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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 KIM Ayoung


막바지 선거 유세가 한창인 퇴근길의 서울시 도봉구. 둘리와 친구들이 반겨주는 쌍문역에 내려서 핫바와 튀김 가게들이 줄지어 선 시장을 따라 “친구네 거실 같은 서점, 도도봉봉”에서 김아영 작가를 만났다. 단편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2003), <상상치도 못한 일>(2007), <그 카페>(2017)를 만들었던 그는 2018년 종이를 접고 잘라 만드는 독립출판을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나와 승자>(2020)는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작품 속 아영의 엄마, 승자의 가방에는 믹스 커피랑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이 있다. 어디서든 카페를 차리고 달콤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휴무인 동네 책방의 불을 밝히고 김아영 작가와 마주 앉아 열두 달 입체 퍼즐 키트 프로젝트, 신작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에 <나와 승자> 다음 이야기와 장편까지, 하고 있는 일도 앞으로 할 일도 많은 작가와 차 한 잔의 여유를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나와 승자>


『나와 승자』 책을 여기서 작업하신 거예요?

제가 독립 출판물을 도도봉봉 대표님 덕분에 알게 됐어요. 서점 오픈하면서 수업을 했으면 좋겠는데 뭘 해야 되지 고민을 하실 때 대표님하고 제 친동생이 그 동네 캣맘 모임에서 서로 알게 된 거예요. 동생이 언니가 무슨 수업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저를 추천한 거죠.


처음으로 독립서점을 가본 거예요. ‘내가 왜 이걸 몰랐지’ 제가 원하는 자유로운 문화였어요. 책 만드는 수업을 맡았는데, 저도 만들어본 적도 없고 같이 배우면서 한 거예요. 그렇게 『나와 승자』 1화가 나왔어요.


그때가 언제죠?

2018년 5월, 6월 그랬던 것 같아요.


수업 시작할 때부터 『나와 승자』를 해야겠다 생각하셨나요?

제가 결혼을 39살에 했거든요. 연년생 세 자매 중에 제가 둘째인데 아무도 결혼도 안 하고

부모님도 저희들한테 결혼하라는 말씀 안 하고 또 돈 벌어 오라는 말씀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집안 경제가 좋았던 건 아니거든요. 아무도 결혼 안 하는데, 더 나이 먹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노력을 해서 지금 남편을 만났어요. 그 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멘토 선생님이 『나와 승자』에 등장하는 상담 선생님이에요.


어느 순간 친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자꾸 삐끄덕거린다는 거를 느끼고 있었어요. 몇십 년 된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갈등을 잘 해결도 못하고 더 친밀해지고 싶은데 벽이 있는 것 같은 거예요. 상담 선생님이랑 같이 얘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저를 돌아보고 하면서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나와 승자』 2화에 존 브래드쇼의 『가족』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이 세상에 나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나를 무조건 지지해 주는 사람 한 명이 필요하다” 우리 부모님이 그런 역할을 못 해 주셨나 인정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제가 2011년에 가을에 남편을 만났거든요. 2013년에 1월에 결혼하고 2018년이 됐잖아요. 거의 6~7년 동안 나를, 내 감정, 욕구 이런 걸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그 기간이 필요했어요. 계속 노력한 결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이런 걸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수업을 하면서 정리가 됐어요. 같이 글 쓰면서 그때그때 제가 깨달은 것을 하나씩 만들었어요. 아직도 해결도 안 됐고 결론이 난 것도 아니지만 2018년 가을까지 정리된 것만 하자라고 한 게 『나와 승자』 1화예요.


1화 제작은 얼마나 걸렸나요?

수업하면서 숙제 해오라 글 써오라고 하는데, 제가 본이 돼야 할 것 같아서 저도 글 쓰면서 하나씩 하나씩 정리를 했죠. 한 기수가 10회 차로 다섯 번은 매주 만나고 나머지는 작업해야 되니까 격주로 만났어요. 작업 기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면 3주에 한 번씩 만나기도 하고.

3개월 정도에 종이책 한 권이 나온 건가요?

