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New-World Tour
뉴-월드 관광 New-World Tour 2024 | 9mins 20secs | dir. 이문주 LEE Moonjoo
그 여름, 노스탤지어의 바다에는 다정한 바람이 불었다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뉴-월드 관광>이 첫 선을 보인 서울인디애니페스트 2024의 프로그램 노트에 <안 할 이유 없는 임신>(2023)의 감독 노경무는 위와 같이 적었다. 이문주는 이 문장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상영 후 개인적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감독은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라는 표현을 프로그램 노트에 담은 젊은 후배/동료의 반응에 고마움뿐만 아니라 적잖은 안도감을 갖는 듯했다. 자신의 작품이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이는 단순히 감동을 주고받는 문제가 아니다. 창작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 추억이 그저 막연히 ‘노스탤지어’라는 감흥으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에는 왜곡과 편견, 나아가 감상주의가 끼어들 위험이 있다. 그리하면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는 가볍게 소비되고, 쉽게 잊힌다. 이문주가 경계한 문제이고, 노경무가 속 깊게 받아들인 지점이다. 노경무는 ‘겪어본 적 없는’이라는 문구로 노스탤지어를 수식한다. 그리고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로 노스탤지어를 풀이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막연히 정서적으로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통해 창작자의 의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뉴-월드 관광>을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마침 영국의 감성사학자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의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가 번역, 출판되었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부제는 노스탤지어를 ‘위험한 감정’이라고 강조한다. 위험은 노스탤지어 자체에 해당하는 게 아니다. 노스탤지어에 부여되는 복합적인 감정이 위험하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과거를 낭만적, 이상적으로 대하는 정서가 위험하며, 다른 한편으로 노스탤지어가 우리를 유혹하는 마성의 힘이 위험하다. 그만큼 치명적인 매혹이다. 그리고 책표지 제목 상단에 “인간은 왜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는가”라는 문구가 놓였다. 노경무의 문장과 대구를 이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연치고는 절묘하다.
이문주는 이러한 감정 놀음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조심스러웠고, 그만큼 절제했다. 영화제 폐막식에서 “인디의 별” 수상 소감을 전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차분했다. 자신의 작품이 상을 받을 줄 몰랐다고 했다. 그렇다면 뜻밖의 수상작 호명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거나, 급작스레 감격이 북받쳐 오를 법한데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았다. 혹여 일말의 기대를 했다면, 이미 자기 스스로 격정의 순간을 걸러냈던 걸까? 알 수 없다. <뉴-월드 관광> 제작 과정 속에서 감정의 격랑을 돌파하면서 종국에는 절대적 평정심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다.
오히려 이문주가 우리에게 되물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왜 이 작품을 감동이라는 감정의 상태로 몰아가는 거죠?” 또는 “왜 노스탤지어에서 과도한 감정의 이입을 시도하는 거죠?” 물론 이 정도로 건조한 표현을 쓰지는 않을 테지만, 이문주는 자신의 작품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뉴-월드 관광>은 꽤 치밀하게 정련된 호흡으로 진행된다. 무엇보다 과거의 추억에서 시작하지만, 결코 사적인 기억으로 수렴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래서 한 가족의 사진첩을 많은 사람들이 들춰 보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가 본 것은 이문주의 가족 앨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족 앨범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경로를 확보하고자 한다. 어떻게?
가족 퀘스트: 일단 터미널까지
1978년 여름, 서울. 평범한 가장이 네 딸과 아내를 데리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가용? 아직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대임을 고려한다면, 그리 일반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지하철? 음, 서울역에서부터 종로 일대를 거쳐 동대문, 청량리까지 연결하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1974년 8월에 개통하여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지만, 도심이 아닌 대부분의 주거지역에서는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아니다. 버스? 가장 가능한 선택이지만 아이들과 짐을 생각하면 이 마저도 쉬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 한 번에 바로 가는 노선이 없어서 도중에 갈아타야 한다면, 어휴~. 그렇다면 남은 건 택시. 요금은 제법 나오겠지만 여섯 명 몫으로 나눠보면 감당할만하다.
어, 잠깐, 그런데 가족 여섯이 택시를 이용하려면 몇 대를 잡아야 할까? 아빠가 아이 둘, 엄마가 아이 둘,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눠서 타야 하겠지만, 그러면 택시가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면? 작전을 짜야한다.
