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The Popstar Water Deer and I
고라니 아이돌과 나 The Popstar Water Deer and I | 2024 | 17mins | dir. 이상화 Sasha Lee
SNS와 숏폼 시대의 존재론과 사랑법
수수께끼(들)
“나는 어렸을 때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
이야기는 주인공 베가의 진술로 시작한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신은 그 대가로 심장을 가져갔으며, 심장이 없는 그는 온기를 잃었고, 때문에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채 소외된 삶을 살았다… 베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수수께끼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베가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래서 베가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진술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대화인가? 독백인가? 방백인가? 고백인가?’
베가의 자기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아니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전에 이미 하나의 수수께끼는 시작되었다. 화면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꿈틀거리는 선은 무엇일까? 해변에 모로 누워있는 베가의 모습, 그리고 그 시선에 들어오는 고라니 아이돌의 (90도로 회전한) 모습을 통해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린다. 수직선은 사실은 물결이었다. 처음부터 파도소리에 집중했다면 쉽게 추측할 수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파도소리보다는 베가의 목소리에 우선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수직선을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빛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비록 첫 실마리에서부터 헛다리를 짚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잘못된 접근은 아니다. 빛은 이 작품 전체에서 지나치게 넘치기 때문이다. 고라니 아이돌의 모습은 과장되게 눈 부셨으며, 베가가 누워있는 해변가도 과잉노출처럼 너무 환하다. 반대로 완전히 어두운 상태로 배경을 지워버린 채, 반짝이거나 번뜩이는 섬광으로 채우는 장면도 많다. 이처럼 작품 전체는 노출 과다 (over-exposure)와 노출 과소 (under-exposure)로만 구성된 듯, 적정한 빛의 상태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야기는 처음부터 베가를 ‘이미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어버린’ 상태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삶과 죽음 경계에 있는’ 상태로 바라보게끔 유혹하기도 한다.
빛의 넘침과 부족함은 시각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러한 빛으로 비추는 피사체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실재하는지, 아니면 허상인지, 환영인지를 판단하는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빛의 과잉과 결핍이라는 양 극단 사이를 오가는 이 작품의 피사체, 인물, 사건, 장면, 상황, 세계 등은 쉽사리 우리의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자 실재일까? 어디까지가 허구이자, 환영일까? 그런데 ‘(이 작품을) 본다’라는 문제는 빛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각도와 위치, 자세까지도 건드린다. 수평적인 파도를 수직으로 배치하고, 서 있는 고라니 아이돌을 90도 기울여 등장시키는 시도를 통해, 바라보는 위치를 계속 수정해 나간다. 빛이 ‘시각’과 관련된다면, 바라보는 각도는 ‘시선’에 해당한다.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수직과 수평을 교차시키고 뒤집으면서 우리의 고정된 시선을 뒤흔든다. 고라니 아이돌이 제대로 수직적 프레임 안에 등장하게 되는 장면은 아침에 눈을 뜬 베가의 침대 세팅을 통해서이다. 이 장면마저도 천장 위에서 내려보아야 가능한 시선 설정이다. 하물며 그 안에 배치된 고라니 아이돌은 실체가 아니라 이불 커버에 프린팅 된 이미지일 뿐이다.
본다는 것, 즉 시각과 시선의 고정관념을 맘껏 휘젓고 나면 정확히 오프닝 2분에 다다른다. 또 다른 수수께끼가 바로 거기에 기다리고 있다. 돌연 고라니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이런, 한국어 가사다. 그러니까 첫 2분 동안 뒤죽박죽된 시각과 시선을 정돈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베가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에 (그리고 이에 따라 한국어 자막에) 가까스로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너무나 태연하게 한국어 노래가 들리면, 우리의 청각이 ‘이번에는 내가 흔들릴 차례인가’라며 긴장한다. ‘도대체 왜, 어째서 이 작품의 인물들은 한국어와 영어 사이를 오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아니, 꼭 굳이 풀어야 할까? 왠지 당장 답을 찾아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작품 속 인물들 사이에서는 상이한 언어의 교차 때문에 소통에 지장을 받는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 어쩌면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허용이라고 받아들여도 될 법하다. 아무튼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것을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시각이 겪은 혼돈을 생각해 보면 청각쯤이야 어느 정도 너그럽게 반응할 만하다.