바로는 안 나왔어요. 내가 부모님을 욕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인데 누가 사겠어 이거 만들어서 뭐 해’ 이런 내적 갈등이 심했고 또 몸이 좀 안 좋았어요. 표지 그림 작업만 하면 끝나는데, 거의 3개월을 누워 있었어요. 그래서 12월에 끝냈던 것 같아요.


책 속 아영 나이는 60살, 어머니 나이는 91살로 하셨잖아요.

‘엄마가 이때까지는 살아있어야 돼’라는 그런 기도 같은 선포, 욕망이었어요. 지금은 엄마가 원하는 거 해드리지 못하는데, 91세까지 사시면 내가 효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영은 37살부터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75살부터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되어있어요. 시기가 다른데, 어머니가 자기 얘기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37살에 상담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분이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제 모습 그대로를 비춰주셨어요. 못생긴 모습, 예쁜 모습, 부족한 모습, 멋진 모습,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춰서 제가 그걸 볼 수 있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되게 감사한 분이거든요. 제가 엄마한테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엄마가 75살 때 엄마의 감정이나 있는 모습 그대로 제가 비춰드려야지. 뭐라고 판단하거나 제 의견을 내기보다 동조해 주고 공감해 주고 이러면 엄마도 나처럼 감정을 찾겠지 했어요.

나와 승자』 1화를 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하신 건가요?

첫 권을 만들고 나서 2019년이 됐어요. 제가 애니메이션을 개인 작업으로 꾸준히 해왔어요. 책이 있으니까 콘티로 바꿔서 이 캐릭터들이 정지된 게 아니라 눈도 깜빡거리고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시작됐어요.


그리고 그때는그런 마음이 미미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계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혼하니까 더 그래요.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되니까 선순환을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내 작업으로 돈을 벌어서 생계도 하지만 다시 작업을 할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자. 내 재능을 다 활용해 보자 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게 된 거예요.


나와 승자』는 다 수작업이잖아요. 책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저한테 쌓인 거를 풀어내고 정리하면서 제가 치유가 되더라고요. 두 번째는 저 같은 사람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책값을 처음에는 7천 원 했거든요. 근래 2천 원을 올렸어요. 이게 종이가 커서 혼자 접을 수가 없고 같이 접어야 되거든요. 남편이랑 하면 무료로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랑 같이 하면 밥을 사주든지 뭔가 해줘야 되니까. 이 책만큼은 비싸게 안 하고 싶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쉽게 살 수 있는 책이 됐으면 좋겠어서.


최근에 입체 달력 프로젝트도 하셨죠.

제가 독립 서점들을 입고하러 가다 보면 대표님들이 다 좋아요. 저 같은 사람한테 꼭 있어야 되는 분들이에요. 근데 책방 운영하기가 되게 어렵거든요. 이분들한테 조금이라도 수익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작년에 서점안착이랑 도도봉봉이랑 협업해서 지역에서 달력 만들고 싶은 분들을 모았어요. 책방 인스타를 통해서 모았더니 금방 마감이 돼버렸어요. 1인당 4만 원씩 6분, 24만 원. 사실 큰 돈은 아니에요. 저도 가르치고 그런 게 아니라 멤버로 들어가서 달력 모임 1회가 생겼어요.


막 무슨 달력 만들까 하다가 『나와 승자』 2화 부록이 작은 집인데, 그 집이 볼 때마다 좋은 거예요. 북페어 나갔을 때도 사람들이 좋아 하더라구요. 이걸 좀 더 발전시켜볼까 그래서 12개를 만들게 됐어요. 이 작은 집들을 햇빛에 놓으면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와서 공간에 그림자를 만들어줘요. 진짜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한 장면을 재현한 거죠. 이 감성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작기 때문에요.


언젠가는 <그 카페>


2017년 작품 <그 카페>의 마지막 장면에 『나와 승자』 2화 부록 카페 모양이 나와요.

아는 아이가 발레 공연한다고 초대받아서 간 적이 있어요. 3만 몇천 원이 있었는데, 꽃다발을 사야 될 것 같더라고요. 3만 원을 쓰고 몇천 원이 남았는데, 겨울이었고 전날 눈도 많이 왔어요. 발레 공연에 잠바 입고 가기 그래서 코트를 입고 갔어요. 창동 공연장에서 중계동 집까지 20분 정도 걷는데, 너무 추운 거예요. 그때는 커피 맛도 몰랐는데, 던킨 도너츠가 있더라고요. 가장 싼 게 따뜻한 아메리카노잖아요.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더니 너무 따뜻한 거예요.


