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ANIMATOR 나와 승자

나와 승자 ㅣ 글과 그림 Whitegrub | 출판사 행복한 재수가 있는

1화 두려움(2018년12월7일) 2화 얼음 땡(2020년5월23일) 3화 생각 정리(2021년8월18일)


가족이 뭐길래


처음엔 종이 때문이었다. 이 책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책방에 입고된 책을 넘겨받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진 종이 감촉이 유달리 좋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문지르면 보풀이 일어날 것 같은 따뜻한 감촉의 미색 종이. 미색의 A1 사이즈의 큰 종이를 오리고 접어서 만든 32 페이지의 손바닥만 한 작은 만화책 『나와 승자-1화 두려움』의 첫인상은 그랬다. “늦은 밤,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있을까? 두려웠다.”로 시작하는 나와 엄마의 이야기는 분량이 많지 않지만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책이다. 또한, 검은 라인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심플하지만 유치하지 않다. 노년의 엄마는 주름이 세줄 씩, 중년에 접어든 ‘나’는 얼굴에 주름이 두 줄씩. 어두컴컴한 밤과 까만 그림자는 빗금으로 표현하고 세 자매는 머리카락 길이로 구분할 수 있다. 스토리도 그림체도 간결하지만 부족함이 없고, 군더더기 없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019년에 1화를 시작으로 매해 한 편씩, 2021년에 『나와 승자』의 이야기가 완결되었다. 1화 두려움, 2화 얼음땡, 3화 생각정리. 세 권을 모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이어서 읽었던 때, 어느 페이지에서인가 눈물이 왈칵 났다. 아, 이 책은 내가 오래 옆에 두고 좋아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다.


나와 엄마를 중심으로 묘사한 가족 에세이면서 동시에 심리 치유서이기도 한 이야기. 대인관계가 어렵고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엄마의 삶에서부터 이어져 있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소홀한 술주정뱅이 남편과 어린 자녀 셋을 키워야 했던 엄마는 눈 뜨면 일해야 했고 밤이 되면 내일 또 일을 하기 위해 피로한 몸을 쉬어야 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꿈도 감정도 지운 채 평생을 바쁘게 살아야했던 엄마는 이제 슬픔도 기쁨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와 승자』 속 엄마도 그랬고 우리 엄마 또한 그렇게 살았다. 책 속 엄마가 물건을 떼러 새벽시장에 나가 커다란 짐을 양손에 한가득 든 모습에서 칭얼대는 어린 나를 달래며 물건을 떼러 남대문 시장을 다니던 우리 엄마의 모습이 겹쳤다. “나 없으면 니네 아빠 어떻게 살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나와 승자』 속 엄마가 했던 그 말들 역시 우리 엄마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나에게 했던 말들이다. 그리고 가족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희생한 건 엄마뿐만이 아니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삶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승자』 속 ‘나’가 그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인내하는 순간이 많았다. 이 세상 수많은 ‘엄마’와 수많은 ‘나’가 이 책을 보며 왈칵 눈물이 터질 것이다. 가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큰 종이를 자르고 접어서 만들었다. 종이 끝에서 끝까지 자른 부분이 없어서 모든 페이지가 온전히 1장으로 이어져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가족 이야기이기 때문에 풀칠로 잇기 싫었고 그래서 완전히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 가족이란 무엇이길래.


크라프트지로 손수 한 권 한 권 예쁘게 포장된 <나와 승자>를 계산하러 오는 책방 손님에게 나는 짧은 설명 하나를 덧붙인다. “이 책은 작가님이 엄마와 같이 크라프트지로 포장을 하였는데 포장한 후에 제목 스티커를 엄마가 정중앙이 아니고 중앙보다 아래에 붙여서 작가님이 균형을 맞추려고 제목 위에 다이아몬드 스티커를 하나 더 붙이셨대요.” 손님이 관심이 있건 없건 되도록 이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하려고 한다. 딸이 다이아몬드 스티커를 붙여 엄마의 작은 실수를 보완하는 그 소소한 행위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꼈다면 오버일까. 가족이 뭐고 사랑이 무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평생 참고 견디고 살아온 엄마에게 “엄마! 엄마는 승자(winner)예요.”라고 딸이 말해주며 『나와 승자』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연작 시리즈로 작가님은 아빠의 이야기를 다룬 『나와 재일』을 제작할 예정이다. 아마도 따듯한 감촉의 종이를 사용할 것이고, 또 아마도 완전히 자르지 않은 한 장의 종이로 책 한 권을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빠를 싫어하는 나는 <나와 재일>을 읽고 뜬금없이 아빠를 목 놓아 부르며 엉엉 울지도 모른다. 아, 가족이여. 알다가도 모를 그 이름이여.

나와 승자 SeungJa and Me 2020 | 7mins 46secs | dir. KIM A-young

 

이보람

2013년부터 독립책방 헬로인디북스 책방지기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책과 창작자를 소개하는 일이 주 업무이며 새로운 창작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고 좋은 손님들과 매일 소통할 수 있는 내 직업을 사랑한다. 그리고 부업으로 소소하게 책을 만든다. 나의 이야기를 주로 기록하는 출판이지만 머지않아 엄마의 어렸을 때 추억을 책으로 엮을 계획을 갖고 있다.