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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 HUR Bumwook

  • 작성자 사진: seoulanimator
    seoulanimator
  • 3월 14일
  • 19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4일

20대와 30대의 끝에 <창백한 얼굴들>(2014)과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2024)를 만든 허범욱 감독은 20대 중반 온 세상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주인공인 <평범한 식사>(2009)로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실종된 손자를 찾는 할머니를 그린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2011)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고 2011년 광진구에서 일어난 고등학생의 존속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갈라파고스>(2019)는 졸업 후 만든 첫 단편이다. 장편 두 편과 단편 세 편, 작품 목록이 단출하다. 초등학교 때 꿈은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였고 고등학교 때는 시인과 소설가였단다.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부딪쳐 싸운다는 면에서는 통한다. 애니메이션도 세상의 폭력과 소외에 저항하는 수단이었다. 또 한 번 긴 싸움을 끝내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그를 만나 애니메이션을 하며 맺은 인연, 고통만큼 낭만도 넘쳤던 시절을 회상했다.


2025년 3월 인터뷰

사건과 상상


<창백한 얼굴들>(2014) 만들고 계획했던 단편이죠. 주로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나요?

‘한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찔러 죽이고 방 안에 방치한 뒤 평범하게 살았다.’ 이 사건을 봤을 때 ‘이게 뭐지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기사를 찾아보니까 성적 때문에 엄청나게 학대를 받았더라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이상하면서 한편으론 괴로운 사회 현상과 사건에 관심이 많은데요. 이 사건도 저의 틀 안에 단번에 들어오는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나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본적인 설정을 잡아 놨어요. 그렇다고 다큐처럼 실제 사건을 재현하는 작품은 절대 하고 싶진 않았고, 이와 연결되어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냈어요.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2011)를 했던 때보다는 뒤인 거예요.

한국영화아카데미 다닐 때부터 비슷한 작품을 해봐야겠다 했는데, 그 사건 기사를 읽으면서 더해진 거죠. 원래 이런 스타일의 얘기를 하려고 기획서를 들이밀었을 때 교수님이 "아직 너 이런 거 할 때가 아니다. 이것보다 평이한 이야기로 영화적인 틀에 맞는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 한다."라고 하셨고, 저도 이에 완전 동의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기획은 깊이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 전에 다른 기획을 냈다는 건가요?

기사를 보기 전 버전인데, 비슷한 내용이지만 여러 디테일들이 빠져 있는 걸 냈어요. 종교 비판에 더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매우 심하게.


졸업하고서 그때 못한 거 지금 해야겠다.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한국영화아카데미 정규과정 다닐 때 제가 만들면서도 단편을 그렇게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첫 장편도 끝낸 후이고 이젠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몇 개 안 만들었는데

몇 개 없지만 만들 때의 느낌이 명확하거든요. 장편하고 단편을 비교해 보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장편이 더 잘 써지고 훨씬 재밌거든요. 그런 면에서 단편은 나랑 성향이 안 맞는구나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처음에 7분짜리 하고 두 번째는 15분 하고 짧은 걸 만들지도 않았어요.

맞아요. 단편을 처음부터 나름 길게 만들긴 했어요. 제가 더 짧은 이야기가 생각 안 나는 것도 있고요. 더 넓게는 장편 시나리오를 쓸 때 ‘그래 이런 건 괜찮지’라는 느낌으로 써지곤 하는데, 단편을 쓰면 ‘뭔가 계속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편 이야기에 확신이 없는 거죠. 그래서 어쩌면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갖고 있던 단편 기획 중에서 제일 만들고 싶은 게 <갈라파고스>였기 때문에 이걸 해야만 모든 것이 명확히 해결되겠다 싶었어요.


2019년에 나왔으니까 2017년 콘텐츠진흥원 지원받았나요?

네, 2017년에 받았어요. 앞서 장편 초기지원에 1번 떨어진 상황이었어요. 장편 시나리오도 계속 맘에 안 들었고요. 첫 장편이 끝나고 2년간 풀리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 이러다가는 정신적으로 망가지겠다 싶어서 단편 제작을 시도한 측면도 있어요. 물론 단편 제작지원도 한 번에 된 것은 아니고요. 2016년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에 떨어졌었어요.


지금 보면은 성적에 연연해서 자식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사람이 있을까 싶거든요. 사건이 일어난 건 2011년이고 제작 들어갔을 때도 시차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가 시대와 맞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학력 우선주의가 없어지진 않을 거다. 다들 품위를 지키려고 말을 안 할 뿐이지 계속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었어요.


호원: 작품이 성적 입시 얘기만 했으면은 과했다 싶은데, 종교를 집어넣어서 맹신 그런 광기가 같이 돌아가니까는 가족에서부터 시작해서 학교도 가고 군대도 가고 종교도 가고 한국 사회에서 폭력이 가장 잘 작동하는 지점을 탁탁 탁탁 배치를 해서 ‘진짜 폭력 마스터 같다.’

(다 같이 웃음)


엄마는 주님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인 것처럼 나오지만, 종교보다는 자기네 성공을 위한 집착적인 기도로 보였어요. 원래는 종교의 폭력성에 더 비중이 있었나요?

맞아요. 비중이 더 많았어요. 너무 심하게 가면 결국 본질에서 벗어날 것이고, 관객들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작지원 한 번 떨어졌던 것도 그런 지점들이 너무 세다는 지적이 있었거든요. 이대로면 절대로 제작을 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방향을 틀게 한 거죠.


