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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Rhino Issue

2시간 전
6분 분량

코뿔소 이슈  Rhino Issue | 2025 |  0:11:04 | dir, 김정한 KIM Junghan


코뿔소와 함께 춤을, 불끈!


# 동물원에 간 소년

소년이 동물원을 찾는다. 

여느 때처럼 동물원은 (인기 있는 동물들 앞은) 북적이기도 하고, (관심이 덜한 동물들 앞은) 한적하기도 하다. 소년의 발길이 머문 곳은 웅덩이가 있는 제법 큰 우리이다. 아직은 텅 빈 곳, 여기서 소년은 시선을 두 번 빼앗긴다. 우선, 건초더미를 던져 넣는 사육사, 그리고 물속에서 솟아 오른 코뿔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겪는 찰나적인 사건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나 짧은 시간이어서, 때론 인상, 혹은 충격, 아니면 자극, 경우에 따라서는 트라우마 등등으로 이름 붙이기도 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 즉시 반응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고 금방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무의식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나타나기도 하고, 은밀하고도 은은하게 우리 내부에서 끊이지 않는 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판단하기는 어렵다), 우리와 마주친 순간, 어떤 스위치가 켜진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된다.


소년은 2차 성징이 시작된 사춘기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모든 것이 변하고, 소용돌이치고,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친구, 가족, 친지, 이웃,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이전의 관계는 새롭게 조정되어야 한다. 새로운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관계가 헝클어지기도 하고, 관계를 업그레이드해야 하기 때문에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한없이 고독해지기도 하고, 더없이 갈망이 일기도 한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그래서 더 소극적이거나, 아예 공격적으로 굴기도 한다. 

코뿔소는 그렇게 사춘기 소년의 혼돈 속으로 들어왔다.


# 동물원을 좋아하세요?

동물원에는 동물이 산다. 

갇혀 살거나, 보호받으며 살거나. 본래의 서식지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도 굳이 강제로 끌려와 있거나, 멸종 직전의 위기에 놓인 몇 안 남은 개체가 간신히 구조되어 세심히 관리받거나. 최적의 서식 환경을 유지하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수용소와 별반 다름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육식 동물은 고기를, 초식 동물은 풀을 제때 공급받으므로 애써 사냥할 필요도, 계절에 따라 이동할 필요도 없다. 평화 또는 권태, 관리 또는 방치, 야생 또는 야만... 이 모든 대립과 모순이 공존하는 곳에서 인간은 동물을 (마찬가지로 동물은 인간을) 구경한다.


화가 앙리 루소는 동물원을 즐겨 찾곤 했다. 그가 그곳(그리고 그 옆의 식물원)에서 관찰하고 스케치한 동물과 식물은 그의 캔버스에서 이국적인 열대 정글의 이미지로 재탄생하였다. 고갱이 타히티 섬까지 간 것에 비해, 루소는 파리의 동물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추어 화가로 시작한 18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떠난 1910년까지 루소가 줄곧 방문한 파리의 식물원(Jardin de Plantes)과 그 안의 동물원(Ménagerie)은 그저 평온하기만 한 낭만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로이센 군은 파리를 봉쇄했다. 식량난에 시달렸던 파리 시민들로서는 궁여지책으로 동물원의 동물들을 잡아먹어야 했다. 그중 한 곳이 파리 동물원이었다. 전쟁 속 기근의 상징과 상상 속 열대 정글 사이에는 불과 20년도 안 되는 시간차가 놓여있었다. 


동물원에는 그렇게 멜랑콜리한 기운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 내가 뭘 본 거지? - 시선과 터치, 그리고 색 

애당초 동물원이 구경거리와 구경꾼이라는 시선의 그물망 (일방적이긴 하지만)을 기반으로 삼고 있듯이, <코뿔소 이슈> 또한 시선들의 교차와 충돌로 짜여 있다. 


처음부터 줄곧 내려다보는 새들의 시선. ‘내려다본다’는 위상 설정 때문에 소년은 늘 그 시선의 대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반면 소년의 시선은 새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꽂힌 것은 코뿔소와 사육사이다.


코뿔소 이슈 (2025)
코뿔소 이슈 (2025)

그런데, ‘찰나적 사건’이란 시선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면서 이내 시선의 속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라는 상황이 바로 시선을 둘러싼 의구심을 낳는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의 시선을 확인하려 하고 조정하려 한다. 친구들과 가위바위보 하면서 두 손을 꼬아 만든 틈새, 그 사이로 건너다보는 웅크린 자기 모습, 말뚝박기의 술래가 되어 몸을 수그렸을 때 자신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뒤집힌 세상, 그 너머로 보이는 친구... 그렇게 끊임없이 재조정되는 시선 속에서 세상과 나는 이전과 다른 질서를 꾸려 나간다.


