. 그런데 펜 선 효과를 도저히 다 할 수가 없어서 중국에 갔다. 엄마가 조화 만드시는데, 중국에 공장이 있다. 마침 그때 일이 많지 않아서 트레이싱된 종이 몇 박스를 들고 내가 중국으로 갔다. 엄마 공장 직원들은 대부분 삼십 년 넘게 계신 50대, 60대 분들인데, 하이테크 펜을 나눠드리고 사인펜을 드리면서 이렇게 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삼각대랑 다 가져가서 다 된 건 바로바로 촬영해서 디지털 파일만 가지고 한국에 왔다. 2주 만에 끝내서 왔다.
묘아 (2010)
그리고서 <묘아>를 했다. 지금은 고양이를 키우지 않나?
키운다. 남편 작업실에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가 아토고 한 마리가 민지묘아다. 묘아랑 똑같은 애가 나왔는데, 내가 묘아를 너무 사랑해서 걔 이름을 태어나자마자 민지묘아라고 지었다.
<묘아>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묘아를 기억하면서 만들었다. <묘아>에서 보이는 물방울무늬나 달 같은 이미지들이 그 전후로 많이 보인다.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다 담은 건가.
<묘아>는 내 자전적인, 어릴 때부터 2010년도의 나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어릴 때 아파서 학교를 잘 못 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옥상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되게 많았다. 학교 안 갈 때 혼자 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때 하늘이랑 책 보는 걸 좋아했다. 별이랑 달이 뭔가 나와 닿아있는 것 같다는 공상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그게 쭉 이어졌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데 매일매일 달 보고 구름 보는 거 좋아한다. 이제는 아이랑 같이 얘기하다보니 항상 작품에 달이 들어가는 것 같다. 도트는 애니메이션 하면서 좋아했던 것 같다. 드로잉 애니메이션에서 도트 무늬를 그리면 파바바박 틔는 느낌이 나서 빛이 반짝거린다는 느낌이 제일 확실하게 드는 것 같더라.
<묘아>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함께였나?
2006년부터 2009년 2월까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고양이, 강아지를 많이 키우고 치료하고 그랬는데, 유독 얘한테는 감정이 달랐다. 젖먹이 때 나한테 와서 내가 우유병으로 수유를 하면서 키웠다. 똥오줌도 어미처럼 손으로 받아주고, 산책하다 부르면 나무 타서 나한테 점프하던 산책냥이어서 유대감이 남달리 강했다.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환청도 심하게 들리고 충격이 너무 심하게 와서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작업을 했던 것 같다. 작품에 몰입하면서 벗어난 것 같다.
Natural Urban Nature
그 전까지는 드로잉 애니메이션이 주로 보였다면 <Natural Urban Nature>부터 스톱모션으로 완전히 넘어 온 것 같다. 계기가 있었나?
작은 취미 중에 하나가 어릴 때부터 책갈피에 나뭇잎을 끼워 놓는 거다. 너무 예쁘다. 보들보들한 촉감이나 냄새도 너무 좋고. 조금씩 모으다가 어느 날 보니까 너무 많아졌다. 이걸로 애니메이션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지 해서 3년 동안 철마다 몽땅몽땅 수집해 놓았다.
거실에 앉아 있는데, 창문이 얼추 16:9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뭉게구름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는 걸 보면서 '스크린이구나.' 내가 창문을 통해 보는 하늘은 온전한 자연이고 나는 지금 도시의 자연을 이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아니면 강 이런 자연 형상은 마구 뻗어나가는데 우리는 계속 정갈하게 다듬는다. 자연은 다시 뻗쳐 나가고 우리는 또 다듬고 이게 무한반복이다. 자연의 속성과 자연을 도시화하는 이런 반복을 한 편의 작업으로 담았다.
수집은 집 근처에서 했나?
집 근처 산도 가고 최대한 도시를 벗어나지 않은 인근의 작은 산, 길가에 있는 나무들, 정원수에서 수집했다.