종교 비판이

이렇게 심할 필요가 있냐. 만들고는 싶은데 내가 내 돈으로 다 하기 힘드니 어느 정도 타협하고 좀 세련돼 보이게 할 수 없을까 생각을 했어요. 사실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 교회에 가서 기도 하고, 사찰에 가서 절하기도 하고, 심지어 무당을 만나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평이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고, 일반적인 것보다 약간 더 부정적인 종교에 미친 느낌, 특히 개신교에 미친 느낌만 좀 더 주면 되지 않나. 이렇게 조절을 했어요.


종교를 빌미로 내가 원하는 걸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는

‘자식을 성공의 도구로 삼는 거랑 종교랑 비슷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타인에게 자신의 목적을 주입하는 느낌이 저는 비슷하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역시 이것을 이야기로 연결시키면서 너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선을 지켜야 되는데, 그게 어려웠어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보면은 동굴에서 장로하고 청소년 셋이 마주 볼 때 배경에 종교 의식하는 벽화를 그려놨더라고요. 그 부분도 그런 맥락인가요?

그 부분의 종교적인 맥락은 넣지 않았어요. 초기 인류가 동굴에 벽화를 그렸잖아요. 인간화된 멧돼지들도 초기 인류라고 한다면 결국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자기들만의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도 물론 있지만, 그림을 다 같이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완벽한 인간이 돼야 한다는 설명과 토론의 장을 열었을 것이란 설정이었어요.


그 무리는 새 지도자를 신처럼 따르다가 너무 빨리 각성한 것 같아요.

저는 각성이라기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의 냉혹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멧돼지들은 결국 완벽한 인간이 되는 길을 원했으니까요. 주인공 돼지 H가 곧 얼굴마저 완벽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굳게 믿었는데, 그 믿음이 깨질 때의 차가움이 극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거든요. 


호원: 폭력을 다루는 감독은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건 희생당한 사람이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를 마지막에는 판단을 해야 되는 경우가 많아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호원: 이 작품에서 이상하게 계속 구원이라는 걸 던져보더라고요.

‘엄마를 죽였는데 구원받을 수 있겠나’ 엄마가 진짜 최악의 악질이라고 해도 아들인 자신이 엄마를 죽였는데 과연 구원받을 수 있나, 아니 '구원'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릴 수가 있을까,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힘들겠다. 더 최악으로 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최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연결되었어요. 저의 결론은 엄마를 죽였다는 기억을 잊는 것이었고, 그래서 주인공의 머리를 통째로 떼어 가져가는 걸로 한 거죠. 물론, 이것을 만약 구원이라고 본다면 저도 반박할 생각은 없어요.


호원: 이 작품에서 알량한 위안 따위 바라지 마.

결국에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다는 걸 짓궂게 보여주는 거죠.


호원: 허범욱 유니버스 안에서는 쑤시고 목매다는 코드가 있어요. 내가 나를 파괴를 하느냐 아니면 내가 상대를 파괴를 하느냐. 상대는 이미 나를 파괴하는 중이고 방어와 공격 사이에서 어디로 가느냐 그게 있는데, <갈라파고스>는 두 개 다 나오죠. 근데 갑자기 스톱모션 쪽으로 가더라고요.

이 작품을 기획할 때 저는 주인공이 인형처럼 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인공의 과거를 표현할 때는 반드시 스톱모션이어야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후배 김시진 감독*과 같이 하게 되었고요. 추가로 3D도 말씀드리면, 3D는 어떤 면에선 스톱모션보다 더 인형처럼 보이는 기법 중에 저는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레고와 큐브릭 형태의 장난감으로 모델링을 한다면 더욱 힘이 실릴 것이라 판단했어요. 이 3D 파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인 탁도연 감독**과 같이 작업했어요.

*<모스트라>(2011), <거인의 방>(2012), <회귀>(2016)

**<지금 여기에>(2011), <여우소년>(2018) 

호원: 스톱모션 신에서 아방가르드 연극처럼 미니멀한 공간 세팅해서 세 인물만 박아놓고 얘기합니다. 결국 내적 갈등을 얘기를 할 때 그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사적인 얘기를 많이 한 작품 같아 보였거든요.

첫 장편이 진짜 사적인 얘기고요.


호원: 감독 개인의 말고 캐릭터의 사적인 이야기

아, 네. 그런 면에서라면 그렇죠.


여기는 배경이 서울이라는 걸 남산 타워가 보여주고 있어요.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나 <평범한 식사>(2009)의 배경도 서울이고요.

서울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고 서울을 제일 잘 아니까 다른 데는 생각이 안 나요.


2D로 만들어진 세계는 현실이라고 하는데 달동네처럼 산골짜기에 따로 있는 집이에요.

갈라파고스라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억지로 설정했어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옳다고 판단했어요. 이야기와 연결을 확실히 하려면 어느 도시 한가운데 이런 상황이 있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보여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잭과 콩나무』처럼 다들 사다리를 타고 공중섬으로 올라오잖아요. 주인공도 엄마의 무덤에서 자란 식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무슨 결혼식장처럼 모두가 환영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맞아주는 목사 같은 남자는 신이에요?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가 심판을 내려야 되긴 하는데, 그게 정상적이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이 이야기가 '권선징악'은 아니기 때문이에요. 언뜻 보면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로 이상하고 묘한 느낌을 주고자 했어요. 왜냐면 저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 부분을 비꼬고 싶었어요. 또 공중섬에 있는 아이들 머리가 모두 없는 건, 이미 주인공 이전에 이곳을 왔던 아이들인 거죠.

화산에서 올라가는 풍선들을 보면 <업>(2009, 감독: 피트 닥터)이 생각나요.