이 작은 잔 하나가 온몸을 따뜻하게 해서 ‘아 행복하다’ 이러면서 가고 있었는데, 제 안에서 ‘아영아 오늘 돈 다 써서 내일은 먹고 싶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못 먹잖아’라는 마음이 들어 불행해졌어요. 금방 식듯이.


‘아영아 너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매일 마셔야 행복한 사람이야?’ 마음속에서 이 질문이 들려왔어요. 충격이었어요. 나는 의미 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매일 먹어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나는 왜 살지’ 생각하면서 <그 카페>를 기획하게 됐어요.

주인공은 광야에서 농사짓는 집 장녀인데, 땅이 오염되어 도시의 공장으로 일하러 나가잖아요.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얘기도 하고 싶었나요?

이미 지구는 오염되어 더 이상 기능을 못하는 시대예요. 주인공이 취직한 공장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분리수거예요. 과거에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에서 자원을 찾아야 되는, 아주 열악한 시대죠.

10년을 일해야 커피 한 잔이라니 너무 가혹한 환경이네요.

10년 동안 일해서 돈은 벌었지만 커피가 너무 비싸진 거예요.


게다가 강도도 나타나고

보이스피싱이 생각나서 강도를 넣었어요. 양심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속이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나요.


마지막에는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캐릭터가 차를 따라주잖아요. 이 비정한 세계에서 그 장면은 환상 같아요.

차의 상징이 여유와 쉼이 거든요. 여유와 쉼이 행복인데, 이거는 사실 공짜로 누릴 수 있어요. 불행한 마음이 들어도 털어버리고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할 수 있잖아요. 근데 그거를 자꾸 물건(돈)으로 사려고 하는 거예요. 주인공도요. 그게 공짜라는 거를 그 캐릭터가 알려주는 거예요. 언제든지 네가 원하면 차를 마실 수 있어. 언제든지 네가 원하면 여유, 쉼, 행복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에요. 쉬고 싶으면 5분이라도 쉴 수 있잖아요.


살다 보면 저도 돈 있으면 다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고, 사회도 돈이면 다 가능할 것 같이 보여요. 그래서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까? 잘 모르겠어요. 이미 공짜로 주어진 것들을 돈을 주고 사고 있진 않은지.. 저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어요. 나는 무엇을 사고 있나요?


<그 카페>는 원래 장편으로 기획했던 거예요. 캐릭터들도 많이 안 들어갔고 후반부가 아쉬운 게 있어요. 장녀가 불행하게 죽어서 끝났다라고 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해피 엔딩이에요. 결국 장녀는 공짜로 차를 마셨으니까요.


기회가 닿는다면 장편으로 완성하실 건가요?

네. 하고 싶고, 하려고요.


다음에는 <나와 재일>


아버지 이야기 ‘나와 재일’을 한다고 하셨잖아요. ‘나와 승자’처럼 책으로 1화, 2화, 3화 내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 생각인가요?

그렇죠. 구상은 해놨어요. ‘나와 승자’랑 비슷하게 ‘나와 재일’도 세 편 하고 그다음에 ‘나와 자매’ 언니랑 동생 그다음에 남편, ‘나와 재수’ 하고 그다음에 ‘나와 나’를 할까 봐요. ‘나와 아영’이라고 해도 되고.


『나와 승자』를 할 때는 독립출판서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워크숍을 하면서 발전시켰는데, 다른 작품들도 그런 식으로 하고 계시나요?

1화만 그렇게 했어요. 2화는 그렇게 할 멤버들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수강하신 분들 얘기 듣기에도 시간이 꽉 차서 2화부터는 혼자 작업했어요. 나오면 언니랑 동생한테 보여주고 어떠냐고 물어보고요.


책에도 그렇고 애니메이션 크레디트에도 나오는 다영, 지영이 자매이신 거죠. 가족들이 반쯤 제작진이 되셨겠네요.