일단 아빠가 홀로 택시를 잡는다. 나머지 가족은 그 부근 어딘가에 숨어 있기로 한다.
아빠가 용케 택시를 잡았다면 그다음 단계를 진행한다. 아빠는 커다란 짐을 택시 트렁크에 실으며 택시 기사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시간을 번다.
택시 기사와 함께 짐을 부리는 사이, 잽싸게 가족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아빠의 신호에 맞춰 재빠르게 택시로 돌진한다.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엄마와 함께 뒷좌석으로 파고든다. 그 사이 막내는 아빠 품에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뒷좌석 상황을 확인한 후, 아빠는 유유히 막내와 함께 앞 좌석에 앉는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한 가지 제약을 극복해야 하고, 한 가지 조건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제약부터 말하자면 당시 택시는 국민차 “포니”라는 사실. 소형차라는 얘기다. 요즘처럼 중대형급 택시가 아니다. 택시 기사 포함하여 일곱 명이 소형차 한 대 안에 들어가야 한다. 실내 공간의 용적률을 넘지 않게끔 최대한 밀착해야 한다. 그나마 네 아이가 그리 크지 않아서 가능한 시도이다. 그다음은 조건, 바로 택시 기사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승객의 안전을 위하여, 적정 승차 인원을 준수해야 합니다”라는 교통 수칙이 그 시절에도 있기는 있었다. 간혹 단속을 했지만, 아무래도 일상적이지는 않았던 듯싶다 (더구나 여행을 떠나는 시간은 아침이었을 테니, 단속 시간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 기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이미 게임은 종료되었다. 게임의 룰은 다음과 같다. 빈 택시는 누구를 태울지 선택하고, 택시를 잡아야 하는 사람은 택시 기사에게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 이때 가급적 혼자인 것이 유리하다. 당시에는 ‘합승’, 즉 먼저 탄 승객의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같은 방향의 추가 승객을 태우는 운행 방식이 일상적이었다. 처음부터 동행인이 많다면 합승의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택시는 그냥 지나치곤 했다. 게다가 승객이 여섯 명이면 이미 정원 초과이다. 택시 이용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은 앞에서 나온 ‘히트 앤드 런’이다. 그리하면 택시 기사는 대개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인다. 이미 차 안은 점령당했으니까. 작품 속에서도 일단 택시 탑승에 성공한 가족은 만족한 웃음을 보이고, 택시 기사는 덤덤하게 운전대를 잡는다.
작품의 처음 장면에서부터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이르는, 제목 포함하여 도입부 50초에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관객이 어느 연령대인가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겪어본 경험이고, 누군가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낯선 모습이다. 그런데 바다를 향해 나가는 아빠와 가족의 험난한 대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신속하게 택시에서 하차하고, 트렁크에 실은 많은 짐을 꺼내서 다시 짊어지고, 터미널 매표소에서 필요한 차표를 사야 하고, 출발 시간에 늦지 않게 타야 할 버스를 찾아야 하고, 아이들 하나하나 제 자리에 앉히고, 짊어진 많은 짐을 선반 위에 올려야 한다. 대개 이 와중에 누군가 넘어지거나, 보채거나, 짜증을 내거나, 짐을 얹다가 떨어뜨리거나, 뭔가를 빠뜨리고 왔거나,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 하거나, 아예 엉뚱한 버스에 올라탔거나, 다른 승객과 좌석이 겹치거나, 누가 창가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출발 전부터 이미 술 취한 승객이 소란을 피우거나 등등... 한두 가지 돌발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문주는 이런 대환장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몇몇 장면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집어넣지 않았다. 정신없이 부산하게 출발 준비를 하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아이의 관심 밖이라 구체적으로 기억에 저장되지 않았을 테다. 여행의 설렘이 아이의 기억에 남아 있다면 그 이미지는 간식거리로 집약될 것이다. 출발할 버스 앞에서 엄마와 함께 서서 아빠를 기다린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흔드는 아빠. 모든 것을 해냈다는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한 손에는 버스표, 다른 한 손에는 과자 봉지. 그렇다, 아빠는 해냈다. 버스표를 제대로 구입하는 거야 어른들이라면 당연히 수월하게 해내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아이들은 모른다), 더 중요한 건 네 딸의 구미에 맞는 간식거리를 제대로 꾸리는 것이리라 (하, 이건 정말 어렵다).
