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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_Cocoon

고치 Cocoon | 2015 | 12mins 22secs | dir. 여은아 YEO Eun-a


광기와 파국을 위한 보금자리

스틸 컷 한 장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작품이 있곤 한다. 스타일, 장르, 기법 등등. <고치>가 그러하다. 목탄으로 그려진 이미지(실제로는 디지털 작업이다)는 이 작품이 드로잉 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상당히 거칠고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는 공포, 호러 장르라는 정보를 단번에 보여준다. 강렬함 속에는 낯섦과 낯익음이 함께 있다. 적어도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공포는 상대적으로 덜 다뤄진 장르이기에 낯설다. 그렇지만 거친 드로잉의 이미지는 어딘가 친숙하기도 하다. 아마도 만화 쪽의 경험에서 비롯된 느낌일 테다 (그래, 이토 준지 말이다. 하지만 최근 OTT를 통해 소개된 이토 준지 원작의 애니메이션은 도통 그 맛이 안 산다. 여은아 승!).

문제는 이 스틸 컷 하나가 전부는 아니라는 점! 나아가 이러한 첫인상−낯설거나 낯익거나, 무섭거나 거칠거나 등등−은 정작 작품의 상영 시작과 함께 많은 부분이 엇나가거나, 수정되거나, 다시 쓰이거나, 폐기된다. 그래서 12분 남짓의 러닝 타임 동안 꽤나 혼란스럽거나 당혹스럽기도 하며, 어떤 감흥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번번이 고민해야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다양한 반응의 혼재가 막바로 불쾌한 경험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진부한 반전이라든가, 뻔한 종착점, 혹은 모호한 방향으로 휘젓다가 황망하게 열린 결말로 우리를 인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치>는 명료하다. 어쭙잖게 에둘러가지 않는다. 직진! 마치 상대방이 어떤 전략으로 접근해 올지 신중하게 탐색전을 벌이려 할 때, 별안간 냅다 달려들어 펀치를 날리는 식이다. 상징과 은유, 메타포와 알레고리, 플래시 백과 오버랩, 몽타주 등등 따위는 제쳐 두자. 알량한 사탕발림 대사도 사치일 뿐. 시작부터 직진이다. 우리가 올라탄 <고치>라는 자동차의 운전대는 돌아가지 않게 고정되어 있고, 브레이크 없이 액셀레이터 페달만 있다 (당연히 사이드 미러와 룸 미러도 없다). 그렇게 12분을 내달린다.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철구, 미나, 미나 엄마. 이로부터 두 개의 관계가 나온다. 첫 번째 관계는 일방적이다. 철구는 미나에 집착한다. 미나는 (5년 전에 돌아가신, 또는 그때 돌아가셨어야 할) 엄마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 도망치려 한다. 그럴수록 철구의 집착은 강해진다. 두 번째 관계도 일방적이지만, 이미 뒤집혀 있다. 엄마는 미나를 낳았지만, 미나가 엄마를 보살핀다. 엄마는 달라붙으려 하고, 미나는 떼어내려 한다. 이러한 두 관계 사이에 갇힌 여성 미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난처해지는 지점은 우선, 거대한 벌레가 되어 버린 엄마를 마주할 때이다. 지나치게 과도한 모성을 상징하거나, 자식에게 짐으로 다가오는 엄마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하면 맥이 빠진다. 진부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낫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판타지로 가는가? 아니, 판타지로 훌쩍 도약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죽지 못한/죽이지 못한/죽지 않은/죽고 싶지 않은 엄마는 벌레가 되었다.

한 번 더 난처해지는 지점은 벌레-엄마와 미나가 서로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이다. 때로는 애원하고, 때로는 저주한다.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상대를 탓하기도 한다. 애(愛)와 증(憎)이 엄마에게도, 미나에게도 뒤섞여 있다. 엄마의 애는 미나의 증이고, 엄마의 증은 미나의 애이다. 벌레가 된 엄마는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일까? 미나는 엄마가 어떻게 되길 원하는 걸까? 정작 자신들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세 번째 난처함은 철구와 미나의 감정이다. 철구는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미나는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 집착과 회피가 거듭될수록 사랑의 자리에 또 다른 감정 기제가 들어선 건 아닐까? 답답함, 불만족, 두려움, 불안함 등이 증폭되어 사랑을 폭파시킬 것만 같다.