동생은 피디 역할을 너무 잘해줘요. 저 결혼한 다음에 언니 결혼하고 동생도 결혼했거든요. 동생 남편이 음악 하는 사람이에요. <나와 승자> 사운드를 제부가 해줬어요. 언니는 제가 놓치는 거 잡아주고 꼼꼼하게 잘해줘요.


책도 애니메이션도 단순한 라인 드로잉이고 색은 안 쓰셨어요. 인쇄비 같은 비용 때문인가요 가볍고 솔직한 미적 선택인가요?

나와 승자는 저의 솔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제 마음이 편한 그림체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잘 찾지 못했어요. 괴로웠어요. 그때 기억 하나가 떠올랐어요. 엄마가 “아영아 너 이런 그림 그려봐 대박 날 거야” 하면서 그림을 그려 주셨어요. 텔레비전에서 어떤 인형들을 보고 엄마가 그려주신 거예요. 그때 그 느낌을 스케치하다 보니까 나와 승자 캐릭터들이 나왔어요. 최소한의 선과 재료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저의 가장 깊숙하고 소중한 마음이어서 꾸미고 싶지 않았어요.



2등신, 3등신으로 짤뚱해져서 더 귀여워진 것 같아요. <그 카페> 초반에 엑스트라로 나오는 긴 머리 남자는 첫 번째 작품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에 나오는 남자와 닮았어요. 평소 감독님의 그림 스타일이 과장 왜곡되어 있고 패션은 중세 왕자와 외계인을 섞은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나중에 기회 되면 옷도 만들고 싶어요.


외계인 같은 왕자 스타일

네, <그 카페>에 나온 옷들.

2003년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은 남편을 잃은 젊은 신부의 이야기인데요. 학생 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제가 한예종을 늦게 들어갔어요. 26살에 1학년이 된 거예요. 사회생활을 하다가 창작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수능을 안 보고 실기 위주의 학교라고 해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시험을 쳤는데, 된 거예요.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막상 학교를 들어갔는데 숙제가 너무 많고 할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제가 원하는 작업을 못 하겠더라고요. 너무 속상했어요. ‘여기 왜 왔지’ 이런 생각도 들고. 행복할 거라고 선택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거예요.


한여름 매우 무더웠던 날 속상한 마음으로 높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어요. 앞에 검은색 긴팔 투피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이 걸어가는 거예요. ‘장례식장 갔다 왔나 그래도 여름인데 긴팔이 뭐야 답답하다’ 생각했어요. 치마와 윗옷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틈이 있었는데 그 틈으로 피부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거예요. 피부가 보였을 때는 아 시원하다. 저렇게 작은 틈으로라도 바람이 들어가니까 시원하겠지. 아, 지금 내 자유의 크기를 그려보라고 하면 저 보일랑 말랑 한 삼각형 모양의 틈만큼이겠다.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하는 선택이 뭘까. 결혼. 근데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죽었어. 그런 설정을 한 거예요.


긴 머리 남자는 감독님의 이상형인가요?

그때 좋아했던 애를 그렸어요. 다른 애들이 눈치챌 까 봐 처음에는 다른 애를 할까 하다가 그냥 그렸어요. 그리고 일부러 팔도 하나 짧게 하고 하나 길게 했어요. 캐릭터 자체에 장애를 줬어요. 그래도 이 사람은 행복하다. 자유가 많다. 이런 거를 더 부각하고 싶어서.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가 2~3학년 학년작이라는 거죠. 그 이전에도 그림 그리는 일을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시각 디자인과 들어갔는데, 돈이 없으니까 못 다녔어요.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대학을 중퇴하고 애니메이션 회사 동화 맨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서 한 2년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넓은 공간에 라이트 박스가 있는 책상들이 있었어요. 동화 1팀, 2팀, 3팀 등이 있었고, 각 팀마다 총괄하는 작감님 한 분이 계셨어요. 작가님은 동화맨들에게 일을 분배해 주셨는데, 제가 손이 느려서 돈을 많이 벌지 못 했어요.


동화 일을 하면서 내 애니메이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요?

네, 그림 그릴 때 되게 재밌었고 움직이는 게 신기하고 저는 그림 그릴 때 설레는 감정이 많이 들거든요.