어쨌든 타야 할 버스에 제대로 탑승했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가장 큰 도전을 해낸 것이다. 아이들을 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일일이 확인해 주고 나서야 당신들의 자리에 몸을 맡긴다. 안도감 뒤에 몰려오는 급격한 피곤함. 생략된 과정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아빠는 이미 곯아떨어졌다 (생뚱맞게도 나는 그 장면에서 극장판 <짱구는 못 말려: 어른제국의 역습>(2001)에 나오는 짱구 아빠의 회상 장면을 잠시 떠올렸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극장에 함께 간 아빠들을 울렸다는 바로 그 전설적인 장면 말이다).
관객의 퀘스트: 과거 속 기호 찾기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막간 퀴즈 하나. 당시의 여행을 담은 가족 앨범을 펼쳤을 때, 버스에 승차하기까지의 첫 퀘스트를 담은 사진은 무엇일까? 이런, 아직 사진을 찍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서술은 사진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다. 사진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 상황을 경험한 감독의 어렴풋한 기억일 테다. 그런데 그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기억의 정확도가 중요한 것일까?
여섯 명의 가족이 ‘뉴-월드 관광’ 버스를 타고 바다로 가는 여정을 풀어내는 가운데, 이 작품은 우리들, 관객을 위한 별도의 퀘스트를 마련하여 이미 진행하고 있었다. 숨은 그림 찾기와 닮은 듯한, 기호 찾기/발견하기. 아빠의 과자 봉다리를 펼치는 순간 본격적인 게임은 시작되었다. “보름달” 빵, “초코파이”, “사루비아” 막대 과자, “티나 크래카”, 삼각 초코우유, “쥬시 후레시”, “스피아 민트” 껌, 오렌지 주스 등등… 누군가는 정확한 고유 명사로, 누군가는 상징적인 아이템으로 알아볼 수 있다. 여전히 살아남은 장수 상품도 있지만, 어쨌든 당시를 추억케 할 ‘옛날’ 기호들이다.
버스가 출발하여 서울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호-찾아내기 게임은 계속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모습들. 도시는 기호로 가득 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기호는 간판들. 첫 장면의 “근대화 연쇄점” 간판부터 “뉴-월드 관광”이라는 버스 이름, “동대문 종합 시장”, “고속버스터미널”, “상업은행”, “금성 직판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시로 간판들을 찾아 읽어낸다.
간판들 뒤로 한 발짝 물러 서 있지만, 도시를 이루는 더 커다란 스케일의 기호는 건축물들이다. 여기에는 빌딩뿐만 아니라 터미널, 고가도로, 그리고 남산 타워 같은 랜드마크도 포함된다. 당시의 경험치 보유자라면 그 속에서 실제 이동 경로를 구성할 수도 있다.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청계고가도로(삼일고가도로)를 지나면서 삼일빌딩을 거친 후, 남산을 왼편에 끼고 서울의 남서쪽을 지나 서해안으로 향한다.
이처럼 우리는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호 찾기 놀이/퀘스트에 참여하고 있다. 놀이/퀘스트는 다음과 같이 수행된다.
감독과 동년배라면, 혹은 1970년대의 풍경을 관통해 본 자들은 자신의 기억과 작품 속 풍경을 일대일 대응시킨다. 그러면서 기억 속 희미해진 부분을 명료하게 교정하고, 일치하는 부분은 더욱 선명히 보전한다.
그 시기를 겪지 못한 젊은 관객이라면 기호를 경유하여 상상의 연결선을 그린다. 현재의 풍경에 과거의 모습을 오버랩시켜서 두 시간대 사이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고 (이러면 ‘틀린 그림 찾기’ 같은 놀이가 된다), 아니면 1970년대라는 과거의 전형적인 이미지라고 순순히 따르면 된다.