<업> 생각 안 했어요. 뭔가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느낌이 나는 소품이 필요했어요. 흔히 우리가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면 예쁘다고 느끼잖아요. 근데 그것이 아이들의 텅 빈 머리를 상징한다면 이건 분명 다르게 보일 테니까, 이 아이러니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넣었어요.


공중에 떠 있는 섬은 라퓨타를 떠올리는데, 제목은 갈라파고스예요.

<갈라파고스>가 일본에서 상영했던 제 유일한 작품이에요.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걸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일본을 갈라파고스라고도 하듯이 그들도 비뚤어진 종교와 대학입시로 인한 사회문제가 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주변을 보지 못하고 갇혀 사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거죠.


하늘을 떠다니는 섬을 가지고 왔을 때는 라퓨타를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요. 그들만의 천국으로 생각을 했어요.


호원: 2D로 시작을 해서 스톱모션으로 가고 3D로 가면서 색깔이 확 알록달록하게 바뀌는 세 번의 곡예를 한 거잖아요. 마지막 풍선 천국에는 괴팍하게 짓궂은 냉소적인 느낌이 확 나죠.

그거 보라고 하는 거죠.


호원: 15분짜리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재주넘기를 하면서 스태프 구성도 달라지는 거죠.

네, 다 달라요. 2D, 3D, 스톱모션 완전히 달라요.


호원: 소통 방식이나 제작 기간이나 기존의 작업이랑

소통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결국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기법마다 제작 방식의 차이가 있으니, 그에 따라 연출 지시를 일부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 정도.


호원: 전체는 몇 달이 걸린 거예요? 

1년 조금 넘었어요. 이것도 기간 안에 제출을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뒤에 다듬고 하는 게 좀 걸렸죠.


호원: 스태프 모집은 순조롭게

다 아는 분 들하고 했어요. 그렇다고 순조롭진 않았고요.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웃음)


창백한 얼굴들 (2014)

<창백한 얼굴들>은 제작기가 나왔어요.

장편 제작 막판에 출판계약이 돼 있다고 빨리 쓰래요. 어쩔 수 없이 끝나기도 전에 써야 됐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없었고요. 한 일주일 썼나.


호원: 아카데미 내부고발서 같아요.

예전 제작 백서는 기법 얘기만 있었는데, 그렇게 쓰기 싫어서 ‘있는 대로 다 쓰자’ 했어요.


내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보진 않는 거죠.

봤나 모르겠네요. 출판사 편집자 분은 좋아했어요.


<창백한 얼굴들> 장편 제작 과정은 아카데미 졸업하고 바로 이어진 건가요?

네, 바로 이어져 있어요. 제가 정규과정 다녔던 2010년에는 졸업 후 트리트먼트와 기획서를 제출한 뒤에 최종 PT와 결정 심사가 있었어요. 제 전이 <은실이>(2011, 감독: 김선아, 박세희)였고 그보다 더 앞에는 3개의 작품이 있었죠. <제불찰씨 이야기>(2008, 감독: 김일현, 곽인근, 류지나, 이은미, 이혜영)랑 <로망은 없다>(2009, 감독: 박재옥, 수경, 홍은지)랑 <집>(2010, 감독: 반주영, 이현진 이재호, 박미선, 박은영) 있네요. 제가 다섯 번째인데 앞에 다 공동 연출을 했어요. 


이 공동연출. 저에겐 이게 너무 안 좋아 보였어요. 서로 많이 싸우며 감정도 상하고요. 근데 어쩌면 그건 당연한 거죠. 누군가가 주도를 해야 되고 결국은 시나리오 쓰는 사람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럼 나머지들은 스태프일 뿐이고 이런 불만과 여러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들을 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할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차례 PT 할 때 저는 혼자 하지 않으면 안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원장님께서 “진짜? 그럼 하지 마” 그러시더라고요. 결국 저는 탈락했었어요. 처음에는.


공동연출의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책임을 나누는 거예요?

교육이니까 다 같이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하셨었고 또 애니메이션 제작이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연출자 한 사람이 다 컨트롤할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는 결국 이 모든 말들을 인정하지 못했던 거죠. 영화연출 전공은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할 수 있지.


졸업하기 전에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거죠.

저희 때는 졸업작품이 완성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약간의 텀이 있었어요. 약 2개월 정도. 그때 박지연 작가님이 강사로 오셔서 기본적인 수업을 해주셨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편 트리트먼트를 썼어요. 이후 장편 최종 선발 심사에 선정되면, 그때부터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멘토링받으며 본격적인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이었어요. 근데 이건 2010년과 2011년 제가 다녔을 때의 기준이에요. 지금은 완전히 달라요. 지금은 지원할 때 시나리오가 초고일지라도 반드시 있어야 해요.


원래 이야기는 언제부터  떠올렸나요.

언제부터인지는 저도 확실히 잘 모르겠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20대 초에 NFBC 작품들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의 꿈을 키웠고,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재밌을만한 여러 설정들을 생각해 왔죠.


시 쓰고 소설 쓰고 싶을 때는 어떤 이야기를 썼나요.

뭘 많이 썼는데, 정확히 뭘 썼는지 기억은 안 나요. 개인적인 괴로움을 표현했던 감정만 남아 있어요. 고등학교와 20대 초반에는 매년 신춘문예를 내기도 했고요. 군대에서도 쓰고 했는데, 아쉽게도 남아 있는 게 없네요.


호원: 이런 계열이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앞서 들어간 프로젝트에서 중도 하차한 사람들 대신에 들어가서 기간도 짧고 예산도 적었겠어요.

처음엔 저도 그렇게 전달을 받았어요. 그래도 첫 장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서 모두 받아들이면서 시작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결국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과 비용은 명확하니 그 부분에 있어서 인정해 주시고 예산도 거의 맞춰주신 걸로 기억해요.