형태, 꼴: f(네모, 동그라미, 세모)=코스모스X카오스
스토리라인만 따른다면 이 작품은 아주 심플하다 할 수 있다. 외톨이 베가가 아이돌 고라니를 추앙하지만, 현실에서는 자기와 정반대 성격의 (비둘기이기도 하고 참새이기도 한) 새와 결혼하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라니를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는 이야기.
단순함은 형태로 명료하게 나타난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 <오징어 게임>이 떠오를 수도 있고, 플레이 스테이션의 컨트롤러 버튼을 연상할 수도 있을 테다. 그만큼 가장 기본적인 도형을 인물에게 할당한다. 베가는 네모, 새는 동그라미, 고라니 아이돌은 세모 (이러한 도형 선택과 배치는 클림트의 <키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자는 네모, 여자는 동그라미 패턴으로 채워진 황금빛 옷을 입고 있으며, 세모는 여자의 옷 끝자락에 작은 형태들로 그려진다. 마치 이 작품의 인물 관계, 즉 베가와 새가 커플이 되었음에도 결코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 고라니 아이돌처럼 말이다).
명확한 형태는 명확한 성격을, 그리고 명확한 움직임을 담아낸다. 베가는 온기를 잃었기 때문에 각진 네모가 어울리고, 그래서 무미건조한 사무실에서 마치 기계처럼 일을 한다. 네모난 베가 이외의 절대다수는 동그라미이며, 이들의 곡선은 베가의 직선, 직각과는 애초에 대비되며, 재잘거리고 활발하다 (아무래도 일의 집중력이나 효율은 베가에 비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곡선이라고 해도 그 형태가 지배적이면 모두들 획일적이게 된다. 세상은 개성을 상실한 동그라미들이 지배하며, 네모난 베가는 이질적인 소외자로 밀려난다.
흥미로운 형태는 물론 고라니 아이돌이다. 세모로 획정되기 이전, 오프닝 부분에서 이미 고라니는 베가의 심장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의 대삼각형 별자리는 고라니의 세모 머리로 연결되는데, 이때 대삼각형을 이루는 한 꼭짓점 별이 바로 거문고자리의 가장 밝은 별로서, 이름이 ‘베가’이다. 그러니까 베가에게 고라니는 (신이 가져간) 심장이며, 고라니는 베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별 (말 그대로 스타)인 셈이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가 형태이면서 성격이고 움직임이라고 했지만, 이들이 늘 안정 상태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작품이 그저 심플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갑자기 요동치면서 직전과 다른 상태로 도약하거나 무너졌다가 폭주하면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은 바로 기본 형태가 흔들리고 뒤틀리는 상황과 함께 한다. 말 그대로 이야기 속에는 안정적인 코스모스와 불안정한 카오스가 엉켜 있다. 눈여겨볼 지점은 바로 카오스를 이루는 형태이다. 카오스에는 거칠게 형태를 왜곡시키고, 날카로운 파열음 같은 터치와 스트로크로 처리한 움직임이 있으며, 단숨에라도 존재를 폭발시킬 것 같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되는 이질적인 성격의 카오스가 코스모스의 질서에서도 만들어진다. 바로 8비트 기반의 비트맵 이미지, 그리고 3D 프로그램에서 가장 기본적인 폴리곤 상태로 구현된 네모난 캐릭터 설정이 카오스 사이사이에 삽입된다. 3차원 기본 도형으로 이뤄진 캐릭터에는 디테일이 생략되어 있으며 (<마인 크래프트>처럼 말이다), 이들은 아주 투박하면서도 건조하게 대량으로 복제되어 배치된다. 게다가 (마치 3D 프로그램을 처음 배우면서 이제 갓 애니메이팅을 접하는 초심자의 첫 과제물처럼) 어떠한 타이밍과 템포 조절, 이지-인/아웃, 키 프레임 설정 등도 세팅되지 않은, 지극히 기계적인 (그래서 더욱 부자연스러운) 움직임만을 반복한다. 그러니까 가장 단순한 형태와 움직임 (그리고 복제)가 만들어내는 ‘형태적으로 원초적인’ 카오스이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는 컴퓨터 그래픽의 초기 형태로 ‘퇴행’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단지 기술적인 퇴행이 아니라, 인물의 퇴행적 심리 상태와 연결될 것이다).