하지만 제아무리 시선을 새롭게 교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에 놓인 대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그다음 방법은 직접 만져보는 것이다. 더듬고 훑고 누르고 찌르고 쓰다듬는 식으로 대상을 접촉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따뜻한지 차가운지, 거친 지 부드러운지, 딱딱한지 물렁한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허상인지 실체인지 판단할 수 있다. 


소년은 터치를 통해 비로소 욕망의 구체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기만 했다면 그것은 신기루이거나 허깨비, 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터. 그러하기에 조심스레, 찬찬히, 눈 대신 손으로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여) 파악하면서, 욕망은 형태를 갖추고, 질감과 온기를 전하며, 무게와 부피를 채운다. 


두근두근, 그러다 돌연 불끈!


욕망이 실체로 확인되는 순간, <코뿔소 이슈>는 경계심과 분출 사이의 긴장된 대립 상태에 놓인다. 한껏 조심스러움과 용솟음치는 에너지 간의 아슬아슬한 균형, 그러다가 결국 어느 쪽으로든 흘러넘쳐버리고 말 전개. 


푸른색 라인으로 그려진 형태들, 테두리는 매끈하지 않고 거칠고 우글댄다. 선이 푸른색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차리게 되는 계기는 코뿔소의 분홍과 대비를 이룰 때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간 목욕탕에서 다른 남자 어른들이 붉은색 라인으로 그려질 때이고. 그렇다고 대뜸 ‘푸른색’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고 섣불리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함께 목욕탕에 간 친구들도 여전히 푸른색 라인을 유지하니까 말이다. 


선이 지니는 색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굳이 어느 하나의 특정한 상징으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비는 그저 별다른 색깔이 없는 (혹은 다른 색깔을 용납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나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색은 코뿔소를 따라갔을 때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마티스와 루소와 고갱의 화폭을 닮은 세상)에서 비로소 풍부해진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 잔뜩 움츠린 상태로 색을 감추었다가, 코뿔소와 함께 하는 세상에서 맘껏 분출하듯이. 그런 점에서 색은 욕망이고, 생명력이고, 자유이며, 긍정의 기운이다. 


욕망의 긍정, 생명력의 긍정을 통해 화려한 색감이 살아남으로써 시선은 회복된다. 마찬가지로 열대의 숲에서 코뿔소와 함께 추는 탱고는 터치의 절정이기도 하다. 몸을 맞대고 서로의 무게를 상대에게 싣고 받아 주는 신뢰의 춤, 밀고 당기면서 둘 사이의 거리를 맘껏 넘나드는 춤, 이전까지 자신을 옭아맨 긴장의 끈을 비로소 끊어내면서 유쾌한 해방감을 만끽하는 춤. 


그렇게 <코뿔소 이슈>의 엔딩은 낙원을 지향한다. ‘그래야만 합당한’ 엔딩 풍경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 작품은 마치 당연한 결말을 향해 순탄하게 흘러가는 작품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자. 그렇게 쉽게 가는 작품이 아니다.


# 본 것, 감추는 것, 드러내는 것

작품 제목을 다시 보자, 코/뿔/소/이/슈. 

그러니까 이 작품은 ‘코뿔소’의 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뿔소가 ‘이슈’가 되는 상황을 찬찬히, 묵묵히, 그러면서도 꿋꿋이 짚어 나간다. 이때 이슈는 난리법석 소란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다. 


즉 코뿔소의 이슈, 코뿔소에 대한 이슈, 코뿔소에 의해 일어난 이슈, 코뿔소를 둘러싼 이슈를 관통하려면 다음 세 가지 질문을 거쳐야 한다. 첫째, 무엇을 보았는가? 즉 “불현듯 솟아난 욕망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가?” 둘째, 그 욕망을 어떻게 스스로 규정할 것인가? 즉 “나는 그것을 ‘코뿔소’라는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는가?” 셋째, 나의 욕망을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감출 것인가? 즉 “코뿔소를 기꺼이 이슈로 만들 것인가, 그리고 코뿔소 이슈를 가지고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코뿔소 이슈 (2025)
코뿔소 이슈 (2025)

감독 김정한은 이슈를 둘러싼 난제를 풀기 위해 반복해서 고민했다. 그의 이전 작품 <기니피그 숨기기> (2022), <그늘의 고라니> (2023)는 <코뿔소 이슈>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기니피그, 고라니, 도마뱀, 코뿔소라는 동물들은 분명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 두 작품은 ‘숨기기’와 ‘그늘’을 통해 최대한 욕망의 존재를 감추려 하고, 간신히 드러내는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코뿔소 이슈>에서는 부정이 아닌, 긍정의 드러내기가 중심을 차지한다.


세 작품의 관계가 습작을 통해 완성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인지, 아니면 같은 주제에 대한 변주인지, 또는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 끝에 다다른 최적의 결과물인지는 당장 결론 내리기 어렵다 (아무래도 감독 스스로가 이전 작품들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공개할지 아닐지의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욕망의 관계를 다양한 동물의 형상으로, 그리고 그만큼의 다양한 시선과 태도로 바라보고 다가가는 동안, ‘이슈’는 매번 그 모습과 파급력을 바꾸어 나갔을 것이다.