감독으로 들어갔는데, 프로덕션 꾸리는 게 마음대로 안 됐다고요.

단편 한두 개 하고 바로 장편을 하는 거기 때문에 인맥도 없고 경험도 없죠. 앞서 장편을 경험한 선배님들한테 연락해서 해결될 것도 많이 없었고요. 각자의 프로덕션 상황이 모두 다르니까요. 맨 땅에 헤딩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죠. 여기저기 연락하고 PD님이 도와주시고 이러면서 맞춰갔어요. 안 되는 것들의 연속이었어요. 다 공부였어요. 



작품 처음에 화려한 우주로 시작해요. 핑크빛 초록빛 성운을 지나 흑백 지구로 들어가는데, 아프리카랑 시나이 반도 쪽이 나와요. 마지막에 감시 카메라가 있는 도시를 보면 팔레스타인 얘기를 하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까지는 안 했고 아시아 작품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아시아 작품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그때는 제가 <페르세폴리스>(2007,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뱅상 파로노)와 <켈스의 비밀>(2009, 감독: 톰 무어, 노라 트메이)과 같은 유럽 작품들에 빠져 있던 시기였어요. 물론 한국어 대사를 들으면 바로 한국 작품인 걸 알겠지만, 그림에서는 국적이 안 보이는 게 좋지 않나 했어요. 


마지막에 식물을 짓밟는 거는 그게 컬러 식물이어서 그런 거예요.

그렇죠. 교육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세상인 거죠. 색깔이 나쁘다는 인식이 심어져 있으니 될 게 없죠.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거다. 


호원: 그 장면에서 어른들이 창 밖으로 내다보는 설정을 집어넣었어요. 안 그랬다면 애들한테 타깃이 가는데 비난 대상인 어른들로 보내줬어요.

아이들은 죄가 없어요. 모두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죠.


지구에서 그 지역으로 한 건 원래 캐릭터 설정을 흑인으로 했었기 때문인가요?

네 맞아요. 그걸 잊고 있었네요. 원래의 설정, 그러니까 <창백한 얼굴들> 이전에 <창백한 태양> 시절의 설정이었어요. 이 세상의 유일한 흑인으로 설정했었거든요. 기억을 되살려주셔서 감사해요.


호원: 장면 잡아놓은 것도 되게 예뻐요.

전 무조건 예뻐야 된다고 생각해요.


호원: 왜 저 감독은 센 거 얘기를 하는데 이쁘게 뽑지?

이야기가 이미 충분히 괴로운데 그림까지 그런다면 저는 보기 싫을 것 같거든요. 그림을 이쁘게 하면서 이야기를 세게 하는 게 저는 재밌어요. 


2015년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제작 과정 발표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인디애니페스트 상영하고 나서 1시간 동안 GV를 한 거예요. 


해초랑 바다 생물로 구성했던 배경 설정을 인상 깊게 봤어요.

감사해요. 그때 현장에서 사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려주신 것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호원: 장소는 어디서 영감 받은 게 있어요?

바닷속을 많이 참고했어요. 해조류를 땅 위로 올린 디자인을 시도했던 거라서


공간은 특별히 염두에 둔 곳이 있는지 그냥 가상의 공간인지

가상의 공간이에요. 실제 공간을 참고한 건, 폐허 된 놀이공원과 마지막에 로켓이 있는 공간 정도예요. 



호원: 캐릭터 디자인이나 컬러 배치나 배경도 장편 프로젝트 특화적인 게 나와요. 이미 있는 스토리로 장편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타협을 한 건지 

제작 여건의 한계가 있는 건 명확하니까요. 제가 갖고 있는 이야기 중에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기획을 선택했죠. 시나리오는 덜도 말고 배운 대로만, 기본만 하자는 마음이었어요. 엇나가지 않고 기본적인 장편 스토리 라인을 성실히 지키면서 연출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 했어요. 캐릭터도 복잡한 것 없이 매력적인 단순화를 하고 싶었고요. 그래도 배경만은 힘을 주고 싶었어요. 저는 배경이 훌륭해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보거든요. 유일하게 배경에만 타협이 없었어요.


호원: 의외로 장편으로 하면서 캐릭터 비율이나 라인 뽑는 거 보면은 이야기의 장르하고 디자인의 장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이 작품은 깔끔한데 센 얘기가 나오니까 그래서 좋은 거예요.

NFBC와 유럽의 영향 (웃음) 제가 일본이나 미국 작품을 더 좋아했으면 이렇게 나오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호원: 특히 이 작품에서는 정전 신이 너무 멋있는데 이 감독이 저걸 하면서 얼마나 짜릿했을까.

맞아요. 스토리보드 그리면서 실제로 짜릿했어요. 제가 연출을 하고 제작은 김도연 감독*이 한 거예요. 저의 스토리보드보를 더 멋지게 살려서 만들어주셨죠.

*<6월의 산>(2010), <지난여름>(2012), <날 사랑하는 게 왜 더 어려운 걸까? >(2021) 


호원: <창백한 얼굴들>에서 만화로 처리를 하는 신 같은 경우는 애니메이팅이 거의 없어요. 만화적인 연출을 의도적으로 한 거예요. 초기에 액자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 전체를 잡아주죠.

그때는 멋있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주는 명확한 연출을 넣고 싶다. 만화 컷으로 하면 제작비의 절약과 러닝 타임을 채우는 역할도 분명 있긴 한데요. 그래도 이건 여러 번 쓸 수 있는 연출은 아니고, 딱 한 번 쓸 수 있다고 봤어요. 그렇다면 이 부분에 쓰면 되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이 부문의 그림 작업은 그 당시 건국대 학생이었던 김영경, 지금은 한지원 감독 작품 PD에요. 제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의 완성도가 나와서 지금도 굉장히 만족하는 장면이에요.