과거의 기호를 찾아서 현재와 연결시키는 이런 작업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시간, 즉 과거와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한다. 그 시간대를 경험한 자들에게는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는 몸풀기이며,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간단한 맛보기를 통해 1970년대에 뛰어들 준비를 해두는 예비 작업이다. 아직 본론의 장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준비를 마쳤고, 무엇이 다음에 나올지 알고 있다. 노스탤지어의 메인 코스 요리가 곧 펼쳐질 테다.
이처럼 본격적으로 노스탤지어에 빠져들기 전에 관객들은 세대에 따른 경험치 차이를 어느 정도 보정하여 균형을 맞춘다. 거리 좁히기다. 동시에 감독은 관객들과 적정하게 거리를 둘 여지를 마련한다. 자신의 사적인 추억 속으로 타인이 지나치게 가깝게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다. 관객의 시선을 감독의 내부 (그리고 가족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풍경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앞서 말했듯 버스에 이르는 경로는 가족사진에 담겨 있지 않다 (지금처럼 여행의 준비단계부터 매 순간을 사진으로 찍던 때가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려서 버스에 오르는 우여곡절의 모습들도 과감히 빼내어 버렸다. 빠진 자리를 상품과 간판과 건축물이라는 기호가 대신 채운다. 풍경은 감독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하지만, 제작 준비 과정 속에서 당시 기록들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일종의 고증을 거쳐 그려졌다. 따라서 감독의 사적 영역에서 풍경을 분리시킨 후, 외부에 놓인 풍경을 관객과 감독이 함께 바라보는 입장으로 정리한다.
이렇듯 몇 단계를 거치면서 관객들의 세대 간 거리, 관객과 감독 사이의 거리, 관객/감독과 풍경 사이의 거리가 재조정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노스탤지어를 맞이하기 위한 사전 준비이다. 뭔가 과정이 복잡해 보이는 까닭은 “겪어본 노스탤지어”와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를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 안, 감각을 깨우기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면서 풍경이 바뀐다. 길가의 나무들, 넓은 들녘, 그 너머 산... 자연이다. 도시를 채우던 기호들이 사라졌다. 이제 <뉴-월드 관광>은 그다음 단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바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감독은 작품 속 인물들의 감각을 하나씩 깨워 나간다. 운전기사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 냄새로 후각이 열린다. 불쾌하다. 그 냄새와 기분을 씻어내려 노란색 포장지의 “쥬시 후레쉬” 껌을 절반 잘라 엄마가 막내에게 건넨다. 조물조물 씹을수록 상콤한 과일향이 입 안에 고인다. 미각 세포가 반응한다. 그렇게 계속 조물거리다 보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과일 맛 껌의 마법일까? 아이들이라면 금세 싫증을 낼 창 밖 자연의 풍경이 판타지 세상처럼 바뀐다. 숲 속에서 네 자매가 간식 파티를 벌인다. 셋째와 넷째는 동그란 “티나 크래카”를 한 입씩 먹고, 첫째와 둘째는 기다란 “사루비아”를 먹는다. 위에서 커다란 “보름달” 빵이 내려오자 사이좋게 네 등분한다. 보름달 빵은 동그란 카스테라 사이에 크림이 듬뿍 채워져 있어서, 부드럽고 달콤하다. 먹다 보면 입 주변에 크림이 묻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맨질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진다. 끈적한 크림을 침 묻은 혀로 핥는 것도 나름 별미(?)였다. 그렇게 과자와 빵의 식감을 통해 촉각까지 깨운다.
숲 속 간식 파티 장면은 아마도 현실에서 꿈으로 넘어간 지점이었나 보다. 입 주위에 크림을 묻힌 채, 셋째와 막내는 양손에 과자를 꼬옥 그러쥐고 잠에 빠져 있다. 볼록해진 배가 들숨 날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운데,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첫째와 둘째도, 엄마와 아빠도 모두 그렇게 잠든 채 여정은 지속된다. 그리고 해수욕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버스는 급하게 주차장 입구로 방향을 튼다. 때문에 잘도 참았던 멀미 기운이 막판에 치밀어 오른다. 부랴부랴 검은 봉지를 씌우고, 꾸웨엑…
이렇듯 버스 속에서 후각, 미각, 촉각이 하나씩 살아난다. 오감의 스위치가 켜진 것은 단지 작품 속 인물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각 장면을 통해서 관객들의 감각도 순차적으로 깨어난다. 캐릭터와 관객 사이에서 감각들이 차례로 대응해 나가는 것은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장치이다. 맛, 향기, 감촉, 메스꺼움은 이미 우리 각자에게 경험으로 축적된 감각들이다. 비록 그 당시의 보름달 빵을 먹어보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카스테라 사이에 크림이 들어간 빵의 부드러운 식감과 달짝한 맛을 즉각 떠올릴 수 있다. 동그란 크래커의 바삭하면서도 짭짤한 맛도 익숙하다. 과일 맛 껌을 씹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안다. 원치 않는 담배 냄새도, 폭발 직전의 차멀미도 어떤 느낌일지 생생하게 다가온다.