나뭇잎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지 않나. 작업하다 수분이 없어서 부서지지 않았나?
내가 만든 건 수분이 완전히 없는 상태의 오브제들이었다. 샌드보다도 고되더라. 샌드는 손만 조금 조절하면 되는데, 얘는 한숨만 쉬어도 확 날아가 버렸다. 디테일하게 움직여야 돼서 숨도 못 쉬고 거의 요가하는 자세로 찍었다. 그게 컷 없이 쭉 가는 원테이크다 보니까 한 신을 하고 끝낼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웬만큼은 다 쳐 내야 됐다. 지금까지 했던 작업 중에 제일 고되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거의 스무 시간 풀로 촬영했던 적도 있다. 이걸 빨리 끝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조급증 같은 게 생겼다. 어느 날 웬만큼 촬영을 하고 밖에 나갔는데,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Natural Urban Nature> 끝내고 나서 (일의) 고됨과 스스로 만들어낸 강박으로 인한 슬픔이 있어서 엄청 쓸쓸했다.
그 후로는 나뭇잎을 모으지 않나?
안 모으는데, 계속 식물에 대한 것, 자연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예 쓰레기를 부각해서 작업하고 싶다.
Souvenir Animation (2012)
안 쉬고 <Souvenir Animation>을 했다.
<Souvenir Animation>까지는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에 대한 실험까지도 해보고 싶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은 신나는 예술 작업이라기보다는 공정에 가깝다. 그런 걸 벗어나고 싶었다. 한 공간에서 묵언 수행하듯이 하는 거 말고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었다. 배낭여행을 하면서 카메라랑 작화지랑 스톱모션 할 수 있는 걸 들고 다니면서 조금씩 클립을 만들었다. 그걸로 기획을 했고 제작지원을 받아서 작업 과정까지 담긴 작품을 만들어 본 거다.
배낭여행으로는 어디를 갔나?
보르도의 실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아서 영화제 끝나고 두 달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천천히 다니면서 그림 그리고 찍고 스톱모션 만들고 했다.
카페 장면에 직접 등장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나?
너무 있다. 아련하기도 하지만 부끄러울 때가 있다. 사실 나는 등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연기자를 섭외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트레일러 한 편 찍으면 실사 영화는 길게는 네 시간 정도 촬영하면 끝나는데, 애니메이션은 이틀은 꼬박 촬영해야 된다. 연기자를 섭외할 수 있는 예산도 없고 스톱모션 원리도 알려줘야 되고 또 너무 여성스럽지도 남성스럽지도 않은 캐릭터를 찾다 보니까 내가 한 거다.
<Souvenir Animation>을 만들고 4년 후에 <Before & After>를 만들었다. 4년 동안 뭘 했나?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으려고 떠났었다. 안시로 (웃음) 칼아츠 실험애니메이션과 석사과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종이 한 장> 제작지원이 됐다. 교수님한테 일 년만 입학을 미뤄 달라고 메일을 보내고 일 년 후에 가야지 했는데, 가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일이 엄청 많았다. 항상 해보고 싶은 소설 표지 작업도 들어오고 애니메이션 외주도 많이 들어오던 때여서 고민을 많이 했다. 유학을 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여기서 활동을 하는 게 맞을까. (유학을) 포기했는데, 계속 아쉬움이 남았다. 다른 작가들 작품을 보면 일관된 색깔이 있는데, 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즉흥적으로 쭉 하다 보니까 지쳤고 <Souvenir Animation>을 끝내고 큰 외주 프로젝트를 하면서 완전히 에너지가 소진됐다.
스톱모션으로 만든 대선 개표 영상 재미있었다. 다양한 떡 레시피도 공부했었을 것 같다.