호원: 대저택에 해골 그려져 있는 세팅 ‘배니타스 vanitas’ 그러면서 허범욱의 폭력이라는 게 생의 덧없음을 얘기를 하는 의도도 있지 않을까라고 덕분에 그걸 통해서 다른 작품들도 조금 더 넓게 본 것 같아요.

저만의 숨겨진 의도인데, 만약 관객들이 그걸 읽는다고 해도 이야기의 맥락은 변화가 없어요. 이스터 에그 같은 거죠. 근데 신기하게도 그게 느껴지는지 2014 스페인 히혼영화제 신문에서 '한국에서 온 허무주의자'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어요.

첫 장편 시나리오 쓰는 게 힘들진 않았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생각보다 많이 힘들진 않았어요. 오승욱 감독님**이 저의 1:1 선생님이셨는데, 시나리오를 워낙 잘 쓰시기도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가르치는 것도 너무 뛰어나셨어요. 저에게 장편 시나리오의 기본과 좋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모두 알려주셨어요. 영화적 취향이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점도 한몫했고요. 마른땅에 물 주듯 제가 모든 걸 다 받아들이면서 정말 잘 배웠다고 생각해요.

**<킬리만자로>(2000), <무뢰한>(2014), <리볼버>(2023) 


비록 선생님들은 혼내면서 가르치시지만

저는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잖아요.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 처음이자 마지막 학교거든요. 다 받아들였고 그런 과정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 정희성 시인***을 국어선생님으로 만나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연상호 감독하고 장형윤 감독 만나고 

중요한 시기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던 게 저에겐 무엇보다 큰 복이에요.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돌아다보면 문득』(2008) 


낮에는 스태프들이 작업한 거를 피드백을 해줘야 해서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했어요.

액팅 어떻게 해야 되는지 설명하면 하루가 가는 거죠.


감독님도 그렇게 액팅 경험이 많은 때는 아니었잖아요.

많은 때는 아닌데 저보다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고 업체에 맡겨도 이상하게 하기도 해서 일일이 설명하고 전화 안 되면 메일 보내서 글로 설명하고 이런 과정이 엄청나게 길더라고요. 또 원화를 맡겼는데, 안 하겠다고 던지면 제가 해야 하고 (웃음)


동기나 후배들도 들어왔잖아요.

일단 몇몇 특정 장면, 일부만 동기와 후배분들께 작업 의뢰를 한 거고요. 제일 중요했던 건 이제 막판에 도저히 이 정도 액팅 완성도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후배 진성민 감독****과 제가 옆에 나란히 앉아서 맘에 안 드는 장면들을 하나씩 체크해 가면서 다 뜯어고쳤어요. 그래서 그 정도까지 나온 거예요.

****<잘 자라 우리 아가>(2011), <내 사랑 파이프>(2011), <나는>(2012), <달팽이>(2013), 웹툰 『보고 싶은 얼굴』(2017-2019)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프로덕션 노하우가 생겨서 아카데미 장편 과정이 나아졌나요?

아닌 것 같아요. 각자의 상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직접 경험해 보고 깨져봐야 이해하는 거죠. 다들 그러고 있어요. 결국 경험으로 깨닫고 익히며 배우는 게 교육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인생에서 이때가 제일 괴로웠을 것 같다 싶었는데, 실제로는 어때요?

실제로도 그래요. 이거보다 더한 괴로움이 과연 있을까.


이 괴로움의 시기가 몇 년이었어요?

2년 10개월. 2011년 11월부터 2014년 9월까지 했어요.


회복에는 얼마나 걸렸어요?

스페인 히혼 국제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를 했어요. 빌 플림턴 감독님도 만나고 많은 사람들 만나서 얘기를 듣고 하니 평가가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괜찮게 봤구나’ 그다음에 홀랜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상 받았을 때 ‘한 번에 더 해도 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때 해결된 것 같아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죠.

있긴 했지만 너무 힘들기도 했고 나에게 또다시 장편 기회가 올까 하는 기대 조차를 안 했어요. 첫 장편의 기회마저 기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창백한 얼굴들> 만들면서 ‘이게 마지막이겠다’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욕 많이 나온 이유도 있어요. 학교랑 약속한 기승전결은 명확히 지키면서 이게 나의 마지막 기회이니 후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모든 표현 방법을 동원하자. 욕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예요. 주저하거나 가리지 않고 다 했어요.


호원: 제가 개인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작품 중에 하나가 욕을 많이 쓰는 작품인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그런 시절이었어요.


장편이 둘 다 욕을 많이 하잖아요.

첫 작품이 더 많이 해요.


호원: 이거는 욕을 안 한 라인보다는 욕 라인이 더 많아요.

제가 경험하기로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이 욕을 엄청 많이 많이 하니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면 욕을 가리지 않고 해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10년이 지나 되돌아보면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중고등학생들은 욕이 없으면 얘기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근데 작품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현재로선 들기도 해요. 당시 너무 힘들어서 악으로 버티던 시절이니, 그런 선택들을 더 냉철하게 하기 힘들었던 게 아닌가 해요.


호원: 감독님은 쑤시는 걸로 모든 걸 얘기했는데, 이 작품은 총이 희한하게 쓰였어요.


쑤실 때는 감정이 있는데, 총에는 감정이 없죠.