이러한 난처함들이 중첩되면서 세 사람의 대사는 점점 대화의 기능을 잃는다. 각자 일방적인 말을 내뱉는다. 상대방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상대방의 말도 내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면 각자의 말도 한 문장, 한 마디마다 감정이 널을 뛴다. 애원, 분노, 자조, 저주, 한탄, 절규… 이런 변화무쌍하면서도 파편적으로 쏟아지는 대사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부조리극의 뒤틀린 유머마저 느끼게 된다 (철구가 외치는 “미나야 사랑해”가 정점이다).



일방적으로 질주하는 관계들과 제멋대로 폭주하는 감정들. 마치 항아리 속에 갇힌 벌레떼들의 상태와 같다. 벌레가 그득 담긴 항아리처럼 <고치>는 공간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 공간은 결코 심리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사색적이지도 내면적이지도 않다. 대신 <고치>의 공간(space)은 구체적인 ‘장소’(place)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여은아가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줄곧 천착하는 핵심이다. <장미여관>이 그러했고, <유령이 머문 자리>가 그러하다).

<고치>의 장소는 ‘집’이다. 여기서 제목으로 삼은 ‘고치’의 성격이 일그러진다. 고치(cocoon)가 지닌 본래의 의미에는 보금자리라는 안락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작품 속의 집은 결코 안온하지 않다. 벌레-엄마의 생명줄이 담긴 고치로 인해 딸의 보금자리는 악몽이 되어 버렸다. 당신의 자궁 속에서 생명을 품었던 그런 엄마는 더 이상 없다. 고치에서 뽑아져 나온 실은 거미줄처럼 미나를 옥죌 뿐이다.

철구는 결코 미나의 집으로 초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철구는 진작에 이곳이 결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새 아파트를 계약했고, 미나와 그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미나는 또 다른 고치가 되어가고 있다. 집, 고치, 자궁은 그렇게 서로를 품는다. 그 속에 인물들이 갇히고 관계가 갇힌다. 발버둥 칠수록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감정들의 파열음뿐이다.


<고치>가 판타지 저 너머로 훌쩍 날아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두는 것은 집을 통해 구체적인 감각을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 흉가와 달리, 미나의 집은 여전히 몇몇 주민들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이다. 철거 직전의, 방치된 장소가 주는 쎄~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삐걱대는 문소리, 덜그럭 대며 윙윙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 소리, 벌레를 밟아 으스러뜨리는 소리, 철벅철벅 발바닥이 바닥을 밟으며 내는 소리 등등. 부식되어 가고, 부서져가고, 부패되어 가고, 무너져 가는 소리로 가득 채워진 곳. 거친 소리와 거친 이미지가 만나면 우리는 점차 그곳의 온도와 습도, 냄새와 감촉까지 떠올리게 된다 (스산하면서도 눅눅, 축축하고, 퀴퀴하면서도 꺼끌 하고, 비릿하면서도 시큼한, 그래서 온몸이 근질거리거나 끈적이는 느낌). 그러다 보면 기억 한편, 먼지를 뒤집어쓰고 묻혀 있던 비슷한 경험, 느낌이 살아난다. 그래, 그런 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지든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여은아는 작품을 위해 그러한 로케이션 몇 군데를 찾아갔고, 그 장소가 주는 느낌을 작품 속에 집어넣었고, 그렇게 인물들은 장소가 허락하는 광기와 파국을 맞이하였으며, 우리는 악몽과 트라우마 어딘가에서 그들의 비명과 신음소리와 울부짖음과 한숨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불현듯 불안한 기운이 어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면, 벽 넘어 그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호원 Joint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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