작품과 관객이 다양한 감각을 공유함으로써 <뉴-월드 관광>은 노스탤지어를 막바로 감정/감상으로 연결시키는 대신, 그 사이에 경험이라는 매개체를 거치도록 하였다. 노스탤지어가 곧장 감정으로 넘어간다면, 감정은 막연하거나 피상적인 정서적 반응으로 빠질 수 있다 (노스탤지어가 위험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런데 노스탤지어가 감각적 경험이라는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거쳐 간다면,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작품과 만날 수 있다. 한마디로, 무작정 감성적 감정에 냅다 빠져드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각인된 감각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온몸으로 동조하게 된다. 그리하면 <뉴-월드 관광>의 관객은 이문주의 개인적인 추억만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추억을 겹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겪어보지 않은 노스탤지어’가 점차 ‘겪어본 노스탤지어’로 옮겨가게 된다.
바다, 겪어본 감각의 재확인
마침내 도착한 바다. 그들을 실어 나른 버스 옆에서 비로소 첫 번째 사진을 찍는다, 찰칵! 그 와중에 바람이 지나간다. 그 해, 가족 바캉스 앨범은 이 사진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펼쳐지는 첫날의 모습. 네 자매는 알록달록 꽃무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아빠는 연신 입으로 튜브를 불어댄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 아마도 난생처음 바다를 보았을 막내는 “우와~” 감탄사를 내뱉는다. 가족들 저마다 바다에 뛰어들 때, 튜브를 몸에 걸친 막내는 조심스레 엄마 손을 잡고 바닷속을 걸어본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축축하면서도 쫀쫀한 바다 밑 감촉에 돌연 볼이 달아오른다.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딘 흥분과 희열이랄까? 파도가 밀려오며 얼굴에 바닷물을 찰싹 튀긴다. 짭조름하다. 그렇게 바다는 다시 온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느껴진다.
한바탕 물놀이를 끝낸 후, 커다란 수건을 하나씩 뒤집어쓴 채 젖은 몸을 말릴 때, 아빠는 버너에 불을 붙이고 “삼양라면”을 끓인다. 익기도 전이지만 냄새가 이미 전해진다. 뜨거운 면발을 호호 불어가며 한 젓가락 입에 넣는다. 다시 호~ 불어서 국물을 들이켠다. 민박집 대청마루에 여섯 식구가 나란히 앉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는다. 다시 바닷가로 나간다. 이번에는 갯바위에서 석화를 따서 그 자리에서 하나씩 맛본다. 저 낯선 것을 어찌 먹어야 할까? 호로록, 흐물거리는 것 같지만 탱글거리기도 한 감촉에, 시원하고 짭조름하고 살짝 비린 듯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전해진다. 그것들 말고도 갯벌은 신기한 것투성이, 어느새 바다 너머로 저녁노을이 내려앉는다.
이윽고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모기향 연기. 선풍기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민박집 방에 여섯 가족이 저마다의 자세로 누워 잠들어 있다. 오늘 하루가 어땠을지 보여준다. 그들 위로 방 하나를 채우는 모기장이 펼쳐져 있다. 엄마는 막내에게 부채질을 해주다 잠이 들었나 보다. 바닷바람이라도 들어오라고 방문을 열어놓았는데, 그 틈으로 달빛이 스며 들어온다.