주인공 민재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캐릭터예요. 그래서 칼로 마구 찌르는 행위로 민재의 서사가 시작해요. 무엇보다 칼이어야 만이 그 열정의 감정이 오롯이 전달된다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두목은 자기 동생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매우 차가운 사람이죠. 냉혈한. 그런 두목에겐 가까이 다가가서 열정을 쏟아내는 칼보다 멀리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방아쇠만 당기는 총이 어울린다고 봤어요.


호원: 총은 기계인 거고 칼은 신체의 연장이니까. 이 작품은 창백하다와 피로 상징되는 뜨거운 그 경계에 있는 거예요. 피가 있는 거는 결국 살아있는 존재인 거고 하얗고 차가운 거는 죽어 있는 존재 같은 거고. 두 대비가 총과 칼로 표현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붉은 손 실사 촬영도 하고 페인트 온 글라스도 하고.

캐롤라인 리프를 한때 좋아했었거든요. 또 제 동기 누나가 졸업작품*****으로 페인팅 온 글라스를 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이 가능했었어요. 슬프고 아련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만한 기법이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당.신.들이 사는 나라>(2011, 감독: 장유경)


호원: 피 묻은 실제 손도 보여주잖아요.

이 모든 게 그림으로 표현된 거짓이 아닌 사실로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갑자기 실사가 나오는 순간, 날고 싶다는 의지가 실제로 구현되면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 또한 현실이 될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호원: 지금 이 나이에 그걸 하면은 오버인데, 젊은 기운에는 당연히 저렇게 해봐야지.

어릴 때였으니까 (웃음)


작품도 그렇고 제작기를 지금 보면 없애버리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지 아니면 그건 나의 과거니까 상관없다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그때만 가질 수 있는 저의 열정과 노력들이 모두 거기에 있어요. 내가 정말 제대로 미쳐 있었구나. 물 불 가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구나. 부끄러움은 없어요.


호원: 진짜 그때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감정들을 솔직하게 쓴 거예요. 근데 그게 지금도 유지가 되면 이 사람은 성장을 못 한 거다.

지금은 다 정리되고, 다 화해했고 (웃음) 오히려 그때 나의 열정들이 남아 있어 다행이지 않나 해요.  


호원: 오리지널 시작점 “창백한 태양”부터 얘기를 들으니까 작품이 좀 더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런 작품처럼 감독은 설정을 아는데 관객들한테는 오프닝 5분, 10분 내에 얘기를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망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 작품이 친절하지는 않더라고요. 대신 장르 자체가 설득력이 있으니까 잘 통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 (웃음)

두 번째 단편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가 가장 대중적이지 않을까.


호원: 그건 너무 서정적이에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를 봤을 때 괴롭다고 생각했는데 <창백한 얼굴들> 볼 때는 편했었어요.

고통에 익숙해지신 건 아닐까.


호원: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도 <창백한 얼굴들>도 시선이 계속 관객을 향하게끔 하는 거예요.

도망가지 말고 들어봐!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 (2011)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에 좋아하는 걸 다 넣었다는 얘기를 했었어요.

제가 NFBC를 좋아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미지적으론 실험적인 영상부터 모노톤의 그림들이 그렇고 산을 비롯한 자연물 그리는 것도 좋아했어요. 또 제가 할머니랑 커서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밝은 얘기는 할 수 없죠. (웃음)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했으니까. 제가 좋아했던 것들의 총집합이었어요.


수묵화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 거예요 아니면 할머니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스타일을 맞춘 거예요.

이야기랑 연결을 해서 그려봤는데 그런 톤들이 잘 맞았어요. 칼라를 다 넣으니까 이상하더라고요.


실제로 작업할 때는 뭘 썼어요?

배경은 모나미153 볼펜과 먹을 썼고요. 캐릭터 라인은 모두 먹으로 그려서 하나씩 스캔을 했어요. 디지털은 합성/효과에서만 쓰는 그런 시절이었어요.


연필로 스케치하고 그 위에 붓으로 그리면은 원래보다 손발이 커지고 이러지 않아요?

그런 크기가 변화하고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재밌다고 느꼈어요. 그때 애니메이팅 과목 선생님이 이문주 감독님이세요. 감독님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렇게도 가능하구나를 알고, 그때부터 제가 붓으로 그렸어요.


붓은 작은 수채화 붓 같은 거나 세필로?

세필하고 수채화 붓도 섞어서 썼어요. 실험처럼 나오는 거는 종이에 끄적대고 있으니까 조득수 선생님이 오셔서 “그래가지고 되겠냐. 옷 갈아입고 와라” 하시더니 어디서 갑자기 긴 하얀 천을 구해오셨어요. 그걸 먹을 푼 대야에 담가 먹물을 잔뜩 머금게 만든 다음, 벽에 던지고 휘두르고 때리면서 뿌렸어요. 대야에 찢어진 종이도 넣으라고 해서 넣기도 했고요. 그게 텍스쳐를 만들더라고요. 선생님이 옆에서 막 “더! 더!” 하고 (웃음)


그때 한국영화아카데미 홍대 건물 지하 전체를 애니메이션 전공이 다 썼었는데, 한쪽 벽에다가 그렇게 1시간 2시간 그러고 있었나. 다들 무서워하면서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끝나고 지쳐서 헉헉대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그거 이제 사진 찍어” (웃음)


호원: 추상적인 것도 한 장씩 그린 게 아니라 쫙 펼쳐놓고 한 거죠. 노먼 맥라렌이 <비건 둘 케어>(1949)에서 필름에다가 쫙 그린 거처럼.

네. 그 높은 벽에 다 있는 거예요. 그거를 하나씩 사진을 찍고 이어서 흐름을 만들고 음악에 맞춰서 바꾸기도 하고, 하지만 교수님은 건물 훼손으로 시말서 쓰시고.