레시피 공부도 하고 떡도 배달시켜서 다 먹어봤다. 대한민국이 약간 엉망진창이던 시기였다. MBC에 미팅을 하러 일주일에 한두 번 꼭 들어갔는데, 그 무렵부터 <PD수첩> PD들이 로비에서 텐트 치고 시위하고 있었다. 전 국민 대상 생방송이라는 것도 힘들었다. 방송 나오고 욕을 많이 먹었다. <희망의 떡 잔치>가 열한 번 나왔단다. 한 번만 내보내지. 나는 <희망의 떡 잔치>는 곁가지로 재미있게 들어가는 거겠지 했는데, 이게 메인이었던 거다. 되게 고심하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그랬다. 우리 팀원들이 다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좌절감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맞물려서 약간 내려놨다. ‘진짜 쉬고 싶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공부해 보고 싶어서 프랑스 유학을 알아봤다. 내 작업이 제일 많이 간 나라가 프랑스였다. '잠깐 다른 데 가서 살래', '취직을 해볼까'이러면서 안시를 선택했다. 어학원 친구들이랑 끝나고 호수에서 수영하고 퍼져서 놀고 좋았다.
8개월 있는 동안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갔나?
페스티벌이 딱 끝나고 들어갔다. (웃음) 관광 거리의 오래된 집의 방 하나가 내 집이었다. 오르막길 올라가면 상시 전시를 하는 데가 있다. 그것도 여러 번 보고 도서관 가면 애니메이션 필름 되게 많았다. DVD 빌려서 보고 주말에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여행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면서 몇 개월 있으니까 지루해지더라. '내가 일을 해야 되는데, 돈을 쓰고만 있네. 돈을 벌어야겠다. 작업도 하고 싶어.' 돌아오기 전에 <Before & After>를 구상했다.
Before & After (2016)
종이와 연필, 흑백으로 작업했다. 기본으로 돌아간 건가?
색깔 그리고 기법에 대해 고민하는 게 스트레스여서 아예 흑백으로 갔다.
<Before & After>를 생각한 계기가 있나?
안시에서 시간이 너무 많아서 낙서 끄적이다가 ‘미’라는 게 뭘까 생각했다. 화장품에 대해 쭉 썼는데, 모든 화장품의 목적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성형수술도 똑같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다. 재밌다 생각했다. 그러다 혼자 독일 여행을 갔는데, 베를린커뮤니케이션박물관 Museum for Communication Berlin에서 성형수술에 관한 전시를 봤다. 기가 막혔다. 성형수술을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로테스크한 작품처럼 전시해 놨었다. 그리고 지하철, 특히 2호선에서 비포, 애프터 사진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 들고 왜 저렇게 되려고 하지 싶었다.
기획서를 쓰면서 성형외과 의사를 200명 정도 스크랩했다. 그 얼굴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어떻게 이런 의사한테 가서 얼굴을 맡기는 거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남의 얼굴을 디자인하지? (의사들의 외모도) 그들이 말하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얼굴들인데, 어떻게 누구한테는 이렇게 하라고 하지? 하는 것도 이상하고 하이웨스트 청바지, 스키니 청바지를 팔듯이 유행에 따라 의사들이 (성형수술을) 상품화해서 파는 전체 성형 시스템이 그로테스크하고 아이러니했다.
동그리니 (2017)
<Before & After> 끝나고 바로 <동그리니>를 했다. <Before & After> 스톱모션 촬영을 할 때 배가 많이 나온 상태였다. 아기 낳으러 가기 전 날 까지도 이미지 보정을 했다. 임신 상태로 만든 거다.
육아를 하면서 다섯 편이나 만들었다. 어떤 건 2분도 넘는다. 아기 낳고 5개월쯤 됐을 때 되게 무서웠다. 새벽에 우유 먹이고 자고 남편 아침 차려주고 출근하면 아기 하루 종일 보다가 남편 오면 저녁 차려주고 이런 생활을 5개월 동안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고 사람들도 만나기 싫었다. 임신하고 출산, 육아하면서 우울증이 굉장히 심했다. ‘나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랬을 때 다시 손 풀 겸 창의인재 프로젝트를 해보라고 권유받았다. 면접을 보는데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감이 바닥을 쳤었다. 아기 잘 때 조금씩 만들었다.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길게 만들었다.