묘하게도 이 상반된 스타일의 카오스 (과하게 폭주하거나, 지나치게 단조로운)가 작품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충돌이 인물들의 심리 상태이면서도, 인물들이 놓인 상황과도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혼란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살아가는 획일화된 회사/사회의 기본 설정값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태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대립과 충돌 사이에서도 고라니 아이돌은 차별화된 자신의 몫을 지닌다. 유려하면서도 강렬한, 그리고 한껏 과장된 댄스 속에서 고라니는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한다. 이 작품에서 고라니의 댄스에 필적할 만한 ‘온전한’ 움직임은 맨 첫 장면의 파도 물결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다는 회사, 사회, 도시라는 인공물 반대편에 있는 자연 자체이다. 그렇다면 (아이돌이 아니라) 야생 동물 ‘고라니’의 로드킬은 자연과 인공 사이의 횡단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예정된 비극이다.
형식, 틀 (새로운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선사하는)
<고라니 아이돌과 나>의 감각을 둘러싼 수수께끼, 그리고 인물들을 이루는 형태, 이 두 요소는 별개의 것일까? 그럴 리가! 이 작품의 진가는 이 둘, 즉 감각적 교란과 형태가 ‘형식’ 속에서 결합된다는 점에 있다. 한마디로 <고라니 아이돌과 나>는 형태 (form)를 넘어 형식 (format)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는 작품이다. 어째서?
다시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모로 누운 베가의 시선으로 바다를 본다. 그 시선을 이어받아 고라니 아이돌을 본다. 고라니 아이돌을 제대로 보려면 시선을 90도로 회전시켜 똑바로 세워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고라니 아이돌이 세로로 긴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담긴다. 이 규격이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 각자의 아이돌을 가장 친밀하게 만나는 형식이다. 바로 sns를 비롯하여 지배적인 플랫폼의 숏폼 포맷이다. 그리고 모로 누운 베가의 자세는 우리가 휴대폰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가장 익숙한 기본 포즈이다. 세로로 긴 숏폼 형식의 프레임이 제대로 드러나는 건 침대가 놓인 바로 그 장면이다. 그러니까 수수께끼 속에서 시선을 여러 차례 교정하게끔 이끌어 간 연출은 영화 스크린 (때론 모니터 스크린)의 가로로 긴 프레임과 숏폼의 세로로 긴 프레임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어디까지나 이 작품은 숏폼을 통해 자신의 아이돌을 만나는 베가의 시선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내세운다.
숏폼과 sns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면 언어 또한 다중 설정이 가능하다. (물론 기술적인 보완점과 제작자의 노력이 변수이기는 하지만) 글로벌 아이돌을 만나는데 언어의 장벽은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 현실이다. 아이돌의 콘텐츠는 AI가 실시간 번역을 해주기도 하고, 친절하게 번역된 자막이 제공되기도 하니까. 차분히 되뇌다 보면 고라니 아이돌이 베가와 주고받는 대사 (그리고 노랫말)는 종종 번역체의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하며 (이 지점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아이돌이 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모아서 재배치한 것처럼 여겨지는 지점들도 여럿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베가의 생활 속에서 고라니 아이돌을 ‘소비’하는 모습들이 점점 더 드러난다. 이러한 장면은 특별하거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훨씬 일상적이고 소소한 지점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혼밥 친구로 식탁 맞은편에서 만나는 모습 말이다. 아이돌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모습이 쌓여갈수록 베가와 고라니 아이돌 간의 대화에 균열과 단절, 시차와 오류가 스며드는 정도도 시나브로 늘어난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화는 어디까지나 베가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상상 속의 연출이다. 그러면서 점차 집착이 과해지다 보면, 베가라는 욕망의 연출자는 상대방인 고라니 아이돌이 하지 않은 말의 여백까지도 자기의 바람에 따라 채워 넣게 된다. 파편적인 멘션을 모아서 매끈한 욕망의 서사로 만드는 것은 단지 말, 글, 대화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베가가 마주하고 바라보는 고라니 아이돌의 모습과 표정, 포즈와 움직임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 상당수는 아이돌 계정에 포스팅된 셀카 사진, 가장 정확한 각도에서 준비된 직캠 영상, 홍보용 일상 화보 등등을 연상시킨다. 즉 애니메이팅 작업으로 빗대어 풀이하자면, sns에 포스팅된 ‘잘 관리된 아이돌 이미지’는 키(key) 프레임이며, 그것들 속에 인비트윈(in-betweens)을 채워 넣어 하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베가와 같은 아이돌 소비자의 판타지, 욕망 속에서 가능하다.