7분 40초, 여기까지가 하루이다. 어느덧 이들의 하루는 우리의 기억 속 하루와 무척 닮아 있다. 바닷가의 매 장면에서 우리는 모든 감각으로 반응한다. 갯벌을 밟으면 어떤 느낌인지, 처음 바다 밑바닥을 밟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바닷물이 얼굴에 튀었을 때 무슨 맛이 나는지, 튜브에 몸을 맡긴 채 파도를 타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젖은 몸으로 라면이 끓는 것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참기 힘든 유혹인지, 그때 먹는 라면 국물이 얼마나 천하일미인지, 호호 불어 호로록 라면 면발을 들이켜는 느낌이 얼마나 경쾌한지, 처음 맛보는 석화가 얼마나 오묘한 경험인지, 여름밤 모기향이 어떤 정취를 자아내는지 등등... 그래서 각 상황은 ‘그러하리라’라는 지레짐작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러했다’라는 확신에 찬 우리의 경험으로 넘어온다. 마치 ‘그때 나도 저기에 있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다. 어떤 장면을 더 넣어야 하는지 훈수를 두고 싶어 안달이 날 수도 있다. 버스 안에서 깨어난 오감이 바닷가의 상황들을 통해 다시 한번 반응하면서, 작품의 노스탤지어는 이미 우리 안에서 생생한 과거로 살아나게 된다.
완벽한 가족 사진
다시 바닷가. 갯바위에 올라 한껏 멋진 포즈를 취하는 엄마와 네 자매. 이들을 멋진 구도속에 담고자 열심히 카메라를 설치하는 아빠.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가족사진을 남기려 하나 보다. 렌즈 조리개를 돌려가며 초점을 맞춘 후, 만족한 듯 가족들을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아빠와 카메라를 건너다보는 가족들의 표정도 밝다. 서로가 행복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이 순간은, 그러나, 실제의 기억이 아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돌연 장르를 변경해서 폭주한다던가,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전복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문주는 그저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닌, 자신의 상상으로 그려낸 상황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가족사진을 찍는 아빠는 어떤 모습과 마음이었을까, 다른 가족은 어떤 모습과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본 것이다. 돌연 왜?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짚어볼 과제가 있다.
이 작품은 어디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어째 익숙한 질문이다. 지난달, 김상준의 <메아리>(2022) 리뷰에서 다뤘던 기출문제이다. <뉴-월드 관광>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러 유력한 후보지가 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친숙하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여겨서 다시 바라보는 식이다.
우선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옆에서 찍은 사진 (3분 48초). 오른쪽 구석에 “’78. AUG.”라고 표시되어 있다. 물론 이야기 전체에서 갓 1/3 남짓 지난 지점에서 찍은 첫 사진이자, 아직 본격적인 바다 체험이 시작하기 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4분 내에서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사진은 꽤 멋진 엔딩일 수 있다. 이럴 때, 3분 48초까지의 분량이 전하는 이야기는 ‘첫 가족 바캉스의 좌충우돌 여정기’가 될 것이다. 그래, 사실 여행의 가장 큰 설렘은 준비에서 도착까지의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안에 이미 많은 장면과 사건이 담겨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가장 고된 절차였던 만큼, 기억 속에서도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그다음 적절한 장면은 바로 모두가 라면을 먹는 장면 (6분 16초~6분 25초).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착했고, 첫 바다를 맛보았고, 신나게 놀았고, 맛있게 먹었다. 그림일기로 그날 하루를 그린다면, 하이라이트로 꼽아 그릴만하다. 모두가 만족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며, 아빠와 엄마 사이에 네 자매가 흰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면 가능한 엔딩이다.
멋진 하루를 기념하고 싶다면 모두가 뻗어서 잠든 장면 (7분 32초~7분 37초)이 최적이다. 그 직전에 노을 지는 바닷가 풍경도 여운을 남기기에 괜찮을 수 있지만, 그렇게 노을 장면에서 끝냈다면 왠지 밋밋하고 심심했을 것이다. 한 호흡 더 끌고 와서, 모기향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숨 고르기를 하고, 가장 정적이면서도 가장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천장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장면은 이들 가족의 하루가 어땠을지를 갈무리한다. 작은 방 안에 세팅한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감독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의 말마따나, 실제 일어난 사건의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작품 전체의 시간대도 하루의 시작에서 하루의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매조지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다시 바다를 열고, 거기서 다시 한번 가족사진을 찍는 상황을 마련함으로써, 이문주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대에 새롭게 다가가 보려 한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을 재현해 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억에 없는 부분을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랬을 때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은 그때의 엄마와 아빠보다 더 나이가 든 현재의 나이다. 네 자매를 이끌고 바다를 향해 갔던 부부는 그 이후 어떤 일들을 겪으며 살아갈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뉴-월드”를 미래 어딘가에 두고 살아갔으리라. 현재의 나는 그 이후의 일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한들, 허황된 타임 슬립 장르처럼 과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던 막내 아이가 아니라, 당신네 나이를 건너지른 어른-자식으로서 다시 바라보고 싶었을 테다.