한 여자의 임신, 출산, 육아를 보여주려다보니까 너무 길어진 감이 있다. 그때 웹애니메이션이 거의 시초여서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길게 나왔다. 한 달에 한 편씩 했다.
3년 후 <물건들>이 나왔다. <물건들>을 하기 전에 외주를, 엄청 했다. 육아와 새로운 가족형태에서 대한 해방, 탈출구였다. 그때 온전히 재택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 남편, 아이, 친정 엄마 이렇게 있었는데, 나의 역할이 이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인 중간 다리 겸 가사, 육아였다. 거기서 정당하게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일이었다. 일에 빠진 동안은 혼자만의 시간이어서 더 했다. 일 할 때 미팅 있으면, “아 미팅! 어디예요? 혜화동? 아 좋아요!” 누가 부천 온다면 “아니에요. 무조건 제가 미팅 갑니다!” (웃음)
물건들 (2020)
<물건들>은 어떻게 시작했나?
아기 낳고 조그만 인간이 생기니까 전에 없던 소비를 하게 되었다. 조금 크니까 기저귀, 분유 같은 게 끊임없이 들어가는데, 사는 것의 두 배 정도 쓰레기가 나오는 거다. 이렇게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이 있었다. 유품을 정리하고 염하는 걸 두 번을 봤다. 아이를 싸는 것과 죽은 사람을 염하는 이미지가 강하게 맞물렸다. 물건을 사야 하는 탄생. 물건을 없애야 되는 죽음. 이런 것을 보면서 소비와 환경에 대한 작업을 하고 싶었다. 사실 <Natural Urban Nature> 때부터도 환경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소비하는 인간으로서?
소비하고 파괴하는 인간으로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에둘러서 말한 게 <Natural Urban Nature> 작업이었다. 자기 검열을 너무 하는 타입인 거 같다. '나는 이러면서 어떻게 작업을 해'라는 생각이 있었다. 끊임없이 소비하고 낭비하고 버리고 또다시 사고 그러면서 많아지는 물건들. 계속 뭔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심과 고독에 대해서 다뤄볼까 생각을 했다.
책상 위에서 모든 것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등장하는데, 실제 물건에 텍스처를 붙였나?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가족들의 버리는 물건을 다 모았다. 몇 가지는 동묘시장에서 샀다. 물건도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염해줄까 하면서 실제 물건을 화선지로 쌌다. 종이죽 형태로.
원래 상태가 아니라 텍스처를 입혀서 시작했는데, 미적인 이유였나? 아니면 작품에 등장했을 때부터 염이 시작된 건가?
작품 안에서 물건들이 일관되게 뭔가를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컵을 비슷한 색깔로 다시 채색하면 컵임에도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오브제로 변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본래의 모습을 감추었다.
다양한 세대의 물건이 등장한다. 뒤로 가면 일상의 사물에서 색깔이 빠지고 지구의 문제를 얘기한다.
맞다. 우주적인 작품이다. (웃음)
작업 과정도 못지않게 힘들었을 것 같다.
드릴, 열풍기, 샌딩기, 가는 거 부수는 거, 녹이는 거, 젖게 하는 게 다 결합됐다. 촬영할 때 그림자 지면 안 되니까 책상에서 멀찍이 이동하는 걸 무한반복하다 보니까 몸이 힘들었다.
냄새가 독하거나 먼지가 많이 날리지는 않았나?
독수리가 날아가고 산이 쪼그라들어서 없어지는 신에서 아이소핑크를 열풍기로 녹이는데, 아무 장치도 없이 했다. 가스를 다 마셔버렸다. 그라인더로 핸드폰을 갈 때 미세 먼지를 다 마셨다. 폐병도 생기고 눈병도 생기고, 이번 작업 유독했다.