어른의 위로 <상상치도 못한 일>


<상상치도 못한 일>은 소녀의 성장 이야기인데, 우주 나오고 로봇이 나오고 정말 상상치도 못하는 방향으로 가지요.

졸업 작품이다 보니까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어느 날 실기실 천정을 봤는데, 많은 나사들이 보였어요. 저 작은 나사 하나에도 역사가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을 텐데, 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나는 언제부터 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지?


초등학교 5학년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제가 많이 우울했어요. 그전에도 그렇게 밝은 애는 아니었는데, 더 어두운 아이가 됐어요. 제가 세 딸 중에서 생리를 제일 먼저 했어요. 그런데 여자는 생리를 한다는 걸 몰랐어요. 충격이었어요. 이게 뭐야 난 원하지 않는데, 내 몸에서 생리가 나오다니.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다니.. 난 불행해.


그때의 저를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괜찮아 말해주고 싶었어요. 되게 숙제 같은 작업이 있잖아요. 건너뛰지 못하고 꼭 해야 되는 작업이요. 상상치도 못한 일이 그랬어요. 나사와 같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어떤 물건의 부품들을 캐릭터화 시켰어요. 하찮고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5학년의 저에게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어요.


Whitegrub이라는 아이디 뜻이 굼벵이더라고요.

어릴 때 별명이 굼벵이였어요. 지각도 많이 하고 약속도 많이 어기고 그랬죠. 작업도 느려요. 책 작업도 애니메이션도 다 일일이 연필로 그리거든요. 몇 천 장을. 그게 너무 좋아요. 근데 느려요.


종이로 다 그리고 스캔받아서 보정하고

잡티 제거하고


그다음은 에펙이나

에펙에서 편집하면서 수정할 게 또 보이면 다시 손으로 그려 넣고 그렇게 편집하죠.


TV페인트나 이런 거 써볼 생각은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 한번 해보려고요. 올해 도전 과제예요.


채색은 포토숍에서 하셨죠.

네. <상상치도 못한 일>하고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는 소스를 수작업으로 다 한 다음에 스캔해서 채색한 거예요.


소스라는 거는 텍스처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색연필, 사인펜, 목탄 이런 걸로 다 하고 텍스처화 했어요.


개인 그림 계정 이름이 비닐지예요.

<아메리칸 뷰티>(1999)에서 제가 감명받은 장면이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아가는 장면이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런 게 무슨 소재가 되려나. 전혀 생각을 못하고 그럴듯한 재료를 찾아다녔죠. 근데 그걸 보면서 비닐지가 저렇게 살아있네 감정을 전할 수 있네 알게 되면서 비닐지로 했어요.


그리고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


책과 애니메이션 '나 시리즈'와 장편 애니메이션처럼 장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프로덕션을 꾸릴 생각도 있나요?

좋은 스텝이 있어서 제가 원화만 그리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요.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하려고요. 나와 승자를 만들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이 계속 생겨요. 꿈이 많아졌어요. 그런 꿈들은 지원을 받아야 할 수 있어서 우선 지원 사업을 계속 두드릴 거예요.


작년 초에 <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와 채찍을 든 남자>가 끝났는데, 음악을 마무리를 못 지어서 아직 공개를 못 했어요.


<그 카페>처럼 다시 길쭉한 캐릭터들이 나오네요.

이게 20대 때 만든 캐릭터예요. 20대 때 나온 스토리인데 묵혀놨다가 가끔 생각나서 한번 해보자 했는데, 잘한 것 같아요.


스토리 한 줄로 말한다면

보잘것없는 두 남녀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할까.


나 시리즈는 올해 안에 나와 재일(아빠) 책 한 편 내고 단편 애니메이션 기획서 내볼 거예요. <그 카페>도 장편 초기 기획 단계 지원사업이 있으면 지원해보고 싶어요.

제가 작년에 애니메이션 수업 자료를 찾는데, 캐롤라인 리프 감독님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동영상이 있더라고요. 교실에 학생들 작업이 펼쳐져 있고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얘기해주는 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나도 머리가 하얘져도 저렇게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학생들이랑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어요.

 

인터뷰 2022년 3월 7일 @쌍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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