형태의 카오스, 움직임의 카오스는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파편과 분절, 폭주와 도약은 그저 감정의 카오스에만 그치거나, 혼돈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형태와 움직임의 변화와 전환이 점점 빠르게 가속하면서 숨 가쁘게 펼쳐지는 모습은 내면의 심리 상태일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숏폼 사이를 건너뛰는 외부의 상황, 즉 휴대폰과 우리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과거에는 점프컷에 해당하는 연출이 오늘날에는 스킵 기능으로 구현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숨 가쁘게 등장하는 인서트와 몽타주, 점프컷은 사실 우리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숏폼을 선별하고 소비하는 모습 그 자체에 해당한다.
요컨대 <고라니 아이돌과 나>는 영화와 숏폼 간의 프레임 포맷 충돌뿐만 아니라 영상 이미지의 지속과 재생, 편집 속도 등 영화라는 동영상의 전반적인 진행과 연출에서도 형식적 변화를 탐지해 낸다. 말 그대로 sns와 숏폼의 시대에 시네마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고, 따라서 시네마와 우리 사이에 놓였던 전통적 포맷은 무너지는 중이다.
이 모든 혼돈과 해체,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놓인 감독은 어떻게 방향키를 다뤄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감독 이상화는 침착하고 냉정하다. 마치 모든 계산식과 결괏값을 손에 쥐고 있는 듯, 전체의 플롯을 정교하게 배치하였다. 2분의 오프닝에서 나왔던 바닷가 장면은 15분에 다시 등장한다. 이들 바닷가 장면에서 ‘나는 어렸을 때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라는 대사를 동일하게 반복하지만, 그다음 이어지는 문장은 변주한다. 시작의 바다와 끝의 바다 사이, 중간 지점인 7분 24초에 고라니의 로드킬 이미지를 인서트로 배치한다. 그리고 엔딩에 등장할 바닷가로 향하는 경로 중에 고라니 로드킬 사고를 할당한다. 이때 로드킬 사고 운전자는? 그렇다, 베가. 그러니까 오프닝에서 베가가 고라니 아이돌을 만나지만, 막판에 재조합되는 사건 전개의 퍼즐을 맞추어 보면 베가는 ‘야생’ 고라니를 사고로 친 후, 바닷가에서 ‘아이돌’ 고라니를 만난 것이다. 오프닝에서 들려준 ‘죽음’은 자신이 피해 간 죽음이면서도, 자신이 일으킨 고라니의 죽음이 덧입혀진다.
이처럼 <고라니 아이돌과 나>는 스토리라인은 심플하지만, 전개는 카오스가 끊임없이 개입하고, 그러면서도 전체 구조에는 치밀한 계산에 따른 정확한 배치가 이루어진 작품이다. 영화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좇는 모험이면서도, 기존의 영화 연출의 문법을 한껏 세밀하게 정련한 시도이며, 새로운 실험 속에서 감독 특유의 감각과 리듬감을 잃지 않는 증명 무대이기도 하다. 어쩌면 “2024년 현재, 애니메이션은 어떤 모습 (형태가 아닌, 형식)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유력한 답일 수 있을 것이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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