첫 부분에서 언급한 노경무의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이문주의 작업은 이 문장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바로 “노스탤지어를 통해, 겪어본 적 없는 것 (내 부모의 시간)을 이해”하기. 동의하는가?
충분히 준비했으니 이제 마지막 장면을 볼 차례이다. 갯바위 위에 올라 한껏 포즈를 취한 장면을 ‘찰칵’, 완벽한 가족사진을 찍는 것으로 작품을 끝낼 수 있었다 (7분 57초). 초점을 맞추려 조절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 멋진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순간의 전후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이어진다. 카메라 세팅을 끝내고 흡족해하는 아빠의 미소 (8분 7초~8분 9초). 이 지점도 좋다. 피사체로서의 가족을 보여주었으니, 그 모습을 담아내는 시선의 주인공인 아빠의 얼굴도 그만큼 할애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막내, 어린 이문주의 얼굴. 그런데 화면 왼쪽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걸쳐 있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얼굴을 돌린다. 이제 막내의 시선을 따라 엄마의 얼굴 쪽으로 화면이 천천히 올라간다. 그 느린 경로를 따라 우리는 예상한다, 엄마는 당신을 올려다보는 막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겠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불어와 엄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지나간다. 엄마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바다를 바라본다. 그렇게 엔딩.
이문주는 엄마와 아빠, 당신네들이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당시의 온전한 모습을 그려냈다. 아빠는 카메라 뒤에서 최고의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공들였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돌려드려야 한다. 엄마는 바다를 건너다보았다. 네 자매와 함께 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만의 바다를 한껏 즐길 순간을 보낸다. 그 모습이 그날 바다에서 엄마가 보여줬을 표정이어야 한다. <너의 근원> (2010)에서 엄마는 목소리 없이 마지막 손짓으로 그려졌고, <40> (2020)에서 아빠는 갑자기 노인의 옷을 입어버렸다.
마지막 장면 구성을 부모에 대한 헌정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문주는 그리 거창한 표현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어린 막내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하지만 정확히는 현재의 내가 어린 나의 시선을 빌린 것이리라) 건너 편의 아빠를 바라보았고, 자신의 손을 잡고 옆에 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실제의 추억 속에 보너스처럼 가상의 순간을 만들어서 아주 잠깐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었을’ 장면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지금 자신보다 조금 젊었을, 그 여름 당신네들의 그 순간을 비로소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스탤지어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 보기.
2022년 인디의 별 수상작인 한지원의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과 트라우마를 마법 속에서 풀고자 했다. 자식을 옭매는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삶을 놓지 않으려는 젊은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살아내는 힘을 확인했다. 그날도 바다에는 바람이 불었다.
2023년 인디의 별 수상작인 김상준의 <메아리>는 어린 시절,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인 야호맨의 존재를 통해 아파트라는 일상의 장소에서 허물어지는 것과 살아남는 것의 갈등과 인정을 다루었다. 노스탤지어가 공동의 기억이 될 때, 그것이 지닌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주었다. 그날도 메아리는 바람이 되어 잠든 것들을 깨웠다.
그리고 2024년 인디의 별 수상작, 이문주의 <뉴-월드 관광>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모와 가족을 노스탤지어에 담았고, 그것이 단지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공들여서 접근 경로를 만들었다. 감각을 깨울 것, 깨어난 감각을 통해 각자의 경험을 불러낼 것, 서로의 감각과 경험이 공유하는 지점으로부터 노스탤지어를 다시 바라볼 것, 그럼으로써 더 넓은 이해의 길로 나아갈 것. 그 여름의 바다에도 바람이 불었다. 모두를 어루만지는 다정한 바람이었다.
나호원 Joint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