그랬을 때, 감독 자신은 욕망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자 했을까? 기니피그는 작고 여리다. 연민의 대상이었을 테다. 고라니는 의외로 강하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하듯, 수컷 고라니에게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고, 그것은 감독에게 마치 페니스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코뿔소는 강하고 굳건하지만, 작품에서는 어린 코뿔소의 부드러운 면모를 지니기도 한다. 


스스로 욕망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과 그것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감추는 것 사이에 놓인 것이 바로 <코뿔소 이슈>에 등장하는 도마뱀이다. 도마뱀은 코뿔소처럼 분홍색이다. 기니피그처럼 작고 여리고 부드럽다. 특히나 조심스럽다. 도마뱀이 소년의 피부를 훑으며 밖으로 나오기에 시각에서 촉각으로 확장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도마뱀은 소년을 줄곧 내려다보던 새들에게 잡혀서 뜯어 먹힌다. 그렇다면 욕망이란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었어야 하는 걸까?


소년 (그리고 감독 김정한)의 선택은 그늘 속에 감추는 대신 더 튼튼하고 든든한 코뿔소로 드러내는 것이다. 새들의 부리에 쪼이지 않는 덩치, 쉽게 찢어지지 않는 단단한 살갗, 그러면서도 듬직하고도 따뜻하게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 이슈를 덮기보다는 이슈를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기세와 추진력. 이러한 선택에 이르기 위해서 기니피그, 고라니, 도마뱀의 형태를 거쳐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엔딩에서 간과한 것은 이슈가 코뿔소와의 탱고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코뿔소의 뿔이 잘려 나갔다. 그 자리에 피가 흐른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파멸로 끝을 맺지도 않는다. 잘려 나간 뿔의 자리에 원추형 빛이 내려앉으며 더 길고 강렬한 뿔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서로 부둥켜안은 두 존재가 빛을 타고 하늘로 상승한다. 코뿔소와 소년이 다시 서로와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도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 드러내기와 감추기, 긍정과 부정의 지난한 교차 속에서 김정한이 찾아낸 이슈 해결책이다. 결코 쉽게 주어진 당연한 귀결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코뿔소 이슈>를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한정시켜 바라보는 것, 심지어 그러한 주제에 대한 판단하는 것 (최악의 경우에는 심판하려 덤벼드는 것)에 급급해한다면, 작품에 다가가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꽤나 헛된 수고를 하고, 심지어 있지도 않은 허방다리에 제 스스로 처박히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공연히 이 작품을 ‘뜨거운 감자’라고 지레 여겨 “어맛, 뜨거라!”하며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무엇보다, <코뿔소 이슈>는 우리 자신의 ‘코뿔소’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우리 내면의 모습, 특히나 우리 스스로 당황하여 애써 부인하거나 무시하려는 모습, 바로 욕망과 정체성이 뒤엉킨 그 모습, 그림자 속에 감추려는 모습. 그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까,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을까? 그만큼의 고뇌와 진심으로 다른 이의 코뿔소를 대할 수 있을까? 저마다의 코뿔소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인디의 별, 확장하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우주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토성을 태양계의 끝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지동설 덕분에 태양계라는 구조가 가능해졌지만, 천동설 때에도 지구를 중심으로 한 천구의 행성계에서 토성은 가장 바깥 자리에 있었다). 1781년에 천왕성을 발견하자, 갑자기 태양계는 이전에 비해 두 배나 커졌다. 1846년 해왕성의 발견은 태양계의 영역을 추가로 50% 더 확장하였다. 행성과 별(항성)을 구분하게 되면서 우주는 태양계 중심에서 벗어나 은하 중심으로 더욱 커졌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가 속한 은하 하나(물론 태양계보다는 훨씬 크다)를 우주라고 여겼다. 1920년대 초 허블이 안드로메다를 ‘우리 은하’ 바깥의 또 다른 은하로 관측하면서 우주는 더욱 커졌다 (게다가 계속 팽창 중이다).


영화제들은 자신이 선정한 작품들로 별자리를 꾸리면서 저마다의 우주를 만든다. 서울인디애니페스트 역시도 매년 ‘인디의 별’을 포함한 멋진 작품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독립 애니메이션의 우주 위에 띄운다. 그들은 이전의 작품들 사이에서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때론 이제까지 다루지 않았던 영역의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별의 발견으로 우주의 범위가 확장되기도 한다. 서울인디애니페스트가 탄생하기 이전이었던 1999년, <아빠하고 나하고>는 ‘가정 내 어린이 성폭력’을 다루면서, 독립 애니메이션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의 영역을 새롭게 펼쳐냈다. 2016년, <아버지의 방> 또한 가정 폭력이라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애니메이션에 담아내면서 소재와 표현의 범위를 한번 더 넓혔다. 그리고 2026년, <코뿔소 이슈>는 다시 한번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우주를 확대시키는 별로 떠올랐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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