낭만적이네요.

그다음 날 학교의 모든 직원들이 몰려와서 ‘학교 건물에다 뭔 짓을 한 거냐. 왜 그랬냐.’ 멍하니 먹으로 난장판 된 벽을 쳐다보고 있었거든요.(웃음)



호원: 칼아츠는 지하에 실험 전공 수업하는 교실이 있어요. 그쪽 복도가 쫙 그거 하라고 있거든요. 그 벽은 큰 캔버스야.

그래서 시키셨나 보다. 


호원: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는 절제가 되어 있어서 정서적으로는 저한테는 제일 셌어요. 할머니가 대사도 액팅도 제한이 있고 나머지 이미지를 비워서 그려놓는데, 비어 있는 게 사운드로 들어오니까 되게 세더라고요. 보통은 사건 위주로 푸는데, 이 작품은 할머니의 감정으로 모든 걸 바라봅니다.

애니메이션 또는 영화에서 주인공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면 처참한 실패라고 생각해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기본 조건의 첫 번째는 구축한 작품의 세계관 안에서 무조건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고, 두 번째는 캐릭터의 감정에 깊게 들어가야 해요. 손자가 실종된 채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할머니의 심정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절제가 필요하다고 봤어요. 이 이야기는 오로지 할머니의 감정에 대한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감정을 표현해 내려고 노력했어요.


할머니가 산으로 들어가는 썸네일만 보니까 2D인 줄 알았는데, 실사와 퍼펫이 들어가 있어요. 인형 얼굴 보면은 데즈카 캐릭터 아톰 같기도 해요.

아톰이에요.


원래 인형이에요 아니면 작품을 위해 만든 거예요? 

동기가 갖고 있던 인형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자리에 걸려 있길래 제가 작품에 쓰겠다고 달라고 했고, 또 선뜻 주더라고요. 그래서 작품 스타일에 맞게 잘라서 썼어요.


이것도 비슷한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시련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종종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되는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그 사건들을 보며 ‘할머니가 만약에 같이 살았다면 할머니는 어떻게 삶을 버티고 있을까. 그때 우리 할머니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할머니와 같이 자랐거든요.


호원: 제목을 고민 많이 해서 지으셨는데

저희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제목이긴 한데요. 엄청나게 선량하신 분이었거든요. 그런 면이 우선 있고요. 더 넓게 보면 우리 시대에 조부모님과 같이 자란 친구들이 많았는데요. 지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우리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헌사를 제목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호원: <갈라파고스> 빼고는 제목이 형용사하고 명사로 되어있는데, 언밸런스한 거예요. 작품 내용하고 제목에 붙은 형용사하고 일치하지 않아서 ‘진짜 시를 쓰고 싶었나?’ 

단편은 결국 시일 수 있잖아요. 단편 애니메이션이 단편 소설까지는 못 간 것 같아요. 그러려면 러닝 타임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5분 안쪽으로 하면 시가 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 시절에는 완벽한 시를 해야겠다 근데 이야기가 읽히는 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처음에 기획을 할 때부터 15분이었어요?

스토리보드와 애니메틱 릴까지 다 했을 때 15분 나왔어요.


호원: 스토리보드 15분 한다고 했을 때 교수님들이 말릴 텐데

실험 부분이 나름 길잖아요. 그걸 빼면 러닝 타임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고 보셨나 봐요. 또 앞에는 배경으로만 연출되는 컷들도 있고 하니까 15분짜리인데 공력은 10분 정도라고 보시지 않았을까.


호원: 과정 중에 만들었으면은 몇 달 안에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렇죠. 길게 잡아도 6개월 정도. 그때는 제작비도 200만 원이었어요,


제작비 문제보다는 작업량 때문에

대체로 그렇지만 결국 단편은 감독이 거의 대부분을 다해야 하는데요. 하지만 그때도 저는 스태프 두 명을 썼어요. 교수님이 연결시켜 준 선배님 하고 동기 누나에게 소개받은 서울대 미대 학생.


서울대 학생의 역할은 뭐였어요?

붓으로 라인 리터칭 


호원: 추상 부분에 나오는 음악 때문에 엔딩 크레디트 보다 보니까 음악 하신 분이 전후로 계속 작업을 같이

제 고등학교 친구인데 재즈를 해요. 콘트라베이스. 친구가 하는 재즈 트리오 팀이 있었어요. 다 같이 모여 영상 보면서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 연주로 해보고 괜찮은 버전을 녹음한 거예요.


호원: 그래서 더 좋구나.


많은 부분이 즉흥적인 느낌은 있네요. 

이 작품이 할머니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니 음악을 섬세하게 고민해서 만들기보다 즉흥으로 해보자는 의견을 냈고, 모두가 그 감정에 심취해서 연주를 했어요.


호원: 마일스 데이비스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 감독: 루이 말) 할 때 영화 스크린 띄워놓고 녹음 부스 들어가서 그대로 해 가지고 앨범이 완전히 레전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재즈 하는 사람들은 딱 그 느낌으로

네, 즉흥 연주가 주는 그 힘이 정말 엄청났어요. 오히려 여러 번 했으면 힘이 떨어졌을 것 같아요. 너무 좋았던 버전이 두 번째 연주만에 나왔고, 그걸 기초로 디테일 쌓으며 최종 녹음을 했어요.


녹음실에서 아니면 골방에서 했어요? 

골방에서 다 같이 모여가지고


호원: 다 같이 모이면 골방이 아닌데

진짜 골방이에요. 진짜 비좁게 앉아서


즐거웠겠다. 