붙이는 것보다 해체하는 과정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해체하는 과정은 오히려 쉬웠다. 립스틱을 녹이는데, 한 자리에서 서서히 녹다가 한 번에 팍 쓰러졌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게중심 변하면 팍 쓰러지는데, 되돌릴 수가 없으니 이대로 가자. 이렇게 마음 편하게 갔다. 제일 힘들었던 게 맨 마지막 신에서 테이블이랑 벽면 전체가 종이로 덮이고 하얗게 마르는 장면이었다. 밥도 먹을 수 없는 13시간 풀 촬영이었다. 한 번 종이를 붙이고 촬영하는 게 10분 정도면 그 사이 수분이 말라서 미세하게 색감 차이가 났다. 일정한 시간에 붙이고 찍고 붙이고 찍고를 계속해야 되는데, 1, 2월이어서 손이 엄청 시렸다. 난로를 틀 수는 없고 추위와 습기와 사투를 벌였다.
곁에 머무를게 (2020)
개인 작업도 아니고 상업 작업도 아닌 작업을 했다. 황현성 씨 하고는 상부상조하는 건가?
<뾰루지>부터 황현성 음악감독이랑 했다. <너와 나의 시간>(2018)은 뮤직비디오고 가사 비디오로 <길고 더운 꿈>(2019))과 <곁에 머무를게>를 만들었다. <너와 나의 시간>은 아이를 키우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다. 가사 비디오는 이분이 노브레인 음악 색깔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걸로 팬들이랑 소통하려고 만드는 콘텐츠다. 애니메이션과를 나와서 스스로 많이 만든다. 나한테 콘셉트나 방법적인 걸 물어보곤 하는데, 내가 하면 몇 시간이면 뚝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한테 넘기라고 한다. 내가 팬이라서 해준다.
<곁에 머무를게>의 캐릭터도 그렇고 지난 7월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트레일러도 다 버려진 것들로 만들었다. 신문지, 요구르트병으로 만든 캐릭터다. <곁에 머무를게>는 캐릭터랑 무대 다 만드는데 한 3일, 촬영은 반 나절 걸렸다.
하나 씩 찍어가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이런저런 재료로 작업을 해보는 걸 좋아하는 건가?
첫 프레임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힘들다. 한 프레임 시작하면 나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제 몸이 아니까 시작하고 싶지 않다. 미루고 뻗대다가 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5천 장의 그림을 그려야 끝나는 거라도 하나하나 하면 언젠가 끝난다.
여러 가지 재료로 하는 것도 재밌는데, 요즘에 더 재밌는 건 새로운 분야를 알게 되는 거다. MBC 작업했을 때는 떡 박물관까지 다녔다. 나한테 석유 관련 외주 작업이 두 번 왔다. GS에너지, GS칼텍스(2018). 내가 언제 석유와 중동의 정세에 대해 알게 되겠어. 2019년 이음센터 홍보영상 때는, 점자 학원도 다니고 장애 예술에 대해서 처음 접하면서 신세계라고 느꼈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 생소한 분야를 보는 게 재밌다.
올해 ‘프레임바이프레임’을 만들었다. 혼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잘 해왔는데, 넓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뭔가?
15년, 20년을 꾸준히 작업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가족, 동지가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랑 늙어서까지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작년쯤 50, 60되는 다른 분야의 작가들이 노후를 걱정하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늙은 다음의 내 직업,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할머니가 돼서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두려움이 생겼다. 지금부터라도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나도 신체적으로 힘들어져서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찾지 않을 것이다. 또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지쳐서 떠나게 된다면 슬플 것 같았다. 좋은 작업을 하던 분들이 다 취직했는데, 그것도 나한테는 나름의 충격이었다. 아까 얘기했던 외주 작업을 선배, 후배랑 같이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하는 일들이 많다.
2020년 9월 5일 @연남동 프레임바이프레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