즐거웠어요. 저는 성우 녹음하고 음악/사운드 할 때 너무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아무 소리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소리가 하나씩 입혀지면서 작품에 섬세한 감정이 생기죠. 그걸 보고 있으면 큰 행복을 느껴요. 


특히 이 작품을 할 때 처음으로 5.1 사운드의 힘을 느꼈어요.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영진위에 속해 있는 교육기관이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작업을 해줬어요. 홍릉 영진위와 남양주 종합촬영소가 있던 그 시절, 그곳에서 제대로 된 사운드 작업을 처음 경험했어요.


호원: 추상 그리는 것도 그렇고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도 그렇고 애니메이션 할 때 좋은 경험을 했네요.

그 부분들을 모두 이해하고 또 지원해 주시는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식사 (2009)

호원: 영화관이나 영화제에서는 이 작품을 처음 튼 거예요?

<평범한 식사>(2009)를 2010년 인디애니페스트의 비경쟁 부문이었던 무지개극장에서 틀었어요. 하지만 영화제는 가지 않았어요. <선량한 인간들의 도시> 만드느라 미쳐 있어서 신경을 안 썼어요. 지금도 최유진 님께서 그 얘기를 하세요. 첫 작품 영화제 상영하는데, 안 오는 감독이 있었다고.


<평범한 식사>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한 거더라고요. 미키마우스 머리한 캐릭터는 박용제 감독하고 이애림 작가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그때 유행하던 스타일이기도 했고.

한예종 초창기 졸업작품전에 갔을 때 이애림 감독님 작품을 되게 좋게 봤거든요.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하면서 한예종 입시 준비하러 학원을 갔더니 박용제 감독님이 강사로 계셨고요. 분명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첫 작품은 뭐랄까 저도 모르게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같아요. 먹는 거는 피터 폴데스의 <헝거> 때문에 그렇게 된 거고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는 장형윤, 연상호 감독님이 강사셨는데, 연상호 감독님은 당시 할 줄 모르는 기법이 있었는데요. 다른 감독님한테 배워오셔서 저한테 애프터이펙트를 알려주셨어요. “이걸 이렇게 핀을 박아서 움직이는 거래.”


디지털 컷아웃 방법을 알려주신 거네요.

잘 알려주셨어요. 그때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한겨레 문화센터 컴퓨터실에서 다 했어요. 집에서 5분 거리여서 매일 가서 했죠.


애니메이션 자체가 처음이잖아요. 그림은 2-3년 공부한 상태였나요?

제대하고 나서 3년, 4년 했어요.


프로그램 툴 배우면서 작업을 바로 기획을 한 거예요?

입시 준비하다 보면 칸만화들을 많이 그리게 되잖아요. 그때 그렸던 것들 중에서 잊히지 않는, 스스로도 마음에 들었던 칸만화들이 있었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던 그런 맥락들과 연결되는 흐름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했어요.


괴수가 도시에 들어가서 다 잡아먹는 내용이잖아요. 고질라도 생각나고 쇠를 먹는 불가사리 동화도 생각나더라고요.

당시에는 그 생각이 들진 않았고, 피터 폴데스가 만들었던 <헝거>의 먹는 사람과 똑같이 접근했어요.


호원: <평범한 식사>에서 맨 마지막에 빨간색으로 탁 바뀌잖아요. 첫 작품에서부터 그게 되게 강렬해서 저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쓰나 보자 했는데, 적절하게 잘 썼어요. 반복되는 모티브지만 작품 따라서 다른 식으로 쓰는구나.

그때는 진짜 뭣도 모르고 그냥 감각으로 한다고


그 감각이 되게 중요한 거죠.

지금이야 다 계산하고 하지만 그때는 계산 하나도 안 했어요.


호원: 심지어 7분이 넘어. 한겨레문화센터에서는 기간도 길지 않기 때문에 게 되게 짧게 만들고 박수 쳐주고 끝나는 건데

3개월이었어요. 컷아웃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그림 그려서 잘라서 넣기만 하면 되니까…


밤낮 컴퓨터실에서 살았을 것 같은데요.

밥 먹고 그것만 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호원: 뭐가 재밌었어요?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드는 게 재미있었어요. 물론 본격적인 애니메이션과 영화적 이야기의 재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가서 찾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부터 소설과 시를 좋아하고 또 많이 쓰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긴 했죠. 그런데 그걸 영상으로 만드는 건 또 다른 느낌이거든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이미지화되어 움직인다라는 그 첫 재미가 너무 셌어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끝나고서 당분간 그림 그리는 건 싫다고 했어요.

너무 심하게 지쳐서 당분간 그리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올해부터 시나리오를 다시 써볼까 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얘기는 언제나 있긴 한데 그게 잘 될지 항상 두려움이 커요. 새로운 걸 할 때 편하지만은 않아요.


호원: 그걸 영화로 찍을 생각은 없었어요?

예전에는 애니메이션만 하고 싶었는데, 두 번째 장편 만들면서 여러 우여곡절이 많다 보니까 만약 다른 매체에서 기회가 온다면 오는 대로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편 애니메이션 기회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인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큰 문제지만 그때 되면 제 나이가 50이 훌쩍 넘게 되는데요. 이 엄청난 노동집약 산업인 장편 애니메이션을 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유독 애니메이션 만들 때는 모든 걸 갈아 넣는 스타일이라서요. 또 그 몇 없는 기회에서 젊은 친구들이 더 많은 기회를 받는 게 저는 맞다고 보기도 하고요. 애니메이션을 계속 고집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거다 매체를 정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2025년 1월 15일 @ 망원동

진행: 이경화, 나호원 / 정리: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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